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성나씨 선세고증◇
(壽城羅氏先世考證)
★성씨편(한국인의 족보)에 금성나씨는 원래 중국 축융씨의 후예 인 隕(운) 성 이었으나 춘추시대 에 羅 國 에 봉 해짐으로 나씨로 되었다. 그후 주공이 한고조 에게 공이 있어 예장군에 封(봉)해진뒤 예장 나씨로 되었다가 당태종 때 이르러 상서좌복야 인 나지강(羅至强)이 고구려를 정벌 하자는 정의(중국조정의 논의)를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발라현(나주)에 정착한 후 신라조 에서 좌승상에 이르렀다.신라 효공왕때 후손 나경(羅璥)이 나주사찬으로 봉 해지고 관(貫)을 나주로 하였으나 고증이 실전되어 소목계통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초에 삼한벽상 일등공신인 나총예(羅聰禮)를 시조 로하여 계세(繼世)되고 있다.나주에는 나성을 쓰는 두가지 성이 있었는데 나총예를 시조로하는 나씨 외 나부(羅富)를 시조로하는 나씨는 여황 나씨라 하였는데 고려 성종때 여황현이 나주로 소속 되면서 나주로 개관하여 관을 같이한 이종이 한주에서 수백년 세거하다가 나총예를 시조로한 나주나씨는 영조때 무신흉변의 화를 면하려고 나주의 고호가 금성이고 시조가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음을 연유하여 금성으로 이관 하였다.그러나 나총례의 후손이면서 나주와 격조했던 각처에 산거한 나씨중 지금도 관을 나주로 쓰는 계통이 있고 또수성 안정 상산 군위 등으로 분관하여 이어지고 있다.
◇만보통락 에 수성나씨는 고려조 예부시랑 나위(羅緯)의 후손이라 하였고.
◇삼반성휘 에도 수성나씨는 수성부원군 나총예의 14세손인 수성군 나위(羅緯) 의 후손이라 하였다.
◇금성나씨는 고려 삼한벽상 삼중대광 수성부원군 나총예의 후손이시고.
◇수성나씨는 금성부원군 나총예의 14세손 예부시랑 나위(羅緯)를 중시조로 하고있다
수성나씨 종친 여러분 이해하는대 도움될까 해서 올렸습니다.
글 수성나씨 세보 에서.
-종현-
출처 수성나씨첨추공파인터넷종친회
첫댓글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770년에서 기원전 221년으로 봅니다.
이 때를 동주시대라고 하는데 주나라가 수도를 서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주시대 이전에 하나라 은(상)나라가 있습니다.
나국은 서주시대에 양양시에 존재해 있었습니다.
성은 공손성, 희성, 축융으로 있다가 마지막으로 웅성으로 존재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양양에 거하던 때입니다.
그러다가 초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하고 지강으로 옮겨 집니다.
이때 나국인들은 나나라를 잊지 못하여
웅씨에서 나씨로 이국위씨(以國爲氏)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초나라의 한동제국 통일 후 남하정책으로 장사지방으로 이동하고
그 후 나주공이 장사에서 남창시 예장으로
성을 쌓고 예장수를 심는 등 공을 세운 연유로 해서
예장나씨를 하사받게 됨.
그런데 한국나씨는 나주공께서 예장나씨를 받기 전에
기원전 221년경에 한반도로 대거 이주해서 진한과 변한지역에
나국으로 무리를 지어 살았다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
중국 초나라의 나국 지방은 쌀농사, 수메르문명은 밀농사, 홍산문명(만주지방)은 조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역사는 고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한반도의 나국인들은 진한, 변한 혹은 탐라국에
거하면서 쌀, 보리농사를 짓다가 흉노족 진한족, 대표적인 것이
박혁거세에게 밀려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잡다한 농경문화 나국들을 쓰리모아
새로운 나국 신라를 만들어 국호를
삼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현재의 금성, 나주 안정, 경주, 밀양, 의성 등등 그 본들이 다른 것은
고증이 없으니까 선계를 잇지 못할 뿐 그 뿌리는 바로 하나입니다.
이제야 이 선세고증을 읽었습니다. 몇 가지 의견을 드립니다.
나총예는 총례로 써야 맞습니다. 두음법칙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원음 례로 써야 합니다.
다음 금성부원군 나총례입니다. 나주로 본관을 받았다는 선조들의 기록과 이관에 대한 주장들이 제가 연구한 바로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 한반도로 최초 유입한 선조들과 신라때부터 사용한 본관과 변천과정은 계속 연구되어할 분야로 인식됩니다.
위공(순공)이 언제 수성군이 되었는지 족보상 기록은 없으나 삼반성휘에 있다고 하신 것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끝에서 두번째줄에 수성부원군 나총례는 금성부원군으로 수정되어야 하겠군요.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