문주란과 옥화
|
누구나 자기가 가진
물건에는 다 나름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화분과 나무, 꽃들에도 다 나름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다. 그 가운데 난이라는 분류가 가능한 문주란과 옥화는 비슷한 시기에 우리 집과 인연을 맺고 거의 20여년을 함께 하고
있다.
올해도 옥화는 5월을
전후하여 피고 거의 두 달여를 거실과 베란다를 은근하고 품위 있는 조용하고 낮게 깔리는 향기로 가득 채웠다. 옥화가 온 것이 1980년대
말경이니까 20년이 다 된 것이고 거의 20여 번을 우리 집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
내가 도서관과 맺은
인연으로 사서교사 연수에 출강할 때 수강하던 동기생 친구들이 기념 삼아 가져다 준 것이 옥화다. 그 때도 내가 난에 대해서 아는 게 없고 더구나
화초 관리는 문외한이어서 그냥 버려두듯 했는데 화분에 꽂힌 비닐 명찰에 ‘옥화’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 이 게 이름을 달고 있는 걸 보니 그래도
괜찮은 난인가 보다 하고 화단의 한쪽 비교적 안전한 자리에 옮겨 놓고 길렀다. 그런데 잎 끝도 마르고 부러진 것도 생겨 그냥 죽으려나 보다
했더니 다음 해 초여름에 꽃을 피워 집을 향기로 가득 채운 것이다. 분갈이를 서툰 솜씨로 하고 거름도 꽃집에서 사다가 주었다. 해마다 꽃을
피우는 게 기특하고 살아 주는 게 고마웠다.
그러다가 4년 전에
아파트로 거소를 옮기면서 버릴까 하다가 친구들의 정도 얽히고, 아내도 가지고 가자고 해 그냥 못 이기는 척 가져 왔다. 그러면서도 이게 제대로
살까, 꽃은 피울까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항상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나 보란 듯이 해 마다 꽃을 피우고 단독 주택에 살 때처럼 아직은
건강하다.
문주란은 내가
구례에서 근무할 때, 이른 봄인데, 꽃장수 할아버지가 대바구니에 뭉툭하게 줄기와 잔뿌리를 모두 떼어낸, 문주란 그루터기를 팔러 왔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이게 살겠냐고 했더니 그분 말이 확실히 산단다. 그래 영감님 도와주는 셈치고 한 그루 사 가지고 와서 분에 심었더니 그 해 여름부터
꽃을 피우는 것이다. 옥화와는 다르게 흙에 심고 분도 대형이어야 하고 거름도 많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가을이면 잎들을 모두 낙엽으로 처리해야
했다.
문주란의 향은 한층
짙고 알싸해서 꽃이 피는 7월의 아침에는 온통 집 안팎이 향기로 가득 차 고급스럽고 자극적인 향수를 마구 뿌린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20여 년, 문주란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파트로 옮기면서 버려질 위기를 맞는다. 그래도 다행히 옥화와 같이 살아남았다. 문주란은 화분
덩치도 크고 많은 면적을 차지할 뿐 아니라 제주도가 원산인 열대성이어서 아파트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울 듯해 버릴까 하다가 그냥 가져왔다. 그게
고마운지 문주란도 해마다 빠지지 않고 꽃을 피운다.
|
올해도 5월에 옥화가 꽃대를 두 대 뽑아 올리고 꽃대마다 예닐곱의 꽃송이를 만들어 피웠다. 약한 연두의 노란 색 꽃잎이 여섯 개씩 펼쳐지고 그 꽃잎들에 각기 고운 적자색의 반점이 수를 놓았다. 가운데 놓인 노란 꽃술과 어울려 뿜어내는 향기가 낮게 깔리며 집안을 서서히 점령하고, 코끝을 간
|
질이는 듯한 얇고 은근한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향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끝내는 세
살배기 손녀가 ‘뭔 냄새여?’ ‘좋다’고 제 나름의 소회를 말하게 했다.
옥화가 향기를
거두어들이자 7월. 문주란이 그 특유의 꽃대를, 양화를 그리는 제법 큰 붓의 붓끝을 닮은 꽃대를 서서히 밀어올리고, 그 꽃대 끝에 꽃봉오리를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둥그렇게 십여 개의 기둥을 먼저 보이고, 며칠의 시간을 두고 각 기둥을 펼쳐 꽃송이를 피우는 마술 쇼를 연출한다. 인간의
것보다 더욱 아름답고 멋진 쇼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서 강렬하게 뿜어 나오는 짙고 제법 알싸한 냄새의 향은 집과 사람을 온통 압도하고, 성숙한
여인의 요염한 체취를 발산하는 듯하다. 그러는 사이 꽃송이는 나발 모양으로 퍼지면서 갈래를 만들고 그 가운데 자황색의 귀두를 단 보라색 주조의
무지갯빛 꽃술들이 기둥으로 자리한다.
옥화가 기품 있는
집안의 한국 여인이라면 문주란은 세련된 서양 여인을 연상시킨다. 옥화 향기가 서서히 부는 미풍이라면 문주란은 조금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이다.
우리 집에는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동안 미풍과 세찬 바람의 향으로 내내 가득 찬다.
난들의 향이
사그라지면 분에 거름을 하고 웃자란 잎을 손질하며 서서히 다음 해에 필 문주란과 옥화의 모습을
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