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0여년 전 고고학계는 심호흡과도 같은 충격을 받는다. 중화문명을 기원지를 바꾸어야 할 중대 발견이 있었는데, 황하문명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에 이보다 훨씬 앞서는 새로운 문화층이 나타났다. 바로 요하 일대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는데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BC 6500~)와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BC 6200~BC 5500)등을 바탕으로한 홍산문화(紅山文化:BC 4000/3500~BC 2500)가 꽃핀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은 이들 요하 일대의 신석기 문화를 모두 광의로 ‘홍산문화’라고 일컫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만리장성 밖은 북적(北狄)과 동이(東夷)의 거주지로 그들 표현대로 야만적이었기에 괄호 속에 넣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될 경우 이 홍산문화 지역이 중화민족보다 훨씬 앞선 문명 집단이 되므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중요프로젝트를 세웠으니 바로 ‘중화문명탐원공정’이다. 이렇게 해야 단군에서 추모왕(주몽)에 이르는 ‘빛나는 세월’이 그들의 겨레붙이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이들 유적은 황하 유역의 앙소문화나 양자강 하류의 하모도 문화보다 1500년 이상 앞서는 신석기 문화로 그 끈이 고스란히 한반도에 연결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숨기고 있다.
중국은 고조선(古朝鮮)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들이 설치했다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또 근세에 태조 이성계가 국호를 ‘조선과 화녕(和寧)’가운데 선택해 달라고 하자 조선을 쓰게 했다는 이 ‘조선’이란 이름과 단군시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 지명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땅을 밟지 않고는 우리의 국사를 어떻게 정립해 나가겠는가?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가운데 4개가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선비-퉁구스’족 출신인데, 이들의 유산을 쫓아가 보면 우리와 똑같은 빗살무늬토기, 비파형동검, 고인돌 등이 존재한다.
홍산문화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다.
적봉에 접근하는 루트는 한국에서 북경이나 심양으로 가 그곳에서 열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편하다. 밤새껏 달려 아침이면 한자와 몽골어가 병기되어 있는 ‘적봉역’에 도착한다.
홍산문화는 이 붉은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적봉시가지를 북쪽에서 내려다보는 해발 746m인 이 산은 우리의 시조이신 ‘환웅천왕’께서 ‘신시’를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화하여 도읍의 시대를 연 그 신시라는 주장이 출토유물을 증거하여 꾸준히 주장되고 있다.
지금은 내몽고자치구인 적봉시 소재지다. 적봉시는 3구 2현 7기로 행정구분을 하고 있는데, 시의 면적이 남한과 비슷한 90021㎢, 인구는 357천명(2006)에 석탄, 철 같은 광물과 2차산업이 발달하고 있고, 약초와 농산물이 풍부하게 산출되니 옛 영화를 점쳐볼 수 있겠다.
홍산에 걸려있는 약속의 징표. 청춘남녀는 이곳에 와서 사랑의 맹세로 자물쇠를 채우고 소원을 적어 걸어둔다. 그 열쇠는 각자 나누어 보관하는데 사랑이 깨어지면 자물쇠를 연다. 우리는 이 산을 성전으로 꾸밀 수 있을까? 그렇게 하겠노라고 마음의 자물쇠를 채어두었다.
적봉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비파형 동검이다. 한국식동검이라고도 불리는 이 유물은 한반도에도 부여 송국리를 비롯한 각처에서 고루 출토된다. 악기 비파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런 동검은 고조선의 주력무기로 만주 일대에서 폭 넓게 발견되는데, 이 동검이 나오는 지역은 고조선의 강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홍산문화의 대표적 유물인 옥으로 만든 동물형상이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돼지다. 만주중부평야와 동부산림지역에 살던 동이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이 유물과 함께 출토된 쟁기 등은 농경과 축산을 증명하는데 이 형상은 점점 용(龍)으로 변해간다.
이 유물은 앞의 사진에서 진화해 가는 용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형상을 갖춘 최초의 용은 적봉과 이웃하고 있는 부신시(阜新市)의 사해유적에서 나온 용으로 지금부터 7천여년 전 층에서 발견 되었는데 돼지 코에 매 발톱, 사슴 뿔, 물고기 몸통으로 20여m에 가까운 돌 모자이크 용이다. 이보다 수 세기 앞서 만들어진 옥룡으로 홍산문화의 대표 유물이다.
소실점이 보이는 직선도로를 끝없이 달린다. 초원이다. 이 길을 네 시간이나 내질러도 겨레의 환영은 저 멀리서 날갯짓 하며 달아난다.
이 넓은 초원에 방목하는 양떼가 웅덩이에 고인 물을 마신다. 저 웅덩이 속에 우리의 뿌리 유물이 들어있다. 신석기유적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중국 당국은 아직 공식적인 발굴을 한 사례가 몇 건 없다. 출토 유물은 대부분 홍수 때 자연히 들어난 유물을 수습한 것이 대부분이다.
10. 이런 꿈을 꾸었다. 중국의 땅은 모두 국가소유다. 이 땅을 30년, 50년, 70년 단위로 임대한다. 이 초원지대 1백만 평을 50년 임대하는데 우리 돈 5백만원이라니 목 좋은(?) 초원에 철조망을 쳐두고 형식적으로 소나 몇 마리 넣어두고 야금야금 도굴이나 해볼까? 아니 우리 조상을 만나 볼까.
이 초원에 부는 바람으로 풍력단지를 조성하여 전력을 생산한다. 동행한 적봉시청 직원은 이 초원지대에서 나오는 풍력전기가 북경시내 소비전력의 2/3 이상을 감당한다고 한다.
초원지대에 솟아있는 점자산(點子山)에는 암각화가 있다. 점자산 암각화는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연대는 멀지 않지만 이 역시 우리민족의 이동경로와 문화적 동질감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울산 대곡리 암각화(국보285호)를 공부하면서 전 세계 1천여 암각화를 살폈다. 물론 우리 대곡리 암각화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걸작이다. 그런데 모두 정지영상이다. 유일하게 이 그림만 무사가 말을 타고 달리는 동적인 표현을 한 유일의 작품이다.
점자산에서 바라본 달래약이호수(達來渃爾湖). 바다와도 같은 거대한 이 호수 주변에 대왕묘를 비롯한 고조선의 유적들이 즐비하다.
아사합도석림(阿斯哈圖石林). 제4기 빙천기(氷川記)에 위쪽의 얼음덩어리가 내려오면서 바위를 깎고 이후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받아 이루어진 판 모양의 화강암이 퇴적되어 형성된 기기묘묘한 바위산이다. 해발 1700m 이상의 고산으로 약 5km²의 면적이 유네스코자연사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단군왕검이 도읍으로 정하고 다스렸다고 전하는 아사달(阿斯達)이 이곳이라는 학설이 꾸준히 재기되고 있다. 아직까지 전해지는 지명의 글자가 같고 고조선의 유물을 통한 이동 경로의 궤적이 여기까지 미친다는 분석이다. 적봉시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초원지대를 네 시간이나 달려온 먼 거리에 있다.
석림에 있는 칭기스칸 바위. 우리와 같은 혈통인 칭기스칸이 마치 침대처럼 생긴 이 바위에 올라 잠을 청했다는 전설이 있다.
초원에서 살고 있는 몽고족들. 주 이동 수단은 아직 말이며, 우리와 똑 같은 생김새에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말을 쓰고, 우리와 흡사한 씨름을 한다. 5월에서 7월까지 이 초원이 온통 꽃밭으로 변한다니 그들의 심성이 얼마나 고울까.
한밤 초원에서 조그만 음악회가 열렸다. 고산족 특유의 날카롭고 높은 음색의 노래를 부르는데 가만히 들으니 애절한 가락사이로 묻어나는 향수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해발 1300m인 이곳은 8월인데도 새벽 기온이 빙점에 가깝다. 기마민족인 이들은 이동에 편리한 ‘겔’이라는 천막형 가옥에 거주한다. 영화 ‘칭기스칸’의 촬영무대지다.
멀리 이곳까지 달려와 우정을 나누어준 적봉시 문물계사국장. 우리로 치면 문화재조사관리국장이다. 그는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울산처용문화제에 적봉시박물관장과 함께 찾아와 교류한 인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첫댓글 이런 중대한 오타가... 바로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