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술독에 빠지다
부산 서면 ‘산야‘
시끌벅적이 위안이 되는 산야에서
김해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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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현주, 김해경, 배재경 시인, 정훈(문학평론가), 원무현 시인
‘사람의 감정은 어쩌면 사람을 창조한 신의 지문인지도 모른다’고 누가 말했는데 내 어느 날의 감정은 도시의 정신없는 복잡함을 갈구 하다가 또 어느 날엔 아무도 없는 산골 외딴집에 골몰이 숨어 있고픈 감정을 신은 어떻게 해석 할 런지 궁금하다.
도시의 밤은 너무 밝다.
낮보다 더 밝은 것이 도시의 번화가이다.
번화가 한 가운데 서면이 있다.
서면에 서면 밤이지만 밤 같지 않고 왠지 모든 것이 휘황하고 들썩이고 두근거린다.
잠깐 동안, 번쩍이는 네온불빛 아래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이곳에서 내가 아는 집은 아무데도 없다.
그 수많은 곳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옷도 사고 책도 샀지만 막상 서로 아는 사람처럼 찾아갈 곳이 있나 생각하면 없다.
서면에 산야가 생긴지 20년. 그동안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이집을 거쳐 갔다. 산야는 20여 년 전 서면에 푸짐한 집이라는 술집이 생기기 시작할 때 즈음 생긴 곳 중 한곳인데 영광도서 앞 좁은 골목 안에 개업을 하고 6~7개월 후 우연히 부산의 아동문학가이신 정한길(진채)선생님이 한두 번 오시더니 단골이 되셨다. 그리고 지금은 원동으로 제2의 삶을 찾아 떠나신 강갑재 시인과, 고향 전라도로 거처를 옮기신 정형남 소설가 등 부산의 글깨나 쓰신다는 분들이 단골이셨고 이후 많은 언론인과 예술가들이 산야에서 토론과 정담을 나누곤 했다. 지금은 멤버가 조금씩 바뀌어 신진식 시인이 자주 들리고 또 새로운 얼굴들이 산야를 찾고 있지만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끔씩 찾아온다고 주인 아짐은 이야기 한다.
항간에는 저녁 술시에 산야에 가면 문학인이나 예술인들이 무조건 있다고 소문이 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일반 사람들 중에도 문화쪽으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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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에서 문학행사나 모임이 이루어진 뒤풀이는 어김없이 산야에서 하는 걸로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꼭 정해진 룰은 아니었지만 몇몇의 산야 팬들로 인한 수순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일부 작가들이 잘 가는 몇 군데 술집이 있기도 했다. 술집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었으니 자기가 편한 곳으로 자주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중에서 산야는, 푸짐한 집이라는 닉네임이 있지만 정작 식사를 위한 음식이라기보다, 배불리 밥을 먹고 난 뒤 가서 간단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이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몇 가지의 정해진 안주와 소주두병에 15,000원. 정작 작가들은 음식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으니 저렴한 가격에 편한 사람들과 술과 예술을 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넓지 않은 실내는 산야 단골 시인들의 시가 액자에 담겨져 있고 신문에 난 소식을 스크랩해서 붙여놓은 것도 있다.
또 한곳에는 작가들이 와서 주고 간책들이 가득 쌓여있는 것을 보니 과연 이곳이 작가들의 사랑방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일반사람들이 술을 마시러 왔다가 무슨 술집에 책이 쌓여있고 온 벽에 시화가 걸려있냐며 의아해 하다가 주인마담의 설명을 들으며 저기 앉아 있는 분이 이 시를 쓴 시인이고 또 저기 앉아있는 분이 이 동시를 쓴 시인이라고 하면 정말 그러냐고 신기해하며 다음에는 시를 좋아하는 친구랑 다시 와야겠다고 한다.
술집이라는 공간과 예술이라는 커다란 허구가 만나서 복작대다가 지글대다가 사람냄새 가득한 시들을 뿜어내는 곳간이 되었다.
어스름 해 지고 취기가 거나해지면
서면 영광도서 앞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 곳엔 세상의 무서운 풍문에 떠밀려온
갖가지 바닷것들과
오밀조밀 맛난 것들이 펼쳐진 산야가 있다
태평양 뜨거운 햇살에 등 지지다
잠깐의 실수로 낚싯줄에 옭아 매인 밍크고래
포항 먼 바다에서 까불대다
해풍에 얻어맞고 도망 온 과메기
송정 지나 기장,
기장하고도 질퍽한 대변에서
날아와 드러누운 미역채
온 종일 시끌벅적 부전시장 좌판에서
소리소리 지르다 달려온 다시마나 톳등이
탱탱하게 잘 마른 김과 어깨동무하고
이것들을 쌈으로 잘 싸먹으면
비린내 무진장한 시 몇 편쯤 낚을 수 있을텐데
오늘도 해 저문 서면바다에는
집어등 환한 배들이 선착장을 찾아 헤매고
어느새 닻을 내린 밤 갈매기들
던져놓은 낚싯대를 조율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오래전 던져진 나의 그물은
아직도 엉키기만 한 채 당겨지지 않는다
- 김해경, 바다를 낚는다(산야에서)
오래전 시로 동인 모임에 참석 했었다. 한달에 한번 하는 모임인데 회장은 임종성 시인이고 강갑재, 강문출, 김곳 시인 등 보통 7~8명이 식당이나 찻집 같은 곳에서 모여 시 토론을 한다. 모인 시인들 제 각각의 시풍이 다 다르다 보니 생각도 다르고 시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서 토론이 뜨거웠다. 시간이 갈수록 그 열기가 가시지도 않고 더 치열한 토론이 하고 싶은 강갑재 시인이 자리를 옮기자고 제의를 한다. 그러면 당연히 다음은 산야로 향했다. 강갑재 시인은 술도 좋아하지만 산야의 진골단골이다. 그래서 강갑재 시인과 함께 가면 안주가 조금 특별한 것이 나올 때가 있다. 우리가 산야에 들어서면 보통시간이 9시가 넘어 있다. 왁자한 소음과 술 냄새에 쩔어 있는 내부에는 벌써 반술이 넘은 손님과 주인 마담의 웃음소리, 또 곳곳에 아는 얼굴들이 앉아서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취해 있다. 아담한 키의 마담이 자리를 안내하고 먼저 온 손님 중 아는 분이 있으면, 들어서는 우리를 향해 손 한번 흔들고는 같이 합석하자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도 못 다한 이야기가 있는지라, 사양하면 어느새 우리 자리로 술을 보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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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에 들어선 우리들은 열띤 시 토론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임종성시인은 가방에서 자꾸만 습작한 작품을 읽어보라며 우리에게 건네고 강갑재 시인은 나오는 안주마다 시적인 소재가 충분하다며 우리에게 이걸로 시를 써봐라 저걸로 시를 써봐라 숙제를 안겨준다. 한번은 음식이 담긴 쟁반을 가리키며 달이라 생각하고 시를 써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장난처럼 들리지 않고 너무도 진지해서 그 자리에서 시가 울컥울컥 나올 것 만 같았다. 그렇게 우린 그 왁자한 실내에서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쫑긋하고 그러다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박장대소 하고,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보면 어느 듯 시간이 흘렀는지 술을 마시지 않는 임종성시인이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시간이 늦었으니 집으로 가려는 것이다. 우린 가는 사람은 잡지 않는다며 하던 이야기에 다시 몰두 한다. 그러다보면 마담이 왔다 갔다 하며 우리 이야기에 살짝 끼어들기도 하고 맛난 새로운 안주도 가져다준다. 그냥 편하게 내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 같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아까 우리에게 술을 보낸 분이 보이면 우리도 답례로 술을 보내고, 서로 감사해 하고 산야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정경이다.
술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시계는 11시를 가르키고 그때부터 집이 먼 사람들은 엉덩이가 들썩인다. 일어서야 하는데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혹시 내가 떠난 후에 더 재밌고 귀한 이야기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며 지하철이 끝나기 전에 일어서야 하는데 하다가 조금 있다 보면 그 마음도 잠시.
술자리가 너무 좋아 아예 지하철은 포기하고 분위기에 휩쓸린다.
술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문학에 취하고.
밤은 짙은 코발트색으로 변해 가는데 우리의 가슴은 아직도 활활이다.
크레파스로 그려진 소녀를 보았다.
소녀의 머리위에는 새가 한 마리 있고 새는 꽃을 물고 있다.
가슴에 하트가 잔뜩 그려진 셔츠를 입고 볼이 발간 소녀의 그림이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소녀가 술을 마시진 않았을 거라.
그럼 머리 위의 새를 사랑하는 건가?
꽃을 사랑하는 건가?
볼이 발간채로 산야에서 나와 지하철이 없는 지하도를 향하는 내 셔츠위로 노랑나비가 팔랑인다.
난 오늘 고요가 한 점도 없는 곳에서 내 삶을 보았다.
첫댓글 안주가 푸짐한 곳이더군요
사진에 실린 시인들의 얼굴이 환하게 좋습니다.~
액자에 실린 한 편의 시를 읽는 재미도 쏠쏠 할것 같아요 ^^
오랜만이네요. 얼굴 좀 보입시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