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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韓國敎會史)
◉ 서론
◉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한 역사의 과정
동방의 작은 나라인 한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뜻가운데 진행되었다. 조선 말기의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의 틈바귀에서 쇄국정책을 통해 외국과는 관계를 거부하였으나, 일본,러시아,영국,미국 등이 힘에 의한 강압적인 자세로 조선을 굴복시키고,마침내 은둔의 나라인 한반도는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고 강대국들과 외교관계를 맺게되었다.이러한 역사적인 변화는 결국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는 세계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어 복음의 주자들인 선교사들이 속속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우리보다 복음을 먼저 전해준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한반도에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고, 조선의 관리들이나 상인등이 중국과 일본을 출입하면서 복음을 전해듣게 되어 이들을 통한 복음의 전래도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의 이러한 주변 여건은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다. 즉 선교를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또 국내적으로는 절대 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불신,부패 등으로 불안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피폐해져 있어 삶 자체가 희망이 없는 암담한 가운데 있었을 뿐만아니라 이로인한 혹세무민의 미신행위가 모든 사람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마치 예수님의 초림 직전의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과도 같았다. 그당시에는 선지자의 활동이 단절된 암흑기였고,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 백성들위에 군림하는 압제자들에 불과하였다. 그때 이스라엘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메시아를 대망하였듯이 우리나라의 그 당시 백성들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기대하는 암흑기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우리의 역사상 가장 암흑기인 그 시대에 복음을 이 땅에 비추어 주셨던 것이다.
1. 한.미조약의 체결로 인한 복음화의 여명기
조선 조정의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굳게 닫힌 문의 빗장을 벗기게 된 계기는 1875년(고종1년)일본의 군함 운양호 사건이었다. 일본과의 조약은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조약을 뒤따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미국도 조선과 관계를 맺게된다.
미국과의 통상 조약은 1876년 한일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활동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되어 청나라가 조선 정부로 하여금 미국과 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일제의 세력을 견제케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청나라의 원세계가 조선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조선과 미국은 제물포 해안에 설치된 텐트안에서 우리측 대표 김홍집과 미국측 대표 슈펠트간에 역사적인 한, 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오래동안 피로 맺어진 혈맹의 유대 관계가 시작되게 되었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선교도 이것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올 시점에 한미조약이 체결된 것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미조약은 오래동안 조선이 중국의 부속국가로 중요시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국의 재가를 얻어야만 하는 불명예를 씻어 버리고,세계 만방에 독립된 국가로서 나서게 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자,1883년 5월에 우리 나라에 와서 비준서를 교환하고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서 서울에서 그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장부도 이에 대한 답례 사절단을 파송하게 되었는데, 민영익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대리공사에 홍영식을 그리고 수행원에 서광범,유길준 등을 임명하여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1883년 7월 미국의 해군함정을 이용하여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저들은 기차편으로 대륙을 횡단하여 워싱톤에 도착하여,미국대통령을 접견하고 12월에 귀국하였다.
2. 한국선교의 정지 작업을 한 가우쳐 박사와 맥클레이
미국에 간 사절된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횡단 기차를 타고 위싱톤을 향해 갈 때 한국 선교 역사상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대학교의 설립자이며,감리교회의 목사인 가우쳐박사였다. 3일동안 같이 여행하면서 그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1833년 11월 감리교 외지 선교본부에 편지를 써 보내어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선교자금 2천달러를 같이 송금하였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는 아직 한국에 선교를 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가우쳐는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대표 맥클레인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내면서 "한국에 찾아가서 그 나라를 실지 답사한 후 선교사업에 착수하였으면 좋겠다고"하였다.
맥크레이는 곧 한국을 1884년 6월에 2주간 예정으로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다행히도 그는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때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김옥균을 찾아갔다. 그는 김옥균이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달라넌 청원서를 전달하여, 국왕의 허가를 부탁하였다. 며칠후 김옥균은 맥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임금께서 지난 밤에 나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시고 나의 요청대로 선교회가 한국에서 이러한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이 회답을 받은 맥클레이는 주한 미국공사 푸트에게 공사관 가까운 곳에 선교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하나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일본에 돌아온 후 즉시 그는 "우선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전도에 있다는 것을 감추어 두지 아니하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사업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은 시급한 요구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미국 북감리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첫발을 딛게 하여,1884년말에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아펜젤러목사가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선교의 과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미조약이 맺어졌고 민영익이 가우쳐 박사를 기차간에서 만났으며, 맥클레이가 한국에 와서 국왕에게 편지를 올려 윤허를 받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3.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감리교회가 한국선교를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을 때, 미국 북장로교회 역시 한국의 선교사업에 대한 작업을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1884년 9월 한국에 마침내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그 해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점으로 잡는 해가 되었다. 개신교의 첫 선교사의 영예를 얻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다. 그는 1883년 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 의료선교사로 지원서를 보냈고,이것이 허락되어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선교지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그의 친구 의사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에 알렌은 곧 뉴욕의 선교본부에 한국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국공관들과 세관에서는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하므로 본부가 허락한다면 한국에 가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4천년의 한국역사에 처음으로 개신교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도착하게 되어 마침내 개신교 선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미국 공사 푸트씨를 만났고, 바로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공개적인 선교활동은 금해져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장 적합한 일자리였고, 합법적으로 한국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길이기도 하였다. 푸트공사와 함께 고종을 알현했을 때도 푸트는 그를 공사관의 의사로 소개하였다.
알렌의 이와같은 입국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한국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이후로 일어나는 한국의 정변은 마침내 왕궁의 복음화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4. 갑신정변(우정국사건)을 통한 의료선교의 시작.
당시 조선 조정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누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는 수구파의 거세를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시행할 우정국 건물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하는 피로연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때를 기해 개화파들이 수구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개화파들로 새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개방정치를 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12월 4일 저녁 피로연이 진행되는데 "불이야"하는 신호와 함께 잠복했던 자객들이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민비의 동생)이 전신에 칼을 맞고 혈관이 끊기는 생명이 위급해지는 상황에 처했을 때 미국공사 푸트와 세관고문 묄렌도프가 민영익을 응급 처치하고 함께 그를 묄렌도프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즉시 알렌에게 통지하여 급히 오도록 조치하였다.
알렌이 통지를 받고 오는 동안 벌써 어의를 포함한 한의사들 여러 명이 모여 치료를 해보려고 했으나, 끊겨진 몸을 한방의 의술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도착한 알렌은 환자의 위급함을 알고 주저하지 않았다. 만일 자기가 이 환자를 살려내지 못하면 자기에게 돌아올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민영익을 치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치료는 극적인 효력을 나타내,민영익은 얼마되지 않아 완치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은 후에 알렌에게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그들은 당신이 아메리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사건은 알렌으로 하여금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왕실과 고위관리들,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알렌은 곧 고종의 시의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민영익을 구해준 대가로 국왕으로부터 참판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왕으로부터 막대한 상금을 받게 되어 그는 그돈으로 병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조정에 이에 대한 편지를 써서 제출하였다. 왕이나 관리들은 알렌의 뛰어난 의술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알고 있는 터여서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알렌의 청원을 순수히 받아 주었다.
그 결과 마침내 1885년 4월 14일에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개원한지 열흘쯤 지나 이름을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언더우드가 입국하게 되어 그 병원의 직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직 외국인들이 선교활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는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은 한국선교를 확산시키는 근거지가 되었고, 한국의 복음화가 의료봉사와 교육을 통한 선교의 모델이 되었으며, 한국의 복음화 뿐만아니라, 근대화와 문명화를 이루게 하는 산실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1. 가톨릭의 전래와 박해
1) 전래
(1) 임진왜란 때 포루투갈 신부가 종군 신부로서 일본군과 함께 입국하였다.
(2) 1594년12월 28일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교직자인 포르투갈 신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입국하여 일본의 고메즈(Luis Gonez O.F.M) 교구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3) 실학의 발달로 마태오 릿치의 천주실의(De Deo Ver Doctrina )등이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들어옴.
(4) 1783년 이 승훈이 뻬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옴.
(5) 1794년 12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전도하다가 순교함.
(6) 프랑스인 신부들이 계속 입국하여 전도하였다.
2) 박해
(1) 1801년 신유박해 / 3,000명 순교.
(2) 1839년 기해박해 /200명 순교.
(3) 1866년 병인 대박해. / 신부 7명과 8,000명의 신도가 순교.
2. 한국 Protestant 교회의 전래
1) 간접 선교 시대
(1)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쯔라프(Gutzlaff)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선교.
(2) 1865년 토머스(Robert J.Thomas)선교사 대동강변에서 첫 순교.
(3) 1872년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전도.
(4) 1876년 외국에서 한국인 첫 세례 받음 /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2) 직접 선교 시대
(1) 1882년 우리말 성경이 반포됨 / 로스역 성경(누가복음, 요한복음) - 서상륜의 공로
(2) 1882년 12월 신사 유람단으로 이수정이 일본에 가서 입신, 성경 번역.
(3) 1883년 5월 16일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에 소래교회(서상륜 설립)가 설립됨.(1883년 10월 20일에 안악군 서하면 상촌리에서 장석훈, 장석규, 장석구 3형제와 그의 4촌 형제 장석두, 장석영, 장석우 등이 합심하여 두 번째 교회인 대동교회를 설립, 1884년에는 장연군 낙도면 산천리에 낙도교회와 재령읍 동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안악군에는 1884년 3월 1일에 안악군 용문면 상무리에 무동교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3월 5일에는 안악군 은홍면 덕산리 덕산교회,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안악군 대원면 당전리에 당곡교회가 각각 설립되었고,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은율군 은율읍교회가 남천리에 설립되었다.
(4) 1884년 알렌(Allen) 의사 부부가 입국하여 의료 선교 실시.
(5)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정식 선교사로 입국하여 선교사업 시작.
(6) 1890년 네비우스가 입국하여 네비우스 전도방법이 실시됨(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s)이다.).
3. 외국 선교사의 선교정책
1) 선교의 방법
(1) 개인전도를 중심으로 한다.
(2) 교회 자체를 중요시한다.
(3)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 선교를 한다.
(4) 교회의 자급자족.
(5) 기독교 윤리를 철저히 교육시킨다.
(6) 의료 선교.
(7) 사경회를 자주 연다.
(8) 여자 전도에 주력한다.
(9) 문서(한글) 전도.
(10) 기도에 힘쓰는 생활을 한다.
2) 존 네비우스(John Nevius) 선교방법
(1) 발단
➀ 1890년 6월경 중국 산동성 주재 네비우스(John L. Nevius) 선교사를 초청하여 선교 방법을 듣고 한국 교회 선교의 기본 원칙을 정하였다. 왜냐하면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 뛰어난 잠재력은 있었지만 모두가 20대의 젊은이들로 선교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일이 25세, 언더우드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 알렌 의사가 27세 그리고 그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던 스크랜턴 선교사도 29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패기와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전혀 선교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녀지와 같은 이 한반도에서 선교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국에 와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방법에 대한 도전을 준 사람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네비우스 선교사였다. 1854년 이래 30년 이상 선교 사업에 종사했던 네비우스 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2주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국 선교사들이 앞으로 명심하고 실천할 선교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다.
➁ 1891년에, 네비우스의 원리를 선교 현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일련의‘규범과 세칙’(Rules and By-laws)을 채택했다.
한국에 새로 파송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한 후“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책을 한 부 받아 첫 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아울러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 시험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습득은 적어도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고, 따라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2) 방법
①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여 전도한다.
②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자전(Self-Propagation):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모든 개인과 집단(소수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휘묻이 법에 의해 사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한다.
④ 자치(Self-Government):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⑤ 자립(Self-Support):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되 교회 건축 양식은 토착적으로 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받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될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 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 신앙양육 프로그램
⑦ 성경적 권징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한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3) 결과 (자립 전도, 자치, 자급)
➀ 한국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됨 ➁ 성경 중심의 교회 ➂ 기도하는 교회 ➃ 전도하는 교회 ➄ 교육하는 교회
이 네비우스 방법은 단순히 네비우스의 선교 경험에서 우러나온 선교 정책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선교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네비우스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선교이론을 발전시켰고 적용하였다. 이는 성경적인 방법이었고, 초대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교회가 세워진 후,「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고 했다. 그리고「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고 했다.
사도들은‘백성을 가르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행 4:2)고 전했으며, 그「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행 4:4)고 하였다.
사도들은「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행 6:4)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 집사들을 세우게 되었고, 업무를 분담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져서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는 환난을 당했다. 이때 핍박을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헬라인(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였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고, 바나바는 사울(바울)을 데리고 와서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큰 무리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으며,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저들을 후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처음 교회들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고, 집사를 세워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 나갔으며, 지도자(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원리는 선교지의 신생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독립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적인 방법을 통해 제시해 주었으며, 이 원리를 채택하여 한국교회에 적용한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및 다른 장로교 선교부는 이 원리를 택하지 않은 다른 선교부보다 더 많은 성장을 가져 왔다.
4. 민족적 자각과 신자의 증가
1) 한국 장로교 조직 연혁
(1) 선교사회 조직
➀ 1885년 북장로교 선교사 5명이 북장로교 선교사회 설립.
➁ 1889년 호주 선교사(데이비스 목사)와 합동하여 연합공의회 설립(이듬해 데이비스 목사의 사망으로 자연히 폐지)
➂ 1892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1893년 남장로교 설립(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미션회)
➃ 189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호주 선교사의 내한으로 계속 합류.
◉ 이때까지는 거의 친목단체 정도의 역할만 함
(2)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 설립
➀ 1901년 선교사와 한국인 총대가 참석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 조직(장로 3인, 조사(권사) 6인, 선교사 25인)
➁ 평양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설립, 한국 자유 장로회 설립을 위한 위원 선출을 결의함.
(3) 독노회
➀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민국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 조직(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4개국 선교부-미국의 남,북장로교, 카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는 각기 한국 교회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이로써 1905년 9월에 회집된 공의회는 1907년에 노회를 조직할 것과 평양 신학교 제 1회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장립할 것을 결의하고 목사 임직을 위한 절차를 마련한다. 제 1회 독노회 참석자는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으로 도합 78명이다.)
➁ 신학 졸업생 7명에게 첫 목사 안수 /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➂ 최초의 선교사 파송 /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
◉ 창립노회의 중요결의 사항
1.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전국 교회는 감사한 마음으로 선교 헌금을 하기로 하였으며,
2. 새로 징립된 목사들의 임지를 결정하는 것으로써,
1) 한석진은 평양, 장전 등지의 전도 목사로,
2) 송린서는 증산 한천 지방의 전도 목사로,
3) 양전백은 선천, 정주, 박천 지방의 전도 목사로,
4) 서경조는 장연, 옹진 등지의 전도 목사로, 파송하였으며,
3. 길선주는 평양의 장대재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4. 경기충청, 평북, 평남, 경상, 함경, 전라, 황해 등 7 대리회를 조직하였고,
5. 남, 북 미 장로교와 카나다, 후주 장로교에 노회 조직을 통보하고, 미국에 체류 중인 언더우드 목사에게도 노회 조직을 알리기로 하였다.
6. 총계 위원이 보고한 당시 장로교회의 교세는 목사 47명, 장로 53명 조사 131명, 예배 처소 984개 처, 세례 교인 17,890명, 원입 교인 21,482명, 전체 교인 69,098명, 교회 직영 학교 402개 처, 학생 8,611명, 헌금 총액 94,227원이다.
(4) 예수교 장로회 조선 총회
➀ 1907년 독노회 조직 이후 교회가 계속 발전하여 7개 노회로 분할하면서 총회를 조직하게 됨(제5회 독도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황해, 평북, 평남, 경기충청, 전라, 경상, 함경 등 7개 대리회를 7개 노회로 개편하기로 함).
➁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조선총회가 조직됨.
➂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방지일 선교사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파송(역대 선교사/ 방지일, 김영훈, 박봉로, 사병순(1913), 박상순, 홍승한, 방효원, 이대영, 김호순(여)
2) 기독교 조선 감리회 창설
(1) 선교사의 내한
➀ 1885년 아펜셀러 입국 후에 남북 감리교회에서 선교사 계속 파송.
➁ 1927 년부터 합동 운동이 일어나 미국 남,북 감리회 총회의 승인을 받아 조선 감리 교회를 조직토록 함
(2) 조직
➀ 1930년 12월 2일 제 1회 총회가 서울 협성 신학교에서 개최되어 제1대 총리사로 양주삼 목사 피선.
➁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식 거행.
3)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1) 발단
➀ 네비우스 방법으로 사경회와 성경 연구열이 고조되었다.
➁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들이 수양회에서 성령운동이 일어남.
➂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남.
➃ 장대현교회의 부흥운동 후 길선주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가 전국으로 확산 새로운 영적각성운동 전개.
(2) 결과
➀ 남녀노소, 유무식자, 선교사, 국내 교역자, 신구 신자를 막론하고 성령의 감화를 받음.
➁ 각자의 죄를 통회자복 함으로 화해와 사랑의 분위기 조성.
➂ 새로운 사랑과 봉사의 능력을 받음.
➃ 학교는 2주간 휴학하고, 일반은 사무 중지, 상가는 철시하여 기도에만 힘씀.
5. 백만 명 구령 운동과 전진 운동
1) 백만 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
(1) 발단(1910-1911)
➀ 1910년의 한일 합방으로 좌절감에 잠긴 백성들에게 영적 각성을 줌.
➁ 민족의 활로로서의 교회의 사명 자각.
(2) 결과
➀ 전도 헌신 일수가 연 10만일이 되었고, 70만권의 마가복음(쪽복음)을 배포.
➁ 일본 총독부의 교회 탄압의 기회가 됨 / 105인 사건.
2) 전진운동
(1) 발단
➀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대표 33명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교회가 조직 동원의 모체가 됨
➁ 3.1운동으로 교회 피해 극심. 장로교만 체포된 목사와 장로가 134명, 교인 3,804명, 사살 교인 47명, 재산피해 약 3만 달러.
(2) 경과
➀ 장로교회의 전진운동(The Foward Movement), 감리교회의 백년전진(The Centenary Advance)등을 조직적으로 전개.
➁ 주일학교 운동이 활기를 띰. 1920년 ‘주일학계’ 잡지 발행, 1921년 전국 주일학교 대회 개최.
➂ 김익두 목사의 신유, 부흥 운동으로 새로운 영적 감화를 끼침.
6. 왜정 탄압과 신사 참배
1) 강요
(1) 1934년 선교 50주년 희년 행사가 활발히 진행됨
(2) 1935년 가을, 숭실 전문학교장 맥쿤(George S.Mccune, 윤산온)이 평남 지사에서 신사참배 강요당함
(3) 1938년 9월 10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민의식이라 하여 참배키로 결의함(1954년 제39회 총회가 안동에서 모여 27회 결의를 취소함)
2) 수난
(1) 1943년 장로회 총회가 해산되고 일본 기독교단 조선 교단으로 변함.
(2) 1943년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를 폐쇄
(3) 주기철, 최봉석 등 수 많은 순교자와 진리의 파수를 위해 옥고를 당한 많은 산순교자를 내었고, 한국 교회의 대 수난기가 됨.
7. 교회의 분열과 합동
1) 장로교의 제1차 분열
(1) 1946년 9월 고려 신학교 개교.
(2) 출옥 성도들의 교회 재건안과 일제시 일본 신도에 귀의했던 교직자 사이의 알력.
(3) 1952년 9월 11일 출옥 성도들이 고신파 총회를 따로 세움.
2) 장로교의 제2차 분열
(1) 1938년 9월 30일 평양 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무기 휴학.
(2) 1939년 가을, 서울에서 조선 신학교 개교.
(3) 해방 후(1947년) 조선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불만을 품은 조선 신학생 51명의 진정서가 총회에 제출되어 신학논쟁이 벌어짐.
(4) 자유주의 신학(김재준 교수 주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1953년 기독교 장로회를 설립함.
3) 장로교의 제3차 분열
(1) 1959년 9월 제44회 대전 총회에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약칭 W.C.C) 가입 문제와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 등으로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
(2) 교권과 선교사의 작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세칭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됨
4) 감리 교회의 분열과 합동
(1) 1945년 가을, 감리교 재건 중앙 위원회를 조직하여 재건을 논의하였으나 소위 부흥파와 유지파로 분열. 그후 1949년 3월 ‘기독교 대한 감리회’로 합동함.
(2) 1954년 3월 감독 선거로 호헌파가 생겼으나 1959년 3월 재합동.
(3) 1975년 총리원측과 총회측으로 분열되었으나 재합동 운동이 계속 일어남.
5) 성결 교회의 분열과 합동
(1) 1943년 12월 29일 총회 해산.
(2) 1945년 11월 9일 재건 총회.
(3) 1960년에 연합기관 문제로 분열하여 기독교 성결교회는 동양 선교회(O.M.S)와 관계를 맺고, 예수교 성결 교회는 I.C.C.C와 관계를 맺음
6) 장로교의 합동 운동
(1)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➀ 신학, 주장, 대외 관계가 같으므로 1960년 12월에 합동하여 이른바 합동측을 형성.
➁ 1962년 고신측 인사들 가운데 환원하여 고신측을 다시 형성.
(2) 합동측과 통합측의 합동 모색
1965년에 급진되었고, 쌍방 총회가 위원을 선출하고 합동 원칙, 세칙까지 작성하고 1968.3.1일 오후 2시에 대전에서 합동 총회를 개최키로 하였으나 통합 측이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않아 백지화 되었다.
8. 교회 성장 운동
1) 운동의 의의
민족 복음화 운동, 전군 신자화 운동, 빌리그래함 전도 대회, 엑스폴로 74, 선교 1백주년 향한 교회 성장 운동, 77민족 성회 등 일련의 전도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자원 집중과 민족복음화에 새로운 역사를 이룸.
2) 운동의 확산
각 교단, 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새로운 개척운동과 전도운동은 안으로는 민족 복음화 운동이 일어남
9. 에큐메니칼 운동
1) 에큐메니칼의 의미
에큐메니칼(ecumenical)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누리’ 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 에서 파생된 말로서 ‘전 세계적인 교회(world-wide Christian unity)’ 를 의미한다.
교회는 민족적, 국가적 구별을 초월한 인류의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인 교회, 그 교회가 전세계로부터 모여서 개최한 교회 회의도 콘칠리움 에큐메니쿰(Comcilium Oecumenicum)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15회 사용되었다.
이 말은 교리문제로 인한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교회회의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연합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타나며, 니케야 신조도 교회의 연합, 거룩, 보편성 및 사도성을 말한다. 그러나 전세계적이고도 조직적인 연합운동은 20세기의 선교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곧 이 단어는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교회들을 연합하는 운동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 단어는 세계 교회협의회 즉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 산하 기관의 신학 또는 공식적인 견해 및 신학적 경향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면서 WCC 초대 총무를 역임한 비서트 후프트(Vissert Hooft)는 이 에큐메니칼 용어를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 '전 로마 제국', '전 교회', '교회의 우주적 타당성', '교회의 세계적인 선교', '교회간의 관계와 일치', '기독교의 일치 의식'등 일곱 가지로 표현하고 그 중 후자 세 개념, 교회의 세계적 선교, 교회들 간의 일치, 기독교의 일치 의식을 20세기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에큐메니칼의 정의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에큐메니즘이란 말은 금세기에 시작된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한정되고 있으나 본래의 의미로 본다면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뿐 아니라 더 큰 의미를 가진 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전세계의 일치, 전 인류의 일치도 포함하는 것이다.
2) 에큐메니칼의 의의
⑴ 19세기에 일어난 초교파적 선교 운동을 말한다.
⑵ 원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로 뭉쳐야 되겠다는 갈망과 책임 의식이었다.
① 세계 선교 운동의 필요
② 그리스도교 청년 운동
③ 현 세계가 지니고 있는 윤리적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
④ 교리 및 교회 제도에 대하여 변하는 신앙의 태도.
⑤ 교파간의 협동 운동.
⑥ 제2차 대전의 경험 등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⑶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 대표 351인이 모여서 조직하였다.
◉ 에큐메니칼 운동
1. 역사
에큐메니컬 운동, 즉 일반적 의미의 교회 일치 운동은 개신교에서 17∼18세기의 신앙 부흥 운동과 19세기의 선교 운동 및 청년 운동의 과정을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개신교 교파들과 정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결성하면서 두 교파간의 일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정교회는 WCC 결성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1961년에 비로소 회원교단으로 가입했으며 한국에서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과거 KNCC)의 협력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2.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간의 화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측과 1967년부터 루터교와 공동으로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1972년부터 19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합동위원회를 열어 1972년 말타 보고서를 비롯한 두 개의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즉, 장로교회와는 1970년부터 꾸준히 대화하고 있다. 이미 교황청과 세계 개혁교회 연맹(WARC) 간의 제1기 대화 보고서는 1977년 ‘교회와 세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이어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진행된 제2기 대화에서는 ‘교회에 대한 공동 이해를 향하여’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감리교, 오순절 교회, 침례교회와도 각각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보고서들을 발표해왔다.
3. 아시아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
아시아 차원에서는 1994년에 아시아 주교회의연합( FABC)과 아시아 기독교교회협의회(CCA) 사이에 만들어진 ‘아시아 그리스도인 일치운동(AMCU)’을 중심으로 일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시아 각국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 평신도 대표들이 참가해 서로의 차이점을 딛고 함께 협력해 일하도록 한다는 궁극적 목표를 확인하고 구체적인 행동방침을 논의하는 등 활동 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일치 운동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서 공동번역사업이다.
4.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
1)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단체로는 대한 성공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한국 기독교 장로회 등에서 회원교단으로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 협의체인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가 있다. 특히, 성공회에서는 1965년 한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기도모임, 개신교 교파들과의 부활절 연합예배 참여, 루터교와의 축구 모임 등 기독교 세계의 분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이다.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도 한신대학교 신학과 학생들과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학생들간의 축구경기와 상호 전례(Liturgy)설명으로 다양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반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 정교회 간의 명확한 분리를 주장하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상당수 존재한다.
2) 공동번역성서 출간
한국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교황청 일치사무국에서 성서 공동번역을 위한 규정을 마련하고 세계성서공회연합회와의 협조를 지침을 시달함에 따라 1968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대표로 공동번역위원회를 구성해 1971년에 공동 번역 신약성서를 출판했으며, 1977년에 구약성서를 공동 번역하기도 했다.[1] 최근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가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와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회의」를 발족시키는가 하면 일치 기도 주간에 에큐메니컬 포럼을 개최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성직자들의 축구경기를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5. 에큐메니칼 총회
(1) 제1차 - 암스테르담
1948년 8월 암스테르담 제1회 총회에서는 151교파로 부터 352 대표들이 참석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이 절대 다수요 소수의 정교회 대표들이 있었다.
(2) 제2차 - 에반스톤
1954년 8월 15일 미국 시카고 근방 에반스톤시에서 17일 동안 진행 되었다. 세계 163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파 중에서 132교파와 헬라정교 계통의 교회들로부터 1242명의 대표들이 내참하였다.
(3) 제3차 - 뉴델리
1961년 12월 인도 뉴델리에서 모인 회의에서는 러시아 정교회가 회원으로 되었다. 또 이 회의에서 국제선교 협의회가 WCC에 합동되었다.
(4) 제4차 - 웁살라
1968년 7월4일부터 20일까지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열렸다.
(5) 제5차 - 나이로비
1975년 11월23일부터 12월10일까지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286개 교파의 747명의 대표들이 모였다. 여기에는 로마교황청이 파견한 16명의 천주교 사람들을 비롯한 불교, 힌두교, 모슬렘교, 유대교 등에서도 참석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구원과 복음과 선교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해방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북반구의 백인지배 소비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난, 민중차별, 인권유린, 군사주의 등을 비판하였다. 이 총회 때에 해방신학이 가담하게 된 것이다.
(6) 제6차 - 밴쿠버
1983년 7월24일부터 8월10일까지 캐나다 밴쿠버에서 세계 각국에서 정식대표 930명을 포함하여 각국에서 보내온 교계대표들,이방종교대표자들,천주교사절드, 보도진 등 820명을 포함 총3500명이 참석하였다.
특히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 의장 뮬더는 캐나다 원주민에 관한 인터뷰에서 불교, 힌두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구원 얻었다고 강력 주장했다. 오직 예수를 부인, 종교다원주의, 예수 이름 배제
(7) 제7차 - 캔버라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7차 총회에서 한국 이화여대의 조직신학교수 정현경 교수가 무속신앙에 접목한 “초혼제”를 행하였다. 각종 종교(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정령숭배, 무속신앙…)에서 나타나는 영적능력과 신비를 동일한 성령의 역사라고 함 – 범신론적 종교혼합주의
(8) 제8차 - 하라레
1998년 12월 3일부터 14일까지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열렸다. 남아프리카 대통령 넬슨 만델라 연설 중에서 “WCC가 지난 30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남부 아프리카의 여러 해방운동단체(공산게릴라)를 지원해 온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한다.”고 함. 동성애, 일부다처주의 허용, 결의
(9) 제9차 - 포르토알레그레
2006년 2월 14일부터 23일까지 브라질 포르로 알레그레에서 120개국 348개 회언교회 691개 대표가 모인 가운데 열렸다. 성적 소수자들(동성애자들)에게도 성직을 허락하는 제도적 구조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동성애 성직자 지지
지금 전 세계적으로 WCC 소속교단 교회들 중에는 동성애 성직자가 계속 늘어가고 있다.
(10) 제10차 - 부산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