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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아카데미 발표자료 - 마중물 - 민족의 영산 팔공산 동화사 등산로 탑골→깔딱고개→팔공산장→염불암→일인석→눌암→부도암능선→양진암→내원암→물방아골→빈대절터→내원능선→부도암→비로암→동화사→약수암→마애불좌상 1. 동화사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동화사(桐華寺)는 팔공산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로 이름나 있는 곳이다. 팔공산의 수려한 산세를 배경으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면서,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문화의 대표적 유산들이 즐비하다. 일제 강점기에 31본산의 하나였던 이곳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서 상당수의 말사와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동화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가지 다른 주장이 있다. 첫째, 동화사 사적비(桐華寺 寺跡碑)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 15년(493년) 극달(極達)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揄伽寺)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 심지(心地)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피웠다 하여 동화사(桐華寺)라 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현재 동화사에는 극달 화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진영에는 ‘공산개조극달화상지진영(公山開祖極達和尙之眞影)’이라는 글이 적혀 있기도 하다. 지금으로서는 언제부터 이 설이 전해져 내려 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데, 1931년 김정래(金鼎來)가 지은 조선불교선교양종제일수사찰대본산경북달성군공산면동화사적비(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寺刹大本山慶北達城郡公山面桐華寺蹟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동화사는) 생각건대 극달존숙(極達尊宿)께서 부악(父岳)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고 유가(瑜伽)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때는 신라 소지왕 15년 계유년(493)이었다.” ‘극달’이라는 법명의 스님은 일반 사서류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유독 이쪽 지역, 즉 팔공산 일대의 사찰과 관련하여 그 이름이 보이고 있을 뿐이다. 갓바위부처님으로 유명한 선본사(禪本寺)에도 극달 화상이 491년에 창건하였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다. 그런데 493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572년) 이전의 시기이므로, 이때에 과연 동화사가 창건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게 지배적이다. 하지만 극달 화상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특히 ‘공산의 개조’로 추앙받고 있다는 점은 불교사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다. 둘째,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832년(흥덕왕 7년) 현덕왕의 왕자인 심지왕사(心地王師)에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영심대사(永深大師)에게 전해졌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心地)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첨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는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 홍진(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 보조국사는 호국불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동화사 중창에 크게 공헌하여 동화사와 염불암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또 고려 말기 대표적인 고승인 홍진 국사는 동화사를 하안소(下安所)로 삼고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현재 해탈교 건너편에 국사를 기리는 부도가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 (1606) 유정(惟政) 사명대사, 숙종 3년(1677) 상숭(尙崇) 대사, 영조 8년(1732) 관허(冠虛), 운구(雲丘), 낙빈(洛濱), 청월(晴月) 대사 등이 각각 중창 중건하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상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조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 근래에 들어와 동화사는 두 차례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1976년의 금당선원의 건립이 그 첫 번째 전환기다. 기존의 낙후 되었던 금당암을 해체하고 새로이 건립한 이 선원은 이제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 수행 도량으로 자리 잡을 만큼 빠르게 성장하였다. 1992년 통일약사대불(統一藥師大佛) 조성은 두 번째 전환기로 볼 수 있다. 총 5,000톤에 달하는 원석 자재가 소요된 이 불상은 이제 맞은편의 통일대전과 함께 팔공산의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이 대불은 팔공산의 전통적 약사 신앙과 민족 통일에로의 의지를 결합시키고자하는 의도 속에서 조성되었으므로 호국불교의 전통과 연계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동화사의 가람 배치 동화사는 크게 대웅전 영역, 무마제전과 극락전이 있는 선원 영역, 그리고 근래에 새로 조성된 통일대불 영역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웅전 영역 - 대웅전, 봉서루, 심검당, 강생원, 원음전 등 중요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그 뒤편에 조사당, 칠성가그 산신각과 영산전이 있다. 대웅전 영역에서 오른쪽으로 400m쯤 떨어진 지역에는 극락전과 함께 2기의 석탑이 위치하고, 그 오른쪽으로 금당선원과 요사가 위치한다. 통일대불이 있는 공간은 통일대불을 중심으로 성보전시관과 관련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동화사의 전각 ○ 금당선원 극락전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대웅전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 영산전 ○ 조사전(祖師殿) : 동화사를 창건한 극달 스님의 진영을 비롯해 전부 27폭의 진영이 모셔져 있음 동화사의 선원 ○ 금당선원(金堂禪院) 수마제전(須摩提殿)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호 불상 ○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 보물 제243호 2. 동화사 산내 암자 가. 염불암(念佛庵)
염불암(念佛庵)은 동화사에서 서북쪽으로 약 2.8km 떨어진 곳으로, 팔공산 남쪽 기슭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지금의 법당 뒤에 있는 큰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이곳에 암자를 짓고 염불암이라 하였다고 전함 동화사 사적기에 의하면 928년(경순왕 2) 영조선사(靈照禪師)가 창건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중건하였다고 전하나, 『조선사찰사료』에는 1612년이 창건시기로 기록되어 있다. 928년 창건설을 뒷받침할 자료는 없으나, 1220년(고려 고종8)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이곳에서 주석하면서 고덕 대승을 향응하고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때는 존속되었던 암자로 추정된다. 그 귀 1699년(숙종 25), 1803년(순조 3), 1841년(헌종 7)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는 1936년에 운경(雲耕)스님이 중건하였고, 1962년 혜운(慧蕓)스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역은 좌우의 능선으로 에워 쌓인 지형에 자리하며, 높은 축대를 쌓아 사역을 조성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요사가 1동씩 배치되어 있다. 경내 중앙에 청석탑이 위치하며, 극락전 동북쪽에는 마애불이 조성된 염불바위가 있고, 극락전 서쪽으로는 산령각이 있다. 서쪽에 위치하는 요사는 본래ꡐ서당(西堂)ꡑ이었으나, 근래에 ꡐ수월당(水月堂)ꡑ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극락전 오른쪽 뒤에는 염불바위가 있다. 염불바위의 남면에는 문수보살, 서면에는 아미타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들은 문수보살이 조각하였다고 전해진다.
법당 앞 청석탑(靑石塔)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 되어 있다. 현재 탑신이 결실된 채 옥개석만 남아있다. 재질은 흑색 점판암으로 지대석 이외에는 기단이 없다. 각 옥개마다 2단의 각형 받침을 갖추고 있고, 상면에는 1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옥개석은 두께가 얇고 낙수면은 평박(平薄)하다. 네 귀퉁이의 전각은 반전이 심하여 매우 경쾌한 느낌을 주는데, 해인사 원당암 청암석과 같은 계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높이 1.4m에 13층으로 구성된 이 탑은 옥개석의 체감률이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넓은 지대석 위에 매우 안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 양진암(양진庵) 양진암은 동화사에서 북쪽으로 약 800m쯤 올라간 곳에 있다. 조선 영조 19년(1743년) 무주국사(無住國師)가 창건하였으며, 그 뒤 광무 2년 (1898년) 춘파(春坡) 화상이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이후 건물이 퇴락하여 성련(性蓮) 스님이 이곳에서 선원을 연후 비구니 선원으로 면모를 바꾸었고, 1980년 전각을 완전 개축하였다. 중창유공기(重創有功記)에 “양진공부(養眞工夫)하고 나면 양진암이 어디던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리니 그것이 양진공덕이니라” 라고 적혀 있어 암자의 사명(寺名)이 지닌 속뜻을 새기고 있다. 비구니 수행 도량이다. 가람배치 양진암의 사역은 삼각 형태의 대지 위에 축대를 쌓아 조성하였는데, 축대에 의해 공간은 크게 3분되어 있다. 입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1980년에 지은 관음전이 크게 3분되어 있다. 입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1980년에 지은 관음전이 동향으로 위치한다. 관음전 공간 북쪽으로는 남쪽을 정면으로 하는 육화당이 근래에 새로 건립되었으며, 이들 두 건물 공간을 지난 곳에 양진암의 중심 사역이 조성되어 있다.
중심사역은 삼층석탑이 있고, 그 서쪽에 방향보다 지형에 맞게 건립한 요사인 미소실이 위치하고, 동쪽에는 적묵당이 가람축선에 맞게 위치한다. 탑의 북쪽에는 선원인 인법당이 ꡐㄱꡑ자 형태로 건립되어 있다. 인법당 후면에는 1단 높게 조성된 대지에 법보전이 위치하여 법보전 뒤에는 객실이 있다. 암자 입구에는 암자의 내력은 적은 사적비 2기가 있다. 팔공산법보전불적답공덕비(八公山法寶殿佛積畓功德碑)와 동화사양진암중수비기(桐華寺養眞庵重修碑記) 이다. 다. 내원암(內院庵) 동화사에서 북쪽으로 800m 가량 가면 좌청룡, 우백호의 길지(吉地)에 자리잡고 있음 동화사 사적비에는 조선 인조 4년(1626) 유찬(留贊) 스님이 창건하였다. 그 뒤 순조 27년 (1827)에 무월(霧月) 화주 중건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1960년 무렵 장일(長一) 스님이 이곳에 비구니 선원을 열었으며 1966년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내원암 인법당은 1827년(순조 27)에 지었으며, 앞면 6칸, 옆면 4칸 규모에 동쪽과 서남쪽에 각각 덧대어 증축하여 ‘ㄱ'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형태로 공포는 굴도리식이다.
내원암 관음전은 1966년에 지었다.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에 내진주가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사용하여 전각을 올렸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형태로 이익공 형태의 공포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후벽에 접해 불단이 조성되어 있고, 그 위에는 후불탱을 배경으로 아미타주존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또한 측면과 측벽에는 칠성탱산신탱신중탱을 봉안하고 있다. 라. 부도암(浮屠庵) 동화사에서 북쪽으로 약 500m쯤 오른 곳에 위치하며, 좁은 대지에 높은 석축을 많이 쌓아 사역을 조성하였다. 본래 개울 건너 서편 기슭의 부도군 근처에 자리잡고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이건하여 1960년에 정비하였다. 부도암이란 암자이름도 부도가 있는 곳에 암자를 지었다하여 부도암이라 함 조선 효종 9년(1658년) 도오(道悟)스님이 창건하였다. 그 뒤 정조 14년(1790년) 춘성(春城) 화주가 중수하였고, 1960년 완전 개축하였다. 부도암은 원래 개울 건너 서쪽 산기슭에 12기의 부도가 있는 곳에 있었으나 뒤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비구니 수행 도량이다.
부도암 관음전은 1960년에 지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에 내진주가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은 다듬돌 주초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익공계의 건물로 외부는 1출목으로 표현하고 위에는 용두로 장식하였다. 내부 불단은 뒷벽에 접해서 마련되어 있는데 유리장 안에 관음보살좌상 및 후탱불이 봉안되어 있고 그 밖에 신중탱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관음보살좌상은 화불이 있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옷자락은 화려한 영락(瓔珞)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비로암(毘盧庵) 동화사 용호문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위치 동화사 사적기에는 비로전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1591년(선조 25) 서일(瑞一) 화주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로암 석탑과 비로자나불 등 남아 있는 성보로 볼때 창건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며, 동화사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암 대적광전에서는 신라 흥덕왕때 심지대사가 조성한 보물 제244호 석조 비로자나불이 봉안 되어 있음
비로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은 대좌와 광배까지 갖추고 있으면서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 비로자불 양식의 전형적인 예로서, 생동감이 줄어진 단아한 상호에 통견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규칙적이며 얇고 평판적이다. 어깨는 현격하게 좁아진 형태이며, 평판적인 가슴께에는 군의(裙衣)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주형(舟形) 거신광배로 주변에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팔각 삼단대좌로 상대석과 하대석에는 연화가 배치되어 있다. 이 불상은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보물 제247호 삼층석탑과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863년(경문왕 3) 무렵에 민애왕을 위해서 조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높이 372cm의 이 삼층석탑은 민애왕의 원당(願堂)이었던 비로암 앞마당에 있는 석탑으로 경문왕 3년(863)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석탑이라 하여 일명 ‘민애대왕석탑’이라고도 불린다. 이중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이 올려지고 상륜부에 노반, 복발, 보수가 남아 있는 일반형 신라 석탑이다. 보물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67년 도굴로 인해 해체 복원하였다. 비로암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에 지붕은 맞배지붕 형식이다. 전후면의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계 건물이다. 안에는 중앙에 팔각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석조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은 18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조 비로자나불상은 보물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 약수암(藥水庵) 약수암은 본래 약사전이 있던 옛터에 1970년 암자를 새로 짓고 약수암이라고 부른다. 약사전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산신각이 있다. 약수암이란 이름은 부근의 구세약수(救世藥水)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법당에는 옛 이름인 약사전(藥師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약수암은 동화사 입구의 해탈교에서 오른쪽으로 700m 가량 가면 구세 약수터가 있고, 약수암은 여기서 다시 50m 떨어진 좌측 산허리에 위치해 있다. 약수암의 사역은 높은 석축에 마련된 계단을 오르면 중앙에 약사전이 있고, 그 좌우에 요사가 3동 배치되어 있다. 약수암 약사전은 1970년에 지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에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 형태이다. 천장은 연등 천장으로 바닥에는 다다미를 깔았다. 건물의 전면에는 익공우설이 없다. 내부에는 후벽에 접해 불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중앙에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불단과 측면에는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약수암 산신각(山神閣)은 1970년에 지었으며, 앞 옆면 각 1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 형식이다. 내부에는 후벽에 접해 불단이 마련되고 벽에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3. 제9교구 말사 교구종회의원 현황 팔공산 동화사 말사 - 파계사, 부인사, 북지장사 등 129개 포교당 - 보현사(중구 남산동), 금산사(동구 효목동), 보금사(동구 불로 동), 청량선원(수성구 만촌동), 칠성관음사(북구 칠성동) 산내암자 - 부도암, 내원암, 양진암, 염불암, 비로암 4. 기타 가. 당간지주 : 보물 제254호
인약대사 비각 옆에 있음. 당간지주는 폭 74㎝, 높이 3.1m 크기의 화강암으로 된 두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음 당간은 본래 사찰의 입구에 꽂는 기당의 일종으로 사찰에서 기도와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당간 꼭대기에 깃발을 단다. 동화사 당간지주는 동화사의 창건 연대와 비슷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하며, 보물 제2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 부도(흥진국사부도)
금당선원 입구에서 조금 아래에 일련의 문화재군이 있다. 그 가운데 뒤쪽 소나무 아래에 한 기의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원래 동화사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도학동의 내학 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으로 도학동 석조부도라고 한다. 일명 흥진국사라고 불린다.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601호로 지정되어 있다.되어 있다. 다. 마애불좌상
남쪽 입구 암벽위에 새겨져 있음. 자비로운 모습으로 향미촉지인을 하고 있는 이 마애불좌상은 몸체가 106㎝로 아담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마애불좌상은 두 발은 오른쪽 다리를 대좌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특이한 유희좌(유희좌)를 취하고 있고, 대좌에는 구름 무늬를 새겨 사실적으로 표현해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조각 기법이 화려하고 세련되어 9세기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빼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마애불좌상은 동화사와 인연이 깊은 심지 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전해진다. 보물 제243호로 불상의 높이 106㎝, 대좌 높이는 39㎝, 그리고 광배 높이는 105㎝이다. 라. 금당선원 동, 서탑 금당선원 동탑 : 보물 제248호 - 863년에 세워졌는데 1957년 해체수리 하였다. 이 동탑은 극락전 측면 오른쪽에 위치한 삼층 석탑으로 높이 562cm이며, 탑신부는 우주를 모각한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동탑 보호 난간 안에는 석등 하나와 상석이 함꼐 놓여 있다. 금당선원 동탑은 보물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당선원 서탑 : - 극락전 측면 왼쪽에 있으며, 동탑과 짝을 이루고 있음 서탑은 높이 524cm, 기단 폭 300cm, 탑신은 동탑과 거의 같고 상륜부에는 반과 양화만이 가늘고 긴 찰주에 꽂혀 있다. 서탑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57년 해체 보수때 1층 몸돌에서 99개의 작은 탑과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조선 말기에 방산 허훈이 지은 '금당탑기'에 "신라 경문왕이 민애왕을 축복하기 위해 사리 7과를 봉안하여 석탑을 세웠는데 헌강왕 원년(875)에 삼강 대사가 탑을 금당으로 이안했다" 라고 적혀있다. 마. 사명대사 유물 현재 동화사에는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서 승군을 지휘했을 때의 상황을 알려주는 영남도총섭 인장, 승병을 지휘할 때 썼다는 소라나팔, 금강저, 수저, 요령 등의 유품이 전해져 오고 있다. 사명 대사는 조선 선조 때 고승으로 임진왜란때 승군을 통솔하여 어려움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던 분이시다. 속성은 임씨, 자는 이환, 호는 사명, 또는 송운, 시호는 자통홍제존자이다. 조사전에 봉안된 사명 대사 진영은 간결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 등으로 대사의 인품과 권위를 느낄 수 있다. 진영의 제작 시기는 가경년간(1796~1820)이라 표시되어 있다.
사명당대장 진영(泗溟堂大將 眞影) 규격(가로×세로) : 78.8cm × 122.9cm 등받이가 높다란 의장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가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기백을 강조해 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기품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좌측 하단의 묵서명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이란 연호가 있어 1610년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료이다. 바. 八公山桐華寺鳳凰門 마애불좌상 바로 좌측에 위치
사.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 -1992년에 낙성되었으며, 높이가 30m에 이르는, 7천만 겨레의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고 민족자존의 새시대를 열어나가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이 석조대불의 원석은 약 300톤의 규모로, 8등분으로 조성되어 조각 되었다고 한다. 아. 동화사 부도군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부도밭에 현재 10기의 부도가 있다. 이 부도군은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형태도 종형(鐘形)과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기본으로 하는 등 다양하다. 부도의 석재는 화강암이며 보존 상태는 양호하고, 규모는 대체로 높이 1.41m~3.32m 정도이다. |
첫댓글 마중물님이 올려주신 사진중에서만 끌어 올렸는데, 배치가 맘에 드실지 몰겠네요. 더 올릴 사진있음 답주세요.
참잘하셨네요 백점만점에백을 더뿌랏스해서 아주후하게점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