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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룰러 개념의 고안과 AMPS 시스템 도입>
IMTS 방식으로 제공되던 초기의 이동통신은 송신기의 최대 출력에 의해 서비스 지역이 결정되고 채널 수가 제한되었다. 따라서 산악, 건물 등 장애물이 있는 구간에서는 통신이 두절되거나 자신이 가입하지 않은 기지국에서는 전혀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고, 수용할 수 있는 가입자 용량 역시 한계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셀룰러 이동전화 시스템이다. 1947년 미국 벨연구소에서 한정된 주파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대용량의 이동전화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는 셀룰러 이동전화 개념이 처음 고안되었으나, 실제 구현은 1978년 AT&T사가 시카고 지역에서 시작한 AMPS(Advanced Mobile Phone System) 시험 시스템에서 이루어졌고, 여기서 1세대 이동통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지역별로 운용된 1세대 주요 기술>
1세대는 200~900MHz의 주파수 대역에서 10Kbps의 속도로 음성을 전송하며 AMPS(미국), TACS(영국), NMT(스웨덴) 등의 기술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AMPS 방식은 1983년 미국에서 상용화되었고, 이후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1984년 AMPS 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1979년 NTT가 채용되었고,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등 유럽에서는 1981년 450MHz 대역을 사용하는 NMT(Nordic Mobile Telephony)450으로 출발해 900MHz 대역을 사용하는 NMT900으로 발전했다. 영국 역시 900MHz 대역을 사용하는 TACS(Total Access Communication System) 기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AMPS의 개정판이었다.
<음성 위주 서비스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공>
1세대에서는 음성 위주의 이동통신 서비스가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공되었다. 아날로그 통신은 목소리를 마이크에 전달하고 마이크는 연속적인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어 상대방에게 소리의 변화 그대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통신할 때 자신의 신호와 다른 방해 신호가 동일한 주파수로 섞이면 혼신이 생기고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후 AMPS 시스템 같은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증가하는 사용자 수를 감당할 수 없어 2세대 디지털 방식의 개발을 촉진하게 되었다.
2. 저무는 차량전화, 떠오르는 휴대전화
<차량전화에서 휴대용 이동전화로>
1988년 6월 7일 체신부는 한국이동통신이 제출한 휴대전화 설치 및 요금안을 승인하고 일반 사용자가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에서 이처럼 휴대전화의 보급을 서두른 것은 당면한 국가적인 행사인 서울올림픽을 맞아 통신 지원을 원활히 수행하는 동시에 선진국처럼 휴대전화의 대중화를 앞당기기 위해서였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이미 담뱃갑만한 크기에 500g 안팎의 소형 휴대 전화기가 경쟁적으로 개발되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휴대전화기의 판매량이 일반 전화기의 30%대에 육박하였고, 일본에서는 한 해 동안 70만 대가 팔려 나갔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이미 사용 중인 차량전화에 비해 단말기 가격이 비싸고 출력이 약해 통화 가능 지역이 좁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휴대가 간편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통화할 수 있는 고유의 장점 때문에 차량전화를 급속히 대체하면서 새로운 이동통신의 총아로 떠올랐다. 차량전화의 시대가 저물고 휴대전화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처음 휴대전화가 보급될 당시에는 차량전화와 휴대전화의 국번이 달랐다. 그러나 휴대전화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차량에 쉽게 거치할 수 있어 그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없게 됨에 따라 국번의 구분을 없앴으며, 호칭도 1990년 이후부터는 이동전화로 통일되었다.
한편 휴대전화 단말기의 경우, 휴대전화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을 놓고 업체 간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초창기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은 한진전자와 유니텍시스템 등 외국 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업체들이 주도했다. 이들 업체는 각각 영국 테크노폰사, 미국 모토롤라사와 대리점 계약을 맺고 단말기를 수입, 판매했으며, 88서울올림픽 기간 중에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단말기를 납품하면서 초기 단말기 시장을 이끌었다.
이들 수입 업체들에 이어 삼성전자, 금성통신, 현대전자 등 국내 생산 업체들이 외국 업체들과 제휴하여 단말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제조업체 간 판매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단말기 가격은 점차 인하되었으며, 기능 또한 더욱 다양해지면서 이동전화의 보급이 촉진되었다.
<전국 단일 요금제의 도입>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동전화 가입자 증가에 발맞추어 통신 요금도 기존보다 좀 더 저렴한 수준으로 바뀌었다. 요금 체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것은 1990년 6월 1일, 기존의 유선전화같은 다른 통신 분야에서는 없던 전국 단일 요금제를 실시하면서부터였다. 전국 단일 요금제란 종전까지 요금 체계를 여러 단계로 구분하고 거리별로 차등 요금을 부과해 오던 것을 거리에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단일 요금을 적용한 요금 제도였다.
전국 단일 요금제 실시는 정보 이용의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려는 목적이 컸는데, 실제로 우리나라는 미국의 한 개 주(州)보다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별로 차등 요금을 부과함으로써 이용자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고 있어 이동전화 대중화를 위해서는 요금 체계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51Km 이상 장거리 구간에서는 한국통신의 일반전화 도수료에 비하여 가격 경쟁에서 훨씬 유리해짐에 따라, 장거리 전화를 많이 사용하는 회사나 개인 사업자들은 일반전화 대신 이동전화를 이용함으로써 통신 요금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통화 품질의 획기적 개선을 이룬 집중운용보전시스템>
이동전화 가입자의 급신장은 가입 적체 현상의 심화와 교환기 수용 한계 초과에 따른 통화 품질의 저하라는 두 가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이동통신은 이동전화 적체 해소와 통화 품질의 향상을 경영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가운데 국제적인 기업을 대상으로 한 공개경쟁 입찰을 통해 통신 설비의 도입을 서두르는 한편 통화 품질 향상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전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산물로 1991년 10월 22일 이동전화 집중운용보전시스템(CNSS : Cellular Network Surveillance System)을 개발, 운용하게 되었다.
이동전화 집중운용보전시스템(CNSS) 개통식 (1991. 10. 22)
3. 성큼 다가온 이동통신 대중화 시대
<이동통신 가입자 100만 시대 개막>
1991년에 들어 이동통신 100만 가입자를 돌파했다. 무선호출 83만 7000, 이동전화 16만 3000 가입자를 넘어선 것으로, 이는 본격적인 이동통신 대중화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내 이동통신의 성장 속도는 세계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성장의 연속이었다. 이동통신 시대의 개막을 알린 1984년에 1만 8300명에 불과하던 국내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해마다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던 중 88서울올림픽 개최와 국민 소득 향상에 힘입어 1988년부터는 평균 100% 이상 신장되면서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여 1991년 말 마침내 100만 명 고지에 올라섰다.
이후에도 가파른 성장의 질주는 계속되어 무선호출의 경우 서비스 도입 10년 만인 1992년 4월 21일 가입자가 100만을 넘어섰으며, 이후 1년 3개월여 만인 1993년 7월 19일 200만을 돌파하는 급신장세를 나타내었다. 이동전화 역시 1993년 말 기준 47만 1784명을 기록하였다. 이로써 이동통신은 100만 가입자를 돌파한 지 2년 만인 1993년 말 250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동통신 가입자가 이처럼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려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동전화는 선진국과 비교해 아직 보급률이 크게 뒤떨어지는 수준이었다. 1991년 기준 우리나라의 이동전화 보급 대수는 인구 1000명당 3.8대 꼴로 스웨덴의 66.8대, 홍콩의 26.7대, 미국의 24.8대, 일본의 7.3대 등과 큰 격차를 보였다. 이는 이동전화의 성장 잠재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무선호출의 경우, 1991년 우리나라의 보급 대수는 1000명당 19.5대로 일본의 40.2대, 네덜란드의 19.9대, 스웨덴의 14.8대, 영국의 11.7대 등 선진국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짧은 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서비스망 확대 및 기지국 증설>
서비스 지역 확대와 기지국 증설은 1988년 4월 사업자 지정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서비스 지역 확대를 위해서 무엇보다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에 따른 적체 현상 해소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차량전화는 1만 5000회선에서 2만 9500회선으로 늘어났고, 무선호출은 8만 1000회선에서 15만 회선으로 두 배 가깝게 증설되었다. 1989년에는 이동전화 3만 8000회선과 무선호출 18만 7000회선을 증설하여 전국망을 구축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이동전화 서비스 지역은 경부, 호남, 중부, 구마 등 4개 고속도로와 주변 도시 및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등이 추가 되었으며, 무선호출 서비스 지역은 73개 시 70개 읍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이동전화 71만 7500회선, 무선호출 414만 4000회선을 각각 증설하여 서비스 지역은 읍 단위로까지 뻗어 나갔다. 이처럼 활발한 시설 투자와 지속적인 서비스 지역 확장에 힘입어 1993년 말에는 이동전화의 경우 전국 74개 시 전역과 107개 읍 및 주요 고속도로 주변 지역까지, 그리고 무선호출은 전국 74개 시 전역과 158개 읍면 단위까지 각각 서비스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서비스망이 실현되었다. 특히 1989년 9월부터 시작된 전국 이동전화 기종 변경(모토롤라→AT&T)으로 인해 단기간에 엄청난 시설 공사가 전개되었다.
한편 기지국의 증설은 전국 서비스망 구축과 함께 1990년부터 본격화되었다. 1990년에는 15개 시, 1개 읍 지역에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하여 기지국 146개 국소, RF 1443회선을 설치하였다. 이어 1991년에는 전국 시 단위 서비스 완성을 목표로 112개 국소의 기지국을 건설하였으며, RF 3859회선을 대폭 증설함으로써 폭발적인 수요 증가에 발 빠르게 대처하였다. 1992년부터는 기술력 향상에 힘입어 기지국의 자체 설계가 이루어져 예산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93년부터는 시설의 적기 공급을 목표로 시설 공급의 연동화도 추진되었다. 연동화 추진에 따라 기지국은 Y+1년 말 수요를 기준으로 공급되면서 기지국 치국 장소를 조기에 선정하고 기지국 설치의 효율을 높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RF 회선 공급의 적정화를 실현하여 기지국별로 통화량 분포에 따라 회선을 공급하고, 신설 기지국은 기본 장비 단위로 회선을 공급해 나갔다. 이후 1993년에는 기지국 221개 국소에 RF9,813회선을 공급함으로써 1998년 말 당시 기지국과 RF는 총 620개 국소에 2만 3,439회선으로 증가하였다.
<다양한 고객 서비스 제고 활동>
이동통신의 양적인 성장의 지렛대가 된 것은 단말기 적체 해소, 통화 품질 개선을 위한 서비스망 확충 및 서비스 지역 확대, 전국 단일 요금제 실시 및 사용료 인하 등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서비스 제고 활동이었다. 한국이동통신은 양적인 성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이동통신의 편리성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더욱 활발히 펼쳐 나가면서 이동통신의 대중화 시대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었다.
1992년 7월부터는 이동전화 통화 품질 향상의 일환으로 이동 기지국을 운용하였다. 이동 기지국 차량에는 디지털 마이크로웨이브, RF설비, 반송 단국 장치, 안테나 등을 장착하여 대형 사고나 휴가 기간, 국가적 행사 등 일시에 통화 수요가 급증하는 지역에 집중 배치하였다. 그리고 1993년부터는 무선호출 이동 기지국도 운용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중단 없는 통신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1993년 2월 1일부터는 이동무선 공중전화도 보급, 운영하였다. 이동무선 공중전화는 이동전화에 가입하지 않은 일반 국민들이 고속버스나 기차 등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통신수단이었다. 이동무선 공중전화의 보급으로 도로 및 철도 등에서도 이동전화의 이용이 가능해짐에 따라 일반 국민들의 통신 시설 활용도는 더욱 높아졌다.
1993년 1월에 서비스된 이동무선공중전화를 이용하고 있는 모습
한편 값비싼 이동전화를 구입하지 않아도 임대하여 이동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이동전화 임대제를 1993년 10월 1일부터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확대 실시하였다. 임대제는 150만 원 가까이 되는 이동전화를 월 임대료만 내고 자기 전화기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전에는 국가 기관이나 지방 자체 단체에 한해 서비스되었다. 또한 1994년부터는 이동전화 설비비 분납제를 실시함으로써 이동전화 신규 신청자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당시 이동전화를 신규 가입하려면 총 73만 2000원이 필요했는데, 이 중 설비비 65만원은 최고 12개월까지 분할 납부가 가능해져 우선 8만 2000원만 준비하면 가입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이동전화 운용 기술의 발전>
1993년에는 이동전화의 운용 기술에서 놀랄 만한 성과가 있었다. 서로 다른 이동전화 교환기 간에 상호 접속 기능을 가진 IS-41A를 세계 최초로 운용하게 된 것과 관문 교환기인 게이트웨이(Gateway)를 개통함으로써 교환기 운용 기술의 눈부신 향상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IS-41A는 국제 경쟁 입찰을 통해 이동전화 교환기를 도입하게 되면서, 교환기가 APX(Autoplex)와 EMX(Enhanced Mobile Exchange) 양대 기종으로 구성되어 양 기종 간의 핸드오프(Hand Off?통화 채널 전환)를 위한 역할을 하는 시스템이 필요해짐에 따라 도입, 운용되었다. 한국이동통신은 1991년 1월부터 장비 공급 업체인 AT&T, 모토롤라와 함께 기술 도입을 협의하였으나 두 업체 간의 이권 문제와 자존심 싸움으로 계속 지연되었다.
그러던 중 1992년 9월 국내에서 IS-41A를 실용화하기로 전격 합의하고 수도권과 부산 지역에 설치된 교환기의 종류를 단일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는 APX를 설치하고 EMX는 부산 및 경남 지역으로 이설하였다. 이어 1993년 2월 25일 부산 지역을 시작으로 3월 15일에는 경남 지역에서 IS-41A가 개통, 운용되었다. IS-41A의 운용을 개시함에 따라 지역별로 기종을 단일화하여 운용 및 유지 보수를 일원화할 수 있었다. 또한 기종별 기지국 단위 서비스의 불균형 해소뿐만 아니라 주파수의 재활용이 가능해졌으며, 공급 업체 간의 기술 경쟁 유발로 통화 품질도 향상시킬 수 있었다.
IS-41A를 성공적으로 개통하여 이동전화 운용 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린 한국이동통신은 1993년 말에는 이동전화 교환기를 총괄하는 Gateway를 개통함으로써 교환기 운용 기술은 새로운 발전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Gateway는 한국통신의 PSTN(Public Switched Telephone Network) 교환기나 APX, EMX 등의 다른 이동전화 시스템과의 연결 구성을 단일화시켜 주는 관문 교환기로, 흔히 CGS(Cellular Gateway Switch) 교환기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