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의 진화
2004년 대한민국 홍보 로고
2002년 월드컵 태극기
2002 웅비하는 대한민국의 상징
1949년 대한민국정부 지정 태극기
* 현재의 태극기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1949년 1월「국 기시정위원회」
(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
오늘날의「국기제작법」을 확정ㆍ발표하였다.
*태극기의 의미
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 (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는 땅을, 감괘는 달과 물 을, 이괘는 해와 불을 상징하며, 각각 정의, 풍요, 생명력, 지혜를 뜻 한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50년 중앙청 태극기
6.25동란이 일어난 뒤
한미연합군은 9월 27일
수도탈환작전을 성공시키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1950년 학도병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무력남침하므로써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불과 5년만에 동포끼리 전쟁을 해야만 하는 비극을
남겼다. 이때 3차 학도병을 지원한 병사들이
부산주둔 육군부대에서 김일성 정권을 기필코 응징하고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맹세의 글귀를 태극기에 빽빽하게 남겼다.
1950년 김구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안창호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친필 태극기이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과 인력과 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광복을 완성하자"라는 글귀를 썼는데
이 말을 어디에서나 한국인을 만나는데로 전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1945년 광복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대한민국이 해방되었다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지역에서 활동을 했던 광복군들은
함성을 높이 외치며
그동안 항일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던
태극기 위에다 서명하거나 글귀를 남겼다.
이 것을 통해서 그 동안 설움, 그리고 광복의 기쁨,
희열, 희노애락의 모든것을 단편적으로 나마
느낄수 있다.
1923년 임시정부
상하이 임시정부가
보관하던 태극기
1920년 독립진군기
1920년대 독립군이 시용하던 독립진군기로써
독립군들은 이 태극기를 앞세우며
우렁찬 나팔을 불면서 피나는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전투에 나가 승리의 쾌거를 부르며
자주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1919년 한인자유대회(미)
1919년 4월 16일 미주 지역 동포들은
3월 1일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필라델피아 독립관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고
하루속히 일본을 한국땅에서 몰아내자는
독립결의 시위를 벌렸다.
1919년 평양숭실학교
1919년 3월 1일 정오에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시간을 맞추어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 김건은
동료 학생들과 이 태극기를 만들어
학교 게양대에 높이 게양하므로써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있음을 알렸다.
1919년 3.1운동 목판
1919년 3월 1일 항일운동 시위 때
대량으로 태극기를 나누어주기 위해 만든 목판
1906년 고광순 의병장
1906년 전라남도 구례일대에서 활약한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싸울때 사용한 태극기이다
그는 굳은 신념으로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 는
글자를 이 태극기에 써 넣었다.
1900∼1905년 박기준
1900∼1905년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박기준이 소장하고 있던 태극기이다.
박기준은 고종황제 광무 9년에
통정대부(정삼품) 벼슬을 지낸
종로구 홍지동 박영인의 조부이다.
정사각형 80㎝
1900년 항일 독립운동
1900년 무렵의 태극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단호히 저항하면서
굳건히 항일운동을 펴자는 글을
태극기 양쪽에 새겨진 항일독립운동태극기.
일본은 이 태극기를 빼앗아갔다가
1967년에 반환하였다.
1900년 파리박람회
1900년 프랑스에서 열렸던 파리박람회장
한국관에 게양되었던 태극기 모습이다.
파리박람회특파대사는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이었다.
1898년 독립신문 제호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최초의 의사였던
서재필 박사에 의해
1898년 7월 1일부터
발간된 독립신문
제호에 실린 태극기
의 모습.
당시 독립신문의
제호 태극기는
발행될 때마다
그 모양이 달랐는데
아마도 태극기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86-1890년 O.M.Denny
고종 황제가 조선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데니(O.M.Denny) 에게 하사한 태극기로
우리나라보관 가장 오래된 실물 태극기이다.
1884년 스미드소니언박물관(미)
실물크기(53×36cm) 중 가장 오래된 국기로써
현재 미국의 국립박물관(스미드소니언)이
소장하고 있다.
1882년 태극기_시사신보(일)
고종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하였고,
박영효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박영효의 일기[使和記略](新製國旗縣寓樓旗等白質而從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四卦會有受命於上也)에 기록-
1882년 9월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사용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동경발행 「시사신보」에 소개
1874년 고려국기_통상약장유찬(청)
1874년 청나라에서 발간된
'통상조약장정성안휘편' 이라는 책 표지에
그려진 태극문양으로
1991년 해군사관학교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태극문양과 괘의 도형
1392년 고려말 범종의 태극기
고려말 범종의 태극기는
공양왕 때 제작된 것으로써
현행 태극기를 보는 것 같다.
높이 35cm, 직경 30cm의 현행 태극기의 원형이다.
고려말 범종은 1954년 8월
일본 신나천현 소전 원시 최의현군을 통해
기증 받아 입수한 것으로써
일본인 임모씨가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진품이라는 감정서가 포함되어 있다.
1365년 노국공주의 정릉과 고려 공민왕릉의 태극
노국공주의 정릉과
개성에 소재한
고려 공민왕릉
1328년 회암사지 석계 고형석의 태극
고려 충숙왕 15년
회암사지
석계 고형석에
우리전통
‘회돌이 태극’이
정교하고 생동하는
형체로 양각되어
현재까지
잘 보존 되고 있다.
682년 감은사 금당 기단 장대석의 태극
신문왕(신라 31대)때
창건한 감은사 금당 동남쪽 기단
장대석의 태극도형.
감은사는 전란으로 소실되고,
현재는 동서방향으로
두개의 석탑과 기단의 장대석만이
묵묵히 신라 천년왕업의 흥망사를
현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