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 그 사람을 생각하여 본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항전과 삼전도 굴욕
임금이 항복해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장군, 내 나라에서 버림을 받자 명나라의 장수가 되어 청나라로 쳐들어갔던 장군 임경업(林慶業-1594~1646), 명나라황제도, 청나라황제도 모두 그의 큰 그릇임을 알아보았건만 그의 조국은 그를 몰라보고 처형까지 했으니 ....

이 이야기는 배청이던 배명이든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무장에 대한 사람 이야기임을 잠시 적어둔다.
장군은 충주 대림산기슭의 달천촌에서 선조27년(1594)에 태어났다. 25세인 광해군 10년에 무과에 급제했고, 인조 2년(1624)에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우는 등 무장으로 입신하여가던 시기는 중국에서 명나라가 쇠퇴해가고 청나라의 세력이 일어서던 때였다.
강경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무장이었던 그는 정부시책에 역행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끝내 굽히지 않았다. 정묘호란(1627년)이후 북방의 군사력이 궤멸상태에 빠지자 조정에서는 청북포기(淸北抛棄-청천강 이북은 포기하고 방어선을 그 이남으로 하려던 시도)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북방의 백성들은 이를 맹렬히 반대했고 조정에서는 당시 정주목사였던 임경업을 배후조정자로 지목하여 투옥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절이 확인된 후 청북방어사가 되어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있었다. 이 때(1633년) 명나라의 장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투항하려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반군토벌을 요청했고 조정에서는 임경업장군을 보냈다. 명군과 협격(挾擊)하여 큰 공을 세우고 명나라황제로부터 총병관(總兵官)이라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그의 명성이 중국에 떨쳤다.
인조 14년(1636년)에 의주부윤이 된 그는 청나라의 동태를 살피고 의주성과 백마산성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조정에 병력 2만을 증원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정에서는 정세를 바로 판단하지도 못했고 보낼만한 병력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장군은 자력방어를 결심하고 수천 개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 주위에 세우는 의병(擬兵)전술을 쓰면서 군관민이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그해 겨울에 청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왔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약 50일간의 전쟁이었다. 임경업장군의 용맹과 결사항전을 두려워한 청병은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서울로 직행했고 급기야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번 머리 조아리고 아홉번 땅에 머리찍기)"의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지만 장군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임금의 항복소식을 들은 장군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승리하고 돌아가는 청군을 공격했다. 승전고를 울리며 호기롭게 개선하던 청나라 태종의 조카 ‘요퇴’를 급습하여 그가 이끄는 정예기병부대를 압록강에서 무찌르고 포로로 잡혀가던 조선남녀 120명과 말 60필을 탈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한 조선은 청의 속국일 수밖에 없었고 청나라는 시도 때도 없이 명나라를 치겠다고 출병요청을 해왔다. 출병의무는 항복조건의 하나이기도 했으므로 어쩔 수 없던 조정은 임경업장군에게 그 임무를 주었고 그는 적절히 눈치를 보아 싸우는 체하면서 속으로 모든 정보를 사전에 알리는 등 명군에 유리하도록 명나라를 도왔다.
더러는 무사히 넘어가기도 했지만 끝내는 임경업의 청나라에 대한 비협조사실이 드러났다.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 장수 홍승주(洪承疇)와 그의 부하가 모든 것을 실토했기 때문이었고 이에 따른 청나라의 압력으로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형조판서 원두표(元斗杓)로 하여금 임경업 등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기 전에 이미 결심한 바 있어 그를 후원하던 심기원(沈器遠)대감을 만났고 그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 한 벌을 얻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의 명나라 협력에 은밀히 동참했던 최명길대감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함께 압송되면서 그 일행이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밤을 틈타 탈출하였고 천신만고 끝에 명나라에 망명하는데 성공하였다.
1643년 5월에 승려로 변장한 그는 배를 타고 서해를 떠나 그해 가을에 명나라에 도착하였으나 명나라는 내란과 외환이 겹쳐 국운이 날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명의 황제는 익히 알고 있었던 조선의 명장 임경업이 위급한 시기에 찾아온 것을 심히 반기면서 그에게 군사 4만을 주어 부총병(副總兵)을 삼고 명나라 중군 마등홍(馬登紅)과 더불어 청나라를 치게 했다.
그러나 형세는 이미 기울어 국내에서는 반적 이자성(叛賊 李自成)이 북경으로 쳐들어와 숭정제가 자살하고 청나라 세조(世祖)는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장수 마등홍은 자기의 살 길을 찾기 위하여 임경업을 잡아 청나라에 바치고 항복하였다.
그 동안 본국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그가 명나라에 망명해 있는 동안 청나라의 압박을 받은 조정은 그의 아내와 형제들을 청나라로 잡아 보내야 했고, 그의 부인 이씨는 남편의 충절을 알고 끝까지 충신의 아내로서의 자세를 꼿꼿이 지키다가 심양의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조정에서는 인조반정공신 간에 세력다툼으로 임경업이 망명할 때 도움을 주었던 좌의정 심기원이 역모로 몰리는 의옥사건이 벌어졌고 그의 도움을 받은 바 있는 임경업도 이에 연루되었다하여 청국의 포로에서 다시 역신(逆臣)의 누명을 쓰고 본국으로 잡혀오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일컫던 청나라에서조차도 끝까지 항거하는 장군의 절의(節義)를 보고 그의 충(忠)과 용(勇)을 높이 평가하여 죽이지 않고 설복시키려 했지만 끝내 거부하므로 부득이 투옥시키고 있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그도 역모에 관여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청나라로부터 인수 받은 후 온갖 고문 끝에 사실은 밝히지도 못한 채 처형하고 말았다.
지난날 명나라로 망명할 당시 심기원의 은밀한 도움을 받았던 것이 간신들의 모함의 빌미가 되어 끝내 처형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때를 만나지 못한 위걸(偉傑) 임경업장군의 최후였다. 그 후 50년이 지난 숙종 23년에 그의 무고함과 충성됨이 밝혀져 사면 복권되고 그 다음 해에 그의 고향인 충주지역 선비들이 처음으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불우했던 영웅의 충의와 지조를 기렸다.
그 후 또 30년 가까이 지난 영조 2년에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고, 23년에는 그의 부인 전주이씨 정렬비(貞烈碑)가 섰으며, 정조 15년(1791)에는 왕이 직접 비문을 지어 내려준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澾川忠烈祠碑)’가 세워졌다.



나는 몇 해 전에 친구들과 함께 장군의 충렬사를 찾아 참배한 적이 있었다. 나라를 사랑했던 역대 선열들을 남달리 숭모했던 박정희대통령의 손길이 여기에도 미친 듯, ‘충렬사’라고 쓴 현판글씨하며 정원의 기념식수 등 여기저기 그의 정성 어린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유물전시관에는 그와 그의 부인 이씨에게 내려졌던 교지와 첩지를 비롯하여 진중기록등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나의 눈길을 붙잡는 것은 장군이 그의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했었다는 큰 칼 추련검(秋蓮劒)과 그의 검명시(劒銘詩)였다.
때가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 時乎時乎不再來
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이 여기 있기에 一死一生都在筵
평생을 장부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平生丈夫報國心
석자 추련검을 10년 남아 갈았노라 三尺秋蓮磨十年. ...... 능재 .
첫댓글 시가 장부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네요.....
재밌게 잘봤습니다.
남이장군이나 임경업장군등 그들의 문무를 겸한 심경을 봅니다. 그리고 호걸들의 일생은 천시가 맞추어 져야 겠지요 .. 역사는 참 많은 뒤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네 선생님.....이런이야기 많이 올려주실거죠?
무지 좋아합니다..........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