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전체 베네딕도회 21개의 연합회들 가운데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다. 오딜리아 연합회는‘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 도 ’ (intus monachus, forisapostolus)라는 표어를 기치로 하여 19세기 당시 교회의 선교적 요청에 부응하여 1884년 독일 보이론 (Beuron)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던 안드레아스 암라인 (Andreas Amrhein) 신부가 독일에서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으며, 2007년 현재 약 1000여명의 수도자들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정식 명칭은‘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이다. 보통‘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혹은 그냥 줄여서‘왜관 수도원’이라고 칭한다.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는 베네딕도 성인의 두 직제자로서 왜관 수도원은 이 두 분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왜관 수도원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이북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 수도자들에 의해서 1952년 7월 6일에 현재의 왜관에서 설립되었다.
2007년 3월 현재 총인원 140명 가운데 약 70명이 왜관 본원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각 분원, 본당, 수녀원 지도, 해외 유학, 그리고 선교지에 파견되어 있다.
왜관 수도원은 서울, 대구, 부산, 경기도 남양주, 미국 뉴튼, 전라도 화순 등지에 분원을 두고 있는데, 그 가운데 미국 뉴튼 수도원은 2002년 1월 25일에 왜관 수도원이 인수한 수도원이다. 이곳에는 현재 8명의 한국인 수도자들이 파견되어 생활하고 있다. 뉴튼 수도원은 2004년 1월 15일 원장좌 예속 수도원(Prioratus simplex)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성 요셉 수도원은 1998년 3월 19일 왜관 수도원의 분원에서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되어 현재 9명이 배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또한 2006년 11월 1일에 전라도 화순 지역에 새롭게 수도원을 설립하여 현재 6명의 수도자들이 수도원의 기반을 잡고 있다.
1. 역사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1909년 서울 백동(현재 서울 혜화동 가톨릭 대신학교와 동성 중고등학교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1)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1909-1927)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베네딕도 수도회는 1909년 서울 백동 낙산(山) 아래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1910년부터 숭공학교(崇工學敎)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11년엔 숭신학교(崇信學校: 현 동성 중ㆍ고등학교의 전신)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함경남북도와 간도(間島)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元山敎區)가 설정됨으로써 이 지역의 선교를 위촉받아, 1927년에 서울 수도원은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하였다.
2) 성 베네딕도 덕원 수도원(19271949)
1927년 덕원으로 이전한 수도공동체는 새 수도원을 건립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엔 수도원 바로 옆에 덕원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 수도원은 원산 선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 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서 본당 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 했다. 1940년 덕원 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밖에 덕원 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울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는 소련군이 수도원에 주둔하였고, 1946년에 실시된 토지개혁과 더불어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결국 1949년 5월 9일 수도자들은 체포되어 일부는 처형되고 일부는 포로수용소(옥사독)에서 사망하였다. 생존한 수도자들 가운데 독일인 수도자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자원하여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일부 한국인 수도자들은 월남하였다.
3) 성 베네딕도회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19281946)
1922년 5월 만주 간도지방이 원산교구의 관할 하에 들어감에 따라 한국인 신자들과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사목이 요청되었다. 이에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파견되어 용정을 비롯한 3곳의 기존 본당과 함께 연길 등지에 새로운 본당을 건립하였다. 1922년 12월 5일 설립되어 선교본부의 역할을 해오던 연길 수도원은 1934년 8월 1일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1934년 9월 5일 백 테오도르 브레어(Theodore Breher) 신부가 초대 아빠스 및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 수도원은 수도생활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사목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수도자들은 목공과 철공 분야의 일을 하였고, 인쇄소를 설립하여 소년잡지를 비롯하여 교리문답서, 성가집 등 교회서적을 인쇄, 보급하였다. 이곳에서도 본당사목과 함께 초등 교육기관의 설립은 중요한 선교활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공산당 치하에 들어간 연길교구는 즉시 선교활동이 제한되었고, 1946년 5월 선교사들은 체포, 투옥되었고 14개의 본당 가운데 몇 개의 본당만 한국인 교구신부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1949년까지 두만강 근처 남평수용소에서 수용되었던 독일인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앞서 석방되었던 백 테오도로 아빠스 주교는 1949년 12월 12일 본국 수도원으로 귀환한 후 1950년 11월 2일에 선종 하였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마지막 그룹은 1952년 8월에 만주를 떠났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에 속한 2명의 한국인 신부와 수사는 후에 만주에서 도망하여 간신히 월남하였다. 그들은 남한으로 피난하여 수도생활을 계속한 덕원 수도원의 한국인 수도자들과 합류하였다.
4)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1952현재)
1951년 미국을 방문 중이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크리소스또모(Chrysostomus) 총 아빠스는 이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에게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디모테오 신부는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한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도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디모테오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 식구가 크게 증가되고, 본당수도 증가되어 나아갔다. 1956년 1월 9일 왜관의 새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가되었고, 같은 해 대구교구장 서정길 주교로부터 이미 1953년에 위임받은 3개의 군(郡) 외에 또다시 3개의 군에서 사목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1955년 4월 1일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1960년 왜관에서도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 교회의 문서선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을 건설,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왜관수도원의 자 12일 본국 수도원으로 귀환한 후 1950년 11월 2일에 선종 하였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마지막 그룹은 1952년 8월에 만주를 떠났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에 속한 2명의 한국인 신부와 수사는 후에 만주에서 도망하여 간신히 월남하였다. 그들은 남한으로 피난하여 수도생활을 계속한 덕원 수도원의 한국인 수도자들과 합류하였다.
4)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1952현재)
1951년 미국을 방문 중이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크리소스또모(Chrysostomus) 총 아빠스는 이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에게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디모테오 신부는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한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도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디모테오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 식구가 크게 증가되고, 본당수도 증가되어 나아갔다. 1956년 1월 9일 왜관의 새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가되었고, 같은 해 대구교구장 서정길 주교로부터 이미 1953년에 위임받은 3개의 군(郡) 외에 또다시 3개의 군에서 사목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1955년 4월 1일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1960년 왜관에서도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 교회의 문서선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을 건설,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왜관수도원의 자급자족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장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4년 왜관에 세워진 피정의 집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서 한국교회에 큰 자극을 주어 그 후 많은 피정의 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도회에서는 그 후 1971년 부산과 1979년 서울에서도 각각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는데 서울 피정의 집은 동시에 신학원 구실을 하였다. 본당사목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1956년 6개 군에 8개의 본당에 불과하던 것이 1964년까지 12년간에 또 10개의 본당이 증설되었다. 본당 증설과 더불어 교회건축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베네딕도 회원들은 종래의 프랑스 선교사들처럼 단순한 벽돌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성당과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교회건축 발전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날 뿐더러 수도원 가족도 크게 늘어나 왜관수도원은 명실 공히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1964년 2월 17일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오도 하스(Odo Haas)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왜관 수도원은 완전한 자립 수도원이 되었고, 한국에서 확고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71년 4월 이동호 신부가 제2대 아빠스로 선출됨에 따라 베네딕도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85년 5월 또다시 이덕근 신부가 제 3대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1987년 3월 19일 서울 근교 불암산 기슭에 단순한 노동으로 기도생활에 전념하며 베네딕도회적 삶을 지향하는 성 요셉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995년 7월 12일 이덕근 아빠스가 수도원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김구인 신부가 1995년 8월 10일부터 2001년 8월 23일까지‘관리원장’(Prior Administrator)을 맡아 오다가, 2001년 8월 23일 이형우 시몬 베드로 신부가 제4대 아빠스로 선출됨으로써 왜관수도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지금 현재 2009년에 맞게 될 한국 진출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한국 교회의 발전과 공동체의 영적인 쇄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2. 수도원의 일상
하루가 크게 기도와 노동으로 짜여져 있다. 하루에 다섯 차례 성당에 모여 공동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오전, 오후 두 차례 각자 자신의 소임에 따라 일터에서 노동을 하며 생활한다. 그래서 흔히 베네딕도회의 모토를‘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고 말한다.
1) 기도
기도는 수도생활의 중심이며, 그것을 특징 짓는다. 비록 많은 다양한 일들과 활동들을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는 않다. 노동은 일차적으로 베네딕도 성인께서“자기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들이 되기 때문이다”(RB 48,8) 라고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수도공동체의 자급자족을 위한 것이다. 때때로 교회의 요청과 선교적 목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삶의 핵심인 기도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노동
베네딕도회 삶에서 노동은 기도 다음으로 중요하다. 수도 전통 안에서 노동은 몇 가지 차원을 띠고 있다. 먼저 금욕적인 차원이다. 베네딕도 성인은“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RB 48,1) 라고 말한다. 노동은 한가함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금욕적인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두번째는 실제적인 차원이다. 즉, 수도공동체의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베네딕도 수도원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끝으로 애덕적인 차원을 들 수 있겠다. 수도승은 노동을 통해서 얻은 결실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도 한다. 따라서 노동은 애덕실천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왜관 수도원에서 하는 일들은 상당히 다양하다. 먼저 대구대교구 내 대명동, 왜관, 석전, 약목, 신동, 낙산 등 6개 성당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구 베네딕도 수녀회, 부산 베네딕도 수녀회, 수정 트라피스트 수녀회에 신부를 파견하여 지도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 부산. 요셉, 왜관의 피정의 집과 손님의 집, 수도자 교육을 위해 기여해온 대구 대명동의 가톨릭 신학원, 서울의 가톨릭 교리통신교육회, 왜관의 순심 남녀 중∙고등학교 등을 운영함으로써 영성 및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아울러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성인 신자들을 위해서는‘봉헌회’을 운영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을 위해서는‘베네딕도의 벗들’모임을 하고 있다. 또한 요즘 성경을 인쇄하느라 분주한 분도 출판사, 영상 매체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베네딕도 미디어, 성당의 창문을 기도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장식하는 유리화 공예실, 제단에 사용되는 성작과 성반, 감실, 촛대 등을 제작하는 금속 공예실, 성당에 사용되는 의자와 제단 등 여러 가지 가구를 제작하는 분도 가구공예소 등을 통해 교회 문화예술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사업으로는 분도노인마을과 구미 가톨릭 근로자 센터를 운영하며 양로사업 및 노동사목에도 종사하고 있다. 한편 최근 공산국가들의 개방화 정책에 고무되어 과거 베네딕도회의 선교지였던 북한과 만주 등 북방선교에도 많은 관심과 사명감을 갖고 노력하고 있다.
작년에는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같은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의 뉴튼 성바오로 수도원에 왜관 수도원 수도승들을 파견하였고, 2002년 1월 25일 정식으로 왜관 수도원의 분원으로 인수함으로써 왜관 수도원의 대내외적 위상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또한 2006년 11월에는 광주 대교구의 요청으로 전라도 화순에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여 형제들을 파견하였다. 왜관 수도원은 현재 이런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나름대로 교회와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3. 양성과정
1) 견학기(6개월 이상)
수도생활은 하느님을 찾는 다양한 삶의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만일 누가 이러한 삶에 관심과 부르심을 느낀다면 지속적인 수도원 견학과 면담을 통해 성소를 식별한다. 수도성소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선 형제는 매년 9월경부터 가정방문과 입회에 필요한 기본적인 서류를 준비해서 11월 초에 공동체의 장상들과 최종 면담을 갖게 된다. 입회가 허락된 형제는 매년 1월 초에 수도생활에 입문하게 된다.
2) 지원기∙청원기(1년 이상)
수도원에 들어오면 지원기와 청원기를 보내게 된다. 이 기간은 수도생활을 배우기 전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들을 갖추고 또 자신의 수도생활에 대한 갈망을 키워 나가는 일종의 적응 및 준비 시기라 할 수 있다.
3) 수련기(1년)
지원기와 청원기를 보내고 병역을 필한 사람은 1년 간의 수련기를 통해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배운다. 이때 비로소 수도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을 받는데, 이런 의미에서 수도생활은 수련기와 더불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수련기를 수도원의 꽃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만큼 이 기간은 수도생활 전체 안에서 중요하다. 수련기는 수도생활의 기초를 놓는 단계이다. 만약 이때 기초를 잘못 놓으면 수도생활의 긴 여정을 항구히 걸어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수련기 때 올바른 수도 정신과 그에 따른 삶의 자세를 체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기간에는 공동체 안에서 수도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주로 수도생활 역사, 규칙서, 회헌, 전례와 기도, 성경, 관례 등을 공부한다.
4) 유기 서원기(4년)
수련기 말에 공동체의 투표를 거쳐 수련자는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 첫 서원을 하게 된다. 첫 서원을 흔히 유기 서원이라 하는데, 이는 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종신 서원과는 달리 일정 기간을 두고 봉헌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종신 서원을 할 때까지 4년간의 유기 서원 기간을 보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성소를 확인해 나가고, 수도원이 하고 있는 여러 사업에 투신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결정적으로 응답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이다. 아울러 이 기간부터 평수사 지망자는 신학원, 성직 수사 지망자는 신학교에 다니게 된다.
5) 종신 서원기
유기 서원기를 통해 자신의 수도성소에 대한 확신이 서고 또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면, 이제 하느님과 수도 공동체에 결정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게 되는데, 이를 종신 서원이라 한다. 종신 서원을 통해 죽을 때까지 하느님과 공동체와 함께 살겠다고 약속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이 된다. 종신 서원을 발한 형제 가운데 성직을 지망하는 형제는 부제품을 받고 그 후 적당한 시기에 신품을 받아 수사 신부가 된다.
4. 성소 모임 및 젊은이 피정
수도원 입회 자격은 최소한 6개월 이상의 견학기가 지났고, 가톨릭 세례를 받은 지 3년 이상이 되었고,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과, 만 30세 이하의 미혼 남성으로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성소 담당자와의 지속적인 만남 후 성소자가 입회 의사를 밝히고 이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입회에 필요한 절차를 밟게 된다. 이외에 예외적인 경우는 수도원장인 아빠스님의 사전 허락이 필요하다.
1) 성소 모임
- 본원 성소 모임 : 매달 첫째 주일 10시-15시
- 서울 성소 모임 : 매달 둘째 주일 14시-17시
이 외의 날에도 수시로 연락 후 며칠 씩 수도원에 머물며 수도생활 체험 및 성소 상담이 가능하다.
2)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
- 매주 셋째 주 토요일 16시-주일 15시(고등학생 이상 만30세 이하의 미혼 남녀)
3) 각 본당 청년회, 교사회, 청년 레지오 피정 : 주말을 이용해 1박 2일로 실시, 수도원에서 프로그램 운영, 원하시는 날짜를 정해서 미리 신청하면 된다.
4) 젊은이들을 위한 열린 미사(일일 피정) : 매달 마지막 주일 (누구나 참석 가능)
5) 수도생활 체험학교(1년에 4차례, 젊은이와 성소자들을 위해 실시)
[성소 문의]
(718-806)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134-1번지
0505-331-2323 / 019-9353-2323
5. 주소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
(100-391)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 54-1 / 02) 2273-6394~5
성 베네딕도회 부산 수도원(명상의 집)
(609-330) 부산시 금정구 오륜동 645-1/ 051) 582-4573
홈페이지 :
http://bundo.org
성 베네딕도회 대구 수도원(가톨릭 신학원)
(705-035) 대구시 대명 5동 289-2 / 053) 626-5001~2
성 베네딕도회 뉴튼 수도원
성 베네딕도회 화순 수도원
2006년 11월 1일 수도자들이 광주시 부근 화순으로 파견되면서 새롭게 시작된 성 베네딕도회 화순 수도원은 2007년 현재 수도원 건물을 짓고 있다. 기도하는 공동체로서 피정의 집을 운영하고 농사를 지으며 단순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그 지역 교회에서 필요한 일을 찾아갈 것이다.
(519-852) 전남 화순군 춘양면 석정리 61-2 / 061) 373-3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