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사도적 복음을 열망하는 그리스도인 대화방
 
 
 
카페 게시글
산상수훈 스크랩 마태복음의 지시성과 수사학
꿈속의 언어 추천 0 조회 552 17.12.08 08: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태복음의 지시성과 수사학 (Reference and rhetoric in the Gospel of Matthew)

베르나르트 꼼브링크(H. J. Bernard Combrink)

송영목(고신대학교회) 역

 

 

 

 

요약:

이 글은 마가복음의 네러티브가 주로 의사소통을 위해서 ‘수사학적 축' 위에서 기능을 하는 반면에, 마태복음의 네러티브는 기본적으로 설명하고 지시하는 ‘모방의 축' 위에서 기능을 한다는 견해에 대한 반론이다. 비록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수사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들이 있으나, 마태복음의 수사학을 마가복음의 경우보다 더 지시적인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마태복음 안에서 수사학적 특성이 약해지는 것을 발견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야기의 서술에 사용된 다양한 수사학적 기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수사학적 읽기 역시 본문의 언어적 힘을 고려해야만 한다.

 

1. 문제제기

문학의 해석과 신약의 해석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하나의 문제는 본문의 지시성에 관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하나의 극단적 입장은 본문을 언어 너머의 실제 세계에 관한 메시지로 보는 것이다. 이 ‘실제적인 견해'는 문학작품을 단지 하나의 문서로 축소하는데, 모든 강조점은 모방(mimesis)의 측면에 모아진다. 다른 극단은 세계에 대한 지시를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것인데, 언어의 관계적 차원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본문은 단지 의사소통의 대상 혹은 수단으로 취급된다. 이 ‘관계적 입장'은 창조(creatio)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하나의 문학작품과 본문을 단지 예술작품으로 축소시킨다.

 

성경연구의 비평이전 국면에서는 본문을 읽을 때 본문의 실용주의적(pragmatic) 혹은 수사학적 강조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면, 비평적 읽기(critical reading)는 본문의 지시성과 성경 네러티브의 결과적인 상실(eclipse)에 관심을 보였다(Frei와 관련하여 Fowler 1986:4).

그러는 동안, 문학 연구는 모방이 가지는 묘사적인 미적 감각 연구로부터 본문의 단어에 대한 창조적인 몰두로 옮겨졌다(예. Roland Barthes의 작품).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강조는 스스로 너무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성경연구에서 이런 경향은 구조주의 연구에서 나타났는데, 그들은 성경본문의 문학적 특성과 네러티브 연구의 통찰력을 성경의 네러티브 연구에 적용하려는데 관심을 보였다(cf. Combrink 19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는 다시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라프(Graff 1979:196f)는 문학의 지시적 기능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규정(conventions)은 상황을 필요로 하며 지시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자기 지시성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를 포기했지만 이것은 여전히 유효한데, 이유는 단어가 지시를 위해 사용될 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놀이에서도 사용될 수 있고 다양한 화행(話行; speech acts)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단순히 묘사하거나 지시하는 것 이상임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신약의 언어는 설명적인 기능뿐 아니라 감정을 움직이는 호소와 수사학적인 기능도 가진다(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이점과 관련하여 그것의 두 축(설명하고 지시하는 ‘모방의 축'과 의사소통을 위한 ‘수사학적 축')과 더불어서 헤르난디(Hernandi 1976)의 모델은 아주 유용하다. 그는 언어가 이 두 축과 더불어서 기능함을 분명히 한다. 몇몇 화행은 주로 수사학적 축과 더불어 작용하지만 설명 혹은 지시를 주목적으로 하는 화행도 있다는 것이다.

포울러(Fowler 1986:12)는 흥미롭고 고무적인 자신의 글에서 언어는 지시하는 역할 이외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두 번째 주장은 마태가 마가복음을 개정한 것은 공관복음 안에서 지시로서의 의미를 향한 첫 단계로 보는 것이다. 포울러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주로 언어의 수사학적인 축을 따라 기능하는 반면, 마태복음은 모방적인 축을 따라 작용하며 마태는 지시에 더 관심을 두고 정보를 제공한다(1986:13). 세례와 빈 무덤이라는 두 가지를 예로 든 후,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1986:14):

 

마태는 주로 언어의 수사학적 축을 따라 작용하는 마가의 네러티브를 취하여, 그것을 역사와 같은 설명적이며 실제적인 네러티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주로 설명의 축을 따라 기능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단지 세례와 빈 무덤을 예로든 증거에 근거한 이 결론이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포울러(1986:13)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에 의한 진술은 정세(a state of affairs)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시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때, 이러한 진술은 우선 그 네러티브의 상호본문(co-text)과 그 네러티브의 단계에 있어서 네러티브 세계 안의 정세에 비추어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포울러(1986:15) 역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 못지않게 수사적임을 인정한다:

 

그들 (마태와 누가)은 다소 상이한 수사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실제적인 네러티브를 사용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매력적이고 눈길을 끄는 수사학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이 간접성의 수사학적 성격을 띤 감정을 움직이는 네러티브로 보이는 반면, 마태복음은 지시의 수사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지시적 네러티브이다. 이 두 복음서들은 그들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동일한 소망을 가지지만 그들은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포울러 1986:15f). 이것을 화행이론의 용어로 설명해보면: 비록 두 복음서의 화법이 동일할 수 있으나, 그들의 발화의 힘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포울러가 그의 글을 결론 맺을 때 마태복음이 공정한 취급을 받았느냐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1986:16):

 

··· 적어도 하나의 주요 성경 네러티브인 마가복음의 실추, ··· 그리고 지시로서의 의미의 궁극적인 승리를 향한 느린 행진은 마태가 마가복음을 다시 고쳐 썼을 때 이미 잘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마태의 수사학이 정당하게 평가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안의 지시의 현상 역시 방해받는다. 따라서 지시와 수사학의 문제를 더욱 철저히 다루는 것이 필요하고, 산상설교를 예로 들어 몇 가지 측면의 관점에서 이 토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2. 지시

본문의 자기 지시성에 관해서 문학비평이 일방적으로 연구해 온 경향은 다양한 방식으로 촉진되었다. 로트만(Lotman)의 문학의 지시성에 관한 이론은 창조와 모방으로서의 문학에 관한 균형 잡힌 견해를 위한 하나의 중요한 공헌이다(Bowker 1983:14). 더 나아가 그는 주장하기를 (1977:32):

 

··· 문학에 관한 구조주의와 기호학적 연구가 작품의 내용, 의미, 사회-윤리적 가치 그리고 그것의 실재와의 연결에 관한 질문을 무시한다는 주장은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또 다른 기여는 볼프강 이저(W. Iser 1980)의 독자반응비평이다. 그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고려함에 있어서 로트만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저(Iser)의 본문 안의 실재에 대한 정확한 상응의 부재라는 비결정성의 개념에 의하면, 본문은 사고체계의 복제나 실재의 모델이 아니라, 선택되어 자신의 레퍼터리 안으로 통합된 사고체계에 대한 반응이다(1978:72). 독자는 본문의 레퍼터리와 상호 작용함으로써 본문의 의미 혹은 지시를 형성한다; 그 다음, 의미는 자신의 존재 속으로 본문의 지시를 흡수함으로써 의의로 전환된다(Iser 1978:151):

 

이저의 레퍼터리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그 당시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실재를 보다 충분히 경험하도록 하며, 독자의 후 세대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실재를 파악하도록 하는 문학의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글 밖에 있는 세상에 관한 지시를 가진 문학의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기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Bowker 1983:26).

 

언어모델로서의 문학의 한계도 화행의 개념을 포함한 행동모델로서의 언어에 의해 조명되어져 왔다(cf. Walhout 1985). 이 접근에 의하면 본문은 본문 너머의 세계에 관해서 무언가를 의사 전달함이 분명하다. 언어가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본문의 의미는 본문의 내적 구조 및 관계들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본문이 발생하고 기능하는 상황과도 관련 있다는 사실에 대해 더 많이 인식되고 있다(cf. Combrink 1988).

그러므로 문학이론 안에 지시성으로부터 문학과 기호학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세계와 분리된 문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본문과 실재 사이의 지시성은 문학과 성경연구에 있어 매우 적절함이 분명하다. 최근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이 문제의 개념은 변화되어 왔다.

 

질문은 더 이상 어느 정도 본문과 실재 사이에 적합성이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본문이 어떤 방식으로 실재를 설명하는가이다(Lategan & Vorster 1985:1).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문학과 실재 사이의 관계는 오직 하나의 ‘기호(sign)-기의(signified)'라는 고정된 양극적 관계라는 명제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호(sign)-지시대상(referent)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명제로도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도식이 연결된 관계를 아주 단순화시키기는 하지만 적어도 기호학의 삼각형의 몇 가지 형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한다: ‘기호-기의-지시대상'(Eco 1979: 58ff).

출발점은 언어란 실재에 대한 수동적인 거울이 아니라, 간(間) 세계(Zwischenwelt), 즉 문화적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의 비전으로서 기능한다는 원리이다. 이 중간 영역(간 세계) 속에 사회-문화적으로 고정된 내용과 개인적 정보 또는 주관적 개념의 가변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Pagnini 1987:95). 이 중간 기능은 대상을 속속들이 규명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대상을 조직화하고 그것의 비전을 구성한다. 환언하면, 언어는 실재를 조직화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고 완전한 조직화가 아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 언어는 항상 실재의 관점에서는 불충분하다. 지도는 항상 그것이 지시하는 영토의 관점에서 보면 불충분하다(Pagnini 1987:100).

 

본문의 지시적 측면 즉 무엇을 반영하는 실재의 기능 역시 본문의 자율성을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의 비유 안에 있는 기호(signs)는 내적으로 그 비유의 네러티브 세계를 언급한다는 것이 인정된다. 이것은 또한 복음서 전체에도 적용되는데, 네러티브가 성격묘사, 플롯, 그리고 다른 네러티브 고안 장치에 의해서 네러티브 세계의 형식 안에서 실재를 재형성하기 때문이다(Vorster 1985:60). 이점에 관해서 파그니니(Pagnini 1987:104f)가 제시한 모델은 본문의 개념적 차원 혹은 하나의 네러티브의 네러티브 세계가 본문의 외부 실재를 지시할 수 있는 삼중방식을 명료화하는데 빛을 준다.

 

S2-(S3)·································(A1-A2)

 

Z3

S1 R...n

 

Z1 Z2 E

 

S1 = 외부 저자(발신인 1)

S2 = 내재된 저자(발신인 2)

S3 = 두 번째 해설자-가끔 존재함 (발신인 3)

A1 = 내부 수신자-가끔 존재함

A2 = 예상된 내부 수신자(A1과 동일시 될 수 있다)

R...n = 외부 수신자

Z1 = 표준 언어의 개념적 차원

Z2 = 자연세계의 기호학적 체계의 개념적 차원

Z3 = 작품의 개념적 차원

E = 문화적 체계의 관점에서의 실천적(empiria), 주변적 경험

(언어적, 그리고 비언어적)

 

작품의 개념적 차원(Z3)이 삼중적 방식 안에서 Z1, Z2, 그리고 E를 지시하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따라서 작품의 개념적 차원은 그것이 실재를 반영하거나 모방하도록 제안할 때조차도 실재에 관한 직접적인 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문학의 지시적 차원이란 일상 언어의 구조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계획과는 다른 세상을 구조화(의미화)하기 위한 제안 혹은 계획이다. 결과적으로 그 차원(Z3)은 사물의 새로운 경험이 된다(Pagnini 1987: 106).

 

하나의 작품의 개념적 차원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물의 새로운 경험의 차원은 본문 앞의 새로운 지시적 지평을 불러일으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 폴 리꾀르(1975)에 의해 사용된 실재에 관한 재 묘사의 개념과 관련되며, 또한 이 차원은 기호(signs)의 기의(signified)는 사회-문화적 상황의 언어 외적인 상황과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가 결정된다는 사실과도 연관 된다(Pagnini 1987:102). 따라서 마태복음과 같은 작품의 지시성은 이 복음서의 수신자나 독자의 사회-문화적 세계와의 관련성과 밀접히 연결된다. 네러티브 본문의 의사소통적인 성격은 혹자가 본문은 예수님의 삶의 중요한 사건이나 가르침을 복제하거나 단순히 보존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을 때 완전히 오해된다.

적확하게 이것은 인식하기에 아주 친숙하지만 초청하기에는 아주 다른 하나의 세계를 묘사하는 네러티브의 설득하는 힘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복음서 기자들이 사용한 네러티브 형식이다(Lategan 1985:92).

 

지금까지 논의된 것은 포울러의 결론, 즉 마태가 마가를 재(再) 기술한 것은 네러티브의 상실 및 수사학적 축에 근거한 의사소통 안의 의미 대신에 지시로서의 의미를 향한 움직임의 시작으로 귀결되었다는 결론에 대한 문제제기의 배경이다. 마태복음의 기호(signs)는 우선 내적으로 네러티브 세계를 지시한다. 그러나 기호가 본문 외적 실재를 지시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된 것처럼 간접적인 방식에서 그러하다. 사실, 마태가 언급하는 방식은 앞으로 더 설명되겠지만 매우 수사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으로 지시를 다룰 때 본문과 그 너머의 실제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은 중요하게 남아있다. 마태복음 본문의 자율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 각각의 서술은 인물과 행동을 통해서 그 자신의 네러티브 세계와 상황을 창조한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하는 것, 그리고 이 네러티브 세계가 실제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마태복음이 실제적으로 공상적인 본문임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음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불가피한 결론이 아닌가?:

플롯의 시간의 경과, 위치, 인물의 성격, 그리고 더 넓은 환경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단회적인 실재인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복음서 안에서만 일어나는가?(Dormeyer 1978:83).

 

본문과 본문 밖의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월호트(Walhout 1985:48f)는 본문의 저자의 역할과 역사의 상황 안에서 본문을 형성함에 있어서 저자의 의도와 행위를 강조한 것은 적절하다(또한 Du Plessis 1984:87을 비교해 보라). 이 점에서 그가 지시와 모방 사이를 구분한 것도 중요하다. 지시가 본문의 언어와 언어에 의해 반영된 세계와의 관계와 관련 있다면, 모방은 본문에 의해 반영된 가상적 세계와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와의 관계와 관련 있다(Walhout 1985:52).

역사적 본문에 관해 논의하면서, 월호트는 가상적 본문과 역사적 본문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유사한 것은 양자가 세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이지만, 공상적 본문과는 달리 역사적 본문은 가상적 혹은 상상의 세계를 반영하지 않고 실제 세계에 관한 주장을 위해 사용된다(1985:69). 문학작품의 경우에서도, 본문 너머의 세계에 관한 주장이 비록 항상 그런 작품의 구조에 중심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주제에 의해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주장에 의해서 계획된 작품들이 있다(Phelan 1984:362f). 공상적인 입장의 소설가와는 달리, 역사적 본문의 저자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며

··· 저자의 관점과 더불어 본문이 투사하는 세계는 이야기와 사건의 해석을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간주한다(Walhout 1985:69).

 

우리가 성경 네러티브 안에서 네러티브 세계를 만난다는 사실은 이런 본문들을 공상적인 본문으로 보도록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본문의 종류에 관한 우리의 결정은 묘사의 정확성, 저자의 관점, 그리고 독자에 의한 본문의 사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Walhout 1985:73; cf. Schenk [1989]:5, 14). 따라서 본문에 관한 참된 역사적 관심은 본문의 과거성(pastness)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고, 특별히 현재에 새로운 본문의 가능성을 인식하도록 하는 격려를 찾는데 관심 있다(Lategan 1985: 25).

성경 네러티브에 관한 역사적 관심이 부인될 수 없다는 주장 속에서, 본문의 언어에 의해 반영된 네러티브 세계에 관한 사실은 무효화되지 않는다. 스턴버그(Sternberg)는 성경의 네러티브를 규정하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지적한다: 이데올로기적, 역사-서술적, 그리고 심미적(1985:41).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세 개의 규정적인 원리가 하나의 작품(poetics) 안으로 모아지는 성경 네러티브를 구성하도록 한데 모아지고 상호작용한다. 이 방식으로 실제 사건의 세계의 반영은 또한 이데올로기적(신학적)이고 심미적인 구성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Sternberg 1985:45f).

3. 수사학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 분명한 것은 지시성과 수사학은 상호 배타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헤르난디(Hernandi)의 모델 안에서 본문의 이 두 차원은 의사소통의 두 기본적인 축을 형성하는 것이 분명하다. 움베르또 에코(Eco 1979:277f)는 수사학이 주로 청자에게 정서적이며 실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중점을 두는 수사가들의 고전적 견해와 인간의 거의 모든 추론과 대부분의 담론 형식은 (명백한 담론을 제외하고) 수사학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신(新) 수사학 사이의 차이점에 주의를 기울인다(Pelman 1969).

앞 장에서 지적된 것은 본문이 지시하는 방식이 그 자신의 개념적인 차원과 작품(poetics)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담론의 수사학(저자가 그의 동시대인과 그의 현대의 독자들과 의사소통하는 전략)과 담론 안의 수사학(네러티브 안의 인물들이 네러티브 안의 그들의 청자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전략) 사이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하다(Sloane 1984:799f). 지난 2-3세기 동안 관습적으로 되어버린 ‘수사학'이란 말이 경멸적인 의미로 이해되지 않을 때조차도, 매우 자주 수사학은 한정적인 의미로 단지 문체를 다루는 것 혹은 수사학적 비유나 말의 수사를 다루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런 의미에서 수사비평은 문학비평과 불가분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히려 수사학은 재 고안된 수사학 혹은 재평가된 수사학으로 여겨져야 한다(cf. Wuellner 1987:453).

뷰얼너(Wuellner 1988:284, 288) 역시 독서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지시성의 손상과 지시성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수사학으로부터 지시성을 구분하는 것에 대한 미심쩍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본문과 실제 세계 사이의 주요 이슈는 본문성(영향연구, textuality)이지 지시성이 아님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의 본문성(영향연구, textuality)으로서의 (하나의 본문의 수사적 구조뿐만 아니라) 수사적 구조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독서의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Wuellner 1988:285f, 301f, 305). 이것은 이야기 또는 네러티브 차원뿐만 아니라 해설자의 담론 차원과 저자의 차원과도 관련 있다. 수사비평은 특별히 본문의 힘을 강조하는 본문의 설득적인 면을 강조한다(Kennedy 1984: 158). 마태복음의 경우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마태복음 안에서 수사학과 지시성이 분리되는 현상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은 아래에서 충분히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의 수사학적 읽기의 모든 측면을 철저히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이 단계에서의 관심은 몇몇 적절한 측면, 특히 마태복음과 산상설교 안에서의 팔복의 기능에 집중될 것이다. 이 방식으로, 나는 단지 마태복음의 수사학적인 읽기가 책임성 있는 독서임을 구체화하기 원한다(cf. Th- iselton 1985:107).

수사학에서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수사적 상황이다. 이것은 역사적 상황과 구별되어야 한다. 수사적 상황은 특별히 상황의 긴급성, 논지의 요점(stasis), 이루어질 사건의 기본적인 이슈를 다룬다. 반응은 수사학적 상황에 의해 조건 지어지며 인물, 사건, 목적, 관계, 시간, 그리고 장소와 관련 있다. 브린튼(Brinton 1981:236, 239, 246)은 수사적 상황과 수사적 행위 사이의 관계가 주로 규범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즉 한 특정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적합한 반응. 따라서 긴급성은 외적인 관계와 연관된다.

적합한 반응은 수사학의 세 가지 장르 중 하나의 형식을 취하도록 한다: 법정적, 심의적 혹은 예전적 수사학. 수사학의 적용의 주야 분야는 고대 헬라와 로마의 법률적, 그리고 정치적 수사학이지만 (특별히 설득에 의해 특징지어짐), 특정한 종교적 수사학도 중요한데 이 경우 중요한 특징은 권위적인 선포이다(Kennedy 1984:6).

수사적 상황과 관련된 한 가지 더 깊은 측면은 본문을 강조하는 주제(topoi) 혹은 공통소재(loci communes)인데, 서로 대적하고 있던 바울과 유대인 모두에게 성경은 중요한 것이었다(Kennedy 1984:20; Bouwman 1980:69f).

다른 중요한 요소들은 동원된 수사학적 기교와 문체뿐만 아니라 본문 안의 자료의 특성 혹은 배열 그리고 본문 안의 세분화이다. 수사학에서 화자가 자신의 논의를 통해서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는 청중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에 있어서 단지 하나의 규칙이 있다: 그것의 성격이 무엇이건 간에 청중에게 행하는 연설의 각색이다. 내용과 형식 속에서 어떤 환경에 적합한 논쟁은 다른 상황 속에서는 우습게 보일 것이다(Perelman & Olbrechts- Tyteca 1969:25).

 

마태복음의 논쟁은 특정한 청중을 염두에 두고 각색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를 들어, 예언의 성취에 대해 유명한 강조와 행해져야 할 율법의 요구(마 7:13-27)로부터 추론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바, 저자의 역할과 그의 발화와 화행은 다시 연구의 항목이 된다는 사실로부터, 릭만(Rickman 1981:105) 역시 수사학에서 화자(저자)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중요하다. 그는 설명하기를(1981:118):

 

수사학이 화자의 관점으로부터의 의사소통의 과정에 관한 것이라면, 해석학은 청자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사실들이 오직 네러티브의 수사학에 의해 들려질 수 있다는 사실과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Booth 1974:186; Wilder 1983:353).

4. 마태복음의 수사학적 읽기

이미 여러 번 연구된 것처럼, 헬라어와 헬라 문화가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 얼마나 설득적이었던가! 아마도 좀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의회, 집회 혹은 법정에서 설득의 기교가 성공적으로 작용하도록 했던 헬라의 교육이 팔레스틴의 도시에서도 영향을 미친 정도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매우 결정적인 헬라의 영향이 수사학적 쟝르나 기교뿐만 아니라, 법에 관한 지식, 불문율적 해석에 관한 지식, 그리고 미쉬나 안에 구체화된 토라의 적용과 해석적 기술, 이 세 중심적인 관심에 초점을 둔 그 당시의 히브리 교육의 환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Kinneavey 1987:82-91). 헬라 수사학적 쟝르의 많은 전형적인 특징들이 유대전승과 히브리 시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랍비학파들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헬라의 수사학과 법률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

헬라시대의 팔레스틴의 학파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그들이 엄청나게 헬라 교육의 영향 하에 있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법률과 수사학 영역에서는 헬라교육이 자유도시국가의 헬라학교와 학교와 회당의 중등 및 고등 교육이 시행된 히브리학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마태복음의 저자와 독자는 수사학의 사용이 기대되고 이용되었던 상황 속에 살았음이 분명해 진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된 것처럼 재평가된 수사학의 개념과 일치해서 마태복음 안의 수사학 뿐 만 아니라, 마태의 수사학에도 관심이 주어져야 한다.

지면상 마태복음의 구조와 배열을 상세히 다룰 수 없다. 여기서 마태복음의 교차대칭구조(예수님의 다섯 강화에 기초해서)는 네러티브 플롯의 직선적 전개와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cf. Combrink 1983). 예수님의 다섯 강화가 네러티브의 복잡한 부분(complication; 4:18-25:46)을 둘러싸고 있음이 고려되면(다른 견해를 위해서는 Kings- bury 1975:25를 보라), 예수님의 첫 번째 주요 강화인 산상설교는 마태복음의 중심부를 여는 표제적(programmatic)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관점으로부터 볼 때, 산상설교의 서론 역할을 하는 팔복은 마태복음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하나의 연설 속에 다양한 수사적 논쟁과 형식이 지적될 수 있지만, 산상설교는 심의적 연설이다. 하나의 형식은 가변적인 길이의 단위들을 포함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Robbins 1985b:149). 연설의 긴급성은 본문 외적인 요소로부터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네러티브의 플롯으로부터 추론되어야 한다.

네러티브의 배경(1:1-4:17) 다음에 등장하는 복잡한 부분(the compli- cation 4:18-25:46)은 예수님이 네 형제들에게 주님을 따라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위임하심으로(4:18-22)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려는 네러티브 프로그램을 가정하신 예수님의 공생애 중 첫 번째 에피소드와 더불어 시작된다. 이 사건 직후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사역의 포괄적 형식은(inclusio 4:23과 9:35) 주님의 첫 번째 치유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그 뒤의 장들(5-9장)과 연결시킨다(cf. Kingsbury 1988:59). 이제 산상설교는 이 사람들 즉 자신의 병으로부터 치유 받았던 사람들과 치유 받는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름 받은 제자들 모두에게 조언을 준다(마 8-9).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나라를 선택한 완전히 새로운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 듣는다.

마태복음 7:24-27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네러티브의 이 단계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는:

 

··· 헬라 철학용어로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askein kai meletan)이라 불리는 것을 격려하고 주장하기 위함이다(Betz 1985:10).

 

베츠(Hans Dieter Betz)는 산상설교의 문학 쟝르는 개요(epitome)인데, 체계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의 신학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985:12). 이 개요는 더 큰 부분의 체계적인 요약으로 역할을 하는데, 외부인이나 초보자를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그 체계의 주요 원리 속에 이미 진척중인 사람을 위해 학습의 과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상설교는 순종해야할 율법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용하고 내면화하여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며 실행하기 위한 신학이다(Betz 1985:15).

 

아직도 산상설교의 구조에 관해서 학자들 가운데 완전한 합일이 없다(cf. Bornkamm 1978; Allison 1987:427). 케네디(Kennedy 1984:24)에 의하면 심의적 구조는 대개 법정적인 것의 단순화된 표현이다: 서론, 명제, 증명, 그리고 결론. 산상설교 안에 이 구조는 다음과 같다.

 

5:3-16 서론: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킴

5:17-20 기본적 명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심

5:21-7:12 명제의 해석

7:13-27 결론

 

산상설교의 서론인 팔복 안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박해를 겪을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5:10-12). 이것은 수사적 상황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암시한다. 강조점은 마태복음 5:17-20이 보여주는 것처럼 대조가 아니라 전통과의 접촉점과 연속성에 놓여있다(Van Tilborg 1986:5). 이것은 ‘가능한 반대'(prokatalepsis)를 기대하도록 하는 전형적인 수사학적 특징이다.

수사적 상황은 결론(7:13-27)에 나타나는 엄한 경고에 의해 더욱 두드러진다. 결론은 대개 연설의 명제를 요약하며 청중으로 하여금 실천하도록 한다. 케네디(Kennedy 1984:62)가 결론을 7:21-27로 한정했지만, 마태복음 7:13로부터 시작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Nicol 1977:85). 청중은 이미 서론에서 임박한 박해에 대해 경고를 받았다. 이제 결론에서 그들은 다시 안전한 중도적인 길이 없음을 경고 받는다. 이 엄격한 경고는 임박한 박해의 바로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이 거짓 예언의 위험과 주님의 시험을 겪음 없이 참 제자가 되려는 위험에 빠지기 쉬움을 강조한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 수사학적 상황은 수사학의 심의적 형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팔복은 예전적인 방식으로도 작용한다.

 

팔복은 자격을 기린다는 점에서 예전적인 요소이지만 연설의 시작에 위치한 팔복의 위치는 서론으로 역할할 것을 요청한다; ··· 서론은 규칙적으로 예전적인 성격을 보인다(Kennedy 1984:45).

 

버거(Berger)는 팔복을 연결 고리적(symbuleutic) 혹은 심의적(delibe- rative) 본문의 상황 속에서 논한다. 하지만 그는 팔복 안에는 행위와 결과의 인과 관계적인 연결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본다(Berger 1984: 189). 그러나 팔복의 실용적인 관계 즉 본문과 상황 사이의 체계적인 관계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빈스(Robbins 1985:40)는 팔복의 명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 연설의 시작부분은 이어지는 연설에서 앞으로 발전될 기본적인 명제를 소개하는 위치이다.

 

명제로서의 팔복은 생략삼단논법 또는 수사학적 삼단논법으로 취급되어야 함에 주목하는 것 역시 적절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복은 진술되지 않은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Robbins 1985a:40).

여기는 팔복의 구조를 철저히 논할 수 없다. 마태복음 5:3-10에서 각각 네 개의 복들의 두 연(stanzas)을 논할 정당한 근거가 있다(Michaelis 1968). 다른 한편, 첫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의 포괄적 구조의 현상 역시 자주 주목받아왔다. 아직도 여전히 분명하게 논의되지 않은 것은 팔복의 시작부분처럼 마지막 부분이 동일한 방식으로 마쳐진다는 점이다:

 

··· 사람 안에서 최고조의 힘의 특성은 그들 안에 모든 억압적인 힘의 부재(不在)이다(Van Tilborg 1986:42).

 

내가 보기에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제안은 Kodjak(1986)의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 5:3, 10의 포괄적 구조 속에서 각각 두 개씩 세 그룹의 복을 제시했다. 이 쌍들의 각각의 복은 더 내면적이며 개인적인 경향과 더 외면적이며 사회적인 경향의 복으로 구성된다. 더욱이 이 세 쌍 사이의 분명한 위계적인 발전 역시(처음에는 개인적인 조롱과 비방, 그 다음에는 육체적인 배제 혹은 추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상적 비방-이러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도출되는) 박해에 대한 반응과 연관된다 (5:11-12; Kodjak 1986:64f). 이런 방식 속에 3인칭의 복(5:3-10)으로부터 2인칭의 복(5:11-12)으로의 전환이 매우 안전하고 부드럽게 연결되어지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팔복의 형식에 있어서 이 변화는 팔복을 청중이 다시 2인칭 복수형으로 말해지는 마태복음 5:13-16과 연결한다. 로빈스 역시 팔복에서 논리적인 연속보다는 ‘질적' 혹은 ‘축적적' 연속을 본다. 이것의 뜻은 아래와 같다(1985a:49):

 

··· 전제와 결론의 관계처럼 팔복이 서로 서로를 따르는 대신, 하나의 복은 청자(聽者)로 하여금 청자가 선행하는 특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절하다고 받아들이는 다른 특성을 위해 준비하도록 하는 하나의 특성을 소개한다.

 

산상설교의 서론이 팔복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5:13-16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수사학적으로 중요하다. 마태복음 5:3-12에서 공동체의 특성을 구성하는 역설적인 복을 말한 후, 제자들은 빛과 소금의 은유로 분명히 묘사되며, 이 방식으로 특정한 소명으로 부름 받는다(cf. Betz 1985:35).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는 것과 빛이 감추어지는 이 두 경고의 가능성은 사람 역시 자기의 효과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결론과 더불어 생략삼단논법의 전제를 구성한다(cf. Kennedy 1984:53). 더욱이 땅과 세상에 관한 지시는 박해받는 제자의 적은 무리의 소명에 관한 우주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앞의 팔복과의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행은 사람들이 성부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인도하기에, 세상은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 모두 복되며 다른 사람을 위한 복임을 안다(Patte 1987:70).

 

비록 이것이 박해를 가져오지만, 박해가 그들의 빛을 숨길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의미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앞에 있는 팔복과 뒤따르는 반명제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Luz 1985:225).

 

이 방식으로 산상설교의 서론은 완전해 진다. 팔복이 자신에게서 어떤 의지할 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나라의 은혜에 관한 역설적인 직설법으로서 작용하는 반면, 마태복음 5:13-16은 복된 자에게만 아니라 세상을 위해 복된 사람을 향한 명령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조차도 즉각적으로 이 소명에 대한 실패의 가능성에 대해서 암시적으로 경고가 주어진다. 하지만 제자의 삶은 성부 하나님과도 연관되며 이런 방식으로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과도 직접적인 연결이 성립되는데, 그 이유는 성부 하나님은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 매우 주도적이시기 때문이다(마 6:1, 4, 6, 8, 14, 18).

케네디(1984:46f)가 산상설교의 수사학적 읽기는 행위구원의 교리를 초래한다고 주장했을 때 하나의 흥미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그의 결론은 청중은 팔복의 중심적인 호소로부터 특정적인 명령의 논의를 거쳐서 그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는 최종 경고로 인도되고 그 지점에 남겨진다는 선적 원리에 일치한다. 케네디에 의하면 은혜의 교리는 오직 산상설교가 읽혀질 수 있고 다시 읽혀지는 문학적 산물로 접근되어질 때에만 산상설교에 적용된다. 이 문학적 산물 안에서 팔복은 독자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으로 돌아간다(1984:47).

두 가지 근거에 의해 이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을 위해 서론으로서의 팔복의 기능을 제외하는 지시적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서 수사학적 읽기의 본문성(textuality)의 원리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논의의 가장 설득력 있는 순서에 관한 견해에 대해 차이점이 있다: 증가하는 힘의 순서, 감소하는 힘의 순서 혹은 나머지는 중간부분에 두면서 가장 강력한 논의로 시작하고 마치는 네스토리안의 순서(Perelman 1982:148). 하지만 이것은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제적인(programmatic) 연설의 서론으로서의 팔복의 중요성을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러한 최초의 명제의 수사학적 암시는 다음의 진술에서 분명하다:

 

명제는 연설에 방향성을 제시하며 화자를 둘러 감싸는 명확한 입장에 관한 가정과도 연관이 있다. 명제를 즉각적으로 말하는 것의 이점은 독자를 깨우쳐주는 것이다; 이것은 전제를 점유한다(Perelman & Olbrechts- Tyteca 1969:498f).

 

이 사실은 산상설교의 은혜에 관한 처음 진술은 산상설교의 중심부분인 7:7-12의 마지막 단락의 끝에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 여기서 중심부분은 자신의 성부 하나님을 기꺼이 의지하려는 사람은 용납될 것이며 그들의 간구는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결론 맺는다: 경고를 동반한 결론 바로 앞에서. 바로 팔복에 나타난 은혜에 관한 처음 명제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은 또한 복이 되라는 명령은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 특히 결론에서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5:13-16에도 첨가된다.

산상설교와 같은 경우에 비록 역사성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지만, 케네디(1984:68)가 산상설교를-그 자신의 수사학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주 반복하신 특정한 기본적인 연설에 연결시킨 것은 의아하다. 이점은 우리가 마태복음 안에 지금 가지고 있는 산상설교의 경우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산상설교와 마태복음 전체의 수사학적 읽기는 우선 본문의 개념적 차원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본문 외적인 실재와의 연결은 더욱 간접인 성격의 것이다.

혹자는 마태복음으로부터 에피소드의 반복이(예. 이중 혹은 삼중 이야기) 상황의 역할과 반복의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강력한 수사학적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예들을 첨가할 수 있다(Anderson 1985). 또는 어떤 이는 문맥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장인 마태복음 13장을 혹은 주요 기능이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역할하는 마태복음 23장을 논할 수 있다(Lategan 1985:22).

이미 앞서 지적된 바처럼, 마태복음의 수사학적 접근은 본문의 수사학적 구조를 고려해야 하며, 매번 본문의 독특한 읽기를 포함하는 본문의 읽기의 중요성과 연관되어 있는 본문의 힘 또한 다루어야 한다. 본문을 수사학적으로 읽는 것은 의미에 대한 저항의 요점과 산상설교의 수사학적 표상(figures)과 같은 지시성을 손상시키는 점을 드러낼 수 있음이 또한 주목되어져야 한다(마 7:3-눈의 티/들보); 역사적 인물들(바리새인, 서기관); 사회적 혹은 정치적 권력과 가치(마 10:18-임금들과 총독들). 논의의 목적이 마음의 접촉을 전제하듯이, 이 마음의 접촉을 방해할 수 있는 본문의 내적 그리고 외적인 요소와(실제 독자의 입장을 다루는) 같은 것에 주의가 주어져야 한다(Wuellner 1988:285ff).

 

의사소통이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사고를 순응시키며, 그들의 감정을 흥분시키거나 평온하게 하려고 하며, 그들의 행동을 인도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이것은 수사학의 영역에 속한다(Perelman 1982:162).

 

이것은 네러티브로서의 마태복음에 적용된다.

참고문헌

Allison, D. C. “The structure of the Sermon on the Mount”, JBL 106 (1987), 423-45.

Anderson, J. C. “Double and triple stories, the implied reader, and redundancy in Matthew”, Semeia 31 (1985), 71-89.

Betz, H. D. Essays on the Sermon on the Mount. tr. by L. L. Welborn. Philadelphia: Fortress, 1985.

Berger, K. Formgeschichte der Neuen Testaments. Heidelberg: Quelle & Meyer, 1984.

Booth, W. C. Modern dogma and rhetoric of assent.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4.

Bornkamm, G. “Der Aufbau der Bergpredigt”, NTS 24 (1978), 419-32.

Bouwman, G. Paulus an de Romeinen. Een retorische analyse van Rom 1-8. Averbode: Werkgroep voor levensverdieping. (Cahiers voor levensverdieping), 1980.

Bowker, V. J. The playwright as social commentator with special reference to Athol Fugard's A lesson from aloes. M.A. thesis, University of Port Elizabeth, 1983.

Brinton, A. “Situation in the theory of rhetoric”, Philosophy and rhetoric 14 (1981), 234-48.

Burke, K. A rhetoric of motives. New York: Prentice Hall, 1950.

Burnett, F. W. “Prolegomenon to reading Matthew's eschatological discourse: redundancy and the education of the reader in Matthew”, Semeia 31 (1985), 91-109.

Combrink, H. J. B. “The structure of the Gospel of Matthew as narrative”, Tyndale Bulletin 34 (1983), 61-90.

. The changing scene of biblical interpretation, in Petzer, J. H. and Hartin, P. J. (eds.), A South African perspective on the New Testament Scholars presented to Bruce Manning Metzger during his visit to South Africa in 1985, 9-17. Leiden: Brill, 1986.

. “Readers, readings and authors: an orientation”, Neotesta- mentica 22 (1988), 189-203.

Corbett, E. P. J. Classical rhetoric for the modern student. 2n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Dormeyer, D. Die Bibel antwortet. Einfhrung in die interaktionale Bibelauslegung. Mnchen: Pfeiffer, 1978.

Du Plessis, J. G. “Some aspects of extralingual reality and the interpretation of texts”, Neotestamentica 18 (1984), 80-93.

Eco, U. A theory of semiotic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Advances in semiotics), 1979.

마태복음에 관한 수사학 관련 참고자료

Edwards, R. A. Matthew's story of Jesus. Philadelphia: Fortress, 1985.

Fowler, R. M. Reading Matthew reading Mark: observing the first steps toward meaning-as-reference in the synoptic Gospels, in Richards, K. H.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Seminar Paper, 1-16. Atlanta: Scholars, 1986.

Graff, G. Literature against itself. Literary ideas in modern socie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Hernandi, P. “Literary theory: a compass for critics”, Critical Inquiry 3 (1976), 369-86.

Iser, W. The act of reading.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8.

Kennedy, G. A.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Studies in religion), 1984.

Kingsbury, J. D. Matthew: Structure, Christology, Kingdom. Phila- delphia: Fortress, 1975.

Linneavey, J. L. Greek rhetorical origins of Christian faith: an inqui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Kodjak, A. A structural analysis of the Sermon on the Mount. Berlin: Mouton (Religion and Reason 34), 1986.

Lategan, B. C. Some unresolved methodological issues in New Testament hermeneutics, in Lategan, B. C. & Vorster, W. S. (1985), 3-25.

. Reference: reception, redescription, and reality, in Lategan, B. C. & Vorster, W. S. (1985), 67-93.

. & Vorster, W. S. Text and reality. Aspects of reference in Biblical texts. Philadelphia: Fortress (Semeia studies), 1985.

Lotman, J. The structure of the artistic text. Michigan: Michigan University Press, 1977.

Lundin, R, Thiselton, A. C. & Walhout, C. The responsibility of hermeneutics. Grand Rapids: Eerdmans, 1985.

Luz, U. Das Evangelium nach Matthus. 1. Teiband Mt 1-7. Zrich: Benziger Verlag, 1985.

McKnight, E. V. The Bible and the reader. An introduction to literary criticism. Philadelphia: Fortress, 1985.

Michaelis, C. Die II-Alliteration der Subjeksworte der ersten 4 Seligpreisungen in Mt v 3-6 und ihre Bedeutung fr den Aufbau der Seligpreisungen bei Mt., Lk. und in Q. NovTest 10 (1968), 148-61.

Moore, S. D. “Narrative commentaries on the Bible. Contexts, roots, and prospects”, Foundations and Facets 3 (1987a), 29-62.

. “Are the Gospels unified narratives?” in Richards, K. H. 443-458.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87 Seminar Papers (1987) Atlanta: Scholars.

Nicol, W. “The structure of Matthew seven”, Neotestamentica 11 (1977), 77-90.

Nida, E. A. Louw, J. P. Snyman, A. H. & Cronje, J. v W. Style and discourse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text of the Greek Testament. Cape Town: Bible Society, 1983.

Pagnini, M. The pragmatics of literature. tr. by N Jones-Henry.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7.

Patte, D.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a structural com- mentary on Matthew's faith. Philadelphia: Fortress, 1987.

Perelman, Ch. 1982 & Olbrechts-Tyteca, L. 1969. The new rhetoric. A treatise on argument. tr. by J. Wilkinson & P. Weaver.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 The realm of rhetoric. tr. by W. Kluback.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2.

. s v ‘Rhetoric'. The New Encyclopedia Brittanica 15. 15th ed., 1984.

Phelan, J. “Thematic reference, literary structure, and fictive character: An examination of interrelationships”, Semiotica 48 (1984), 345-65.

Phillips, G. A. “History and text: the reader in context in Matthew's parables discourse”, Semeia 31 (1985), 111-38.

Rickman, H. P. “Rhetoric and hermeneutics”, Philosophy and Rhetoric 1 (1981), 100-11.

Ricoeur, P. “Biblical hermeneutics”, Semeia 4 (1975), 27-148.

Robbins, V. K. “Pragmatic relations as a criterion for authentic sayings”, Foundations and Facets Forum 1/3 (1985a), 35-63.

. Review of Kennedy, G. A. 1984.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Rhetorica 3 (1985b), 145-49.

Schenk, W. Die Rollen der Leser oder der Mythos des Lesers? To be published in Semeia (1985b).

Sloane, T. O. s v ‘Rhetoric'. The New Encyclopedia Brittanica 15. 15th ed, 1984.

Snyman, A. H. Retoriese kritiek en die Nuwe Testament. Die bydraes van en verband tussen Kennedy en Perelman, in Snyman, A. H. Oor styl en retoriek by Paulus, 1-18. Bloemfontein: UOVS. (Acra Academica D 6), 1986.

Steiner, G. ‘Critic'/‘Reader'. New Literary History 10 (1979), 423-52.

Sternberg, M. The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Ideological literature and the drama of reading.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Indiana literary Biblical series), 1985.

Thiselton, A. C. Reader-response hermeneutics, action models, and the parables of Jesus, in Lundin, R. Thiselton, A. C. & Walhout, C (1985), 79-113.

Van Huyssteen, Q. The realism of the text. A perspective on Biblical authority. Pretoria: University of South Africa. (Miscellanea congregalia 28), 1987.

Van Tilborg, S. The Sermon on the Mount as an ideological intervention. A reconstruction of meaning. Assen: Van Gorcum, 1986.

Vorster, W. S. Meaning and reference: the parables of Jesus in Mark 4, in Lategan, B. C. & Vorster, W. S. (1985), 27-65.

Walhout, C. Texts and actions, in Lundin, R. Thiselton, A. C. & Walhout, C. (1985), 31-77.

Wilder, A. N. “Story and story-world”, Interpretation 37 (1983), 353-64.

Wuellner, W. “Where is rhetorical criticism taking us?”, CBQ 49 (1987), 448-63.

. “The rhetorical structure of Luke 12 in its wider context”, Neotestamentica 22 (1988), 283-310.

◇ Abstract

Reference and rhetoric in the Gospel of Matthew

 

H. J. B. Combrink

(University of Stellenbosch)

 

 

This article reacts to the view that whereas the Markan narrative functions predominantly on the rhetorical axis of communication, Matthew operates basically on the mimetic axis. Although there are obvious differences between the rhetoric of Matthew and Mark, it is not apt to characterize Matthew's rhetoric as more referential than in the case of Mark. Instead of discovering a moving away from rhetoric in Matthew, one can point to various rhetorical techniques utilized in narration of the story. A rhetorical reading of Matthew also has to take the power of the text into account.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