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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를 바라보는
조선과 미국의 시각차
■ 조선측 기록 : '왕조실록'(고종편)
* 1866년(고종임금 3년), 날짜는 음력기준.
* 이해가 쉽게 기록내용을 의역, 축약함.
7월11일
이양선(異樣船) 1척이 평양 경내의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정박. 평양서윤(平壤庶尹; 평양부의 종4품)이
술시(戌時; 오후7시-9시사이)쯤 그곳에 가니, 이미 평양부의 신장포구(新場浦口)로 옮겼다고 함.
7월12일
평양서윤이 진시(辰時; 오전7시-9시 사이)에 신장포구에 가서 문정(問情; 정황을 물음)하니,
자신들은 서양인으로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말고 딴 목적은 없다고 함. 서윤은 “조선에서는 무역이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고 있으며, 지방관이 마음대로 허가해 주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대답함.
선원중 한 사람인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한국명 崔蘭軒)는 “조선은 왜 천주교인들을 쫓아내는가?
예수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는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라고 했다. 서윤은 “그 종교는 우리나라에서 불법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마음대로
익힐 수 없다”고 대답해줌.
토마스는 또 “프랑스의 큰 배가 이미 한양에 갔는데(1866년 한강 양화진침입 건), 우리 배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서윤은 “큰 배가 수도에 갔다고 말하는 의도를 알 수 없다. 당신 배는 언제쯤 철수하나?”고 묻자
서양인들은 머리를 끄덕이고 대답을 않았다. 서양인들은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얻은 식량과 찬거리로
며칠을 버텼는데, 쌀과 고기, 계란(鷄卵)과 시목(柴木; 나무땔감) 등을 도와주기 바랍니다” 요청을 해와
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너그럽게 대하는 게 도리여서 “쌀과 고기 등을 공급해 주었다”고 했다.
12일 유시(酉時; 오후5시-7시사이)경 6명이 작고 푸른 배를 타고 물깊이 탐지를 위해 상류까지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되돌아 옴.
7월13일
인시(寅時; 오전3시-5시 사이)에 배를 출발시켜 평양부 만경대(萬景臺) 아래 두로도(豆老島) 앞에 정박.
7월18일
평양감사(平壤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 조정에 보내는 현장보고서)에 따르면,
7월18일 큰 이양선(異樣船) 1척이 한사정(閒似亭)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7월19 유시(酉時; 오후5시-7시 사이)경
6명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순영중군(巡營中軍; 순무영 중군) 이현익이
감시를 위해 작은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름. 그때 서양인들이 갑자기 다가서더니 우리군사가 탄 배를 끌어가
자신들의 선박안에 억류함. 평양부 서윤(庶尹)이 그들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曉諭; 깨닫도록 타이름)하였지만,
끝내 군사를 돌려보내지 않음.
7월19일
사시(巳時; 오전9시-11시사이) 쯤 배를 출발시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완구(大碗口; 큰 대포, 함포를 의미)와
조총을 마구 쏘아댐. 황강정(黃江亭) 앞에 배가 닿자 그곳에 정박함. 그 후 서양인 5명이 작은 파란색 배를 타고
물깊이 탐지를 위해 오탄(烏灘) 일대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그때 평양성안 백성들이 강변에 모여들어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라”며 소리 높여 외침. 그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분명히 알려주겠다”고 하자 군중들이
분함을 참지못해 돌을 마구 던졌다. 또 장교와 나졸들이 활이나 총을 쏘아대는 등 위세를 과시함.
그러자 서양인들은 도망쳐 돌아갔으며 그 큰 배는 양각도(羊角島) 하단(下端)으로 물러가 정박하였음.
7월19일 신시(申時; 오후3시-5시 사이) 쯤 퇴직한 장교 박춘권(朴春權)이 앞장서서 배를 타고 그들 배에 돌진해
들어가 중군을 구원해 돌아왔다.
▲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했던 대동강 양각도. 한강 여의도보다는
작지만, 이곳에는 평양시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돼 있다. 대동강은 길이
450.3㎞로 한국에서 다섯번째로 큰 강이다. 평안남도 평양특별시·남포직할시·
황해북도·황해남도를 아우르며 평안남도 내륙수로의 대동맥 역할을 한다.
*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ylj1407?Redirect=Log&logNo=130088140374
7월25일
평안감사 박규수의 장계.
“평양 방수성(防水城)에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이 상선을 약탈하며 총을 쏘아대 조선사람 7명이 피살되고
부상자가 5명이나 됐습니다.”며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너그럽게 대하고 좋은 뜻으로 타이르고 식량도 넉넉히
주어서 도왔는데, 갈수록 더욱 더 포악한 짓을 자행하고 있다고 보고. 박슈수는 또 “처음에는 중군(中軍)을 잡아
억류하고, 나중에는 백성들에게도 상해를 입혔으니 저대로 계속 날뛰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모두 무찔러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했다. 고종임금은 그렇게 하라고 윤허했다.
7월27일
평안감사 박규수의 장계.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이 미쳐 날뛰면서 포와 총을 쏘아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토마스(崔蘭軒)와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江岸)으로 데려왔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달려들어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겸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과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직접 총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결국 적들을 소멸시켰으니
모두 그들의 공로라고 할만 합니다. 포상(褒賞)의 특전을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했다.
8월8일
평안 감사 박규수의 장계
“평양부(平壤府) 방수성(防水城) 앞 여울에서 정박해 있던 이양선 1척과 그 기계들과 잡다한 물건들을 몰수하여
함께 불 태워버린 다음, 배에 장치한 것들이나 무기 같은 철물이 삭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서 적간(摘奸; 샅샅이 뒤짐)하여
감영의 무기고에 거두어들여 앞으로의 일에 보태 쓰도록 하였습니다. 창고에 입고시킨 수량은 대완구(大碗口; 큰 대포)와
소완구(小碗口; 작은 대포) 각 2좌(坐), 대완구환(大碗口丸; 큰 포탄) 3개, 철로 만든 닻 2개, 크고 작은 철사고리로
연결한 쇠고리줄 162파(把; 1파는 약 180cm), 서양철 1,300근(斤; 1근은 375g), 장철(長鐵) 2,250근,
잡철(雜鐵) 2,145근입니다.” 보고.
'제너럴 셔먼호'는 진짜로 불타 없어졌나? 한미(韓美) 150년 외교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1866년 여름 대동강에서 실종된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에 관해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록은 대체로 4가지로 요약된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편(1866)에 수록된 어전회의 기록과 ▲ 당시 평안감사였던 박규수가 보고한 문서기록 ▲ 미 해군기록보존소의 제너럴셔먼호 관련기록 그리고 제너럴셔먼호에 탔다가 순교했다는 ▲ ‘한국최초 순교목사’ 토머스(Rev. Thomas)에 관해 전해지는 '신화같은 이야기'들이 그것. 이 가운데 역사적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조선왕조실록과 미해군 기록보존소의 자료 두 가지인데, 그 기록들은 제너럴셔먼호의 운명에 대해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증언을 하고 있다. 박규수의 보고에는 "불탄 선박의 고철을 수거했다"고 주장하고, 미국측은 1874년 1월 미국에서 민간화물 운송선으로 운항 중 악천후로 인해 침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측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제너럴셔먼호는 어쨌건 "8월31일(양력) 대동강에서 조선군의 화공(火攻)작전으로 배를 불태웠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설(異說)이 없다. 대략의 내용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8월31일 대동안 양쪽 기슭에 모여든 평양시민을 향해 제너럴셔먼호가 위험을 느낀 나머지 함포를 발사, 조선병사 12명과 다수 시민이 사망했다. 조선군은 작전상 후퇴를 했고 시민들이 계속 돌을 던지고 불화살을 쏘자 제너럴셔먼호도 이에 함포를 응사했다. 평양시민들과의 밀고 당기는 소규모 교전이 계속되던 중 9월5일 평안감사 박규수가 "선박파괴 명령"을 내렸고 조선군은 거북선을 급조(急造), 모래톱에 좌초한 제너럴셔먼호에 다가가 총통 등을 발사하지만 철선인 제너럴셔먼호에는 별다는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조선군은 뗏마(소형목선) 두 척을 하나로 묶어 그 안에다 장작, 황, 초석(硝石)을 적재해 불을 붙여서 제너럴셔먼호에 접근시키려 했지만 접근도 하기전에 불이 꺼져 실패하고 말았다. 두번째 시도에서는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이 불붙은 뗏마가 접근하자 밀어버려 또 실패했다. 그러나 세번째 시도는 제대로 접근, 제너럴셔먼호가 불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원들이 모두 강에 뛰어들어 강기슭으로 헤엄쳐 나왔다. 성난 평양시민들은 이들을 무차별 린치, 모두가 사망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포로로 잡혀있던 조선군 한 명 뿐이었다. ▲ 제너럴셔먼호가 불타고 있는 장면을 찍었다는 '유일한 증거사진' 이 사진은 현재 북한의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북한정권은 '김일성선집'(金日成選集)이란 저술을 통해 대동강의 제너럴셔먼호 격침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金亨稷)의 할아버지인 김응우(金膺禹)가 떨치고나서 미국배를 불질렀다고 기록한다. 김일성 조상이 불태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해도, 이 사진은 의문스러운 점이 너무 많다. 불타는 모습은 확연히 목선(木船)으로 여겨지는데 제너럴셔먼호는 사실 두꺼운 철판으로 건조된 선박이란 점에서 '선박전체 화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이다. 또 하나 의문점은, 이 사진은 과연 누가 찍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진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외국인방문도 허용되지 않았는데, 유럽 선진국에서조차 일반화되지 않았던 고가의 사진기를 북한주민 가운데 누가 휴대했으며, 더군다나 대동강까지 뛰어들어 이 사진을 찍었는지. 그것은 '귀신도 알지 못할' 일이다. < * 필자 註 : 미국은 흑백사진기가 발명된 18세기 중엽이후 미 해군소속의 전함은 거의 대부분 사진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제너럴셔먼(로얄프린세스호)의 사진만은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소형범선인데다 원래가 전함용으로 건조된 배가 아닌, 남북전쟁(시민전쟁)당시 민간에서 압류해 2년간 군용으로 잠정사용된 탓에 '정식 미군전함'에는 포함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 미국측 기록 : 조선측과 판이한 '제너럴 셔먼호' 관련기록
▲ 공식기록
미국 해군역사자료관(Department of the Navy- Naval Historical Center)은 제너럴셔먼호에 관한
기록을 이례적으로 짧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시민전쟁당시 단 2년 동안
해군함(U.S. Navy ships; 1863-1865 취역) 프린세스 로열함(USS Princess Royal)란 이름으로
참전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아래내용은 그 기록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번역문 아래에는
영어원문도 함께 실었다.<필자 註>
전함 프린세스 로열(USS Princess Royal)은 총톤수 774t 의 증기기관 스크류추진 함포(gunboat)로
1861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건조돼 아이리시해역(Irish Sea; 아일랜드 해역)을 운항하는 상선으로 취역했다.
1863년 1월29일, 남북전쟁당시 항만봉쇄된 남 캘리포니아 찰스턴(Charleston; 웨스트버지니아주 주도)항의
출입통제선을 뚫고 항해하던 프린세스 로열호를 미국전함 우나딜라함(USS Unadilla)이 나포했다.
당시 그 배에는 선박용 증기기관이 적재돼 있었는데 그 엔진은 후에 전함 캔서스(USS Kansas)에 장착됐다.
미 해군은 1863년 3월 프린세스 로열호를 구입, 전함으로 개조한 뒤 5월말 전투임무를 부여했다.
1863년 6월 프린세스 로열은 멕시코 걸프만으로 배치돼 루이지애나주 도널드슨빌(Donaldsonville)에 주둔한
기병대를 포격하는 임무의 한 부분을 맡았다. 1863년 중반에서 1865년초 퇴역할 때까지 텍사스만에서
프린세스 로열함이 거둔 전과는 항해금지구역을 넘나드는 선박들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킨 것이었다.
1865년 7월 미국시민전쟁이 끝남에 따라 해군은 프린세스 로열함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미국부부지역으로
귀환시켰다. 그해 8월 프린세스 로열함은 '제너럴 셔먼'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선으로 재취역 운항되다가,
1874년 1월10일 노스 캐롤라이나주 피어만(Cape Fear)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미해군 역사자료관의 영어원문 기록)
USS Princess Royal, a 774 gross ton screw steam gunboat, was built at Glasgow, Scotland,
in 1861 for commercial employment in the Irish Sea. On 29 January 1863 she was captured by USS Unadilla
while attempting to run through the Federal blockade of Charleston, South Carolina. Her cargo included
a steam engine that was later used to power USS Kansas. The U.S. Navy purchased her in March 1863 and,
after converting her to a warship, placed her in commission in late May.
Sent to the Gulf of Mexico, in June 1863 Princess Royal took part in a bombardment of enemy cavalry
at Donaldsonville, Louisiana. While serving off the Texas coast between mid-1863 and early 1865,
she captured or destroyed several sailing blockade runners. USS Princess Royal returned north in July 1865,
as the Navy was reducing its forces following the end of the Civil War. Sold in August of that year,
she became the merchant steamer General Sherman and was active until 10 January 1874,
when she sank off Cape Fear, North Carolina.
▲ 관련 연구기록
* 필자 註 : 아래 내용은 미국의 역사학자가 기술한 내용으로, 미국의 입장에서 비교적 공정하게
작성된 내용이라 판단돼 그 원문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한글 번역문 아랫부분에
영어 원문을 게재했으니, 혹시 잘못된 번역부분을 발견되면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필자(카페지기)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오역(誤譯)으로 확인되면 수정하겠습니다.
제네럴셔먼호 사건은 한국과 미국간 첫 번째 무력충돌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자그만 사태는 10명의 한국인과 3명의 미국인이 사망하는데 그쳤지만, 1871년의 신미양요로 발전해
3명의 미군과 243명의 조선군이 사망하는 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미국의 상선 제네럴셔먼호가 평양근처에서 불에 타 침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제네럴셔먼호는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철선(鐵船)이어서 그렇게 쉽게 불이 붙지도 않고 또 조선측의
공격으로 불 질러졌을 땐 선박이 강바닥 진흙에 좌초한 상태였고 배가 침몰할 만큼 강수심도 깊지 않았다.
한미간 외교역사를 거슬러 1844년 7월로 올라가면, 미국의회는 당시 ‘은둔의 왕국’으로 불리던 한국과 미국의회가
통상을 정식추진하려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무장한 스쿠너선 제네럴셔면호를 한국에 출진시켰다.
제네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은 잘못된 정보와 신화의 안개 속 장막에 가려 아직도 미궁속을 헤매고 있다.
조선조정에서 기록한 고종실록에 이 사건은 대략 묘사돼 있는데, 미국 해군측은 이 난처한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1871년 6월 미국침략군이 구성돼 이 사건을 보복하는 설욕전이 있었고 “미국인을 학살한 조선인들”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243명의 조선군을 사살했다. 특히 제네럴셔먼호의 선원들을 학살하고 선박을 불 질렀고,
조선정부 허락은 없었으나 한강에서 수심을 측량하던 또 다른 미국의 소형보트를
불 지른 행위를 응징하는 것이었다.
제네럴셔먼호(전 미국전함 프린세스 로)의 간략한 생애소개
이 선박은 1861년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테드·맥거리거조선소(Ted & McGregor)에서 건조됐으며
한 밀무역업자에게 팔려 미국 시민전쟁기간 중 무기류와 군사용품을 미국측 동맹거래처에 공급하는 일을 했다.
이 선박은 철선으로 길이 198피트 9인치(약 60m) 폭 27피트 3인치(약 8.2m) 흘수(訖水) 16피트(약 4.8m)였다.
석탄을 때는 증기엔진 2기에 돛대 마스트가 2개가 장착됐고 항해속도 11노트(시속 약 20km)였다. 선박 무장은
12파운드(약 5.44kg) 포탄발사 대포 2문과 소형포(게이틀링건 Gattling guns으로 추정) 2문, 약 15명의 승무원이
개인화기로 무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63년 미국 연방해군에 징집돼 시민전쟁이 끝나던 1865년까지 미해군 전함 프린세스로열(U.S.S. Princess Royal)로
참전했다. 전쟁 뒤에는 쿡(Samuel C. Cook)씨에게 팔렸는데, 그는 2문의 대형함포와 2문의 소형포를 장착하고
선박이름을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으로 고쳤다.
1864년 쿡은 중국으로 선박을 보냈다. 1849년부터 중국은 외세를 반대하는 폭도들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켜
외국인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정국이 혼돈상태에 빠졌는데, 당시 청나라조정은
외국인 용병을 고용해 폭도들을 진압했다.
미국 시민전쟁에 참전했던 일부 예비역 병사들도 모험과 행운을 거머쥐려 중국으로 건너갔다.
버지바인(Henry Andres Burgevine, 중국명 白齊文; 1836–1865)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해군예비역이며 태평천국의 난이 한창일 때 청나라조정이 고용한 용병이 돼 뛰어난 전공을 세워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의 한 늙은 하급관리가 보수를 가로채자 그는 관리를 살해, 폭도들 편에 가담했다.
1865년 그는 일단의 용병들과 함께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포모사(Formosa; 현재의 대만)로 건너가 그곳
폭도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항해도중 중국 황실해군이 제너럴셔먼호를 가로채 빼앗았고
버지바인은 살해돼 바닷물에 수장되고 말았다.
(노트: 제너럴셔먼호의 소유권은 애매하다. 미국 해군에 징발돼 시민전쟁에 참전한 뒤 쿡에게 팔렸고, 중국에
나포된 뒤에는 영국의 한 회사에 팔렸다. 몇몇 사학자들은 조선의 대동강에서 파괴된 제너럴 셔먼호를
모험적인 미국상인 프리스턴(W. B. Preston) 소유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고종편)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며
파괴될 당시 선적국은 영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제너럴셔먼호는 당시 중국연안 마을을 약탈했던 유명한 도적떼 ‘흑색무리’의 해적선으로 이용됐고,
이후 중국정부가 압수해 톈진(天津)에서 영업중이던 미도스회사(Meadows & Co.,)란 영국상사에 팔았다.
이 배를 미국사업가 프리스턴이 구입했다는 것이다. 프리스턴은 은둔의 왕국 한국과 미국간 무역을 개설하기
원했고 제너럴셔먼호에 면제품과 주석양철판, 유리, 기타물품을 실었다. 미국인들은 그러나 ‘무역거래’만
꿈꾼 것이 아니었다. 조선땅 왕의 무덤을 도굴해 황금이나 보석을 훔쳐온다는 계획도 있었다.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8월9일 중국 톈진항을 출발해 체푸(Chefoo; 지금의 옌타이 煙臺)에
잠시 기항해 식수를 채운 뒤 곧바로 조선으로 출항, 8월18일 대동강입구에 닿았다.
1866년 9월5일 제너럴셔먼호는 평양인근 대동강에서 승무원 전원이 손과 머리가 잘렸고 선박은 파괴됐다.
대동강물이 다시 불어나자 선박은 인양돼 서울과 인접한 한강의 조선소로 옮겨져 수리를 마쳤고
한국해군 최초의 현대식 전함으로 사용됐다. 그러자 중국정부가 조선 외무부에 강력한 압력을 행사해
제너럴셔먼호는 결국 1867년 미국의 원래 소유자 새뮤얼 쿡에게 반환됐다.
쿡은 그 배를 1868년 미국 보스턴의 SS상사(Merchants of Boston SS Co.) 윌리엄 웰드회사(William F. Weld Co.)에
팔았다. 월리엄 웰드회사는 선박을 수리, 뉴욕과 뉴올리언스간을 운항하는 페리선으로 투입했다.
1874년 1월4일 제너럴셔먼호는 4명의 승객과 42명의 남자승무원을 태우고 정기운항을 떠났다.
적재된 화물은 뉴올리언스까지 운송할 일반상품들이었다. 날씨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1월7일 새벽2시
균열된 틈으로 제너럴셔먼호에 물이 새 들었고 1월10일 정오경 마침내 침몰, 비극적인 운명은 막을 내렸다.
(영어 원문)
The General Sherman incident is significant because it was the first armed conflict between Korea andthe U.S. This minor incident, in which about 10 Koreans and three Americans were killed, led to a larger
conflict in 1871, in which three Americans and 243 Koreans were killed.
It is commonly believed the U.S. merchant ship the General Sherman was burned and sunk in 1866
near Pyongyang. However, it is unlikely that she sank or burned down, because she had a thick iron hull,
not easily burnable, and besides, she was stuck in the river mud when she was attacked and could not
have sunk any deeper.
U.S.-Korea relations date back to July 1844 when the U.S. Congress tabled a motion to trade with
"Corea" -- commonly called the Hermit Kingdom in those days. In spite of this, the General Sherman,
an armed schooner, was dispatched to Korea (Spear, 1872).
The General Sherman incident is still shrouded in a mist of disinformation and myths.
The Kojong Silrok -- the Chosun court archives -- are sketchy and the U.S. Navy archives are mum on
this embarrassing incident; there is no photo of the ship in the U.S. Navy archives. The Chosun court
wanted to cover up the incident for fear of American reprisals.
The reprisal did come in June 1871 in the form of an American invasion force, which killed
243 Chosun soldiers to punish "natives for depredations on Americans," particularly for murdering
the crew of the General Sherman and burning the schooner, and for firing on other American "small boats taking soundings up the Salee (Han) River," -- without Chosun government permission. (Duvernay, 2005)
A Brief Life History of the General Sherman -- formerly the U.S.S. Princess Royal
This ship was built by Ted & McGregor, Glasgow, Scotland, in 1861, and sold to a smuggler who usedher to smuggle arms and other war supplies to the Confederates in the American Civil War. She had
an iron hull of 198 feet 9 inches by 27 feet 3 inches by 16 feet. She had two steam engines powered
by coal and two full-sail masts, and could cruise at 11 knots. Her armament included two 12-pound cannons,
two smaller cannons (perhaps Gattling guns), and small arms for all crew members, about 15 (Erik, 1960).
In 1863, the Princess Royal was captured by the U.S. Federal Navy and served in the Civil War
as a U.S. Navy warship, the U.S.S. Princess Royal, from 1863 to 1865. She was decommissioned
at the end of the war, and sold to Samuel C. Cook, who rearmed her with two large cannons and
two small cannons, and renamed her the General Sherman (Erik, 1960).
In 1864, Cook sent the ship to China, which was in chaos because of the Taiping uprising that
began in 1849. The Taiping rebels wanted to kick out all foreigners, and the Chinese government
employed foreign mercenaries (Spear, 1872).
A horde of veterans of the American Civil War went to China, seeking fortune and adventure.
Gen. Henry A. Burgevine was one of the American mercenaries in the service of the Chinese royal court.
Henry Andres Burgevine was an American sailor of French ancestry, mercenary and soldier of fortune,
who became famous for his military victories for Imperial China during the Taiping Rebellion.
When a low-ranking mandarin held up his pay, Burgevine beat up the old man and defected to the
Taiping rebels. In 1865, he boarded the General Sherman with a small band of fellow mercenaries
and sailed toward Formosa, modern-day Taiwan, to join the Taiping rebel force there. But the royal navy
intercepted the General Sherman and Burgevine was thrown overboard and drowned.
(Note: the ownership of the General Sherman is murky: After being captured by the U.S. Navy
in the Civil War and sold to Cook, she was captured by the Chinese and sold to a British company.
Some historians state that the ship was British-owned when she was destroyed in Korea, contrary to the
Kojong Silrok which lists W. B. Preston, an American merchant-adventurer, as the ship's owner.)
The General Sherman, well-known as the "black" pirate ship raiding villages along the China coast,
was confiscated by the Chinese government and was sold to the Meadows & Co., a British firm in Tientsin,
known today as Tianjin, which in turn sold her to Preston. Preston wanted to open the Hermit Kingdom
of Korea to American trade, and loaded her with merchandise of cotton goods, tin sheets, glass,
and other items. Trading was not the only goal of the Americans -- they planned to plunder the gold
and precious stones buried in royal tombs (Lee, 2000).
The General Sherman left Tientsin on Aug. 9, 1866 and stopped briefly for water at Chefoo, today's Yantai,
northeastern China, from where she set sail and reached the mouth of the Daedong River on Aug.18.
On Sept. 5 1866, the General Sherman was destroyed near Pyongyang with all hands beaten or
hacked to death. When the water level rose again in the Daedong River, the ship was floated and
moved to a shipyard near Seoul. The General Sherman was refurbished and christened the first modern
warship of the Korean Navy (Lee, 2002). However, under intense pressure from China, which handled
the foreign affairs of the Chosun Dynasty at the time, the ship was returned to the her American owner,
Samuel Cook, in 1867.
William F. Weld Co. (Merchants of Boston SS Co.) bought the ship from Cook in 1868 and refurnished her
for ferry service between New York and New Orleans. Erik (1960) states: "On January 4, 1874,
the General Sherman left New York on her usual run with four passengers and a crew of forty-two men.
Her cargo consisted of general merchandise consigned to New Orleans. The weather began to worsen and
on January 7, 1874 at 2:00 AM the General Sherman sprung a bad leak." She sank about noon
on January 10, 1874 and her tragic saga ended at last.
1871년 강화도 한미(韓美)전쟁 - 발단(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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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사하신 어재연 장군님을 위하여 묵념 합시다...
^^ 강철군의 올곧은 역사인식에 카페지기는 또 한번 감동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