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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원대장군 나공 묘표(懷遠大將軍 羅公 墓表)
아! 우리 외조부 회원대장군 나공(羅公)이 돌아가신지 39년(1331)이 되어서야 비석을 처음으로 마련하고 공의 자손들이 주(澍)에게 말하기를 택상(宅相)의 반열에 서 있으니 영구히 없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 하므로 주(澍)는 재배하고 받아들여 마침내 울음을 걷우고 삼가 서술하니 공의 휘는 유(裕)요 자는 만기(萬器)이고 처음의 휘는 철준(哲準)인데 항렬의 이름이 같은 것을 피하여 재명하였다.
나씨는 본래 나주에서 나왔으니 삼한공신 대광 휘 총례의 10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인겸(仁謙)이니 검교(檢校) 대호군(大護軍)이요 조부의 휘는 효전(孝全)이니 태중대부(太中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지도성사(知都省事)이고 아버지의 휘는 득황(得璜)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판호부사(判戶部事)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시니 삼중대광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휘 국정(國貞)의 따님으로 규범이 있고 자애로웠다.
공이 충생하심에 완력과 용기 기지가 있었고 대의(大義)를 환히 통달하여서 공의 나이 이십 일세에 경선점 녹사(綠事)에 뽑혔고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주능직(周陵直)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떄에 임연(林衍)이 궁궐에 친척 또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기용하고 밖으로는 권세를 폈으며 그물과 함정을 만들어 온 세상 선비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고 사감(私感)을 가지고 공의 장인 조공(趙公) 문주(文柱)를 죽이고 공을 위협하여 이혼(離婚)하게 하였으나 공이 의(義)로써 거절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얼마 후 천직되어 병마사(兵馬使)에 이르러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여 크게 이긴 전공이 있었는데 이때에 조정(朝廷) 선비들의 많은 부인(夫人)들이 적의 무리들에게 재난을 당해서 다시 장가들고 적을 평정한 뒤에 아내가 혹 돌아오는 이도 있었으나 모두 버렸는데 공도 역시 새장가를 들었으나 먼저 적중에 들어가 전처(前妻)를 데리고 와서 다시 부부(夫婦)가 되니 사람들이 다 의(義)롭게 여겼다.
또 김방경이 제주를 칠적에 공이 중군(中軍)으로써 선봉이 되어 먼저 해안에 내려가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으매 경략사(經略使)가 일찍이 사로잡은 남여 두명을 상(賞)으로 주고 황제께 아뢰어 중통보초(中統寶鈔)를 하사하게 하였다.
신미년 봄에 또 병마사로서 도독사 김공과 병마사 박지량(朴之亮) 김흔(金炘)과 함께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삼익군(三翼軍)이라 이름하고 원(元)나라 도원수 홀돈(忽敦), 좌우부원수 홍다구(洪茶丘)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몽고군, 한군(韓軍) 25,000명과 아군(我軍) 8,000명으로써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를 출발하여(1274) 11일 만에 기도(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제장이 힘을 다하여 싸워서 천여급을 베고 드디어 삼랑포에 배를 두고 길을 나우어 진격하니 왜병이 대패하여 엎드러진 시체가 삼대 갈거늘 공이 승세를 타고 쫓아가서 남은 무리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조정에 돌아와서 벼슬을 응양군 대호군(大護軍)으로 옮겼고 금패(金牌)를 하사하며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벼슬을 내려 우대하였다.
충렬왕5년(1279) 공이 외직으로 나가서 합포를 진압하였고 예(禮)를 안다하여 특별히 소환하여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맡게 하였다가 얼마 안되어서 지신사(知申事)로 옮겼으며 또 부지밀직사(副知密直司)로 승진되었다.
정해년(1287)에 왕이 내안(乃顔)을 친히 정벌할 적에 공에게 호두패(虎頭牌)를 주어 중익 부만호(副萬戶)를 삼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옴에 일등공신으로 책록하여 철권(鐵券)과 토지 일백결(一百結)과 노비 20명을 주고 명위장군(明威將軍)을 제수하고 황제께서는 쌍주금패(雙珠金牌)를 하사하였다.
내안의 무리 합단(哈丹)의 아들 노적(老的)이 평양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장차 강도(江都=강화도)를 치려고 하거늘 왕이 공에게 명하여 방어케하니 공이 명을 받고 곧 물러나와 자기 집을 지나면서도 들리지 않고 바다를 따라 험한 곳을 넘어 평양에서 적을 만나 싸워 적장 2명을 베니 적의 무리들은 드디어 무너졌다. 또 연기(燕岐)에서 싸워 대패시키니 남은 무리들이 여진(女眞) 땅으로 도망하는지라 왕이 공을 교주도(交州道)로 보내어 쫓아가서 잡도록 하니 노적이 죽전을 넘어 다시 평양으로 달아나는지라 공이 배를 내버려두고 육지에 오르니 현문혁(玄文奕)이 언덕과 습한 벌판이 구불구불하여 복병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고 군사들을 아직 정돈하기도 전에 적군이 크게 몰려오거늘 군사를 지휘하여 후퇴하여 배에 모두 올랐으나 낭장 이무(李茂)등 수십인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하였다. 문혁이 배에 서서 부르짖어 말하기를 "무(茂)야 힘써서 특별한 공을 세우면 나라에서 큰 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니 이무등이 독산(獨山)으로 달아났다. 적장이 이를 가볍게 여기고 말에서 내려 앉아 무리들을 나누어 산을 에워싸고 올라오는데 해는 저물고 배가 너무 고파 주머니 속의 밥을 씹으며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사나이가 마땅히 죽을 곳에서 삶을 구할 적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 하고 활을 당겨 쏘아 적장의 목구멍을 맞히니 활시위의 소리에 응하듯이 거꾸러졌다. 때에 적진이 어지러워지니 이무 등이 크게 소리치고 돌격하여 베어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셀 수 없었다.
공은 지밀직사사로서 원(元)나라에 가서 신정을 하례하니 황제께서 삼주호부(三珠虎符)와 옥대(玉帶) 은정(銀錠=은화) 활과 화살, 칼, 안장을 지운말을 주고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을 제수하였다.
가친 낙헌공(樂軒公)이 글을 바쳐 치사(致仕)하시도록 청하면서 말하기를 "누차 사직을 편안히 하여 이름이 철권에 올랐고 형상이 기린각에 올랐는데 그 외에 다시 무엇을 바라십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請)하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글을 보시고 바로 그날 물러가기를 왕에게 청하니 하교하여 이르되 "경(卿)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나는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랴" 하시매 누차 글을 올리니 마침내 허락하였다.
공이 고향의 산천으로 돌아와 한가롭게 노년을 보내면서 좋은날 좋은 명절이면 자손들이 앞에 가득하고 주연에 풍악을 울려서 즐겁게 하니 모두 부러워 하였다.
충렬왕 임진(1292) 6월 17일 병을 얻어 집에서 졸(卒)하시니 춘추 68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아니하시고 제물을 하사하시며 제관을 보내 장례를 도와주셨고 해를 넘겨 3월 어느날 나주 약사원(藥師院)의 북쪽 벌에 하관하여 장례지냈다.
부인은 백천 조씨(趙氏)로서 군부인(郡夫人)이니 병부상서(兵部尙書) 휘 문주(文柱)의 따님이시다. 병인년(1226)에 출생하고 갑술년(1274)에 졸(卒)하셨으며 공의 묘 좌편에 붙였다.
공을 슬하에 남 2녀를 키웠으니 아들 익희(益禧)는 벼슬이 감문위 상호군(上護軍)이요, 딸에 맞이는 홍융(洪戎) 대광 중찬(大匡 中贊)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방보(李方甫) 지유대위(指諭隊尉)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익희(益禧)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민지(閔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영걸(英傑)은 만호(萬戶)요, 딸은 최문도(崔文度)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여서 홍융(洪戎)이 3남을 낳으니 주(澍)와 언박(彦博)과 언유(彦猷)로서 벼슬이 모두 고관(高官)에 이르렀으며 이방보(李方甫)가 1남을 낳았으나 아직 어려서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나라가 장차 위태로움에 충성을 다하여 몸이 파리하도록 한 적이 여러번 이었고 군사를 인솔하고 싸워 공(功)을 세운 적이 많았다. 높은 작위와 높은 관직은 공을 영화롭게 할만 하였고 하신 일의 큰 빛이 해와 달같이 밝게 빛나서 공과 같은 이는 국가와 세운(世運)의 성쇠에 관계가 있었으나 이는 한 나라의 공론(公論)이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다.
공의 정벌(征伐)한 공훈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나 간략(簡略)하게 기술하여 묘도(墓道)의 글로 하여 오는 후세(後世)에 증거하려고 하나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임에도 글을 짓는 실력이 없으니 서러워서 할 말이 없다.
신미(辛未) 1332년 월 일
외손(外孫) 홍주(洪澍) 삼가 기록하다. 금성나씨 대종회 문헌위원 삼가 번역하다
2. 광정대부 첨의참리 상호군 묘명 (匡靖大夫 僉議參理 上護軍 墓銘)
1344년(충혜5)9월 첨의참리 나공이 돌아가니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조상(弔喪)을 하고 양절(良節)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송림현 약사원 북쪽에 예장(禮葬)하였다. 공의 휘는 익희(益禧)요 본관은 나주며 삼한공신 대광 휘 총례(聰禮)의 11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효전이며 황증 태중대부 상서 좌복야 판호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황회원대장군 판군상만호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장군 세자원빈 휘 유(裕)는 아버님이요 은청 광록대부 동지 추밀원사 병부상서 장군 조문주(趙文柱)의 따님은 군부인인데 공의 어머님이다. 한림직학사사 묵헌선생 민지(閔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남매를 출산, 딸은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상호군 최문도(崔文道)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영걸(英傑)이며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이다.
공(公)은 절의를 사모하고 다투고 소송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어머니께서 가산을 분배할 때 노복 40명 등 많은 가산으 물려 주려할 때 어찌 같은 자녀인데 남녀 차별이 있을 수 있으며 인덕(仁德)에 누가 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어머니께서 의롭게 여기셨다. 원나라의 선명(宣命)을 받아 금부(金符)를 띠고 상천호 회원(懷遠)이 되었다. 별세후 습작으로 관군상만호가 되어 호덕장군의 품계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찾다. 충렬왕 말년에 신호위 호군이 되어 금자겸 첨의중사를 제수 하였다. 덕릉(춘성왕)이 구폐를 개혁하여 조정신하를 랑관(郞官)으로 쫓는 등 인사계획 등 집정에 문제점을 논박하였다. 벼슬을 그만 둔 10년 후 검교 상호군이 되었고, 7년에 감문위 상호군 천무위겸 중문사수좌상시를 거쳐 광정대부 상의평리가 되고 금성군(錦城君)에 봉작되었으며 44세에 그 아들(英傑)에게 세작(世爵)을 주었다. 17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며 민생문제와 인재등용 문제에 대하여 뒷짐지고 근심하며 홀로 정원을 거닐면서 조정의 난맥상을 걱정하다. 일찍이 계림부윤 한번, 합포진관 세 번은 역임했는데 청렴 근면하고 인자하여 남쪽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하다.
왕이 1344년(충혜5)에 공을 첨의참의에 기용하니 이른바 오재상(五宰相)이라 하다. 하루는 판삼사 이제현에게 말하기를 『과거의 잘못을 경계하지 않으니 내가 그들과 함께 관직을 함께하여 지탄을 받고 싶지 않아 관직을 피하고자 했는데 공은 어찌 생각 하십니까』하였더니, 제현이 사례하면서 『내가 집정에 계책을 말 하였는데 실행하지 않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공의 말씀 뜻 깊게 새기겠습니다』하였다. 이후 10여일 후에 공의 병세를 왕에게 고했다. 아! 그분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급히 찾아가 조문하고 물러나오니 아들과 사위가 비문을 청하기에 그 명(銘)에 가로되 관직에 계실 때는 자혜(慈惠)로우셨고 그 후에는 염치(廉恥)있게 하고 의로움을 강조하며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셨도다. 내가 만년에 지기(知己)가 되었으니 공에 대한 말씀을 져버리겠는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찬술(撰述) 금성나씨 대종회 문헌위원 삼가 번역하다.
3. 송와선생신도비명(松窩先生神道碑銘)
선생의 휘는 문규(文奎)요 초휘(初諱)는 극종(克綜)이며, 호(號)는 송와(松窩)다. 나씨의 세계(世系)가 나주에서 나왔는데 삼한벽상일등공신 삼중대광보국으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작된 휘 총례(聰禮)를시조로 하였다.
그 뒤 6대가 대광(大匡)이였고 휘 국영(國英)에 이르러서는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좌명 공훈으로 금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 명종 즉위 후 벼슬을 아니하고 나주에서 청백한 생활을 하니 세상에서 공의 참삶을 칭송하였다. 공의 5대조 효전(孝全)은 황명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요, 고조의 휘는 득황(得璜)이며 황명 금자광록 대부 사공상서 판호부사 치사하였고 증조 휘 유(裕)는 용맴과 지략이 뛰어나더니 여섯 번이나 정란훈(靖亂勳)을 세워 철권(鐵券)에 이름을 썼고 인각(麟閣)에 화상을 그렸으며 조부의 휘는 익희요 호는 경재 또는 퇴유재요 시호는 양절이며 합포진관을 세 번 하였고 계림부윤을 한번하였으며 금성군(錦城軍)에 봉작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영걸(英傑)이요 호는 월포(月浦)이며 밀직부사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이다. 명장(名將)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가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금성군에 봉하였다.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정승을 지낸 충(忠)의 따님이다. 공(公)은 1312년(충성왕4)에 나주 문평 오륜동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덕기(德器)와 재예(才藝)가 초월에 15세 때 경서와 성리학에 재행(才行)이 탁월하다 하여 지방유지의 추천을 받아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규(文奎)로 개명했다. 신사년에 명경박사(明經搏士)에 올랐고 충정왕 신묘년에 통례원 지후로 행직을 하였으며, 1352년(공민왕1)에 서해도 안렴사로 제수되어 지내는 곳 마다 교화를 베풀었더니 어린이와 백발노인이 그 수례에 와서 칭송하였다. 그후 신호위 보승랑장이 되었고 계사년에 판도관이 되어 치화(治化)가 크게 행함으로 저정(朝廷) 출입증인 비어대를 하사 하였다. 갑오년에 영주지사로서 학교를 세워 유풍(濡風)을 크게 떨쳤더니 국왕을 접견할 수 있는 비표인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상고해 조면 공은 문무의 재주를 자취를 거두고 빛을 숨기면서 충숙왕과 충혜왕을 폐위하고 복귀 시키는 당에 불참했으며 높은 관직도 사양하고 낮은 관직에 있었으며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에 있었기에 그 인품이 마침내 현양되지 못하고 직위가 덕망에 알맞지 못하니 애석하며 아깝다.
1355년(공민왕4) 3월 1일에 별세하니 그 나이 44세요 나주 거평면 탄방 천마봉 아래 오좌로 된 언덕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협천 군부인 이씨이니 판사 음(蔭)의 따님이요 묘는 합장하였다.
공양왕 경오년(1390)에 남방 선비들이 나주군서에서 삼십리 된 무학봉 아래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였고 제봉산 아래 오륜촌에 영당(影堂)을 지어 춘추로 제향을 받은지가 삼백여년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년 병화로 소실되었고 아직도 중건하지 못하였다.
공이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순(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인데 아버지 상을 당해 3년을 예묘살이하고 상복을 벗은 후로는 인근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 선고를 회상하곤 했더니 세상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사암이라 하였다. 차남 인(珚)은 시중이요, 삼남신(臣)은 병조정랑이며, 사남 봉(奉)은 문과 한림이요, 오남 신(信)은 중추녹사이다. 두 딸은 하동 정영흥(鄭永興)과 창령 성수항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중호(仲浩)는 태종 때 문과로 봉례요. 광우(光佑)는 문과로 충주목사요, 명우(明佑)는 진사이며 중귀(仲貴)는 장방(長房)소생이요, 중징(仲徵)은 감찰이니 중방소생이며 욱(郁)은 진사요, 희(熙)는 삼방소생이요, 중문과 중산은 문과주서이고 중위와 함양 박팽수의 아내는 사방의 소생이다.
아! 공의 명성과 덕망이 당시에 빛났고 복음이 후손에게 내리어 한강 남쪽 천리에 자손이 곳곳에 번창하여 현관으로 입적하였고 초야에서 행적이 드러난 사람의 숫자가 천백이나 되어 비록 심상하게 길 가는 사람이라고 분묘를 지적하면서 공경하고 부러워하며 탄식하고 찬양하니 마땅히 비석에 새기어 영원히 밝게 보일 것이로다.
공의 후손 기종(基宗)이 문로(門老)의 명의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家狀)에 의거 위와 같이 찬술하고 명(銘)으로 이어 가로되,
세상에서 썪지 않은 것은 오직 덕과 공훈이로세 아름다운 공의 덕과 공훈은 도로써 임을 섬기는 것이로다. 상분(賞分)이 원제(元帝)의 세력을 끼고 있어 인군이 노정에서 욕을 당하는데 탁월하게 의지하기 않고 빛나고 밝게 곳곳하였다. 산반(散般=한직)에서 머뭇거리고 외직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교목세가(喬木世家=훌륭한 집안)에 관직이 덕에 차지않았구나. 고인복의 여파가 멀리 천백리를 흘러갔는데 혁혁한 후적(後蹟)을 지나 비로서 묘도에 새기려고 하였네. 삼척봉분은 흙을 덮어 무너지지 않으리라.
세재계해(歲在癸亥) 1923년 월 일
전숭록대부(前崇錄大夫) 의정부찬정 겸(議政府贊政 兼)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시강원(侍講院) 일강관(日講官) 당성(唐城) 홍순형(洪淳馨) 찬술(撰述)함
4. 죽헌 나선생 기적비문(竹軒 羅先生 紀績碑文)
우리는 고려말 충절의 표본이요 동방이학의 조종이라 할 수 있는 정포은(鄭圃隱)선생등 3은과 이문회우로 도의지교하고 학행일여로 입절사의(立節死義)의 근본을 같이한 불사이군의 수절신 금성 나죽헌선생(羅竹軒先生)에 대한 행적을 여기에 밝혀두려 한다.
선생의 자는 술선(述先)이요 휘는 계종(繼從), 초휘는 계도(啓道)이며 호는 송은(松隱) 또는 죽헌(竹軒)이라 하였다.
시조는 휘 총례(聰禮)로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이시다. 조기 이래 규조가 대대로 빛나서 근역의 명문벌족으로 특히 의종 때 도첨의를 지낸 6세 휘 국영(國英)은 금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전하여 한림학사 휘 인송(仁松)은 문장과 절행이 한세상의 으뜸으로 시호가 문절(文節)이며 전하여 휘 순(珣)은 충열왕 때 영도첨의를 지내고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으니 바로 선생의 고조이시다.
고(考)의 휘는 직(織)이요 사제(思齊)는 그 호인데 벼슬이 선공부령에 이르렀고 비(妣)는 안동 김재댁(金在宅)의 따님으로 현숙하셨다.
선생은 충숙왕기묘(1339)년 3월 9일에 고양군 송천에서 탄생하니 첨품이 고명하고 재예가 뛰어나 6세에 소학을 암송할 수 있었고 충효와 우애를 근본으로 경전과 성리학 탐구에 정진하니 왕께서 영명(令名)을 듣고 4서6경(四書六經) 각 한질씩을 하사하였다.
선생은 15세 되던 봄 문효공 한산 이곡(李穀)의 따님과 혼례를 맺고 공민왕9년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하고 이듬해 전시(殿試)에 장원(壯元)한 후 청현(淸顯)의 요직을 두루 거쳐 동왕23년 정순대부(正順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 되었다. 때에 왕께서 경은 선조 문절공(文節公)의 선지를 이어서 그 위열을 따르라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계종(繼從)이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국운은 동년 가을 왕이 시해되고 위주가 왕위를 승습하니 환로(宦路)에 뜻을 버리고 소명에 불응하니 은율(殷栗)에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공양왕2년 귀양에서 풀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부배되어도 거듭사직하고 조정의 간신들을 규탄하는 항소문을 올렸다.
이에 간당들은 임심년 초에 무인 최형도(崔衡道)를 시켜 선생의 별제를 방화하여 고금서적을 불태우고 또 사관 이견을 사주하여 사승에 소재된 선생의 상소문과 제현들과 문답한 기록들을 칼로 베어내니 사책이 모두 결파 되었다.
선생이 탄식하며 "나의 서재를 불태우고 사책을 결파하니 반평생 경영하던 일 모두 허망에 붙였도다. 나의 몸 밖에 뜬 이름 어찌 족히 아끼리 남으로 와서 다행한 것 촌심이 남아 있구나" 하였다.
역사의 장은 역성혁명으로 1391년 4월에 동지 정포은의 순절에 이어 7월에 고려왕조가 망하니 이태조는 누차 선생을 소명하고 양촌 권근(權近)을 보내 새왕조 섬기기를 간청하나 사절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나주 석간동에 내려와 청검한 은거생활로 죽헌거사(竹軒居士)라 하였다.
태종2년에 진사 김원이(金元履)가 찾아와 말하되 "오늘날 조정을 통하지 않는 선비는 문정이 냉락(冷落)하여 자손이 영체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구하려면 이도 또한 좋은 기회이지만 선세의 훈공이 어떠하며 선조(先朝)의 은우가 어떠함을 잊었단 말인가! 자손의 흥체는 기수(氣數)에 있는 것 천명을 따름이요 어찌 사욕을 하랴 나는 능히 두 마음을 품고 이록(利祿)을 구할 수 없도다." 하였다.
여사한 충절의 의지와 청검한 절조는 당세의 많은 사람이 숭앙하는바였으나 태종 을미(1415)년 1월 9일 77세의 천수를 누리고 기세하니 나주 동북 자산(紫山)의 언덕에 예장 모셨다.
선생은 슬하에 4남을 두니 장자 백훈(伯勳)은 유교(遺敎)에 따라 고향 송천(松川)으로 가고 차자 숙훈(叔勳)은 조몰하니 손(孫)이 우필(禹弼)이요 3남 중훈(仲勳)은 석간거사(石澗居士)라 호하고 4남 계훈(系勳)은 자산(紫山)에 거주하였다.
아! 위대하도다. 성리의 미묘함을 강하고 오륜의 실행으로 세도를 밝혔으며 벼슬을 위조(僞朝)에서 버려 오욕을 씻고 위세(危世)에 상소 올려 강어에 굴하지 않고 왕조 바뀌어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수절 그 충의는 천추에 빛나리라.
영락16년 무술 고려종사랑 문하주서(高麗從仕郞 門下注書) 길재(吉再) 짓고
금성나씨대종회(錦城羅氏大宗會) 문헌위원 번역
1993년 3월 일 죽헌 나계종 선생 기념사업회 세움
5. 송재선생 신도비명(松齋先生 神道碑銘)
아 여기는 송재선생 나공의 묘소(墓所)이다. 이제 공의 세상과의 상거(相距)가 300여년이 되었는데 후손인 종태(鍾泰) 종운(鍾雲) 기종(基宗) 도순(度淳) 등의 청탁으로 인하여 300년 전의 일을 기록하고자 하나 멀어서 자상히 기록하기 어렵다. 그러나 권문순공(權文純公) 윤문헌공(尹文憲公) 두 선생이 그 행장을 짓고 묘표를 지었으니 이는 진실로 구정(九鼎) 대여(大呂)보다 중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삼가 따라서 서(序)하며 명(銘)을 한다. 그 서에 이르되 선생의 휘는 세찬(世纘)이요 자는 비승(丕承)이니 나주인(羅州人)이다.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휘 총례(聰禮)는 시조가 되며 안렴사(按廉使)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휘 문규(文奎)는 문장과 행의가 한 세상에 으뜸이 되었고 증조 휘 계(繼)는 사복시정(司僕侍正)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은제(殷制)니 학행으로써 장성현감(長城縣監)에 제수되었고 귀향할 때에 삼마(三馬)에 불과하니 세상에서 삼마대부(三馬大夫)라 칭하고 조정에서 그 청백(淸白)을 록(錄)하였으며 후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하였다. 아버지의 휘 빈(彬)은 성균생원으로 참판(參判)을 증하였는데 여러차례 상소를 올려 합문(閤門)에 부르짖어 사류(士類)의 추대한 바가 되었다. 찰방(察訪) 해평윤노겸(海平尹勞謙)은 그의 외조부(外祖父)이다. 공(公)이 낳아서부터 총명하였고 기국(器局)이 또한 넓었다. 집은 빈한하여도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항상 송지(松脂)를 불살라서 낮을 이어서 경사(經史)를 모두 관통하여 문장이 훌륭하였다. 가정(嘉靖) 을유(乙酉 1525)에 사마시험(司馬試驗)에 합격하고 무자(戊子 1528)에 대과에 올라 나주(羅州) 황주(黃州) 두 고을 훈도(訓導)가 되었고 갑오(甲午 1534)에 성균관 학유(學諭)로 천거되어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이 되었고 병신(丙申 1536)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봉교(奉敎)에 올랐다. 그때에 김안로(金安老)가 국사에 당하여 권리를 탐학(貪虐)함을 자행하여도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공이 중시의 대책(對策)으로 인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하여 이르기를 「지록(指鹿)의 간신이 어찌 홀로 2세(世)의 조정에만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의 임금이 없는 마음을 통렬히 배척한 것이었다. 김안로가 크게 성을 내어 조옥(詔獄)을 꾸며서 형벌을 가하여 완전한 피부가 없었다. 공이 파쇄(破碎)된 뼈를 찬 주머니에 주어 담으면서 이르기를 「부모의 유체(遺體이니 가히 버리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옷을 찢어 혈서(血書)를 하되 「나라를 위하는 충성에 백일(白日)이 비추어 임한다.」하여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주달함에 이르러 중종께서 측연(惻然)히 여기시어 특히 용서하시어 고성(固城)에 유배(流配)하시었다. 격리된 적소에서 먹을 것이 핍절하여 단사(簞食)가 여러차례 비었으나 편안히 여겨 걱정을 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성현의 글을 외우고 일찍이 노래와 시를 지어 북궐(北闕)을 바라보고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주상께서 비밀히 중인(中人)을 보내어 그의 생사(生死)를 정찰한즉 중사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손에 근사록(近思錄)등의 모든 책을 놓지 아니하고 좌우(左右)에는 크게 충신(忠信) 두 글자를 써서 부쳤다」하니 주상께서 크게 감동하시었다. 김안로가 패사(敗死)함에 이르러 봉교(奉敎)로써 불러 돌아오게 하시고 편전(便殿)에서 인대(引對)하사와 어주(御酒)를 하사하시어 회사(悔謝)의 뜻을 보이시다. 무술(戊戌 1538)에 또 탁영시(擢英試)의 장원에 뽑히었다. 이로부터 두어 해의 사이에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정랑(正郞) 좌랑佐郞).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응교(應敎).전한(典翰).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사간원헌납(司講院文學).필선(弼善).보덕(輔德).의정부검상사인(議政府檢詳舍人).선균관사예(成均館司藝).사옹(司甕).사복(司僕).종부(宗簿).상의(尙衣).제사원정(諸寺院正)을 지내고 간간히 퇴계(退溪).하서(河西)의 두 선생 및 임금호형수(林錦湖亨秀)와 정임당유길(鄭林塘惟吉)의 제공으로 더불어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으니 대게 한 때의 극선(極選)이었다. 때에 기묘(己卯 1519)의 사화를 지내어 사람들이 모두 소학(小學)을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공은 이 글을 강구하여 써 사습(士習)을 바루기를 청하였다. 갑진(甲辰 1544)에 특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옮기고 줄례에 따라 좌승지에 올랐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전직되었다. 을사(乙巳 1545)에 판결사(判決事)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계급을 뛰어 대사간(大司諫)을 받았다. 때에 중종과 인종의 두 임금께서 이어서 승하하시고 명종께서 어리시니 모후(母后)께서 수렴(垂簾)하시고 정사를 들으셨다.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이 고상하게 말을 만들어 선동하여 선량한 사람들에게 화망을 입히니 공이 염전(簾前)에 들어가서 대답하여 겨우 구원하여 풀어 주었으며 또 상소를 올려 백공인걸(白公仁傑).유공희춘(柳公希春).정공황(丁公熿) 등의 원장(寃狀)을 변명하니 간당(奸黨)이 미워하여 공으로 하여금 간직(諫職)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병오에 대사헌(大司憲)에 올라서 또 그 전의 말을 진술하더니 오래지 못하여 파직이 되고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전보되었다. 이기 등이 공더러 일찍이 충순당(忠順堂)에 들어갔으므로써 그 공훈을 기록하여 끌어 당기려고 하거늘 공이 소리를 높여 꾸짖으니 이기 등이 그의 항직함을 미워하여 배척하여 조정에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미(丁未 1547)에 다시 우윤(右尹)이 되었다. 여름에 서절사(聖節使)에 보충되어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무신(戊申 1548)에 다시 좌윤이 되었다. 때에 당시의 의론이 인종께서는 해를 넘기지 못한 임금이라하여 신주를 문소전에 드리고자 아니하거늘 공이 극히 그 불가함을 간하였다. 그로 좌죄(坐罪)되어 방출되니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어 문교(文敎)를 힘써 일으키고 온 경내에 덕화가 흡족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사설(邪設)이 다시 치열하고 국사가 날로 글러가므로 드디어 우분(憂憤)으로 병이 되어 신해(辛亥 1551) 6월14일로써 관아에서 고종(考終)하니 그가 낳은 홍치(弘治) 무오(戊午) 5월21일을 헤아리면 년수가 54세였다. 나주 송림산(松林山) 묘좌원(卯坐原)에 귀장(歸葬)하였고 정부인(貞夫人) 담양전씨(潭陽田氏)는 부장하였다. 호남의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조두(俎豆)하고 철종(哲宗) 경신(庚申 1860)에 유림의 상소로 인하여 이조판서와 시호 희민을 증하였다. 전씨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세균(世均)의 딸이니 3남5녀를 낳았다. 척(惕)은 현감(縣監)이요 협(協)은 증 참의(參議)요 열(悅)은 참봉(參奉)이며 딸은 사인 김경덕(金景德) 김천추(金千秋) 부사 유몽정(柳夢井) 찰방 이황종(李黃鍾) 증 참의 유염(柳濂)에게 출가하였다. 손남(孫男) 덕윤(德允) 덕민(德敏)과 노상문(魯尙文) 찰방 ㅇ홍종(李洪鍾)의 처(妻)는 장방(長房)에서 낳았고 증 참판 덕전(德全) 덕령(德令) 덕함(德含)은 중방(仲房)에서 낳았고 현감 덕원(德元) 진사 덕기(德基) 진사 덕립(德立) 참봉 덕종(德鍾) 덕부(德符) 덕심(德深)과 군수 김충수(金忠秀) 주부 유수경(柳守敬) 처는 계방(李房)에서 낳았다. 형(泂) 호(滸) 양(瀁) 면(沔)과 양종우(梁宗遇) 이진(李縉)은 유몽정의 아들과 사위요 박지충(朴之忠)은 이황종의 사위요 경중(敬仲) 신중(愼仲)과 형감 이태남(李泰男) 나덕준(羅德俊)은 유염의 아들과 사위이며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성대하도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덕행이라 칭함은 하서(河西)의 제문이며 군자의 사람이다함은 지지당(知止堂)의 말에 상고하겠도다. 유미암(柳眉菴)은 굳은 돌과 같다하였고 소양곡(蘇陽谷)은 나라의 그릇이라 일렀도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희민이 그 시호이다. 빛나는 명절(名節)이여 광체가 청사에 넘쳐 흘렀도다. 처음에는 김안로의 모함으로 악형에 거의 죽을 뻔 하였다가 두 번째로 윤원형의 모함을 만나 원한을 품고 을사년을 지났도다. 위훈(僞勳)에 누적(漏籍)되니 거듭 거슬렸도다. 마침내 내침을 보게됨은 문소전(文昭殿)의 이론이었도다. 필부(匹夫)가 구슬을 품으니 진실로 시기가 많았도다. 험난중에 한결같은 절개로 종시토록 부끄러움이 없었도다. 굴하면 반드시 펼때가 있나니 표양과 총애가 거듭 이르렀도다. 고요한 묘소가 송림산의 지대(址臺)로다. 옛날의 유적이니 내의 명을 볼지어다.
기해 계춘 상순(歲屠維大淵獻 李春 上澣)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司憲夫) 대사헌(大司憲) 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시강원(侍講院) 찬선(贊善) 경영관(經篷官
은진 송병선(恩津 宋秉璿) 근찬(謹撰)
출처 금성나씨 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