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작스럽게 서울대환경연구소에 근무하는 우모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일본손님인데 저어새에 관한 탐조 부탁을 받아 이틀간 강화도 이곳저곳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든 기자분이었습니다.
각시바위를 비롯해 여러곳을 다녔습니다.
신문기사가 하나 더 있는데 보안상 비공개로 하고 하나만 실습니다.
야마시로상과 짧은 영어로 오키나와와의 역사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들의 역사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더군요..
반전,평화의 상징적인 도시로 거듭났다니 인상적이군요.
참고로 간단하게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 퍼 올립니다.
오키나와의 역사
12세기 이래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류큐는 14세기에 들어 중국과 책봉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하면서 독자적인 왕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뒤 중국, 일본, 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다.
15세기 임진왜란으로 인한 손실을 채우려는 일본은 류큐를 점령한다. 1609년 일본 샤쓰마한에 정복되어 일본과 중국의 공동속국이 되었다가, 1879년 메이지 정부의 오키나와로 편입되었다.
1945년,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의 최후 격전지가 된다.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기까지, 3개월의 짧은 전투에서 오키나와 주민 4분의 1인 12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여자는 능욕당하고 남자는 사지가 찢겨 죽는다’며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이른바 군민공사(軍民共死), 오키나와를 지켜준다던 일본군에 의해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집단학살을 당한 것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지배를 받는다. 오키나와의 1960년대 후반 이후, 일본 본토에서 행해진 베트남 반전운동과 더불어, 오키나와 문제는 일반인에게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을 위해 오키나와는 B52가 출격하는 후방지원 기지였다.
1972년 오키나와는 미군기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일본으로 다시 넘어갔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되었을 때 대부분의 오키나와 사람들은 환영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전투기가 베트남 전쟁에서 무고한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가해자’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후 오키나와는 미군기지 반대운동, 평화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