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만세!
글 제목을 이렇게 뽑아놓고 나니 좀 어색하다. 지금까지 노무현 대통령이나 정부의 정책을 주로 비판해오다 갑자기 아첨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더구나 작년 4월 {남이랑북이랑}의 표지글 제목은 "노무현도 부쉬의 개가 되려는가"였는데. 그러나 나는 이른바 '노빠들'처럼 노대통령을 무턱대고 지지하지도 않고, 수구 극우 세력들처럼 무조건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떠한 말을 하고 무슨 정책을 펴느냐에 따라 지지도 하고 비판도 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3주전쯤 만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NSC)의 한 인사가 귀띔해준 사연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으리라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 같다. 그와 술을 곁들인 저녁을 함께 하면서 내가 물었다. "도대체 청와대에서는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회유나 위협을 받기에 이전에는 다소 반미적인 사람들도 친미를 넘어 미국에 아첨하거나 질질 끌려가고, 북한에 관해서는 무슨 말못할 사연이나 정보를 갖게 되기에 과거에는 다소 친북적인 사람들도 반북을 넘어 반통일적이 되는가?"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전해들은 권력 핵심 부서의 얘기를 널리 공개하는 게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한 마디만 전한다. 내가 작년에 "노무현도 부쉬의 개가 되려는가"고 비난했던 것은 이라크 파병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노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안에 서명할 때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단다. "내가 여기에 서명하면 아마 최소한 내 지지자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임명한 여러분들이 결정한 것이기에 서명하겠습니다." 노대통령 개인적으로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할지라도 자신이 뽑은 보좌관들이나 장관들이 합의하여 결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밀고 나간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노대통령이 9월 초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몇 차례 얘기하긴 했지만 대통령으로서 공개적으로 확실하게 단언하지는 못했다. 물론 김대통령 때는 여당이 소수파였고 지금은 여당이 다수파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노대통령이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시원하게 건드려 주었기에 아첨으로 비칠 수도 있는 "노무현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어야 할 이 악법의 폐지 운동에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고자 한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바란다면 국가보안법은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태어날 때부터 말썽이 많았다. 건전한 보수 우익 세력들도 반대하는 가운데 친일 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한시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니까. 그리고 그 법은 정통성과 합법성을 얻지 못한 독재 정권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하고 남용해 왔다.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구실로 야당을 탄압하고 양심적 지식인들의 비판을 억누르며 민중의 인권을 유린하는데 사용되어 왔을 뿐이다. 그러기에 국내에서는 지난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조차도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지적했으며, 국외에서는 유엔을 포함한 국제 기구는 물론 북한을 인정하지 않고 "깡패 국가"로 매도하는 미국마저 오래 전부터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권유해온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0년이 지나도록 친일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룩한지 10여년이 흐르도록 군사 독재의 영향력을 제거하지 못한 배경에는 바로 국가보안법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기에 친일에 뿌리를 두거나 군사 독재를 떠받치며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반성이나 사과는커녕 21세기를 맞아서도 "원로"라는 이름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 반대"를 외치는 기막힌 현실을 보게 된다. 친일의 후예들이 어떻게 "국가 정체성"을 들먹거릴 수 있고, 자유민주주의를 처참하게 짓밟았던 군사 독재 세력들이 무슨 "자유와 민주"를 수호할 수 있으며, 부정 부패로 얼룩졌던 사람들이 무슨 염치로 "사회 혼란"을 걱정한다는 것일까.
국가보안법이 1948년 적법하게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56년이 흐른 지금은 모든 상황이 크게 변했다. 그 때는 냉전이 시작될 때였지만, 지금은 냉전이 끝난지 이미 15년이 흘렀다. 1960년대까지는 남북이 극단적으로 대치하는 가운데 북한이 정치적으로 더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더 잘 살았으며 군사적으로 더 강했지만, 지금은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지향하는 가운데 북한은 남한 경제의 1/30 수준으로 남한 군사비의 1/5 수준을 쓸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1980년대까지는 북한이 "공세적" 연방제를 통해 적화 통일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수세적" 연방제를 통해 남한에 흡수 통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정세와 남북 관계가 이렇게 크게 바뀌었는데도 북한을 계속 "적국"으로 규정하며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물론 북한은 거의 모든 면에서 남한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 할지라도 핵무기와 미사일은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은 남한을 침략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막으며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것이지만, 설사 남침용이라 할지라도 국가보안법을 유지하면 핵과 미사일 공격을 피할 수 있을까?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북한이 남침을 강행하고, 국가보안법이 유지되면 남침을 억제하겠느냐는 뜻이다. 설사 북한이 남침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를 막기 위해서는 남한도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든지 또는 북한과 화해 협력을 더욱 진전시켜 전쟁의 기운을 아예 없애버리는 길이 있을텐데 어느 방법이 더 쉽고 더 효과적이며 더 바람직하겠는가.
만에 하나 최악의 경우 남북이 싸우게 되더라도 남한이 이기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알아야 싸우면 이긴다는 뜻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북한이나 공산주의를 거의 모른 채 어릴 때부터 "반공"과 "승공" 또는 "멸공"만 외쳐왔을 뿐인데, 상대방의 실체와 이념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이기고 무슨 수로 물리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빚어지게 된 이유는 북한이나 공산주의를 바로 알고자 하는 노력까지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이나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한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체제 경쟁에서 이겼다 할지라도 단점이 있고 공산주의에 원한이 맺혔을지라도 장점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 우리 사회는 이제 이러한 사상의 장단점까지 "자유 시장"을 통해 비교해보며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가운데 공산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은 안보만 허약하게 했을 뿐 아니라 사회를 진정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창의력까지 말살해온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금새 사회 혼란이 초래되거나 적화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선동하는 수구 정치인들과 극우 신문들도 있다. 전쟁이 일어나야 잘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트집이라도 잡아서 전쟁을 일으키듯이, 분단과 갈등을 통해 기득권을 누려온 사람들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한사코 막으려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오랫동안 "세뇌"되어 막연하게 안보 불안감을 갖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북한이 로동당규약을 고치지 않는 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남한의 헌법도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남북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법이나 규정을 동시에 없애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선 남한이 먼저 악법을 없애는 게 강자의 우월성과 유연성을 보여주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끄는 길이라 믿는다.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김정일 만세"를 부르짖거나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사람을 어떻게 처벌하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형법을 통해 "내란 목적의 선전 선동죄"나 "내란을 위한 예비 음모죄"로 처리할 수 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불바다가 되든 잿더미가 되든 분단의 지속이나 갈등 또는 전쟁을 원한다면 북한을 끝까지 적으로 삼으며 국가보안법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와 통일을 바란다면, 북한을 적으로 삼으며 우리의 자유와 창의력까지 말살하는 국가보안법은 즉각 없애야 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한다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참여해주기 바란다.
5년만에 다시 들어가 본 북녘
12. 방북 넷째 날 (2003년 10월 3일)
-평양 근교 대박산의 웅장한 단군릉-
아침 먹으러 식당에 가면서 스타킹 두 켤레를 챙겼다. 5년 전 평양을 찾을 때도 스타킹 20켤레쯤 준비해서 해설 강사나 호텔 접대원 등 여성들에게 선물로 1-2 켤레씩 건넸는데, 내가 식사할 때마다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는 식당 접대원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식사를 끝낸 뒤 조그만 정성이라며 스타킹을 건네자 통통한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든다.
9시를 조금 넘겨 평양 근교 대박산 기슭에 자리잡은 웅장한 단군릉에 도착하자 어림잡아 1000명쯤 될 듯한 평양시민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며 환영 박수를 보내준다. 대부분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굵은 주름살이 패인 모습이다. 위쪽에 멋지게 늘어서 있는 취주악단 쭉쭉빵빵 선녀들의 희고 고운 얼굴과 몹시 대조적이다. 얼마 전 부산과 대구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는 취주악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데, 열을 지어 연습을 하고 있는 단원들 사이로까지 비집고 들어가 폼을 잡는 극성스런 사람들은 정말 꼴불견이다. 또한 개천절 기념 행사가 진행되는 두어 시간 동안 북녘 사람들은 꼿꼿이 줄을 맞추어 서있는데, 남쪽 사람들은 그늘을 찾아 앉거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으니 민망스럽다. 남쪽의 자유와 혼란 그리고 북녘의 통제와 질서가 대비된다고 할까.
-외무부장관을 지낸 '월북자' 최덕신 집안과 김일성 주석 집안의 특수한 인연-
무대 주석단의 북녘 인사들 가운데는 몇 해전 죽은 최덕신의 아내 류미영씨가 단군민족통일협의회장 자격으로 앉아 있고, 해외 동포 대표들 가운데는 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이숙자씨가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로 최덕신은 남쪽에서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내고 한국전쟁 중에는 휴전 회담에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으며, 베트남 대사와 외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하고, 천도교 교령과 한국종교협의회장을 맡기도 했었는데, 1980년대 미국을 거쳐 북녘에 건너가 살았던 사람이다. 이렇듯 남쪽에서 다양하게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 '월북'한 배경에는 그의 집안과 김일성 집안의 "특수한" 인연도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일제 치하에서 함께 독립 운동을 하던 가까운 사이였는데, 최동오가 1920년대 만주 지역의 민족 운동가들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중학교인 [화성의숙]의 교장을 맡고 있을 때 김일성이 그 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인연 말이다.
남쪽에서 참가한 사람들 대표 가운데는 나와 함께 5년전 평양을 찾았던 [통일연대]의 상임대표인 한상렬 목사가 주유문 (축문) 낭독을 맡았는데 무대 위에서 단군상을 향해 큰절을 넙죽넙죽 4번씩이나 하는 바람에 내가 불안해진다. 행사가 끝난 뒤 조용히 그를 붙들고, 목사로서가 아니라 통일 운동 단체 대표로서 절을 한 것이겠지만, 이 자리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을텐데 목사가 우상 숭배한다고 욕하는 속좁은 사람들도 있지 않겠느냐고 우려를 전했더니 통일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그러겠느냐며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이 행사에서 꽤 심각한 모순이 일어난 듯하다. 한목사가 축문을 낭독할 때 단군을 "실존 인물"이라고 분명히 강조했으며 연호를 "단기 4336년"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남북 공동 대표들이 낭독한 [7000만 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도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받아들이며 "단기 4336년"을 썼다. 여기서 단기 4336년은 남쪽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나와있듯이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 단군에 의해 세워졌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기원전 2333년에 서기 2003년을 더해서 단기 4336년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북녘이 공식적으로 주장하듯 단군을 "실존 인물"로 받아들인다면 올해 2003년은 단기 5021년으로 표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단군의 출생연도와 단군기원 사이의 모순-
북녘 사회과학원은 1993년 평양 강동 지역 대박산 기슭에서 고대로부터 단군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 내려오던 곳을 발굴하여 단군의 실체를 확인하였다고 발표하였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그 후의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강동 지역의 단군묘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해방 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 무덤을 도굴한 바람에 1993년 발굴에서는 유물이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단군과 그의 안해 (아내)의 골격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 분의 뼈가 발굴되었다는 것이었다. 사회과학원이 1994년에 펴낸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에 따르면, 뼈의 연대를 측정하는 데는 10여 가지가 있는데, 평양에서는 현대 물리학의 첨단 기술 가운데 하나인 '전자상자성 공명 년대 측정법'을 사용했단다. 이 방법은 측정 재료가 적어도 괜찮고 측정 정밀도가 높으며 오차가 적다는 이점이 있다는데, 한 연구 기관의 '전자상자성 공명 장치'로 30번 측정해보고, 다른 연구 기관의 최신 과학 분석 기구로 24번 측정해본 결과 뼈의 연대가 5011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여기서 오차 한계를 더하기빼기 267년으로 잡고 있으니 단군이 이르면 5278년 전에 늦어도 4744년 전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5011년 전이란 것은 1993년에 밝힌 것이므로 10년이 지난 2003년 기준으로는 단군이 5021년 전에 출생한 것으로 된다. 따라서 단기를 단군의 출생연도부터 계산한다면 2003년은 5021년이 되어야 하고,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때로부터 계산한다면, 아마 스무살 전후에 나라를 세웠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5000년쯤 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단기로 쓰는 연도보다 660년 정도 앞서는 것이다. 오차 한계를 적용하면 최대 930년 정도 최소 400년 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어서 남북 양쪽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해명을 부탁해보았지만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한편, 남쪽에서는 단군릉 발굴 자체를 조작이라고 일축해버리는 경향이 있기에, 나는 5년 전 단군릉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왜 1993년에 갑자기 그것도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단군릉을 발굴하게 되었는지 해설 강사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수령님이 어릴 때부터 강동 지역에 단군의 무덤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단군제를 모셔왔는데, 마침 1993년 대박산을 개발하게 되면서 파헤쳐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뼈가 어떻게 5000여년 동안 썩지 않고 보존되어 발굴될 수 있었겠느냐는 의혹에는 유골이 석회암 지대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그 지점의 토양은 뼈를 삭히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해명이 돌아왔다. 아무튼 나는 단군릉과 관련하여 남북 양쪽에서 출판된 여러 가지 자료를 접하였지만 고고학적 안목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다.
참고로, 앞에 소개한 사회과학원의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을 1998년 평양 고려호텔 서점에서 구입했는데, 이번에 머무른 양각도호텔 서점에서도 눈에 띄기에 함께 방북한 몇 몇 교수들에게 소개했더니 그들은 주저없이 샀다. 그러나 인천공항에 들어올 때 '불온 서적'이라고 압수당했단다. 북녘의 주장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북한이나 통일 문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그 내용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국가보안법이 오래 전에 없어졌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개천절 기념식이 끝난 뒤 남쪽의 태권도 시범과 북녘의 무용 및 악기 연주 등 공연이 펼쳐졌는데 10월의 햇살이 북녘에서도 어찌나 따가운지 고통스러웠다. 기념식과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평양시민들은 역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남쪽에서 올라간 사람들은 빨리 끝내자며 아우성을 친다. 아무튼 따가운 햇볕 아래서 각종 연설과 공연이 얼마나 효과 있었을지 주최측에서는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단군릉 내부를 둘러본 것은 의미가 있었다. 지난번에는 두 사람만 단군릉을 찾았어도 무덤 안에 들어가볼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말이다.
{예수와 민족}: "통일 목사"의 민족 사랑 이야기
흔히 "통일 목사"로 불리는 홍근수 목사가 향린교회에서 은퇴한지 1년여만에 {예수와 민족}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펴냈다. 그가 좀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그가 걸어온 치열한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더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다. 존경해온 분의 책에 대해 논평을 하게 된 것은 영광이지만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 듯하다. 학술 서적은 아니지만 법학, 신학, 목회학, 철학을 두루 연구하며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진 분의 책을 정치학만 공부해온 사람이 평가한다는 것부터 부담스럽다. 특히 기독교 신앙심이 거의 없는 데다 성경 한 구절 제대로 새겨보지 못한 내가 목사의 목회 활동이나 신학자의 성경 해석에 관해 비평하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할 수나 있겠는가.
홍목사와 나의 관련성을 찾자면 '통일 운동' 분야일텐데, 그는 군사 독재 정권 아래서 감옥 생활까지 하며 20년 가까이 서울에서 전국적인 대규모 통일 운동 단체들을 이끌어왔고, 나는 문민정치가 어느 정도 정착된 뒤 몇 년 동안 지방에서 소박하게 통일 운동에 발 한쪽 정도 담그고 있을 뿐이다. 굳이 공통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둘 다 미국에서 10여년 공부한 뒤 그는 '반미 투사'가 되어 귀국하고 나는 '반미 학자'가 되어 돌아와 미국에 대해 비슷하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랄까.
홍목사는 사주팔자부터 통일 운동과 인연을 맺은 모양이고 나와도 묘한 인연이 있나 보다. 생일이 1937년 8월 15일이라는데, 작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큰형이 1937년생이고 큰형수가 8월 15일생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에 대해 그는 "민족의 광복절에 태어났다는 것이 나의 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될 때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마침 1937년은 소띠해라 소처럼 묵묵하게 열심히 민족 통일 운동을 하라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듯하다.
유교와 미신이 지배적인 문화였던 부산 변두리 마을의 환경 속에서도 목회자였던 아버지와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중학교 다닐 때부터 어른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풍금 반주도 했으며, 고등학교 다닐 때는 기독학생회와 신앙동지회 등을 만들어 이끌기도 했던 그는 이미 그 때 목사가 되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희망은 오로지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에 의한 사회적인 일대 혁신 또는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또한 그 무렵 진보적인 월간지 {사상계}를 읽으며 독일의 본회퍼나 일본의 우찌무라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니 그는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꽤 조숙했던 듯하다. 이렇듯 그는 겨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회를 개혁하여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이 사회를 제대로 바로 잡는다"는 생각을 품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데, 그는 이를 두고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했노라고 회상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신학대학으로 직행하지 않고 법학대학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평범한 목사가 아니라 "개혁적이고 참다운" 목사 그리고 "옳고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의 구원보다는 민족적 구원을 위한 목회자, 마틴 루터나 존 칼빈 같은 "위대한" 개혁자, 모세처럼 민족 해방과 구원 등의 "큰일"을 하는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판검사나 변호사를 꿈꾸지 않으면서도 서울대 법대를 다니게 된 사연이다. 여기서 일종의 아쉬움이 생긴다고 할까. 요즘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가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되고 있는데, 얼마 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연이어 밝혔다는 얘기를 들으며, 그가 서울대 법대를 나와 "개혁적"이거나 "옳은" 법관이 되었다면 아무리 사법부가 보수적인 집단이라 할지라도 저런 수구 극우적인 목소리는 조금이나마 걸러지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법대를 졸업한 그는 신학대학원을 선택하면서 다시 한 번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예수교장로회 측의 장신대로 진학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기독교장로회 측의 한신대로 입학을 한 것이다. 서울대 4학년일 때 장신대 이사장이던 강신명 목사 집에서 가정교사를 한 데다, 아버지가 소속되어 있던 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로부터는 장신대에 입학하면 장학금을 주고 졸업후에 유학을 보내주며 유학을 마친 뒤엔 신학교의 육성을 맡기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자유주의적 교육"을 지향하던 한신대로 진학을 한 것이다. 법대 다닐 때 기독학생회 운동을 하며 만난 문익환 목사가 당시 한신대 교수였다는 것도 그가 한신대를 선택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91년 장신대를 다녔던 내 조카 부부에 따르면, 그 때 학생회에서 문익환 목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가지려고 했는데 학교 당국에서 거절했단다. "위험인물"이란 이유로. 같은 장로회라 할지라도 예장과 기장은 이렇게 차이가 컸던 것이다. 아무튼 홍목사는 당시 부모님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자매들이 몸담고 있던 예장을 거부하고 당시 "이단적인 신학" 또는 "신신학"을 가르친다는 기장측 한신대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예장의 보수적 그리스도인이 기장의 진보적 그리스도인으로 바뀌게 된 것을 두고 "혁명적 전환"이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신학 교육을 받으며 "홍회퍼"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본회퍼를 존경하였으며, 앞에서 소개한 우찌무라 외에 성 프란체스코와 마틴 루터 킹 등도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나도 평화학을 공부하고 평화 운동을 하면서 우찌무라의 무교회운동과 평화사상을 조금이나마 접했고 간디와 킹의 비폭력 저항 운동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흔히 "과격하다"고 알려진 홍목사가 과격한 방법보다 평화적 방법이 좋다며 킹 목사를 존경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간디나 킹의 비폭력 저항을 '무저항'이라고 오해하는데, 무저항은 저항을 하지 않는 것이지만, 비폭력 저항은 불의나 부정에 저항을 하되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목사가 이념적으로는 다소 과격할지 몰라도 정의와 개혁을 추구하는 방법에서는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인 이유이리라. 아무튼 그는 이런 인물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한 이타적인 존재 그리고 개인보다는 민족과 인류 전체를 위한 존재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주로 현대신학 분야를 공부하는 가운데 해방신학을 접하였다고 한다. 그가 밝히지는 않았지만, 남미의 해방신학에 바탕을 두고 신학자 겸 목회자 안병무가 민중신학을 발전시키고, 이 민중신학에 영향을 받아 신학자 겸 목회자 홍근수의 '통일신학'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의 통일신학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특히 기독교인의 정치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누가복음]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그가 무신론자이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블로흐에게 심취하게 된 배경이나 과정은 참 인상적이다. 남북이 통일을 이루려면 남쪽의 기독교와 북녘의 공산주의가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려면 상대방 즉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것을 일찌감치 예견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뼈아프게 생각하면서 진정한 통일운동가가 될 것을 다짐했다고 할까. 내가 1960년대에 초등학교 다닐 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반공방첩"이나 "승공통일"이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녔듯,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반공이나 승공 또는 멸공을 외치고 있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은 식상할 정도로 널리 인용하면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못 가르치거나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공산주의를 반대해야 하고 이겨야 하며 멸망시켜야 한다고 떠들고 있으니 한심한 뿐이다. 그런데 홍목사는 이 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공산주의를 공부했던 것이다. 아직도 북한이나 공산주의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빨갱이"로 처벌받을 각오를 해야하는 정신나간 세상에서 대단한 선각자였다는 생각에 더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다.
홍목사가 1980년대초 귀국하여 명동 향린교회에 부임한 뒤 교회 및 사회 개혁을 위하여 예배 의식에 국악을 도입하고, 국악 찬송가를 만들었으며, 실질적인 담임 목사 정년 제도를 마련해서 미련없이 정든 교회를 떠나고, 통일공화국 헌법을 만든 일 등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 대신 앞으로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기독교 강의를 하거나 개성공단에서 목회를 펼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소개하며 "통일신학자"로서의 꿈이든 "통일목사"로서의 꿈이든 머지않아 꼭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나는 한 때 열성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조카에게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라며 손찌검을 한 적도 있고, 지금도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애매한 회개와 개인 구원을 주로 강조하는 속좁고 보수적인 개신교의 양적 팽창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통일연대]의 상임대표인 한상렬 목사와 [여성단체연합]의 상임대표인 이강실 목사 부부가 이끄는 전주고백교회에서 해마다 서너 차례 강연을 해오고 있는데, 몇 해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백교회 같은 교회라면 우리나라 모든 건물에 십자가가 세워져도 기꺼이 환영하겠다." 이에 한 마디 덧붙인다. "홍근수 목사 같은 분이 목회를 한다면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도가 되어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겠다."
* 이 글은 9월 11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홍근수 목사의 {예수와 민족} 출판기념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조금 고쳐쓴 것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 운동 마당
-편집실에서-
1. 9월 8일 원대신문 지령 1000호 기념 북한 및 통일 문제 진보-보수 좌담회가 원광대에서 열렸는데, 진보쪽 토론자로는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가 보수쪽 토론자로는 고려대 북한학과 유호열 교수가 참석하고 제가 사회를 맡아 김일성 조문 파동, 북한 인권 및 탈북자 대량 입남 문제 등에 관해 2시간이 넘도록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2. 9월 11일 서울에서 일본주재 미국인 언론인들이 저를 인터뷰하면서 11월 2일 실시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길 바라느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케리가 당선되기를 바라지만 부쉬의 당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다면서, 미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부쉬가 당선되면 미국 제국주의가 훨씬 더 빨리 망하게 될 것이므로 부쉬의 재선도 괜찮게 생각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유럽의 진보적 학자들로부터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며 재미있어 하더군요. 부쉬가 재선되면 그의 독선적이고 호전적인 대외 정책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들이 등을 돌려 오만한 제국이 예상보다 빨리 고립되고 궁극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배어있는 얘기지요. 세계 평화를 위해 단기적으로는 케리 당선이 낫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부쉬 당선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뜻이니 이번에 부쉬가 다시 백악관을 차지하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지난 8월 초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학술회의가 무산되는 바람에 제가 방북을 못하게 되자 9월 초 평양의 제 협상 파트너가 베이징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더군요. 9월 23-24일 베이징에서 그를 만났는데 올해 말까지는 정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남북 관계가 풀리기 어렵다는 공동 인식에 따라 내년 봄에 [남이랑북이랑] 운영위원들이 방북하여 대북 지원 사업을 벌이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하였습니다.
-편집인에게-
1. 항상 좋은 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통일을 향한 잔잔하고 일관된 논조와 동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더욱 발전하시길 기원합니다. -서울 공무원-
2. 참 고마워요! 잊지 아니하고 글 보내주시는 것 대단히 고마워요. 여기는 멀고 먼 북 유럽 스웨덴. 대한민국의 국보법은 법이 아닌데 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막 공갈 협박하고 거짓 사기치며 매도하고 폭행과 살인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법, 당장 이 17대 국회는 꼭 폐지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서 대 침략 살인 강도들인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의 꿈에도 소원인 민족 통일을 해야 한다고 자식 이름도 통일로 이름짓고 사는 사람입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큰 안부를 정중히 드리며 시를 지어 보냅니다. - 환웅 9223년, 단군 4337년, 서기 2004년 09월 03일, 스웨덴 동포 림원섭-
남: 남이랑 북이랑
이: 이것이 진짜 민족 통일이네
랑: 랑(朗)이라 환하고 맑은 마음
북: 북이랑 남이랑
이: 이것이 진짜 민족 통일이네
랑: 랑(郞)이라 그 땅 이름 삼천리금수강산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 운동 회원
다음은 2004년 9월 1일부터 30일까지 회원이 되신 분들로, 이름 앞에 - 표시는 앞 회원의 가족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별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으면, 평생 회원은 100,000원, 연 회원은 10,000원, 반년 회원은 5,000원, 월 회원은 1,000원을 내신 분들입니다. 주위 분들에게 {남이랑 북이랑}을 소개해 주시고,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 운동]에 참여하도록 권해 주시기 바랍니다.
♥ 평생 회원
재동세무회계사무소 (소장 조유동) 200,000원
최길용 (인천 올리브백화점 홈프라자)
♥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달에 1,000원씩, 또는 반년치 5,000원이나 1년치 10,000원, 또는 평생회비 100,000원 이상을 아래 은행 계좌로 보내 주시고, 전화나 팩스 (063-850-6580) 또는 전자 우편 (pbpm@chol.com)을 통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돈은 모두 북녘 동포를 돕는데 쓰여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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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및 계좌 번호 (예금주: 이재봉) |
| 제일은행 702-20-271071 외환은행 250-18-056499 |
| 국민은행 753525-01-002564 우리은행 121-094881-12-201 |
| 농 협 531015-52-064434 우 체 국 402396-0057646 |
| 전북은행 610-22-0018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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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 계시는 분들은 월회비 $1, 연회비 $10, 또는 평생회비 $100 이상의 개인 수표를 다음 주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Jae Lee: 334 Caswyck Trace, Alpharetta, GA 30022, 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