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고개-소문난 순댓집 / 이현주
떡볶이가 1개 100원. 28년 전의 가격을 그대로 받는 작은 가게가 있다. 순대나 튀김 어묵은 조금씩 올렸는데 떡볶이만은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게다가 고추장도 직접 담근 고추장을 사용한다. 수입 고추는 매워서 요즘 학생들이 잘 먹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가게 주인 할머니는 올해 66세의 권점순 여사. 이 동네에서만 45년째 살고 있다. 딸 넷에 끝으로 아들 하나를 겨우 얻었는데, 첫 딸을 낳았을 때 시댁에서는 아들이 아니라고 출생신고도 해주지 않았고, 제사는 물론 집안행사에도 발길조차 허락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여학생들이 오면 “공주야, 공주야!” 한다. 공주들이 먹는 모습이 그저 예뻐서 이런저런 말을 걸기도 하고, 이문도 없을 떡볶이를 덤으로 얹어주기도 한다. 떡볶이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게 3평뿐이 안돼도 28년 전에 달세만 50만원이었다아이가. 2천만원 걸고……. 그 당시만 해도 이 동네가 워낙 유명해가꼬, 다디미방 한 칸 달세가 30만원, 40만원 했는기라. (연탄)불이 들어오길 했나, 부엌이 있길 했나, 그래도 달셋방 구할라카믄 방이 없었제.”
영주시장에서 동광동 인쇄골목으로 이어지는 옛 논치시장 삼거리 코너에 위치한 순댓집 할머니 권점순 여사의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100원짜리 떡볶이 팔아가꼬 하루 매상이 50만원씩 올라왔다카믄 장사 끝내주게 했는기라. 일하는 사람 둘 데리고 딸내미하고 너이서 장사를 했는데……. 이 일대가 사창가여가꼬, 밤에 업소에 나가는 아가씨들이 억수로 많았는기라. 1칸짜리 다디미방서 밥이나 해물 수 있었겠나? 떡볶이랑 순대로 대충 때우고, 포장해가꼬 들고 가기도 많이 했는기라.
배달도 했다아이가! 저 우에 중구청하고 메리놀병원에서는 한 번 배달시키면 보통 3만원어치씩 시킸데이. 소문이 나가꼬 저 밑에 세관까지도 배달나갔다아이가.
그땐 밤낮으로 하루도 안 놀고 장사를 했는기라. 코피가 나도 닦을 새가 어딘노! 그래도 힘든 줄 몰랐데이.”
한쪽 벽 위쪽에 ‘Goldstar’ 제품의 낡은 벽걸이 에어컨과 ‘하면 된다’는 문구가 적힌 묵직한 액자가 나란히 초상화처럼 걸려있다.
다른 벽면엔 ‘동광동 새마을금고’ 달력이 현재가 2011년 2월임을 확인시켜 준다.
‘Goldstar’ 상표와, ‘하면 된다’ 액자와, ‘2011년 2월’의 시차가 혼돈스럽게 머릿속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에어컨 아래로 걸린 메뉴판 가격이 또다시 눈길을 잡는다.
선지국밥 3천원, 대구찜, 가오리찜, 명태찜이 각각 5천원이다. 병어회무침도 작은 것이 3천원이고 큰 것은 겨우 5천원. 밑지는 장사일 것 같은데도 할머닌 연신 신이 나서 옛이야기해가며 푸짐한 찌개 한 냄비를 끓여와 옆 테이블 손님상에 내어놓는다.
메뉴에도 없는 안주다. 매일같이 말동무하듯 들르는 단골손님을 위한 특별안주다. 특별안주 가격은 설마 다르겠지 싶어 물어보았더니 역시나 오천 원이란다.
참으로 고마운 가격이다.
순댓집 바로 앞 도로는 오래전부터 시련의 땅, 영선고개다.
영선산 착평공사 이후 산이 사라지고 도로가 넓어진 뒤부터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지만 초량왜관이 있던 시절엔 대낮에도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할 만큼 으스스한 오솔길이었다.
숲이 우거져 대낮에도 하늘을 가려 어두컴컴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왜관담장을 넘나들다 들킨 사람들이나 간음한 자들이 참수형을 당했던 곳이 근처 소나무 숲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숲에서 처형을 당했기에 그 숲을 ‘오열의 숲’이라 했다.
지금은 중구청과 메리놀병원 앞으로 놓인 도로를 영선고갯길이라 하고 있지만, 원래 이 도로는 ‘유엔고개’라 불리었다 6.25 동란 때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아스팔트길을 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 도로를 ‘유엔도로’ 혹은 ‘유엔고개’라 했다고 한다.
옛 영선고개 주위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였다. ‘갑을여관’ ‘장충여관’ 등 숙박업소와 ‘어을빈약포’ ‘에비스약포’ 등의 의료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번화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집들의 대부분이 그 당시에 지어졌으며, 당시의 전형적인 일본식 여관 중 하나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집성촌 아래쪽으로 한국인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다.
집의 외형만으로도 일본식 가옥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초가집 혹은 판잣집이었으니 내부적 사정이야 오죽했을까? 일본인들이 사는 거리는 물론, 일본인 전용병원 등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철도공사, 항만공사, 다리공사 등 각종 공사현장에 강제 투입되어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했다. 영도다리 공사시에만도 17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니 실로 이곳 사람들은 해방이 되기까지 식민지 속의 식민지 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아픔을 겪어 온 동광동 일대에 지금은 그 자식들과 손주들이 살고 있다. 권점순 여사도 시집오고부터 줄곧 45년을 이곳에서 살고 있다.
남의 집살이, 식당일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해서 모은 돈으로 작은 가게를 낸 것이 벌써 28년째 하고 있는 순대집이다.
당시만 해도 시내와 가까운 이곳은 번화가였다. 중구청과 메리놀병원 직원들도 이 길을 지나 출퇴근을 했고, 경찰서, 신문사, 은행, 호텔, 세관 등이 근처에 밀집해 있었다.
게다가 사창가 밀집지대여서 밤낮없이 이곳은 붐볐다.
그렇게 화려했던 동광동 일대는 사창가가 사라지고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사람들도 사라져 갔다.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이 동네 골목엔 어린 아이들 보기가 힘들어졌다.
IMF이후에는 가게세도 20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내렸고, 달세도 50만원에서 20만원으로 내려갔단다. 채 십만 원도 안 되는 하루 매출로는 내린 달세마저도 맞추기 힘들지만 그래도 그만둘 수는 없단다. 오래도록 잊지 않고 찾아주는 손님들, 아니 이웃들 때문이란다. 이제는 돈보다도 운동 삼아 한다며 구부렸던 허리를 쭉 펴 보인다.
순댓집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영주동 방면으로 걷다보니 가파른 계단이 몇 개나 나온다.
이전에 저 아래가 바다였을 것을 상상하니 계단 끝자락을 끌어올리고 싶어진다. 펄떡이는 물고기가 낚여 올 것만 같다.
*영선산은 쌍악(雙岳)으로 영선산과 영사관산으로 나뉘어 불리었다. 1909년 일본은 대륙침략의 야욕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 이 산을 깍아내려 바다를 매립, 지금의 중앙로 일대를 평지로 만들었다. 이 공사로 초량이 종점이었던 경부선철도 부산본역을 중앙동까지 연계해 부산항 선박의 물자와 인력을 육지의 경부선 철도로 바로 연계, 대륙 침략의 터전으로 이용했다.
*왜관은 금녀(禁女) 구역이었으므로 은밀한 매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사실이 발각되면 처벌 또한 엄격했다.
*어을빈약포는 미국인 선교사가, 에비스약포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의료기관이었다. 어을빈약포에서는 ‘만병수’라는 약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었는데, 이를 시샘한 에비스약포에서 ‘만병약수’라는 비슷한 이름의 약을 만들어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상권을 빼앗아갔다. 이에 어을빈이 상표권 침해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결심공판까지 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