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軍 威 邑
沿 革
본래는 軍威郡의 읍내인 까닭으로 縣內面이라 하였다. 鳥項·鴉川·城旨·路上·路下·右政·白嶺·梧谷·東吐·上吐·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여 왔다. 1914년 행정구역을 폐합함에 따라서 南面의 中武·下武·龍城·西君·長水·池洞·社洞·鳩池·金谷의 9개 동리와 西星面의 錦谷·內良·外良·鳩鳴·松峴·鈒嶺·內北·外北·中北의 9개 동리를 관할 하였으며 召本面의 籠岩洞 일부와 의성군 億谷面의 龍臺·吐日의 2개 동을 병합하여 軍威面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동명들을 현재의 그것들과 같이 고쳤으니 武成·水西·社稷·金鳩·內良·外良·鈒嶺·大北·東部·西部·政洞·梧谷·下谷·上谷·龍臺의 15개 동들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행정구역을 개편 관할하여 오던 중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義城郡 金城面 廣峴洞을 편입하여 16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9년에 軍威面이 邑으로 승격되어 召保面 大興洞을 1989. 1. 1. 행정구역을 군위로 편입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79.5㎢이며 인구는 12,700여명으로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군청 소재지로서 군내 행정의 중심지이다.(洪永植)
廣 峴 洞 널브이·널빙이·판번(板番) §약500여년 전에 마을이 생겼는데 마을의 지형이 빈 널(棺)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는 골짜기가 넓다고 명명 되었다고도 한다. 옛날 신라의 召文國 때에 처음 億谷面 소재지였던 마을이고 힘 센 사람이 많아서 이 동리에 와서는 힘 자랑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54가구중 義城 金氏·金海 金氏·淸州 韓氏가 많이 살고 있다.(韓璟洙: 男67 외 4名)
억실·윗마·무이쇠골·대리동(大里洞)·억곡(億谷)·상리(上里)·사창(社倉)§옛날 신라의 召文國 시대 億谷面 소재지로서 큰 마을이라고 불려졌기 때문에 大里洞이라고도 했다. 억곡은 속칭 억실 또는 社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곳에 병기창이 있어서 그렇게 유래 되었으며 지금도 마을 안골 무쇠곡이라는 곳에서 무쇠를 제조한 자취가 남아 있다. 40여호 농가 중 義城 金氏가 20여 호로 많이 산다. (金丁甲: 男 67 外 4名)
2 짱때골·장대골·장대곡(長大谷)·하리(下里)§大里 아랫 마을이라고 下里로 불리며 장대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약 200여년 전에 장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여승의 성품이 장대처럼 곧아 그 분의 성품을 본따서 장대 마을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장자터라는 골에 蔣氏가 번창하게 살았는데 그 골짜기가 깊고 길어서 장대골(長大谷)이라 불렀다 한다. 40여 농가 중 全州 李氏·孝令 司空 氏가 많이 살고 있다(趙順瑢)(李春鳳: 남65 外 4명)
金 鳩 洞 쇳골·쉿골·싯골·金谷(金谷)§ 뒷산에 쇠(鐵)를 캐던 광구가 있다. 쇠가 나는 골이라 하여 쇠의 골(金谷) 즉 쇳골 또는 쉿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일설에는 동네 뒷산이 三谷으로 이루어져 있어 골이 세 개 있다는 뜻으로 싯골(三谷)이라 부른다고도 한다(康學周: 남56 외 3명)
주막거리·주막(酒幕)§옛날 말을 타고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는 통로로서 이 곳에 주막이 있었다. 교통이 불편하던 당시 행인들의 휴식처와 간단한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한 가구가 이주해 살던 것이 점점 늘어나 일곱 가구가 살고 있다. 지금은 술과 음식을 팔지 않으며 전 가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康得周:남66 외 4名)
비들못·비토지(非吐池)·구지(鳩池)§조선 중기 10여호의 민가가 있었는데 어느 해 심한 흉년 중에 어느 중이 탁발하러 왔다가 넉넉한 공양미를 시주 받아 감격한 중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마을 형세를 살펴 보고 북쪽에 玄武가 비어 있으니 그 곳에 못(池)을 파고 非吐池라 부르게 하였다. 동민들이 모여 준공제를 행할 때 못 가운데서 비둘기(鳩)가 날으며 소낙비가 내려 못불이 가득 찼다. 중의 말대로 非吐池 혹은 비둘기 못이라 불려 지다가 그 뒤 비들못으로 불리게 되었다.(徐光昊)(申基株:남74 외 3名)
內 良 洞 뒨짐이·들마을·바깥면실(外棉谷)·철점(鐵店)§위천의 남서쪽이며 면실 북동쪽 바깥에 있는 마을로서 예전에 쇠를 파내서 만들던 鐵店이 있다고 철점이라고 했고 이 지역 대부분이 천수답이 많아 가물 때는 목화를 심어 생계를 유지 했다고 外棉谷이라 칭했다. 약 35가구의 마을로 濟州 高氏가 많이 살고 있다.(鄭完道:남 77外 5名)
안마을·안면실(內棉谷)·면실(棉谷)§내량동의 안쪽에 위치하기에 불리워진 이름이다. 마을 뒷산에서는 옛날에 활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약 36세대로 金海 金氏가 많이 살고 있다(權孝源:男33 外5名)
건너마아·건너마실·칠탄(七灘)§開峯池 아래 쪽에 위치하며 안어리실 건너편 마을로서 12가구가 거주하는데 南陽 洪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李文植: 男82 外 5名)
3 양천(良川)§군위군의 서북쪽 위천의 서쪽, 안어리실 동쪽에 위치하는 마을로 26가구가 거주하며 南陽 洪氏가 많이 살고 있다.(洪斗學: 남70外 5名)
안어리실·귀명·어리곡(魚里谷)·양곡(良谷)·구명(鳩鳴)§약 27가구가 거주하고 南陽 洪氏가 많이 살고 있는 內良洞의 중심부이다. 이 마을의 건너편에는 召保面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바람재(風嶺)란 고개가 있다. 바람재의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는 2개의 미륵이 있었으며 직경 2m 정도의 큰 구멍이 있어 항상 바람이 불어 나온다. 이 바람은 처음 나올 때는 천천히 불어 나오지만 風嶺에서는 최고의 거센 바람이 된다고 한다. 요즈음도 고요한 날에도 그 곳은 바람이 세차며 나무꾼이 나뭇짐을 세워 두지 못한다고 전한다.(洪點遠 :男75 外 5名)
거름말·공수말·공수역(公須驛)§良川과 鳩鳴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서 예전에 역이 있었으며 길거리 주변에 있다하여 거릿말,거름말이로 불러 오고 있다 한다. (全炳滿)(李太植 :男 69 外 5名)
大 北 洞 너운골·너문골·월곡(越谷)§중심지 마을인 中北洞에서 보면 남쪽에 골을 넘어서 마을이 위치하므로 너운골 또는 너문골이라 부른다. 현재 너운골에는 浙江 張氏가 10여 호 살고 있다.(張雲洛: 男 68 外 4名)
소촌(蘇村)·정북(正北)§옛날에 蘇氏가 거주하다가 폐가 되었으며 蘇氏의 묘가 남아 있다. 中北洞에서 보면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정북이라 불려진다. 현재는 浙江 張氏가 20여 호 살고 있다.(장태조: 남 65 外 4名)
위촌·이촌(李村)·외촌(外村)·외북(外北)§大北洞 골짜기의 바깥쪽에 위치하며 현재는 義城 金氏·慶州 金氏·星州 李氏가 살고 있다. 옛날에 성주 이씨가 많이 살았다고 李村이라 불렀다 한다.(金用德: 男 63 外 4名) 큰마을·큰마아·장촌(張村)·중북(中北)·중화촌(中華村)§浙江 張氏가 많이 살므로 張村이라 부른다. 다른 동네 사람들이 張村이라 하고 가까운 大北 내에서는 큰 마을이라 부른다. 中國 浙江省 將軍 張海濱이 임진 왜란 때 와서 참전하였다가 부상 당하여 이 곳에 피신하였는데 뒷산 봉우리에 대명당을 쌓아 북쪽 모국을 향하여 배례했다는 데서 유래한 동명이며 현재 浙江 張氏 70여 호가 살고 있다.(張榮相: 男 68名 外 2名)
내북(內北)§동네 주변에 오목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북안에 동리가 있어서 內北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中北洞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성씨가 30여 호 살고 있다(李月姬: 女77 外 2名) 서원(書院)·
서원동(書院洞)§延安 李氏 南溪 李 輔선생이 군위에서 출생 하였으며 그 南溪書院이 이 마을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 동명이다. 서원은 6.25 동란 때 소실되었으며 李氏의 외손인 西涯大監을 모신 南溪書院 터가 있다.(黃河鍾)(金八龍: 男77 外 2名)
4 東 部 洞 아촌(牙村)·아천(牙川)·아천(雅川)§ 東部洞 北東향에서 西향으로 흐르는 위천의 지류로 물이 맑고 깨끗하여 雅川으로 불리워지던 것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현재는 생활 폐수로 인하여 수질 오염이 극심한 이름뿐인 雅川이다.(朴永浩:男69 外 4名)
오뭇골·골안(谷內)·오미골(烏尾谷)·오항(烏項)·오미곡(烏尾谷)§牙村 남쪽 골짝 안의 지형이 까마귀 꼬리 모양과 같다 하여 烏尾谷으로 불리워졌다. 한때 까마귀 20여 마리가 서식하여 동명에 걸맞았으나 지금은 철에 따라 몇 마리 정도뿐이고 同名만 烏尾谷으로 불려진다.(徐昌植: 男 84 外 4名)
쉬똥골(古金谷洞)·교동(校洞)§牙村 북동쪽에 있다. 군위 유생들의 교육의 장이요 석전제를 모시던 향교가 있어 교동으로 불리워졌다. 군위읍 유교 문화의 요람지가 지금은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徐香蘭)(朴柱浩:男 62 外 4名 )
武 成 洞 용산(龍山)·용성(龍成)§ 渭川 동쪽 龍山 서쪽 기슭에 있고 1450년에 成氏가 개척하였다. 마을 남서쪽 渭川 깊은 소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며, 龍山도 용의 형상이므로 龍成.龍山이라 부른다.(李明永: 男70 外 4名)
웃내민(上羅)·상남면(上南面)·상무(上武)§ 渭川 서쪽에 있고 1450년에 朴氏가 개척 하였고 지금의 軍威邑 최남단에 자리한 부락이다. 위천 상류에 있기에 上武의 上字가 붙었고 面事務所 남쪽에 위치한다고 상남면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 마을 뒤 赤羅山이 있고 신라 景德王 때 이 부락이 武士의 駐屯地이었기에 上武라 한다.(朴明在 :男 69 外 3名)
내민(羅)·중무(中武)§ 渭川 서쪽에 있고 1700년에 金氏가 개척 하였다. 지금 쓰는 동명에 武字가 있는 것은 上武·中武·下武의 武字를 따서 武成이 되었다. 赤羅山 중턱에 "長者平地"라 일컫는 1정보 정도의 집터가 있는데 武士의 막사이다. 지금도 집터와 샘의 자취가 있고, 쟁기밭·우죽골·말장 등 5,6 朴泉의 유허가 있다. 이산에는 좋은 묘터들이 있으나 묘를 쓰기만 하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산에 묘를 쓰지 않는다 한다.(金海均: 男70 外 3名)
아래내민(下南面·下羅)·하무(下武)§ 渭川 서쪽에 1300년에 陰氏가 개척 하였다. 부락 서쪽에 뒷죽고개가 있어 여기에 안개가 끼이면 호우가 시작되어 홍수가 범람하므로 수해를 방비하였다고 전한다. 약 40가구의 마을이다.(李相泰)(朴泰鉉 : 男 69外 4名)
社 稷 洞 사당골·사직골·사직동(社稷洞)·사동(社洞)§ 본래 군위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군위군의 社稷壇이 있었으므로 시직골, 또는 사단골·사동이라 하였는데 5 1914년 행정구역 폐함에 따라 池洞 일부를 병합하여 사직동이 되었다. 인조 반정 때 밀양 朴氏들이 사당으로 모신 곳이므로 사당곡으로 불려 오다가 사당골로 변하였다. (朴泰圭: 남76 外 3名) 못골·
지동(池洞)§ 조선 중엽 때 동리에 못을 막고 있는 동리라 하여 못골이라 불러 왔다. 현재 龍宮 崔氏가 많이 살고 있다.(朴漢寧)(崔允鎬: 男65 外 2名)
鈒 嶺 洞 삽재·삽령(鈒嶺)§ 약 270여 년전 南陽 洪氏가 처음 살기 시작 하면서 新洞이라고 불리다가 新城·薪城으로 변했고,재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삽재·삽령(鈒嶺)으로 호칭 되고 있으며 약 40여 호의 마을이다.(李慶洛: 男 70 外 5名)
큰골§ 삽령 남쪽에 위치한 제일 큰 마을로서 골이 크고 깊어 큰골이라 불려진다. 永川 李氏·南陽 洪氏등 17가구가 거주한다. (李慶洛 :男 70 外 5名 )
등너매·작은골·정골§鈒嶺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골이 얕고 작아 작은골이라 불렀고, 큰골에서 작은 구릉너머가 되므로 등너매라 부른다. 南陽 洪氏· 全州 李氏 등이 살고 있다.(金泰鉉)(李慶洛: 男 70 外 5名)
上 谷 洞 토일(吐日)§ 군위읍에서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船放山 남동에 약 75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로서 마을의 모습이 토시를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마을의 북쪽에 지보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의 경내에서 황청토를 캐내어 염색 재료로 썼기 때문에 보물을 가진 절이라 하여 지보사라 부른다고 한다.(李貫京: 男85 外 4名)
샘위뜸§ 吐日 중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7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徐氏 일족이 집단 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벼농사를 하고 그 중 2가구는 과수원도 경영하고 있으며 대체로 중류 정도이다. (全千得:男 74 外 4名)
아랫뜸·군위편(軍威便)§ 吐日중의 아랫마을로서 입구에 자리잡은 이 마을 최대의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가 吐日 마을 사람들의 벼농사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全成國 : 男64 外 4名)
안말§ 吐日중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5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7가구로 늘었다. 7가구 모두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는데 金氏가 5가구나 된다. 그 중 2가구는 규모가 작은 과수재배도 겸하고 있다.(李敬壽: 男75 外 3名)
양지뜸§ 吐日 중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며 양지쪽이 되므로 이렇게 불려진다. 吐日 마을에서 세대수가 가장 많은 마을로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부업으로 과수. 양잠. 양돈을 하고 생활은 대체로 넉넉한 편이다.(朴郡鳳: 男84 外 2名)
의성편(義城便)§ 吐日 중의 동쪽에 위치하며 의성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다. 산의 모양이 아담하고 이산을 넘으면 의성군이 된다. 주로 밭농사를 많이 하고 있으며 6 산 중턱에 작은 과수원이 군데군데 있다.(金泰浩: 男82 外 4名)
극내기·극락(極樂)§ 吐日의 북쪽 軍威邑의 북동에 위치한 마을로서 현재 8가구 뿐인데 10가구가 넘으면 재난이 닥친다고 하며 極樂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극락으로 칭한다.(沈相鳳)(朴秀萬: 男51 外 4名)
西 部 洞 밤마실·노하(路下)§ 국도의 서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며 밤나무를 많이 심었던 곳이므로 밤마실이라 일컫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국도의 동편보다 지형이 낮기 때문에 노하라고도 부른다.(申宅權: 남62 외 5名)
서부이동·노상(路上)·향교골(鄕校谷)§ 국도 동편의 지대가 서편보다 높기 때문에 노상이라고 불려온다. 향교가 위치한 동네라고 하여 일부는 향교골이라고도 불려지고 군수 관사 경찰서장 관사가 있다하여 관사골이라고도 불려졌다. 옛고을 원님이 살던 곳이 헐려 지고 현재 농업 기술센타가 지어졌다.(徐昌煥: 남 45 外 10名)
구시장(舊市場)·구장터§ 밤마실 남쪽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광복 후 이 곳에 시장이 설립되었으나 西部洞 북편에 다시 신 시장이 생기므로 구장터라 부르게 되었다.(張絹子)(申宅權: 男 62 外 5名)
**서부 1동이 나뉘어져 3동으로 분동 되었는데 거기에 대한 자료는 추후 보강토록 할것임 혹시 내용을 상세히 아시는 분은 꼬리 달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정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水 西 洞 서구이·서군동(西君洞)§ 옛날 동네 앞 강변 서쪽에 큰 호수가 있어 西湖洞이라 불렀으며, 동네 중앙에 서호재사가 있었다. 동네 입구 강에 西君橋가 있고 산골에 西君池가 있으며 약100가구의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徐千重:男77 外 4名)
안장수골·장수골(長水谷)§ 동네의 위치가 계곡에서 약 2㎞ 들어간 곳에 있어 안장수골이라 부르며, 안장수골에서 안쪽으로 약2㎞의 계곡이 길게 뻗어 있어 수원이 풍부하다 하여 長水골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 피란 와서 머물러 살고 있다. (崔仁植: 男53 外 3名)
바깥장수동(外長水洞)·배다리(船橋)§ 長水洞 바깥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서 渭川 변에 위치하며 지금부터 약70년전에 이 동리가 생길 당시 배를 타고 渭川을 건너 다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金順模)(崔士龍:男74 外3名)
梧 谷 洞 안마을·오실(梧實)·오곡(梧谷)§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실. 오곡이라 불렀다 한다. 임진왜란 때 무티라는 사람이 진골에서 피란 하였다가 이 곳에 정착하여 오실이라는 마을 이름을 붙여 살아온 듯하며 현재는 慶州 孫氏. 平海 黃氏. 昌寧 成氏 등 3성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黃鶴山:男70 外 3名)
7 거릇마·그릇마§ 梧實 중의 서쪽 국도 옆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 본동 까지 들어가지 않고 한길 곁에 있으므로 거릇마라고 부른다. 지금은 오실의 자연 부락 중에서 가장 큰 동네로 다른 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다.(黃鶴源: 男62 外 2名)
양지말·양지편(陽地便)§ 특별한 지명 유래는 없고 최근 들어 주민들이 편리상 오실 중의 북서쪽 양달에 위치한 장소라 하여 이렇게 부른다. 주민들의 도시 진출이 잦아 지금은 7가구만 살고 있다.(孫道伊: 男 69外 2名)
음지말·음지편(陰地便)§ 오실 중의 동북쪽 응달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음지가 되므로 음지말이라고 부를 뿐이다. 지금은 慶州 孫氏와 平海 黃氏가 거주하는 마을이다.(黃奭煥: 男64 外1名)
미치미·미치이§ 흰재(白嶺洞)의 높은 고개가 완만해진 끝 지역에 위치하며, 구안 도로 옆인데 예로부터 사방이 무인지경으로 강도가 많이 들어 위험촌으로 알려졌었다. 미늠지라는 못이 있어서 이렇게 동명이 유래된 듯하다.(洪榮佑)(裵潤植: 男72外 5名)
外 良 洞 바깥어리실·양곡(良谷)·외량(外良)§동네 뒷 산인 태항산 골짜기의 모양이 良字와 비슷하게 생겨서 마을이름을 어리실(良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어리실(內良洞)에서 볼 때 바깥쪽이 되므로 바깥어리실이라 한다.(洪景達: 男72外 5名)
새터(新基)§ 일제 때에 몇 집이 있었는데 그 후 籠岩의 延安 李氏가 이 곳에 이주하여 새 마을을 이루게 되어 새터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 입구에 일자봉이 있는데 이 산은 大興洞 부근에서 남쪽으로 움직여 가는 것을 鈒嶺洞의 여인이 보고 산이 걷는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멈추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산의 모양이 一字 같이 되어 있다. 延安 李氏·南陽 洪氏가 많이 살고 있다.
솔티·송현동(松峴洞)§ 太恒山 줄기 의 북쪽 五指穴의 입구에 있는 40여 가구의 마을로 약400년 전에 생겼다고 한다. 처음엔 동명이 망월이었다가 임진왜란 때 솔티로 되었는데 명군 이 여송의 이름에 松字가 있어 왜군이 松字 든 마을을 피해 간다 하여 솔티라고 했다 한다. 이 마을의 북동쪽에 있는 五指形이란 산에는 五指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延安 李氏가 사망하여 묘지를 정해 광혈을 파는데 중이 지나다가 정승이 날 터라고 했다. 그 때 河回 柳氏家로 출가한 延安 李氏의 딸이 길가 우물에서 빨래를 하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욕심이 나서 남편의 묘를 쓰기 위해 밤중에 몰래 물을 광중에 길어다 부었다 이튿날 李氏가 보니 광중에 물이 고여 있으므로 이 곳을 버리고 다른곳에 묘를 쓰려하니, 딸이 달라고 하기에 허락 했다. 그 곳에 柳氏 즉 西涯의 祖父 묘를 쓰고 난 후, 후손으로 柳成龍 선생이 태어 났다고 한다. 산 모양이 五指形으로 되어 있어 五指穴이라고도 하며 食指에 남편 柳氏의 묘, 다음 長指와 그 이하에 李氏의 묘를 썼고 엄지에는 南陽 洪氏의 묘가 있다.(金太鉉)(鄭東穆: 男67外 4名)
8 龍 臺 洞 무질바우·수암(水岩)§ 장자골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기암 괴석이 많고 수질이 좋으며 사시로 물이 나오는 바위가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韓斗星 :男65外 5名) 새터(新基)§ 점마아에서 새로 생겼으며 장자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18가구가 거주한다.(金貴達: 男76外 5名)
장자골·장자울·장자곡(長子谷)§ 용대동 서쪽에 위치하며 부자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長子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마을로서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張承遠: 男 66外 5名)
양지마아·양지(陽地)§ 정동에 위치하여 양지바른 마을이므로 양지마을이라 불리었으며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金學松: 男 65 外 5名) 점마아·점마을·점촌(店村)§ 장자골 북쪽에 위치하며 옛날 그 골짜기 안에 옹기 굽는 점골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며, 이 곳으로 옮겨 옹기를 굽다가 현재는 옹기를 굽지 않는다. 점마아 중앙에 옹기점 터인 점터가 있다.(李鍾奎)(丁經祚: 男 77外 5名)
政 洞 우정골(右政谷)·우정동(右政洞)§ 船放山 쪽의 우편에 위치하는 50가구의 마을로서 海平 金氏가 주성이다. 옛날 羅氏가 우정승을 했는데 이 곳에 살았기 때문에 우정곡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에서 동쪽 산기슭을 따라 1㎞쯤 들어가면 59°의 경사진 곳에 큰 암석이 있는데 이를 장사 공기 돌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지금부터 1500여 년 전 힘이 센 두 장사가 내기를 했다. 한 사람은 쌀을 다섯되 밥을 지어 다 먹어 치운다고 했고, 다른 장사는 저 앞에 있는 바위로써 공기를 하겠다고 했다. 내기 결과 바위로 공기를 하겠다던 사람이 이겼다. 화가 난 옆의 장사가 바위 한 개를 던지니 그 것이 마을 뒷산에 놓여졌다. 어른 5명이 들 수 없는 무게의 큰 바위이다.(金彙性: 男 68 外5名)
좌정골·좌정곡(左政谷)§ 船放山을 향하여 좌편에 위치하며 海平 金氏가 주성이고 安東 權氏도 거주한다. 羅氏가 우정승을 지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金彙性: 남68 外 5名) 흰재·백령동(白嶺洞)§左政谷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흰 바위가 많기 때문에 흰재(白嶺)라 붙여진 동명으로 지금은 政洞 3洞이며, 永川 李氏가 많이 살고 있다.(申相元)(金基滿: 男60 外 5名)
9 下 谷 洞 가리미·부처가리미·가음(佳音)·갈음리(喝飮里)§갈림길 즉 義城의 塔里·上谷·龍臺의 삼거리에 있는 분기점이다. 동네 중앙에 약200여 년 전에 만들었다는 부처(미륵)가 있기 때문에 부처 가리미라고도 하며 義城 金氏· 密陽 朴氏등 17가구가 살고 있다.(崔在明 :男 70 外 2 名)
동리(東里)·동토(東吐)·동토일(東吐日)§ 하곡동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吐日의 입구가 되는 마을로서 옛 성터인 마정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가 불탄 후에 동쪽으로 옮겨졌다. 軍威邑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라 하여 동리로 불렸다.(李圭和 : 男 62 外 2 名)
속골·솥골·속곡(束谷)§ 마을 뒷산이 소의 머리 부분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설에는 옛날 가마솥을 만들던 곳이어서 솥골이라 했다 한다. 현재 慶州 崔氏· 아주 신씨등 2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李又桓)(申台洙: 男 68外 3名)
大 興 洞 보르골·보로골·보동(甫洞)§ 대흥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소보면 동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옛날에 固城 李氏가 크게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뜻에서 甫字를 넣어 甫洞이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에 李永男이라는 사람이 진사 벼슬을 지내면서 재산은 있으나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 여식을 洪氏에게 출가시켜 재산을 물려주었다 한다. 이에 지금도 제사를 洪氏 가문에서 지내주고 있다고 한다. 80여 가구 중 南陽 洪氏가 주성이다.(洪淳洋 :男 77外 5名)
농바우·농바위·농암(籠岩)§ 보르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농같이 생겼고, 그 바위 옆에 탕건바위 각시바위가 있어 부부라는 관점에서 농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생겨난 명칭이다. 마을 뒤에 延安 李氏의 선조가 세운 淸風亭이라는 정자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20가구 중 延安 李氏의 集姓村이다. (李鉉福 : 男 72 外 4 名)
웃마·웃진사§보르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李廷佑(號 所庵)가 영조 40년에 탄생, 순조 7년에 進士가 되어 웃마에 살았기로 웃진사라 하였다고 한다. 37가구가 살고 있으며 李氏 집단 부락으로 他姓氏가 한집도 없다(李華玉: 男 73外 4名)
아랫마·아랫진사§ 보르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李 德(號 農山)이 조선 영조 38년에 탄생 정조 22년에 進士가 되어 아랫마에 살았기로 아랫진사라 하였다 고한다 33가구가 살고 있으며 李氏 집단 부락이다(表河一)(李華玉:男73外 4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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