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같은 행로로 일본 여행을 다녀오신 분께서는 아래의 제 기행문 내용 외에 첨가하실 것이나
저와 다르게 보고 들으신 사항을 댓글로 올려주시면 서로 좋겠지요.
*제목 ‘동경맑음’은 국내의 일본전문 여행사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해당되는 사진을 보시면서 읽어야 실감이 날텐데요, 조만간 사진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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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맑음 1--센다이공항에서 출발한 오다이바, 아사쿠사 관음사 여행기>
이 정 미
꿈에 그리던 동경 여행 첫날. 딸하고 동행했다. 5월 28일 아시아나 항공으로 오전 10시 30분에 인천공항을 떠나 1시 경에 센다이 공항에 도착했다. 노랑풍선 여행사의 우리 일행은 공항을 빠져 나온 후 가이드 인솔로 4일간 여행할 전세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하필 첫날 첫 여행지로 가려는 순간 기사는 공항 버스 승차장소의 지붕을 들이받아서 경찰이 와서 확인하고 기사는 사인하느라 우리 일행은 한참 동안 버스 안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30분 넘게 차 안에서 지내야 했으니 우리 일행은 여행 첫 날 첫 지점부터 지체되니 자연 짜증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소한 접촉사고라도 모든 규정이 엄격하게 적용되기에 시간 절약하는 관광객을 태운 버스라도 예외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즉시 돈 몇 푼 집어주며 쉬쉬하면 끝난다고 했다. 타국에서 우리나라의 추한 점을 듣는 격이니 웬지 역겨웠다.
그날 숙소인 ‘블루웨이브인 아사쿠사’(관광호텔 수준) 근방인 ‘비너스 포트’와 ‘오다이바’로 가느라고 무려 4시간이나 거리 이동을 했다. 육체적 고달픔이 따르는 일정이지만 가이드 설명에 의존하는 패키지 여행의 장점을 만끽하는 시간이 된다. 우리 일행(이하 ‘일행’)은 차창 밖의 거리 풍경을 구경해야 했다. 동경으로 가는 길목인 농촌 풍경만 눈에 들어 왔다. 일본의 농촌 모습과 자연 풍경은 우리나라하고 다를 바가 없었다. 빈 들녘에 띄엄띄엄 위치한 기와집에 농기구, 공사장의 트럭 등이 보였다.
‘오다이바’는 바닷가에 매립된 도시로서 동경으로 가는 부(副)도심지인데, 페리제독이 대포를 설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담은 곳이다.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고 각종 놀이시설, 문화시설, 이벤트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도요타 자동차 전시장, 쇼핑가인 비너스포트, 뉴욕에 있는 자유여신상 모형이 있는 곳이다. ‘오다이바’에서 저녁을 먹고 비너스포트 쇼핑가를 둘러본 후에 차 안에서 야경을 구경했다.
드디어 피곤한 몸으로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지낼 숙소인 ‘블루웨이브인 아사쿠사’ 호텔에 도착했다. 바로 옆에는 다음날 구경가기로 한 ‘아사쿠사 관음사’ 사찰이 있다. 그 호텔은 동경 도심지에 있는데, 호텔 주변에는 주택가였다. 사찰 근방에는 ‘아사쿠사’ 지하철역이 있다. ‘아사쿠사’는 우리나라 인사동처럼 관광거리였다. 지나가다 보면 전통 여관으로 알려진 ‘료깐’(旅館)이 간혹 있다. ‘료깐’ 입구에 음식 메뉴가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곳에선 음식도 제공해 준다. 반갑게 우리나라의 다이소 같은 천원샵(‘100엔샵)이 두 군데 있었다. 그곳에서는 물가가 높다는 일본 실정을 느낄 수 없으니 제법 짭짤한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에 호텔 근방으로 산보를 갔다. 주택들은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흔히 보았던 전통적 적산가옥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문을 열면 바로 정원이나 마당이 있는 주택 형태가 아니라 문간방 창문과 함께 문패 달린 쪽문 같은 대문 한 짝만 달랑 있는 형태이다. 소박하고 아담해 보이는 집이다. 대문 앞에 야생화나 채소를 심어놓은 모습이 우리나라 도심 변두리 골목가의 풍경과 별반 다를 바 없었으나 정리된 듯 무척 깔끔하였다.
바라보기에 우선 편한 것은 골목길에 차가 아무렇게 주차되어 있지 않고 어김없이 정해진 주차공간에 놓여 있었다. 찻길과 병행한 보행자 도로가 좁은데도 가로수를 심었고 그 가로수 옆에는 온갖 꽃들을 심어놓았다. 보행자 도로와 골목길 마다 까마귀가 전신주를 옮겨다니며 정겨운 듯 깍깍 소리 냈다. 일본에선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까마귀가 길조이다. 상가와 주택가가 분리되어 있는데 당연히 주택가는 찻길 뒤편에 몰려 있다.
일본 상점에선 우리나라처럼 90% 이상이 중국산 물건이 많다. 상가를 다니다 보면 점원에서 서빙하는 사람까지 해서 일하는 노년층을 많이 본다. 일본에선 70~80대 연령층이 연금을 받아도 일할 수 있는 한도에선 일을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의식구조가 서양화되어서 자녀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 독립을 꾸린다. 젊었을 때부터 건강한 신체에 기술을 익히는 것이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국민의식을 가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 가정의 가장은 자녀들 교육을 위해 일을 하고 주부는 살림을 한다.
일본은 에도(江戶) 시대(‘에도’는 동경을 가리킴.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세운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의 시대)를 지나 메이지(명치) 시대에 개항을 하자 그 여력으로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국강병에 힘썼으며 청나라를 침범하고 우리나라(당시 ‘조선’)를 식민지 통치했던 것이다.
미국에 의해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인은 근대화 복구를 향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은 천왕을 받들어 모시는 국민 단결력은 대단하다. 기독교는 전인구의 5% 미만이다.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사 참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 날 ‘아사쿠사 관음사’절에서 목격했다. 주지하다시피, 천왕은 일본 국민의 정신적 지주일뿐, 실지 정치는 수상이 한다. 현재 군사력에선 북한을 앞서간다고 한다.
솔직히 동경의 모습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서울 도심지처럼 고층건물에 고가도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있는 정도였다. 가이드는 이런 생각을 짐작이나 했듯이 우리들이 일본 여행 가는 의미를 말해주었다. 볼거리는 별로 없는 나라이고, 관광수입이 주가 되는 나라가 아니라서 간혹 영어, 중국어, 한국어 표기를 병행하는 것 외에 해외여행객을 배려하는 특별한 관광정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매년 많은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비록 우리나라와는 과거에 원수지간으로 지내왔지만 우리나라보다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겪은 기성세대의 영향으로 가까운 일본을 알고자 하는 기념비적 행동에서 온 것이다. 더구나 우리 역사에서 일본과의 접촉에서 벌어진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역사를 보면 일본에 영향을 준 것이 막대하다.
일본은 또한 아시아 중에서 미국의 영향에 좌우되지 않고 유럽, 미국을 따라가며 독자적 문화를 창조하며 선진국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좋은 아이템이나 컨텐츠를 배울 만하다. 이 정도로 일본인은 자국에 대한 프라이드가 무척 강하다. 아시아 국가에 속하면서도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을 거부하고 서양처럼 합리주의 사고를 우선시한다. 형이상학적 학문추구는 고대에서 영토 통일을 위해서 영토분쟁했던 시대에나 유행했었다. 반면 현재 우리나라는 안정적 직업 갖기를 추구하며 형이상학적 학문을 숭상하는 편이다.
일본인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상인들 세계에서 돈만 모으려 하는 층을 ‘하수’로 치고 이름을 얻으려는 층은 ‘중수’, 마음을 얻으려는 층은 ‘상수’로 친다. 전문인일수록 눈앞의 물질 이익보단 명예나 신용을 남기는 층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이런 일본에선 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발달했는지 궁금했다. 더 자세한 일본인의 정서는 아마 문학을 통해서도 잘 드러날 것이다.
첫댓글 나도 일본을 여행했지만 여성성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섬세함이라든지 차분함, 이런 것을 느꼈어요. 일본이 강해진 것은 이런 것이 강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도 유재순의 <일본여자를 말한다>(창해,1998)에서 바로 그러한 설명을 본 적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