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제게, 머리에 똥만 찬 아트하우스 무비와 잘 만든 장르영화 중 선택을 강요한다면 전 기꺼이 후자를 따를 겁니다. 솔직함은 미덕이죠. '그래, 나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아니고 못났다 어쩔래? 내가 뭐 어때서?' 류의 뻔뻔함과 솔직함은 정말이지 사랑스럽습니다. 꽉 안아 주고 싶어요. 줄리아 스타일즈와 히스 레저가 주연한 이 영화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이야 둘 다 헐리우드의 스타이지만,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사정은 달랐어요. 줄리아 스타일즈는 이전 몇 번의 영화에 조연급으로 출연한 게 전부였고요(주연작이 한 편 있기는 합니다) 히스 레저는 무려 이 작품이 데뷔작이었죠.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그런 하이틴 로맨스에 불과한 듯싶지만요(실제로 '그저 그런' 하이틴 로맨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사실은, '그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예요. 특히 이러한 장르 영화의 경우에는요. 보기보다 이 부문의 추종자도 많고, 또 정해진 공식에 맞춰 그럭저럭 내다 팔 상품을 만든다는 게 생각만큼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죠. 공식을 이리저리 변주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를 요하는 일이고요. 안 그럴 것 같나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얼마 전 네티즌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놀림 받은 '다세포 소녀'를 떠올려 보세요. 혹자는 이 영화가 '긴급조치 19호'보다 더 못 만들었다는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물론, '다세포 소녀'같은 경우는 이미 원작 자체가 일반적인 하이틴 로맨스의 공식을 따르는 듯 파괴하는 데 포인트가 있긴 했지만,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영화화 자체가 어려운 작품이었죠. 섣불리 보다가는 큰 코 다쳐요. 원작 만화가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지저분한 3류 에로가 아니었다고요. 창작자의 상당한 내공이 필요한 작품이었는데, 이재용 감독은 괜히 손댔다가 그야말로 피를 봤죠. 단순히 키치적인 호기심으로는 보통 수준으로 뽑아내는 것조차 힘든 거였는데, 쯧쯧.
이야기가 샜군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무튼 이 영화는 그러한 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꾸밈없고 정직합니다. 어떻게 보면 뻔하고 심심할 수 있어요. 특히 로맨스나 스크루볼 코미디나 지지고 볶는 연애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겠죠(승률이오빤 이 영화와 전혀 안 맞으실 거라고 전 확신합니다 ^^). 하지만 저처럼 싸구려 할리퀸을 즐기고 헐리우드 하이틴 로맨스에 열광한다면 이 영화의 매력을 부인하지 못 할 거예요. 별로 잘 맞을 것 같지 않는 남녀가 만납니다. 처음에는 토닥토닥 다투다가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되죠. 둘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오해로 인해 헤어집니다. 서로를 잊지 못하고 맥없는 나날을 보내죠. 이 때 우연한 사건의 발생! 혹은 조력자의 출현! 이 그들을 돕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고, 그 이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블라블라블라...... 뭐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 하지만 앞에서도 누누이 언급했듯, 이 영화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영화를 볼 때 무엇을 기대하고 보시나요? 일관된 어떤 것을 고수하는 사람도 있겠고, 영화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도 있겠죠. 이 영화는 자신이 90년대 말 양산된 무수한 하이틴 로맨스중의 하나란 것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하이틴 로맨스에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사랑과 집착에 관한 심오한 성찰? 인간 사회에 있어서 욕망이 가지는 기능? :-P 기껏해야 킬링 타임이 전부죠. 그냥 두어 시간 동안 유쾌하게 웃고 즐기는 게 목적인 영화라고요. 해피 엔딩이 눈에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잠시 모든 걸 잊고 편안한 마음으로 예쁘고 아기자기한 연애담을 구경합니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 나는 다시 구질구질한 일상 속으로 되지도 않는 사랑에 목매달아야 하지만, 적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모든 세상사가 다 해피 엔딩이지요. 그런데 웃고 즐기는 동안에 어라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합니다. 마치 내가 영화 속 아이들 마냥 가슴 두근거리고 화가 나요. 아, 이런 설렘.
그냥 아무 뜻 없이 한 행동이나 말들이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작정하고 의도대로 누군가를 조종한다는 건 참 어려워요.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는 성공적입니다. 많지 않은 예산으로 괜찮은 배우들이 근사한 앙상블을 이루며 좌충우돌 로맨스를 보여줍니다. 글쎄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귀여운데 꼭 나까지 연애를 하는 것처럼 들뜬단 말이에요. 배경도 정서도 다른 이 영화는,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미 이 영화가 어떨지 다 알고 속아준단 말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 속을 준비를 하고 보는 걸요.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플롯, 예상보다 더 상큼한 감정의 이입.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는 모범적으로 잘 만든 장르영화입니다.
덧붙임.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각색한 것입니다. 90년대 말에서 21세기 초, 많은 헐리우드 하이틴물이 고전을 각색하는 데 열 올린 적이 있었죠. 몇 개를 언급해 보자면 '클루리스'는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쉬즈 올 댓'은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참 쌩뚱맞은 번역이죠)'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모체로 하고 있습니다. 이 중 '위험한 관계'는 우리나라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감독이 이재용이군요. 푸훗.
덧붙임2.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혹시나 원하는 분들을 위해 줄거리를 요약해 둡니다. 산부인과 의사 스트랫포드는 일찍 상처하고 두 딸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딸들 중 둘째 비앙카가 참 예쁩니다. 곱게 큰 부잣집 여학생이죠. 인기도 많고요. 하지만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변변한 데이트 한 번 못 해보는 게 이 아이의 가장 큰 고민이랍니다. 반면에 첫째인 카타리나(하지만 그녀는 러닝타임 내내 '캣'으로 불립니다)는 뭐랄까, '억센' 여자입니다. 살랑살랑 애교 떨고 귀엽게 미소 짓는 동생과는 다르게 좀 과격해 보이기도 해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과 언쟁을 벌이다 징계를 받는 것도 일쑤고, 교내 난다 긴다 하는 남학생들과는 죄다 앙숙입니다. 모두가 그녀를 '싫어'하기보다는 무서워하죠. 하지만 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친 적은 없습니다만...아무튼, 아버지는 비앙카에게 '네 언니가 데이트를 하기 전까지는 너 또한 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합니다. 이에 비앙카를 따르는 일련의 남자애들이 어떻게든 캣을 누군가와 짝 지워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괴짜 패트릭이 보수를 받고 이 일에 나섭니다. 접근하는 패트릭에게 캣은 시종일관 무시+경멸조지만, 점차 마음을 열게 되고……등등. 다음은 뭐 굳이 언급 안 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해요. 원작에서 나오는 그 구역질나는 변화가 이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죠.
덧붙임3. 술에 취한 캣이 탁자 위에서 춤을 추는 장면, 패트릭이 운동장에서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부르는 장면은 언제 봐도 멋집니다. 졸업파티는 생각보다 시시해요.
첫댓글 꺄악- 나 갑자기 재희 - 팬 하고 싶어졌어- 멋져 멋져! 부러워!
축-구 ㅇㅑ구 농-구 ㅂㅐ구를 뮤_직_과 함.께 즐ㄱㅣㅅㅔ요.
K , U , C , U , 7 , 5 , 쩝꼽 (추_천_인1234)
회-원ㄱㅏ입ㅅㅣ 3000원ㅈㅣ급ㅁㅐ일 첫-충-전5% 추ㄱㅏㅈㅣ급.
축.구 ㅇㅑ.구 농.구 ㅂㅐ,구,를 뮤,직,과 함.께 즐.ㄱㅣㅅㅔ요.
K .U .C .U .7 .5 .쩎꼼 (추_천_인1234)
회,원,ㄱㅏ입,ㅅㅣ 3000원,ㅈㅣ급,ㅁㅐ일, 첫,충,전5% 추.ㄱㅏ.ㅈㅣ.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