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적의 모습은 참 나약하고 힘 없는 모습으로 그저 책가방만 들고 학교만 왔다 갔다 하는 존재감없는 학생으로 기억 될 뿐이다.
학교에 가도 공부에 열중 할수 없는 몸살 감기로 몹시 지친 모습으로 등교하여 3교시가 끝나면 아버지가 학교로 오셔서 그때마다 조퇴하고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가던길에 약국들러 약을 사먹고 선창가 학고방 같은 허술한 창구네 선술집 어부들이 대놓고 먹는 그집에서 양은 냄비에 담긴 국수 같은 뜨거운 면가락을 땀을 흘려가면서 먹고 나면 기운을 좀 차릴수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음식인지 처음 먹어보는 거라 신기하고 어떤 음식인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햬보지 못했다.
그때 당시는 라면이 처음 나오던 시절이 라면이 뭔지 몰랐다
아버지는 먹는 내내 내모습을 보고 흡족한 마음으로 다행이다 싶은 표정으로 독한 담배를 들여 마시고 나는 매콤하고 기름진 국물에 빠져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한결 개운해져서 집에 가곤 했다.
어린 동생들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말도 못하고 아버지는 돈이 아까워서 못드시는지 그 음식이 지금도 나를 살린 그때 당시는 약인것 같았다
선창가 일 갔다 늦게 들어 오시는 날이면 잠자는 나만 깨워
튓마루에서 아버지가 가지고 온 토마토와 사과를 먹이섯다 돈도 없는데 어디서 생긴것인지 도무지 모른체 아무 생각 없이 먹지만 나는 잠을 자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나중에 우리아이들이 라면이나 과일을 먹을때마다 그때 추억에 빠지곤 한다
아버지는 가난을 달고 살았지만 그 가난을 자책하거나
거부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니 애비는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니
니들은 그리 살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 형편에 집안에 변변하게 하나 있을리가 만무하다
그때 당시에는 초 중학교는 학년초에 가정생활 조사라는게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반 조회 시간에 우리반을 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가정 학벌 조사부터 시작한다
항목 순서대로 대졸부터 쭉 내려온다
학벌 마지막 질문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읽고 쓰지도 못하고 글을 전혀 모르는 문맹이 사람에서 나는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계속 이어지는 질문은 집에 시계가 있는집 라디오가
있는지 질문은 계속 되고 그때마다
나는 매번 가장 끝 항목에서 손을 들고 나와 같은
사람이 있나 아무리 처댜봐도 손하나 보이지는 않았다
참 곤혹스럽고 머리가 멍해지고 그시간이 왜 그리 긴지
내가 학교하고 맞지 않는 사람인지 오지 말아야 할곳을 와서 기웃거리는 외톨이처럼 누구에게도 윈망조차 못하고
하루 종일 챙피해서 혼자 놀았다
누구도 어떤 대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학교까지 보내주시는 아버지를 윈망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조금 억울하고 분하기도하고 친구들에게
조차 괸히 미안하고 부끄러윘다
글도 모르는 아버지가 당연했다 어릴적부터 낫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 전혀 이샹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선창가 바다에서 하루종일 지게질로 해산물을
퍼나르고 파시가 끝나면 농사까지 온 힘을 다했지만 늘
우리집은 가난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집은 상수도도 있고 화장실도 있었지만 산동네 사람들을 위해 마당에 땅을 파서 공동 우물을 만들고 공동 화장실
까지 내어 동네 사람들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고 일이 없는 겨울철이면 방두칸에 하나를 내어 동네 사랑방을 만들어
온갖 수발을 들고 아버지를 뺀 우리 여섯 식구들은 작은방으로 쫒겨 생활하며 그 찌든 담배연기와 욕설이 난무하는 화투판에서 어린시절을 그져 아무 생각없이 보낸 내 유년 시절의 모습은 아릉답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다 아버지의 별명은 그냐말도 부처님 중에서 나무관세보살 이시다는 존칭어로 그렇게 사람은 불렀다
아버지는 늘 부처님 소리만 듣고 사셨지만 남은 우리 가족은 늘 부족하고 이웃만 배려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와
싸움으로 힘들어지만 우리 형제들은 힘둔줄도 모르고 그걸
당연하고 익숙하게 길들여졌다
아버지는 그랬다
동네에서 돈을 빌리려면 우리 아버지부터 찾았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거절 한적이 거의 없었다
우선은 우리집 돈으로 드리고 부족분은 우리 친척 아주머니
께 부탁하여 자기 몫으로 돈은 빌려 어렵게 만들어 채무자를 만족시켜 돌려 보냈다 결국에 원금에 이자까지는 아버지 몫이었고 친척분은 아버지에게 빌려주는게 너무나
확실하고 고금리 이자까지 챙길수 있으니 매번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 친척은 마음 놓고 아버지에게 빌려주셨다
그리 급한 돈은 바로 나올수 없는게 세상 이치이고 그들은
누구에게도 돈을 빌리수도 없는 처지에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해결되고 모든 책임은 아버지에게 주어져 그돈을 원금부터 다시 갚기 시작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 그리도 욕심이 없었다
우리집은 음력 설날이 지나면 으례적으로 치루는 달갑지 않은 일년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바닷가 작은 밭뙤기가 전부인 사림살이에 여름내내
바닷가에서 노동으로 번돈은 남에게 퍼주고 돈 한푼없이 한겨울을 아무 대챜없이 보냈다
설 보름 지나면
일곱식구가 먹고 살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나고 그 추운 겨울
길을 십리 넘게 지게를 지고 남의집에 가서 아버지는세거리라는 보리 한가마를 빌려 서해에서도 눈이 제일 많이 온다는 그 지역에 매서운 눈보라를 똟고 바다 신장로 길을 따라
보리 한가마를 지고 오시는 아버지를 우리 식구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철이든 나는 아버지 그 보리쌀을 어디에서 사셨냐고
물어보면 어는 동네 누구에게 꾸셨다고 담담하게 이야기 하신다 아버지 글면 어떻겨 갚을거요 하니 올가울 추수때
한배 뱐으로 갚으면 된다고 하시니 참 어처구니가 없고
누가 아버지를 말려쓰면 좋겠다는 생각하는 순간 앞으로 밥을 먹는것도 불효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죽어라 일만 하는데 왜 가난을 못벗는지 알것도 같았다
남에게 죽어라 좋은일만 하시고 식구하나 못먹여
굶주린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 그 매서운 바다 바람을 뚫고미끄러운 신작로 십리길을 무슨 생각으로 걸어 오셨을까
그 생각에 어린 마음속에 갑자기 어둠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끝에 하시는 말씀은 매번 니 애비는 븍이
없어서 이렇게 산다 니들이나 잘살어라 너무 무책임하고
기운이 빠지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그때 당시 아버지 나이보다 많아지니 당시 아버지
모습이 서글퍼지기도 하고 나도 어느새 아버지를 닳아가고
있었다 난 우리 아버지 반대로만 살면 반드시 성공 한다는
어설픈 반향심도 생겼지만 나도 아버지 유전자를 그대로
닮아 가고 있으니 참으로 그피는 속일수 없는 아이러니 하기도하다
매한댸 욕설한번 없이 우리 5 남매 지극 정성으로키우셨지만 대책은 전혀 없었다
그런 아버지는 동네 굿은일은 다 도맡아서 하시면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이 끝나면 고단한 몸을 소주로 달래면 삶을 삼켜셨다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면 우리 광산김가 시조의 시제일이다
철도 들지 않은 초등학교 2힉년일때 학교에 가지
말고 아버지랑 어디 갈때가 있다고 해서 동네 일가 친척돌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데 다들 나이드신 어른들뿐이고 청년들도 한명 없는 학생이라고는 나 혼자였고 난 도대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아버지 손에 이끄려 담양 평장동 광산김가 시조 할아버지 김자 흥자 광자 시제여 참석하게 되었다
그날은 담양군 축제날이다
전국 각지에 광산 김가들이 일년에 한번 모이는 가장 큰행사라 지방 어느 축제보다 더 크고 규모가 어마 어마했다
어른들은 도포를 입고 경건하게 시제를 올리고 있지먄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쌀밥에 반찬으로 주신 은행알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어른들의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 선조들이 뭔가 휼륭한 일을 하셨나 보다 생각하고 지금까지 집안에 욕되는 일이나 나쁜짓을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
또한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좋은 집안이라는 긍지도 갖게
되었다
조상분들중에는 성리학을 완성시킨 사계 김장생 그아들 신독재 김집은 이율곡의 사윗로서 조선의 성리학의 대가로 지금도 연산 돈암서원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근 현대사 큰족적을 남긴 김수환 추기경
마포에 광김회관을 만들어 주신 재계에 큰어른 김우종 회장님 도울 김용옥 선생등 수많은 학자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나에게 참 되게 살라는 조상님의 가르침을 일찍 깨우치게
해주신 아버지의 큰 뜻을 이제는 조금은 알것도 같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해주고 싶다
이세상 모든 사물은 아버지에게는 섬김의 대상이었다
이웃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조카들까지 우리 5 남매까지
모두가 아버지에게는 섬김의 대상이었다
절대자 부처님께도 지극 정성을 다하신 아버지는
성김외는 다른 말로는 표현이 안되었다
아버지는 이땅에 베품과 섬김으로 오신것 같다
아 아버지
빛도 녹아버린 메마른 세월에
하얀 머리카락 한올 한올 올라 때마다
내핏줄의 혈관이 하나씩 터져 나옵니다
아 아버지
잃어버린 세월속에 검버섯 하나씩 필때마다
내 심장의 고통이 길게 패여 옵니다
아버지
당신의 고난한 삶을 가슴으로 삭이시고
90평생 회한까지 끌어 안고 외롭게 겨울나무 되어
내 안에 심겨져 있습니다
아 아버지
동짓달 동토의 땅에 당신을 뭍고 서럽게
피어언 눈꽃 봉분하나 얻어 왔습니다
살아 살아서
몸이 부셔지고 가슴이 으깨어저도
당신의 복이라고 못진 가난을 숙명으로 살았습니다
살아도
살아서도 내 뱉을수 없는게 인생이라지만
행복이라고는 도모지 모른체 비바람에 녹아버린
메마른 얼굴이 가슴에 못으로 옵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섬김을 모른체 자식위해
한평생 외롭게 사셨습니다
아
무슨죄라고 힘이 되는 바람하나 없이 거친 세윌을
혼자 걸어 가셨습니다
아
무슨업이라고 늦게 낳은 자식 곱게 키위 보물처럼
애지중지 하셨지만 남은거라고는 서럽게 패인 주름이
이제는 힘겨워 보였습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당신 앞에서 잘나 보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부족한 자식이라도 당신 앞에서는 우쭐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