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민씨 시조(驪興閔氏始祖) : 민칭도(閔稱道)
유덕종(柳德種)은 "민씨족보 서문(閔氏族譜序文)에서 여흥 민씨는 그 조상 가운대 민칭도(閔稱道)를 추대하여 시조로 삼았는데, 선조는 어느 대에서부터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여흥민씨의 씨족 연원은 두가지 설이 전한다.
1. 고려중엽때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온 사신인 민칭도(閔稱道)가 정착했다는 설
2. 경기도 여주 향리에 있는 영월루 민굴(閔窟; 일명 마암굴)에서 나왔다는 설.
그러나 여주 민굴설(閔窟設)은 신빙성이 적고, 중국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문헌(文獻)상으로 고려(高麗) 이상국규보씨(李相國奎報氏)가 상시(常侍; 고려 문하성. 첨의 부 등의 정 3품 낭사 벼슬) 민식(閔湜)에게 다음과 같이 올린 시(詩)가 있다.
세세전벌열(世世傳閥閱), 계출비후현(系出費侯賢)
"대대로 전해 오는 훌륭한 문벌은 비후[費侯는 민자건(閔子騫)의 관직명] 이어 왔다"
라고 하였다. 민자건(閔子騫)이 비후(費候)가 되었으니 중국에서 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민상시(閔常侍)가 죽은지 멀지 않고, 이상국도 학문이 길은 큰 선비이니 반드시 억지로 꾸며낸 것 같지는 않다.
또 학자들이 우리 민씨를 문장으로 표시할 때는 요요화주(遙遙華주)라 하고[遙遙華주는 멀리 中國에서 나온 민자건(子騫)의 子孫이라는 말], 혹은 문수화벌(汶水華閥)이니 문수후예(汶水後裔)라고 많이 쓰고 있다(汶水는 논어에 민자건이 吾其在汶水之上이라 하는 말이 있다).
이런 문헌으로 보아 우리 민씨는 중국에서 왔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또 하나 신빙(信憑) 할 수 있는 말로는 문헌에는 없지만 이미 故人이 되신 단원(檀園) 민충식(閔忠植)씨 말씀에 의하면(이 분은 일생을 獨立運動에 바치신 분으로 중국과 소련을 도보로 23차 왕복하신 분임) 중국에 수백여호가 거주하는 민씨촌(閔氏村)이 왕왕(往往) 있었다. 하루는 민씨촌을 지나다가 우정 찾아갔는데, 민씨(閔氏) 여러분이 분에 넘치는 환영(歡迎)을 하면서, 그 중 한분이 말하기를 "韓國 閔氏는 중국 민씨의 후예(後裔)다. 그 이유는 "중국문헌에 朝鮮 高麗朝 때 중국 조정의 민씨 한 분이 고려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록만 있고, 환국(還國)했다는 기록은 없으니 한국 민씨는 그 때 사신의 후손이 아니겠는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민씨는 중국에서 나온 성씨(姓氏)가 분명하고, 여주 민굴에서 나왔다는 전설은 전연무근한 낭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여흥민씨 파계보, 1988년 발행인 閔忠植, 회상사).
이와 같은 것을 근거로 민씨(閔氏)는 중국(中國) 농서현(농西縣 : 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십철중(十哲中; 10 제자) 중의 한 명인 민손[閔損, 자는 자건(子騫)으로 노나라 현인]의 후손인 민칭도(閔稱道)가 고려 중엽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귀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민칭도(閔稱道)는 경기도 여흥(驪興; 경기도 여주의 옛 이름)에 정착(定着)하여 살았다고 하며, 고려시대에 상의봉어(尙衣奉御; 상의국 정 6품의 벼슬, 상의국은 고려 때에 임금의 예복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관청)라는 벼슬을 했다. 고려사(高麗史)에 '목종(穆宗)때 상의국(尙衣局)을 두었다가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 붕어(奉御)라는 직책을 두었다' 라고 했으니 공은 대략 문종 이후의 사람이다. 민칭도가 몇 대 손인지도,언제부터 여흥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는 지도 여러 보 서문에는 밝혀지지 않으나 세록편을 보면 고려 충숙왕(27대)때에 8世 민지(閔漬)가 고려 원종조에 문과에 올라 추성수정성보리공신이 되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하였다.따라서 뚜렷하게 관향을 여흥으로 삼은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관향(貫鄕)은 본적(本籍), 성관(姓貫), 본(本), 관적(貫籍), 적관(籍貫)이라고도 하며,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姓)의 출자지(出自地)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시집온 사람들은 고향 동네 이름을 붙여 00댁 이라고 하였다. 즉, 고향이 뿌리이므로 관향이 다르면 같은 조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반드시 관향을 쫓는 것은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뜻일 것이다. 우리 민문은 여흥(여주)는 우리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 민씨는 모두 여흥민씨(驪興민氏)라고 말하고, 봉어공(奉御公군) 민칭도를 시조로 추대하고 있다. 그러나 봉어공 전에도 민씨가 있었다. 고려 태조 원년에 순군낭중(徇軍郎中) 민강(閔剛)으로 내군장군(內軍將軍)을 삼았으며, 후백제의 견훤도 일간찬(一吉찬; 신라 17등관의 7번째 위계) 민합(閔합)을 보내서 하례하게 하였으니 우리나라 민씨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다른 민씨도 여러번 역사기록에 보인다.
여흥 이외에 다른 민씨가 있다는 사실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나타난다. 예로서 한양(漢陽), 영천(榮川), 강주(剛州), 해주(海州) 등의 여러 관향(貫鄕)이 있으며, 이 중에서 현달(顯達)한 인물도 없고, 어떤 사람으로부터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영주(榮州)의 일파가 좀 알려졌다. 국초(國初)에 민천좌(閔天佐지)는 청하현감(淸河縣監)이 되었다. 회회[回回; 7세기경부터 중국에 들어간 아라비아인이 오랫동안 한족(漢族)과 혼혈되어, 한어(漢語)를 전적으로 쓰게 되어 한화도(漢化度)가 높은 이슬람교를 믿는 집단.]의 민씨가 고려 말년에 사신으로 자주 왔고, 민보(閔甫)는 평양윤(平壤尹)인데, 회회 사람으로 지금은 어떤 관향에 소속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들이 여흥민씨와 같은 민씨인지 다른 민씨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4세 민영모(문경공) 이후로는 모두 보첩(譜牒)이 자세하기 때문에 사전(史傳)에 기록된 사람은 모두 그 파로 나누어져도 다른 민씨는 없다.
우리 여흥민씨는 시조인 민칭도는 이후, 고려 중엽초부터 자손들의 번영으로 고려조에는 3대명문(三大名門)의 하나로 일컬었고, 조선왕조에 와서도 王妃가 네분이 탄생하시니 정승 판서 고관 대작이 즐비하였으며, 4대 명문에 하나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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