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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입니다. 이번에는 재미난 고추싸움 이야기입니다. 자료들을 정리하는 덕분에 저도 다시 의장님의 글들을 읽게 되네요.
정광훈의 농민운동이야기
농민의 길 통권 5호(2004.03)
노태우 고추태우는 이야기
88년 11월 17일 수입개방반대 전국농민대회
진도·해남 농민은 고추팔러 농협중앙회로 갔다!
해남 장날 고추 한근에 800원. 산이면 황토밭 매콤 맛난 고추생산비 2,300원. 올가을 전국의 고추값은 고자고추값이 뻔하다.
“내 평생 소원은 경운기 10대로 해남땅에서 군청까지 시가행진 한번 해보았으면 하는 것”이라던 새내기 농민활동가 영동이는 바쁘다. 찌는 듯한 한여름 태양볕을 잊은 채 고추말리랴 생산비 조사하랴 경북, 충북, 생산량 파악하랴, 투쟁조직하랴, 투쟁방법 전술연구하랴. 진도 활동가들 만나러 다니랴.
고추파동은 풍년이 들어서 파동이 아니라 수입개방으로 인한 정부 농업정책 부재때문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해남고추의 매운맛으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일념뿐이다.
김영동, 드디어 산이면 농민 200명 동원, 경운기 트랙터 몰고 군청앞으로!
해남 생기고 처음으로 머리에 붉은 띠 두르고 “내 고추값…”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제일 앞에는 트랙터 부착물이 앞뒤에 쟁기며 보기에도 위협적인 뭔가는 모르지만, 트랙터에 붙일 것은 다 붙였다. 경운기 한 대만 시동걸어도 멀미할 정도로 시끌벅적한데, 30대가 동시에 택택거리며 장터에서 군청으로 출전 시가행진을 하는데 그야말로 각오가 대단하였다.
해남공무원이라고 생긴 사람은 군청문을 꼭 잠근채 군청안마당에 싹 모였다. 트랙터로 밀고 해봤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짚단을 태우며 그 위에 고추를 태웠다. 타는 냄새가 고약할 줄 알았다. 안에 들어있는 공무원들에게 타는 고추를 막대기로 풍겼다. 고춧가루를 가지고 아무렇게나 뿌렸다.
그러나 바람이 우리쪽으로 불어 실패했다. 오히려 농민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젠 트랙터, 경운기, 고춧가루로 해서는 안 된다. 모두 모여 군청문을 밀자 바리케이트를 치우고 영차영차 힘을 모았으나 해남군청문을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빗장만 휘어질 뿐 열리지 않았다. 안된다. 모두 문을 들어버리자 영차 영차 그때서야 문이 통째로 떨어졌었다.
그때 해남장에서 군청까지 아스팔트 길로 행진을 못하고 인도 위로 걸어온 겁쟁이 농민도 있었다. 나는 누구누구인지 잘안다. 그들은 지금도 농민운동을 않는다. 이제 해남에서처음 데모했던 회원들은 간뎅이가 부을 대로 부었다. 무섬증 공포로부터 해방이다. 그들은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다.
해방 후 최초로 농협중앙회 접수당한 날
진도는 대파 맛좋기로 유명하고 고추도 많이 심는다. 그러나 맛이 좋은 들 무엇을 하며 때깔이 좋은 들 무엇하랴, 값이 비싸야지!
“이번에 한번 농협을 본때를 보여주자. 농민이 생산한 고추나 농산물을 제값받고 팔아주기는 커녕 농산물 값이 오르면 농협창고에서 내다팔아 값을 내리는 놈들, 이것이 농민협동조합이냐? 이런 농협은 고장을 내버려야 돼!”
올 가을 고추값은 뻔하다. 어떻게 싸워서 제값 받고 팔아먹을까. 잘 싸우면 제값받고 전량 팔아먹을 수 있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해남 영동이, 진도 채화, 이병일, 홍점이, 화수..
이순신 장군이 대첩을 했다는 우수영 울돌목. 해남 진도바다를 건너는 진도대교를 건너 조용한 회집 2층 여관방 상경투쟁 모의회의가 시작됐다.
어쩌고 저쩌고... 정보과 몰래 모인 곳이라 허풍이 좀 섞이고 일본말로 말하자면 가오다시 기마이끼가 있는 화수는 숭어농어 회감에 쐬주 한잔씩 걸쳐야 기발한 전술이 나온다며 주거니 받거니 한순배 두순배 돌렸다. 거나하게 취한 김에 시끌벅적 걸죽하게 말도 잘하는 홍필이는 고춧가루로 최루탄을 만들어 뿌려불자는 둥, 불을 태워 맵게 하자는 둥, 출발시간, 차량예약, 먹거리, 인원동원 등 이말 저말 순서없이 해도 시끌벅적 별의별 나올 이야기들은 다 나왔다. 토론 내용을 정리하고 싸워보자는 아직 안했지만 머릿속에는 승리의 희망이 역력하게 환했다.
자신만만하게 “자! 한잔 더 어쩌고 저쩌고.. 머시기 농협 중앙회 접수를 위하여!”
아침 8시 30분 서대문 13층 하얀 건물 9층이 중앙회 회장실.
설마 꿈이라도 꾸고 있었을까?
밤새 9시간 넘게 차를 타고 와서 일까.(진도농어민회는 서울에서 두시간 데모하기 위해서 3일을 써야 한다.) 서울 제일가까운 휴게소에서 오줌 눌 사람, 밥 먹을 사람, 출근시간 맞추기 위해 차량이동순서와 주의사항을 주지한 다음 한강을 건너 서대문 농협중앙회 후문에 도착하였다. 아직 출근 정시는 아니지만 사무실 청소를 하기 위해 먼저 온 여직원들은 눈치를 못 챈 모양이다. 엉성하게 생긴, 밤새 지친 모습들.
승강기를 함께 타고 자연스럽게 중앙회 회장실 9층에 내렸다. 중앙회 회장이 출근해야 열린다는 문앞에서 화장실이며 복도에 서서 긴장된 모습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감히 농협중앙회 회장실을 점거하러 왔으리라는 생각도 못했겠지만 우리가 비서진이나 직원들보다 먼저 출근했기 때문인지, 농민들이 점거접수하러 왔다는 보고자가 없었는지 평소와 똑같이 중앙회 회장이 회장실로 왔다.
그때 “중앙회장이 왔다, 들어가자”하면서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이 마피들아, 우리가 중앙회를 접수하러 왔으니 중앙회 회장은 나가거라!”고 책상을 후려치며 금방이라도 때려죽일 것 같은 기세로 기선을 잡고 우악을 떨며 난장을 피웠다. 중앙회 회장은 깜짝 놀라 어디론가 도망가버렸다.
위세를 부리며 권위께나 과시했던 중앙회장 자리는 진도 채화자리가 되었고 이사회랍시고 명패가 얹혀진 고급책상과 의자는 모두 내팽겨쳐졌다. 널따란 중앙회 회장실에 깔린 고급 카페트는 폭신폭신 누워있기도 좋았다. 추위를 잘타는 김덕종이는 뜨끈뜨끈 열이 나오는 스팀라지에타에 몸을 기대며 오로지 시작부터 끝까지 잠이다.
덕종이는 농성전문가다. 농성은 농성하는 것이다. 농성은 잠자는 것이다. 농성은 비타협이다. 농성은 아쉬운 놈이 찾아온 것이다. 농성은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농성은 급소를 치는 것이다. 그래서 덕종이는 농성장만 만나면 물때를 만난 것 같다. 긴장할 필요가 없다. 조급할 필요도 없다. 협상테이블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농성은 농성장에서 쉬면서 논다. 배고프면 13층 식당에서 지집 식당처럼 밥달라 해서 먹고 내려와 또 잔다.
하지만 밖에서는 중앙회 간부급들이 완전히 비상이 걸렸다. 지들끼리는 대책회의를 하고 이쪽 대표를 만나자는 등 요구가 뭣이냐 등 다혈질 화수는 “몰라서 물어!”라며 호령을 한다.
KBS, MBC, 각종 신문, 라디오. 취재꺼리 물때를 만난 듯 인터뷰를 요청한다. 해남에서부터 영동이는 등에 작은 배낭(니구사꾸)를 매고 잠잘 때도 밥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한번도 내려논 법이 없다. 해남에서 작은 배낭맨 영동이는 어느새 초저녁 7시부터 9시뉴스까지 시간대마다 주먹손 올리며 “고추생산비 보장하고 전량수매하라”며 당찬 모습을 보였다. 못된 농협중앙회 점거는 전농민들의 대리만족과 쇼킹한 사건이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지만 이우재 선생 등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격려차 다녀갔다.
해남진도 김봉호 국회의원도, 지역에서 그렇게 싸워도 눈하나 관심도 없던 사람이 중앙회 점거하니까 찾아와 거드름 피며 돈봉투 하나 주고 갈려는 걸, “우리가 거지들이냐”면서 봉투를 팽개쳐버렸다. 그 놈은 그 봉투를 다시 주워들고 나가버렸다.
농협중앙회 점거하는 날은 11월 17일 여의도 수입개방 반대 대회를 하는 날이었다.
모든 경찰 정보는 오로지 여의도 농민대회만 정신이 가 있었다. 2시 행사만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점거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 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2만이 넘는 그 대회에 빨리 점거농성소식을 알리기 위해 여의도로 달려 갔다. 많이 모이고 있었다. 하얀 천 머리띠 “수입개방반대” 수많은 만장, 길다란 대나무에 빨강, 노랑, 검정색이며 울긋불긋 어느 미술예술가가 저렇게도 멋지게 일부러 연출을 시켰을까. 감히 누가 “수입개방 강요하는 미국놈들 어쩌고, 저쩌고” 할 수 있겠는가.
또 플랑글씨는 어찌 그리 글씨체가 모두가 비슷한지. 누가 가르쳐주기는 않았지만 특유의 농민회 플랑 글씨체는 얼른 봐도 농민회것인지 알아볼 수 있다. 색체, 음영, 장단의 깊고 낮은 감각의 차이들의 뉘앙스가 바로 예술행위였다.
그때 날 꼭 따라다닌 학생이 하나 있었다. 수원에 있는 농대학생. 오늘 밤 농활다녀온 학생들이 잔치문화행사가 있어 연설 교섭차 임무를 띠고 왔는데 나를 잃어 버릴까봐 꼭 따라다녔다. 그이가 영광으로 농투신한 지용진이다. 농민회 회의하고 집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은, 눈썹 껌하고 말수 없는 활동가. 청주교도소에도 면회 왔고, 내가 4년 만기출소한지 며칠있다 장례를 치뤘다. 서울대 동창회관에서 결혼주례를 해주었던 말수 없는 눈썹껌한 지용진이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청와대로 시가행진
울긋불긋 만장을 든 수만 농민들이 여의도를 빠져나오는 시간만 두시간. 마포대교를 지나 광화문으로 끝이 이어졌었다. 노랑차선으로 백골단이 줄을 지어 함께 걸어가고 남녀노소 농민들은 농민가를 부르며 제각기 구호를 외치며 마포대교를 들어섰다. 오줌을 못참는 남자들은 한강에다 고장난 스프링클러 모양으로 찔끔찔끔 시원하게 내갈렸다. 여자들도 마찬가지. 그날 한강은 물바다가 아니라 오줌바다였을 것이다.
육교위에선 수많은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나는 많은 사람들을 한눈으로 보고 싶어 가로수 은행나무로 높이 올라가 보았다. 눈물이 났다. 이것이 희망이다. 서대문 농협중앙회 앞을 지나는 중 9층 농성장에서는 미국놈 대통령 올 때 색종이 뿌리듯이 해남진도에서 가져온 고추를 뿌리고 있었다.
정말 멋져! 이것이 예술이다. 작품이 좋으면 눈물이 나는 법. 행진시위대는 모두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광화문 가까운 고개를 넘자 지난번 데모때 저놈의 백골단에게 맞았다며 들고간 피켓 몽둥이로 노랑선 분리차선을 따라가던 청색 백골단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겁에 질린 백골단이 도망치고 말았다.
그때부터 전 도로는 우리들의 것. 차선무시, 신호무시, 공권력 무시, 최루탄 무시..하며 광화문으로 들어서려다 준비된 진압장비들. 보기만 해도 무섬증이 날 정도의 검정색 최루탄 포차, 최루탄은 냄새도 고약하지만 최루탄을 발사하는 연발탄 기관총 같은 소리가 더 무섭다. 서로 대치중 진압지시가 내렸는지 정보과 사복조들이 먼저 도망가기 시작한다. 아까 두들겨 맞은 전경들인지 자기들끼리 모여 하는 말이 “학생데모는 이유가 아니라니까, 농민데모가 제일 무섭다”며 무식하게 덤벼든 데는 대책이 없다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
진압실시 동시에 다발최루탄이 여기저기 지랄탄이 쏟아지고 고층건물에 부딪쳐 울리는 포소리는 어디 전쟁터를 방불케하였다.
모처럼 촌에서 살다가 독한 개스를 들이마셨으니 배창자가 기어나올 것 같고 눈물은 나오지, 쓰리기는 하지. 눈을 못 뜬 농민들은 방향을 잃고 체포조가 오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다. 오랜만에 무공해농민들이 간댕이는 커지고 운동권 공해맛을 보기 시작한다. 겁이 많은 농민들은 어느새 빠구기어를 넣고 농협중앙회 건물안으로 모두 올라가 버렸다. 소똥을 뿌렸는지 1층 승강기 앞에 벽에는 소똥냄새가 진하게 나오고 여직원들은 겁에 질려 다 도망가버렸다. 아마 난리가 난줄 알았을 것이다.
고추농성장은 9층인데 여의도에서 온 시위대는 너무 많아 13층, 12층 가득 메웠고. 어디서 잡아왔는지 농협중앙회 회장을 잡아왔다. 조합장을 의자에 앉히려다 “어디 감히”하면서 무릎을 꿇쳐 놓았다. 식당 매점에 있는 먹을 것은 다 내다먹고 수입산 캔이 있었는데 “너, 이놈 왜 수입농산물을 농협에서 파느냐”하니까 “안 팔았습니다.”한다.
“너 이놈 이걸 봐라 이것이 국산이냐, 시카고라고 써있질 않느냐”고 강기종이가 말했다. “이놈, 매국놈, 죽일놈”하며 쥐박으니까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하며 농협중앙회장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고추 다 사줄거야?” “예.” 회장은 그날이 난생 처음 당한 치욕의 지옥날이었을 것이다. 그 뒷날 종교단체며 사회단체들이 앞뒤로 돌아다니다 와보니 다 끝나고 내려갔다고 했다.
왜냐하면 해남·진도 농성조가 있으면 많은 농민이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니 이 인질들은 보내버려야 했기 때문에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고 일찍 보내버렸다.
그해 경북 안동, 충북 고추데모가 심해지자 헬기가 떠서 진압에 나섰고 축사며 가정마당 어디든지 최루탄을 터뜨려 개도 울고 닭도 울고 소두 울고 염소며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 모두 울었었다.
해남진도가 농협중앙회 점거투쟁에서 승리했다는 소문을 듣고 제천에서 올라온 농민들이 농협중앙회 별관과 정문 앞에다가 고추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할머니며 농민들이 버티고 있었다. 농협은 그 많은 고추를 사줄 수도 없으려니와 계속 들여올 걸 생각하니 대책이 없다.
그 할머니는 이렇게 외쳤다.
“농민 고추하나 못사준 노태우 고추 찧어불자” 그리고 재고까지 다 팔아먹었다. 전국에서 충북, 경북 고추는 그래서 몇천억을 더 받을 수 있었다. 해남진도 고추는 수입개방 여의도 농민데모대 점거농성으로 빨리 해결했고, 충북 제천고추는 해남 진도 덕분에 해결됐다.
“속태우고 애태우는 노태우 고추 불태우자!”는 정치구호였다. 그해 해남진도 고추는 정말 매운 맛을 보여주었다. 임실 무안, 정읍, 안동 매운 고추맛은 사과탄(최루탄) 맛보다 더 맵데이…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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