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여기는 강릉 초당성당 마당입니다. 5월호 공간지에 아름답게 소개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와 편하고 아늑하게 긴 자투리 땅을 활용해 하이얀 성당을 쭉쭉 뻗은 조선 소나무를 다치지 아니하고 앉힌 안목과 혜안에 감탄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공구와 붉은 흙이 드러나 있지만 참 이쁜 건물입니다.
고갯마루 능선에 있어 고저를 활용하고 소라껍질 같은 형태에 백색 타일을 자유롭게 마감해 현대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외면으로 봐도 상상이 갑니다
조금 전 오랫동안 별렀던 선교장에서 실망한 것을 여기서 씻어낼 수 있으니 좋습니다
선교장은 관광지로 개발하느라 온통 새집을 짓고 있었고 터 안에 식당을 만들어 본래의 그윽한 정취를 날려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본래대로 두면 훨씬 좋았을 것을...어느만큼 세월이 흘러야 옛 멋이 다시 베일지 모르지만 또 하나 좋은 우리 것이 사라졌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처럼 난처한 것도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주인의 안목이 중요합니다. 경포대의 바다와 모래는 그대로이나 아직은 때가 아닌 듯 싶습니다
아침에 청주를 떠나 열두시 반에 초당마을 순 두부집 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허난설헌 생가는 고즈녘하고 아담하게 남아 있었고 나이 먹은 배롱나무, 양반꽃, 수국, 벗나무 등 세월의 향기를 내뿜는 것들이 있어 주위의 넓은 소나무 숲과 경포호가 어우러져
아이들 표현대로 끝내 줬습니다 주위의 집도 편안하고 골목길도 정다워 오랫동안 오고싶어 했던 마음을 받아 주었습니다, 사람들도 드믄드믄 찾아와 좋았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며 정취를 더 맛보아야 겠습니다. 하늘엔 상현달이 떠있고 더러 다리긴 백로가 지나갑니다.
길을 잘 몰라 담 없는 집 잔디밭에서 이야기 나누시던 아주머니 두분께 말을 부쳐 차도 얻어 마시고 좋은 자료도 들었습니다. 첫째는 이곳이 허난설헌의 생가로 밝혀진게 근년이라는 것과 조선왕조실록 드라마 작가인 신봉승씨가 강릉 태생이며 이곳에 집이 있는데 그분의 노력으로 이곳이 초당 허엽의 집으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지리학과 교수를 하시는 이광노씨 소유이던 땅을 시에서 사들여 관리하고 있으며 지금은 논으로 되어 있으나 옛날에는 배가 집 가까이 까지 들어와 그 집을 "배 나들이집"으로 불리 웠다고 합니다. 집 뒤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을 백여미터 쯤 가보니 숲이 끝나는 곳에 깊은 또랑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거기 까지 배가 온 모양입니다. 난설헌의 시 죽지사3 에 "나의 집은 강릉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놓고 짝 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장 정룡역) 동네엔 허균 난설헌 시비 공원이 길 옆에 조성되어 있고 동네 여러군데 그들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서애 류 성용 대감이 하늘은 어찌해 한 집에 이렇게 많은 문인을 보내 주셨는가 감탄했던 그들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홍 길동 동상도 있는걸 보니 이제 제대로 대접을 하는 것 같군요, 조선 왕조 내내 복권이 안되었던 허균, 각 지역마다 특색 살리기를 위해 애 쓰는 중 초당은 멋진 자랑꺼리가 생긴 거지요 앞으로도 많은 세월 이 지역을 빛내리라
생각 됩니다. 난설헌이 여덟살에 쓴 백옥루 상량문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까지 알려져 그곳의 유명한 문인 조문기가 읽고 "이 문장을 읽으니 흡사 신선이 되어 백옥루에 올라 있는 느낌이 들었다는 극찬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열 네살에 시집가 불우한 결혼 생활 끝에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숨진 난설헌, 그의 유언대로 그가 남긴 모든 유묵은 불 태워 졌으나 다행이 친정에 남아있던 시 213수와 산문 두 편이 허균에 의해 시집으로 만들어져 동양 삼국에 퍼져 국제적인 시인이 됩니다 허균은 그의 친한 친구 한 석봉에게 부탁해
"백 옥루 상량문"을 쓰게 해 그것을 판각해 책으로 만들었지요. 이후 중국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그 책 하나를 선물 받기를 희망해 선물 받으면 최고로 기뻐 했다 합니다,
대구 고 서점에서 난설헌 시집과 석봉의 글씨로 된 백옥루 상량문책을 구 했고 두 사람의
업적을 펴낸 이십여권도 구하는 억척을 떤 까닭에 이번에 초당을 오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경포대는 몇번 왔지만 지척에 있는 초당은 두부로만 알았으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게 꼭 맞는 것 같습니다 강릉 경포대 입구에서 우측으로2키로만 가면 초당입니다
난설헌에 유년의 천재성과 결혼후의 비극적인 삶은 새삼스럽게 좋은 것은 한곳에 모여있지 않다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생가는 본채 밖으로만 볼 수 있도록 되어있어 우물정자로 된 앞마당을 보지 못한게 못내 서운하군요 소나무 숲은 정말 근사합니다 강릉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다시 7시 30분 정동진 모래시계 고 현정 소나무 아래서 어둠에 잠기는 동해를 바라보며 벤취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아무래도 여기 가까운 곳에서 자고 내일 해뜨는걸 보려면 민박집에서 하루 쉬어야 될 듯 싶습니다. 하얀 포말로 모래사장을 향해 달려오는 파도 소리는 억겁을 변함없이 왔겠으나 사람마다 감상적인 기분으로 빠트리는 것은 그의 특권이겠지요
유명한 이 해송은 여뉘 나무와 다름없지만 의미를 부여하니 다르게 보입니다. 저녘이 되어 바람이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부는군요. 드믄 드믄 이곳을 찻아 온 사람들이 카메라를 터트려 순간의 반짝임으로 핍니다. 내일 해돋이를 보고 계획대로 남으로 향해야겠습니다.
원래는 초당 마을에서 일박하려고 했으나 그곳엔 숙박할 곳이 없어 경포대로 나가야 한다기에 한적한 곳을 찾아 시내를 벗어나려고 남쪽으로 내려온게 정동진입니다.
가능하면 감상에 안 빠지기, 추억에 안 잠기기로 했으나 이렇게 됐습니다. 정월 초하루는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일출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요. 파도를 바라보면 옛 사람들이 용을 만들어 낸 것이 이해가 갑니다., 무언가 신비한 것이 바다 깊이 살 것 같은 건,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연스레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가로등 불이 켜졌습니다. 둥근 백열등이 운치가 있군요 자세히 보니 오징어 잡을 때 배에서 켜는 집어등입니다. 모래사장에 임시로 만든 횟집에도 노란 빛이 가득 합니다. 큰길 우측에 우리집 같은 가든이 있어 이곳에 민박 합니다." 썬 가든" 그 이층이 민박이겠거니 했으나 옆에 있는 허술할 곳 이더군요 그래도 방이 깨끗하고 싸(만 오천원) 괜찮습니다. 여기서 바다가 보이지는 않으나 직선 거리로 이백미터도 안됩니다 주인과 죽이 맞아 그대로 방 앞마루에 앉아 30분 정도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져온 사진과 복사한 것 등으로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마침 주인이 건축을 전공한 분이라 쉽게 이해를 해 좋았습니다. 용감한 사람이 좋은 것과 만난다는 나의 구호가 맞는 것 같습니다.
세면후 양말을 빨아 방바닥에 펴 두었습니다 냄새 나는 것 가방에 넣어두지 않기 위해 양말은 여분을 하나만 가져 왔거든요.
둘째 날 아침
밤새 소쩍새가 운다더니 거짓말이 아니더군요 폭죽소리, 개구리소리, 어둠 속에서 소리는 그 위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렇게 나그네를 잠 못 이루게 하는 뺑덕에미 심뽀는 어느 세월 파도에 씻겨야 변할까 모르겠습니다. 몇 번이나 깨어 시계를 확인 후 가까스로 새벽 다섯시에 사백원의 정동진역 입장료를 내고 다시 아침 바다를 보며 의자에 앉았습니다. 백 여명 남짓되는 사람들이 서서 앉아서, 둘이서, 혼자서, 역에서 틀어주는 모래시계 배경음악을 들으며 일출을 기다립니다. 십분에 해가 뜬다고 써 있군요 모래사장 위로 총 든 군인 다섯이 걸어갑니다. 밤새 조국은 안녕하신지 확인 하면서, 해뜨는 곳 주위가 점점 짙은 자주색에서 밝은 다홍으로 바뀝니다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찍어 대기도 하고, 연인을 업고, 허리를 끼고, 그래도 시선은 모두 정 동쪽입니다. 드디어 해가 솟아오릅니다. 파도 소리와 음악이 어울려 괜찮은 풍경을 이룹니다. " 오늘도 해가 뜬다" 그 붉음이 더 이상일수 없게 붉습니다.
다른 어떤 색과도 비길수 없습니다. 이내 한 뼘쯤 둥실 떠올라 어둠을 물리치기 시작합니다. 아 참 이쁩니다.
열시 반에 평해 월송정에 올라 잠시 쉽니다. 관동 팔경중 하나인 고려시대 때 정자입니다. 물론 터만 그렇지요, 사방에 가득한 소나무 숲에서 맑은 바람이 붑니다 나무위로 동해도 보이구요 정자로는 꽤 큽니다 삼십평은 되겠군요 월이 달이 아니고 넘는다는 월이군요 그게
잘 어울립니다. 한 시간 마다 쉬며 갑니다. 차도 쉬고 사람도 쉬고 혼자라 약간 외롭긴 하지만 이런 자유로움이 있잖아요 까치소리가 요란합니다. 국도 변 옆이라 찾아오기도 쉽군요
나무아래 군인 텐트가 가득해 군인들의 쉼터인 모양입니다. 산 비둘기 한 마리 가까이서 모이먹는 것도 보이구요 뻐꾸기 소리도 들리구요 정동진의 구석구석 마다 보이던 낙서가 여기서는 안 보이는군요 고즈넉하다는 표현이 이런 때 쓰겠지요. 옛 선비들이 사랑 할만한 곳이라 생각됩니다.
오후 한시 경주 시내로 들어와 헤메다 김 유신 장군묘로 접어들어 예정에 없던 인사를 드리고 변두리 이름 없는 식당입니다 입장료 500원 주차료 1000원을 물었습니다. 꼬박 다섯시간을 운전해 도착한 탓인지 나른합니다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오는 경치는 아주 좋았습니다
기름을 가득 넣고 왔으나 다시 반으로 계기가 내려 온걸보면 많이 달려온 것 같군요 오늘 내로 진주까지 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창문 열고 달려왔더니 후덥지근 하군요.
경주는 관광지 냄새가 가득합니다. 다시 부산 쪽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여기는 진주 남강변에 위치한 전망 좋은 동방호텔 704호 실입니다, 웬 호사냐구요? 여행 중 하루 밤은 좋은 잠자리에서라는 오랜 전통(?) 이지요. 아침 일곱시 반 강릉 정동진 출발 저녘5시 5분전 거의 열시간 걸려 이번여행 두 번째 목적지에 예정대로 온 것입니다. 역시나 진주는 오래된 도시의 면모를 풍기는군요. 촉석루, 의암, 박물관등, 진주성 안에 있는 것들을 잘 보았습니다 다섯시 이분전 박물관에 도착해 가까스로 표를 끊어 입장 할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내일 10시 이후나 입장이 가능하니 반 나절을 버려야하는 처지니 다행이지요. 마침 저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아주머니 세분이 내려진 문을 밀고 떼를 써 입장한터라 세세히 설명해드리니 고마워하며 한시간여의 관람 뒤 밖으로 나오자 제일 높은 북장대 누각에 올라 가져온 수박을 주셔서 좋은 이야기 나누었지요, 낯선 사람들과 만나 서로 인생이야기를 나눌수 있다는게 신기합니다. 한국 아주머니는 정 많고 착하고 대단합니다. 세분은 형제로 다들 저보다 연배이신 듯 하더군요 아주머니 만세입니다. 박물관 밖에서는 친절히 이곳 저곳을 안내 해주셔서 처음 온 진주의 인상이 좋았습니다. 피곤한 몸을 씻고, 내일또 창녕 우포늪으로 향하기 위해 이곳에와 축구 잉글랜드전을 보고 아이들과 전화도 나누었습니다. 내려다 보이는 야경이 아름답습니다 진주 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으로 꾸며져 특징 있는 자료 박물관입니다. 진주성 전투의 장렬한 내용은 이미 알고 있지만 막상 이곳에와 성과 자료를 함께보니 지역 특성화의 성공적인 정착으로 느껴집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오늘 여행이 힘들었음을 말해 주는군요 거의 천리길을 달려왔으니 당연 하겠지요. 저녘이되니 쌀쌀 해져 긴 옷을 가져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진주성은 성곽 길이가 1700미터의 석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민관군 7만여명이 이 성을 지키다가 모두 순절한 곳입니다. 지금은 아름답고 조용한 성터지만 선조의 뿌린 피 값으로 우리의 오늘이 있음을 생각하면 숙연해집니다. 총대장 김 시민 장군 사당이 고향인 괴산에 있는 것은 알고 계신지요.
셋째날 눈뜨니 여섯시 십오분입니다. 습관이란 어쩔수 없는 모양입니다. 창밖을 보니 비가 촉촉히 내립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천천히 여행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잠자리가 편해서 그랬는지 피곤한 줄은 모르겠습니다. 식당이 일찍 문을 열어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나니 일어난지 한시간 지났군요. 치약 칫솔 등 쓰고 체크 해야할게 많은대도 쓸게없어 미안 하군요.
다 준비 해온것이라서 특별히 소비할게 없습니다 일회용 비누와 수건 한 장을 사용했을 뿐
입니다. 떠나간 자리는 원래대로... 자 우포늪으로 출발입니다
10시 우포늪을 바라봅니다. 경남 창녕군 사개면에 걸쳐 약 1억 4천만년에 형성된 국내 최대의 원시적 자연늪으로 가시연꽃, 부들 , 생이가래등 각종 희귀식물이 서식하고 중대백로, 왜가리, 고니등 철새 도래지로서 어류, 수서곤충, 무척추곤충 등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달리는 말처럼 생겼구요 목포, 쪽지벌, 우포, 사지포, 등 네 곳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커다란 회색 왜가리가 나르고 맹꽁이, 소리 오리소리 들리는군요. 참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새들이 한결같이 크군요 야산 중턱에 만든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 봅니다. 뚝방으로 여러 곳을 막아 농지로 쓰느라 늪이 많이 줄어든 상태 이군요 날씨가 청명해져 멀리까지 잘 보입니다. 시간이 넉넉하니 휴계소에서 사온 신문도 읽고 좀더 쉬었다 내려 가려고 전망대밖
벤취로 나왔습니다. 차 대는곳에서 바라보니 늪까지 멀어보여 차를 가지고 가겠다고 공익요원에게 떼를 쓴게 미안해집니다, 이렇게 지키는 것이 잘하는 일인데도 편 하려는 속성 때문입니다 고속도로에서는 부산쪽으로 가다 대구쪽으로 가야함에도 착각하여 아무래도 이상해 휴게소에서 물어 다시 뒤로 가는 헤프닝이 있었습니다,
창녕 박물관이 있는 곳은 시내 변두리 고분 옆입니다. 가야시대의 능들이 편한 구릉에 작은 산처럼 보입니다. 부드러운 선이 편안합니다. 일제시대에 송현동 고분10여기를 발굴되었는데, 출토 유물이 마차20대와 화차2량에 싣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야는 신라 진흥왕때 신라에 합병되어 역사에 제대로 남은게 없지만 무덤의 크기로 보아 꽤 큰 세력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도굴 피해가 심해 현재 박물관에 것은 퍽 빈약한 유물입니다. 패자는 항상 가련합니다. 화왕산 용선대를 가고 싶어 물어보니 남은 시간으론 어렵겠습니다. 점심 먹고 청주로 올라가야겠군요. 여행의 끝이 보입니다. 쌈밥집에 와 식사를 시키니 1인분은 안된다는군요. 세상에, 손님에게 맞춰야지 식당에다 맞춰, 할수 없이 이인분 시켜 먹기로 했습니다.
다섯시 십분 전에 집에 돌아와 여장을 풀었습니다. 지나고 나면 늘 그렇지만 꿈만 같습니다,
대구에서 대전까지 경부 고속도로는 누더기 도로입니다. 수없이 공사를 벌려 가다 서다가 반복되고 바닥도 옛것과 새것이 섞여 엉망입니다. 휴게소마다 들려 쉬고 오며 아침에 일찍 출발한 넉넉함을 즐겼습니다. 기름값이 12만원 들었으니 이천리는 달린 셈 이군요. 어떤 분은 누군가 같이 다니지 그러느냐고 합니다만 때로 시속 130키로로 달리는 자동차에 또 다른 사람이 탈까 모르겠습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사흘동안 잘 다녀왔습니다. 다행이 별로 피곤치 않은 건 하루 여덟시간 씩 잠을자고 잘먹고 틈틈이 쉬며 다닌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원 했던 좋은 곳 보았다는 기쁨까지 있으니 그럴겁니다. 책도 가져가고 스케치북도 가져가고 했지만 그건 사치였습니다. 이후로도 테마여행으로 사전에 충분한 준비로 여행이 알차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엔 멋진 성공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