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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출생, 수학 및 청년 시절
고향
선조
가문
어머니
보통학교
첫 결혼
재산 분배
장조카의 재산 인수
조카딸의 아들 한형주
함흥상업 졸업
윤증표와 일본 유학
나니와 상업학교
이은계와 교회
법정대학 상과 입학
일본대학 철학과 입학
유학의 조언자 셋째 형
멋쟁이 형제들
함남일보사 취직
친구 안종호와 불교 청년회
유년 시절의 나의 심성
조선불교재단
불교청년회관 건립
친구 장경모
월간 ‘조선불교’
보천교 교주 차천자
나까무라 선생과 분가分家
장조카의 패가망신
임제종 경성별원
화산華山 노사와의 만남
제1절 출생, 수학 및 청년 시절
고향
나는 1905년 2월 18일(음력)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이 해가 바로 일본 명치明治 38년이 된다. 노일 전쟁이 명치 37년과 38년에 걸쳐 벌어졌고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날 무렵 러시아군이 함흥에 침입했다.
음력 2월 18일경은 함흥 지방은 봄기운이 감돌기는 했으나 아직 쌀쌀한 날씨다. 나는 12남매의 막내였다. 아들로는 8남이고 그 사이에 누님이 네 분 계셨다.
어린 자식들이 우글거리는 데다 러시아군이 침입하여 약탈도 했을 것이니 피난 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핏덩이인 나를 어머니께서 솜에 싸서 안고 함흥 북쪽 약 30리 되는 기곡면 풍동리로 피난했다. 이곳은 서쪽만 트이고 동, 남, 북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피난처로는 아주 알맞은 곳이다 계곡에 옥수 같은 물이 바위를 치며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고, 곳곳에 폭포가 흐르는 경관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지금이라면 등산객이 줄지어 끊일 사이 없었을 그러한 동리洞里였다.
조부(이용순李用諄)님께서는 연로하시고 하실 일도 다 마쳤으니 조용한 그곳이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셋째 형(이희우李喜盂)과 다섯째 형(이희임李喜臨)을 남기고 나머지 가족을 아버님(이용우李慂禹)께 맡겨 거기서 약 15리 함흥 쪽은 주복면 신풍리에 터전을 마련하여 정착했다. 여기는 동쪽이 산이고 서남으로 함흥평야가 전개된 곳이다. 그러니까 두 집으로 나뉜 것이다. 조부님께서 소실 할머니와 두 손자만 데리고 계시고, 아버님께서 조모님 모시고 나머지 식구를 도맡으셨다.
이 주북면에 우리 농막이 대부분이 있었다. 농막은 농장과는 다르다. 너무 많이 한 사람이 감독하기는 곤란하므로 10여명의 소작인을 감독하는 집을 농막이라고 한다. 즉 여러 사람의 소작인을 감독하는 집이다. 농막에서는 그 농막에 소속된 소작인의 추수를 거두어 본가本家에 보고한다. 이런 농막이 주북면에만 있지 않고 주서면에도 여러 곳에 있었다. 만세교를 지나 성천강을 건너면 바로 주서면이다. 다음이 삼평면이고 이어서 정평군이 된다.
사람들은 함흥이라 하면 호랑이 나오는 귀양살이하는 곳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함흥 시가는, 북은 태백산맥인 반룡산(여기에 이성계가 말달렸던 치마대가 있다)이 우뚝 서 있고, 서남으로는 우리나라에서 3대 평야의 하나인 함흥평야가 전개되고 있다. 이 평야는 신흥군, 함흥군, 정평군, 영흥군의 네 고을을 싸고 원산까지 뻗쳤다. 막막한 평야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기름지고 맛이 좋았다. 함흥에서 15리 가면 동해안에 위치한 서호西湖가 있는데, 여기서 나는 생선은 유별나게 좋았다. 쌀 좋고 생선이 좋고 고기는 기름지니, 이 이상 더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전국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함흥처럼 살기 좋은 곳을 못 보았다.
선조
함흥은 이조李朝 태조 이성계가 탄생한 곳으로, 정화릉과 본궁의 고적이 근교에 있다. 우리는 전주 이씨로 목조대왕 셋째 아드님 안창대군의 후손이라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함흥에서는 양반 행세를 했다. 함흥에는 양반이 없었다. 이성계가 함흥 출신으로 등극했으면 고향 사람을 많이 등용했을 터인데, 함경도 사람을 등용은커녕 경원하여 한 사람도 쓰지 않았다. 함경도 사람은 성격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억세었기 때문이다. 소위 ‘니중투구泥中鬪狗’ 격이라고 하여 부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말 잘 듣는 ‘청풍명월淸風明月’ 격의 충청도 사람을 많이 등용했다고 한다. 이유가 있는 이야기다.
우리 선조 이 씨는 옛적 중국인으로 18세 때 우리나라에 관광 왔다가 전주에 정착했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분의 후손에 ‘이안사李安社’라는 분이 있었는데 어용 기생[관기官妓]과 관계가 있어서, 이 사실이 발각되어 도주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가재를 주섬주섬 싣고 도망쳐 온 곳이 속초였다고 한다. 속초에 상륙해서 어부들이 고기잡이하는 광경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가지고 온 재물을 팔아 어선을 모두 사서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 함경도 일대가 원나라의 통치하에 있어서 ‘다루아치’라는 벼슬의 중국인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李안사의 고기잡이에 흥미를 가져, 李안사와 ‘다루아치’ 권리를 어선과 바꾸었다. 이리하여 李안사가 함경도 일대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
李안사의 아들에 ‘이행리李行里’가 있었고 행리의 아들에 ‘이춘李椿’이 있었고 춘의 아들에 ‘이자춘李子椿’이 있었고 자춘의 아들에 ‘이성계李成桂’가 있었는데, 이 분이 이조李朝의 시조가 된다. 왕위에 오르면 자기로부터 5대인 고조까지 추존하여 대왕으로 모시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李안사가 ‘목조穆祖’ 대왕으로 추존되었고, 이 분의 셋째 아들이 안창대군이다.
가문
나는 이 안창대군의 후손이다. 조부님의 함자만 알고 증조부님, 고조부님의 함자는 기억에 없다. 우리 시대에 와서는 가문이나 양반이라는 관념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따라서 조상에 대한 효도나 효성이라는 관념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소위 개화 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물질문명에 현혹되어 전통적 사고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인력으로 막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 집안은 아버님도 독자고 조부님도 독자였다. 몇 대를 독자로 내려왔는지 잘 알 수 없으나, 가까운 친척이 없는 것을 보아서 여러 대를 독자로 내려온 듯하다.
재산은 조부님께서 모으셨는데 7천 석이나 수확했다고 한다. 함경도에는 큰 부자가 없었다. 한 씨가 만석꾼으로 이름났었고, 그 다음이 김 씨이고, 우리가 셋째 가는 부자였다.
우리는 형제가 많고 지출이 엄청나서 그 이상 저축할 힘이 없었던 것 같다. 아버님은 재산을 잘 관리하셨고 자녀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셋째 형이 동경 중앙대학을 나오고, 여섯째 형(이희복李喜復)이 와세다 대학을 나오고, 일곱째 형(이희정李喜鼎)이 일본대학을 나오고, 내가 또 일본대학을 나왔으니 네 형제가 일본에 유학한 것이다. 다음 형들은 서울에 유학했다. 그 당시 네 형제가 동경에 유학한 가문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상상 못할 대호화판이었던 것 같다.
장남인 첫째 형(喜觀)은 폐병으로 누워 있었다. 요즘은 폐병은 별로 어려운 병이 아니나, 그 당시는 불치의 병으로, 걸리기만 하면 죽는 걸로 알았다. 20여 년 누워 계시면서 온갖 약을 다 썼다. 인삼․녹용은 물론, 호랑이고기․사슴고기․노루고기를 말려서 벽장에 넣어 두고 수시로 잡수시는 것을 보았다. 잠깐 그 방을 비우는 사이에 몰래 꺼내 먹기도 했다.
형님은 인품이 좋고 한학자였고 글씨도 잘 쓰셨다. 일남삼녀를 두시고 40세에 돌아가셨다. 선조에서 여러 대를 독자로 내려오다가 우리 대에 와서 12남매가 태어났으나, 큰 형님은 아들 하나만 두었으니, 정통으로 역시 독자인 셈이다. 더욱이 장조카(이인현李寅鉉)는 2남 1녀를 두었으나 두 아들 모두 결혼 못하고 죽었으니, 정통으로는 李씨집 대가 끊어지고 만 것이다.
다른 형님들은 7남매․5남매를 두어서 조카가 수십 명이 된다. 12남매에 7천 석의 대지주였으니 퍽 번화한 가정이었다.
어머니
나는 이런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열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자나 깨나 어머니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화장실에 가셔도 따라 들어가 등에 업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러던 어머니를 잃었으니 천지가 아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대목을 쓰면서 그때 일이 생각나서 지금도 눈물이 흐르며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는 몹시 비대하시어 작은 사람의 두 배나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비만증인 듯하다. 어느 날 친척집 결혼식에 소달구지를 타고 갔다 오시다가 도중에 소변보시기 위해 내리시던 순간 돌아가셨다. 심장마비가 아니면 고혈압 때문이었을 것이다. 치료도 해 보지 못하고 영영 떠나시고 말았다. 나이 겨우 58세였다. 12남매를 거느린 큰살림을 버리고, 환갑도 못되어 세상을 떠나셨으니 애통한 마음을 어찌 금할 수 있었겠는가! 온 마을이 비통悲痛에 잠기었다. 인심이 후하시어 못사는 사람은 물론, 구걸하는 이에게 곡식을 후하게 주셨다고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내 나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계모를 모시게 되었다. 내가 분가할 집을 따로 짓고 여기에 계모를 모시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 분가하게 된 셈이다.
아버지는 여기서 주무시고 저녁 식사는 큰댁에서 잡수시고 두 집을 왕래하셨다. 나는 계모가 지어 주신 밥이나 먹고 지내는 정도였다. 어머니라고 불러 본 적도 없었고, 또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계모라고는 하지만 정식으로 어머니의 뒤를 이은 분은 아니었다. 호적에 입적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아버님께서 적적하여 동거하신 것이다. 인품이나 성격이 매우 좋은 분으로 기억된다.
보통학교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던 해, 12세에 나는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 곁을 떠나기 싫어서 그랬던지 남보다 좀 늦게 학교에 갔다. 그 때 보통학교가 대개 4년제였는데, 나는 함흥 제일공립 보통학교 6년을 졸업하고 함흥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옛날에는 대개 그랬지만 우리 집안은 매우 엄했다. 아버님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8형제나 교육시키시기에 지쳐서 그랬던지, 손목 한 번 만져주시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신 일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하는 일도 내 마음대로 택했다. 그 당시 함흥에는 중등학교로 고등 보통학교, 상업학교, 농업학교, 영생 중학교가 있었는데, 어느 학교에 가라는 지시도 없어서 내 마음대로 상업학교를 택했다.
그러나 학비는 달라는 대로 주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학비를 청구하는데 메모지에, 연필은 얼마, 노트는 얼마, 잉크는 얼마, 이렇게 계산서를 내놓으면 아무 말씀 없이 그대로 다 주셨다. 나는 액수를 많이 받기 위해서 실제보다 늘려서 신청하기도 했으나 아무 말씀 없이 그대로 주셨다. 8형제나 교육시키신 분이 허위 계산인 것을 모르실 리 없다. 그런데도 아무 말씀도 없이 내 주신 것은 따지기가 귀찮아서 그러셨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담배도 피우고 친구와 어울려 술도 잘 마셨다. 이 비용을 염출하려면 허위 신청을 안 할 수 없었다. 허위인 줄 모르실 리 없지만 요구하는 대로 아무 말씀 없이 주셨다. 그래서 남보다 몇 배 돈을 잘 썼다.
첫 결혼
함흥 상업학교 입학한 해에 결혼했다. 그 당시에는 부모 마음대로 신붓감을 택해서 결정했다. 내 나이는 18세였고 그녀는 17세였다. 그런데 신부는 아주 못생겼었다. 결혼하여 잠자리는 한 번 뿐이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하숙을 했다. 형님 댁이 두 집이나 있었으나 부자유하므로 하숙했다. 함흥에서 신흥까지 경편 철도가 통하여 남들은 모두 통학했으나, 나는 그녀가 싫어서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하숙했다. 아버님도 별 이의 없이 허락해 주셨다. 사실 나는 선천적으로 약질로 태어났다. 언젠가 손님이 어머니에게 「아주머니 막내는 열흘에 한 번씩 밥을 줍니까?」하고 농담하던 걸 기억하고 있다. 아마 10세 때였을 것이다.
일요일마다 나는 학비를 타러 가도 자전거로 가서 곧 돌아와 버렸다. 그녀와는 결국 이혼하고 말았지만 이는 인생의 큰 비극이다. 가문이나 보고 본인 자신은 어찌 되었든 부모들이 결정했다. 이런 사례가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당시는 청년들의 사조 전화기였다.
재산 분배
전 재산(논, 밭)의 절반은 장조카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7형제가 나누었는데 아버님 몫도 따로 있었다. 이것은 결국 장조카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둘째 형님(이희겸李喜謙), 셋째 형님, 넷째 형님(이희태李喜泰), 다섯째 형님들에게는 좀 넉넉히 주고, 여섯째, 일곱째 그리고 나에게는 좀 적게 주셨다고 들었다. 앞의 형님들에게는 이미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절반을 차지한 장조카는 그래도 군내郡內에서 제일가는 부자였고, 다음 형님들도 모두 부자 소리 듣고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께 학비까지 타 쓰고 내 몫에서 수확되는 것으로 매년 토지를 샀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일들을 알지 못했다.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들이기 때문이었다. 땅은 해마다 늘어났다. 사람들은 골집(읍에서 왔다고 붙인 별명) 막내는 큰 부자가 된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이렇게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18세 때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평소 낚시를 즐겨 하셨는데, 하루는 소나기 때문에 발을 비틀렸다. 통증이 심해서 마을 침놓는 영감에게 침을 맞으시고 통증이 더 심해져 자혜병원(도립병원)에 입원하셨다. 침놓은 구멍에 단독이 들어갔다. 단독이 전신에 퍼지게 되어 며칠 만에 세상을 뜨셨다. 그러므로 변사라고 할 것이다. 예측했던 것이 아니고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지 6년만의 일이었다.
12남매를 모두 장가 시집보내고 교육도 시킬 대로 시키고 재산도 분재하셨으니 대충 하실 일은 다 하신 셈이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땅을 분재해 주시기는 했으나 소유권을 이전하지 않고 아버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장조카의 재산 인수
큰 형님이 일찍 돌아가셨으니 상속권은 장조카에게 있었다. 따라서 8형제에게 분재해 주었어도 소유권이 없었다. 둘째 형님에게만 소유권을 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7형제의 토지는 고스란히 장조카의 명의로 상속되었다. 그때 장조카의 나이가 25세였다. 나보다 7년이나 위인 셈이다. 소위 「아이 아저씨, 어른 조카」였다.
이 조카가 아주 불량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고대했듯이 몸에다 명주 전대를 감고 기생 작첩하고 브로커들과 어울려 요리점 출입이 잦았다. 그 당시 함흥에는 「권번」이라는 기생 조합이 있었다. 요리점에서 기생을 불러 몇 사람이 하루 저녁 놀면 50원 정도의 계산서가 나왔다. 그 때 쌀 한 가마니에 8원 정도였으니 하루 밤 술값이 쌀 6가마니가 넘는 셈이다.
아버님은 무명옷에 두루마기 안에 겨우 명주를 넣어 입으실 정도로 검소하셨다. 선조 대代에서 절약하여 모은 것도 생각지 않고 장조카가 흥청거리게 되었다. 삼촌들은 일본유학이니 서울유학이니 학업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조카는 겨우 국민학교만 나오고 더 공부할 생각이 없었다. 국민학교도 다니기 싫어서 겨우 졸업했다고 한다.
조카딸의 아들 한형주
장조카 아래로 누이동생이 셋이 있었다. 큰누이 동생이 나보다 5년 위이고 그 다음이 1년 위이고 다음이 나보다 1년 아래였다. 나는 형제 중 제일 막내로 누님들은 모두 일찍 출가하였다. 그래서 큰 형님의 딸들과 형제처럼 지냈다. 돌 공기놀이도 하고 실로 뜨개질 놀이도 하며 사이좋게 자랐다. 이 세 자매가 모두 인물이 뛰어났고 손재간도 좋아서 베 짜기, 바느질을 잘하여 소문이 났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신붓감이 어디 있으랴 싶다. 혼인 신청이 많았다. 우리 집이 워낙 번화해서 적당한 상대가 없었다. 특히 둘째가 뛰어났다. 18세에 출가했다. 신랑은 서울의학 전문학교 재학 중이었다. 그 때 이 학교는 수재 아니면 입학 못했다. 나는 둘째가 시집간다고 해서 매우 섭섭했었다. 지금도 보고 싶고 그립다. 이북에 있으니 생존조차 알 길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
둘째 조카딸의 둘째 아들 한 형주가 20세에 피난 왔다. 서울 의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도 받았으며 지금 신설동 로터리에서 청량리 쪽에 4층의 큰 건물을 짓고, 내과, 신경과 의원을 개업하고 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유화도 잘 그리고 수필도 잘 쓰는 수재이다. 어려서 성격이 활발했고 매우 귀여웠다. 형주가 두 살쯤 되었을 때, 나를 보면 큰 소리로「외가 할아버지」하고 불러대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지금 형주의 신세를 지고 있다. 「禪文化」라는 조그만 불교잡지를 하다가, 신경통으로 그만두고 눕게 되면서부터 잡비를 매달 주고 있다. 나는 형주를 도와준 일이 없다. 친자식도 어려운 세상인데 조카딸 아들의 신세를 지고 있으니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함흥상업 졸업
나는 학비 일체를 장조카에게 타 썼다. 달라는 대로 주었다. 아버님에게처럼 계산서를 제출치 않고 10원, 20원 타서 친구들과 술은 내가 도맡아 샀다.
상업학교 때 학생들 나이는 대개 20을 넘은 청년이었다. 보통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다. 학과마다 90점이 되었으나 창가(음악)가 60점이 못되어 우등은 못했다. 상업학교 입학 지원자 칠백여 명 중, 일본은 20명, 조선인 35명을 선발하는데, 일본인 학생들은 고등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무시험으로 입학하고, 칠백 명 지원자 중에서 35명만 선발했다. 여기에 합격했으니 보통학교에서 우등 성적을 얻지 않고는 안 될 일이었다.
이 학교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나는 4회 졸업생이다. 3년제로 을종학교였다. 나는 2학년 때부터 공부하지 않고 장난만 쳤다. 그래서 꼴찌로 겨우 졸업했다. 상업학교가 내 성격에 맞지 않았던 관계인 듯하다.
윤증표와 일본 유학
함흥상업을 졸업한 이튿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함흥상업 2학년 때 윤증표라는 학생이 편입한 일이 있었다. 윤군은 일본인 집에서 심부름하면서 고학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얼마 안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대판에 가 있었다. 함흥상업 재학 중 친하게 사귀었던 관계로 편지 연락이 잦았다. 졸업 날짜와 내가 출발하는 날짜를 편지로 연락하고 예정대로 그 날 출발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여러 날을 놀았다. 가졌던 돈을 다 써 버렸다. 대판大阪역에 밤 9시경에 도착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일본이 초행인지라 인력거를 타고 윤 증표 주소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기척도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먼지가 낀 빈집이었다. 차부車夫에게 사정을 말하고, 윤증표도 곧 나타날 것이고, 집에 전보를 쳐서 곧 돈을 보내라고 할 것이니, 며칠 후에 오라고 돌려보냈다. 나는 그 빈집에서 하루 밤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초행길인데다 빈집이고 보니 잠이 올 리가 없다. 천정에서 가끔 와르르 하는 발자국 소리가 나고, 멀리서 히히 하고 사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귀신 굴 같고 도깨비 집 같은 그곳에서 하루 밤을 지냈다.
아침 일찍 여관을 찾았다. 주인에게 사정을 말하고 차고 있던 시계를 맡기고 며칠 숙박하기로 정했다. 그 시계는 스위스제로, 줄이 은으로 된 고급시계였다. 그 때는 손목시계는 없었다. 중학생에게는 분에 넘치는 시계였다.
매일 윤증표 주소에 가 본다. 도무지 나타나지 않아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루는 윤군의 일본인 친구가 와서, 윤군이 내 편지를 받고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내가 오지 않으므로, 그 친구에게, 만약 내가 오면 잘 부탁한다고 하고, 함흥으로 나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좀 안심이 되었다. 그동안 집에서 돈을 보내왔다.
천장에서 와르르 하던 소리는 쥐가 달리는 소리였고 히히 하던 웃음소리는 정신 이상자의 웃음 소리였다. 윤군이 정신 이상자의 집에 세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하루 밤은 일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한국 집 천정에는 쥐가 다니는 일이 없는데 일본 집 천장에는 대개 쥐가 다니는 모양이다.
나니와 상업학교
학교에 가야겠는데 어느 학교에 가면 좋을지 윤군과 상의했다. 「나니와」 상업학교가 좋다고 했다. 이 학교는 중등학교에서 야구가 제일 강하며 전국에 이름이 나 있었다. 내가 야구를 잘 해서가 아니고 이왕이면 이름난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 학교는 야간부가 있어서 4년제였다. 야간 4년제로 갑종인가를 받은 학교였다. 내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공부보다는 어물어물하다가 졸업장이나 얻어 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대학 정과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을종학교는 특과라고 해서 졸업 후 자격이 정과보다는 뒤진다. 그래서 갑종제 중등학교를 졸업해야 대학 진학에 유리했다. 함흥상업 3년을 거쳐 여기 4년에 입학하여 졸업하면 갑종상업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함흥상업에서 꼴찌로 졸업한 내가 4년제 갑종학교에 들어갔으니 이 학교의 실력을 알 만하다. 그것은 4년제이니까 모든 학과가 속성으로 진행되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함흥상업 때와는 달리 열심히 공부했다. 그 때 일본에서는 사립 중등학교에는 대개 야간부가 있었고 주간과 똑같은 자격을 주었다.
왼쪽은 김도민, 오른쪽은 김성진인데 모두 부산상업에 편입했고,
중앙은 나인데 대판 나니와상업에 편입했다. 수학여행 때 대판에서 촬영했다.
이은계와 교회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를 졸업한 이은계라는 친구가 나와 같이 「나니와」 상업 4년에 입학했다. 전문학교를 졸업했으나 갑종 중등학교를 졸업 못하고 입학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바 전문학교를 졸업해도 갑종 중등학교를 졸업 못한 사람에게는 의사 자격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갑종 중등학교 졸업자격을 얻기 위해서 입학했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고 동급생이어서 친하게 되고 같은 집에 하숙했다. 방도 이웃이었다.
이 친구는 「세브란스」를 다녀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내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항상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종교가 무엇이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늘 거절해 오다가 또 간곡히 권하므로 어느 일요일에 교회당에 동행했다. 그 때 대판에 모인 한국인 교회당이 있었다. 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설교를 들었으나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더구나 「기도」는 요령조차 몰랐다. 물론 초행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나, 왜 그런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끝가지 앉아 있었는데 예배가 끝나고 대에다 까만 자루를 매어 그것을 돌린다. 돈을 내라는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실망했다. 종교는 정신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돈을 왜 구걸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확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회도 운영에는 돈이 든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래서 교회와 기독교에는 인연이 없게 되었다. 만약 인연이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 목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은계는 그래도 늘 권유했으나 나는 교회에 다시 가지 않았다. 이은계군은 일요일이면 꼭 교회에 나가고, 나는 윤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놀러만 다녔다. 여기에 인간생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장래가 좌우되는 점이기도 하다. 지금 이은계군의 생존은 모르고 천안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그 당시 야간부는 교복을 입지 않고 머리도 길었다. 직장에서 일하고 끝나면 야간부 학교에 가는 것이 생활이 되었기 때문이다.
법정대학 상과 입학
나는 그 다음 해 봄, 동경에 가서 법정대학 상과에 입학했다. 법정대학은 이류 대학이었지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상과는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함흥상업에서도 그랬지만 부기니 주산이니 하는 과목들이 모두 돈에 대한 공부였다. 나는 선천적으로 돈과는 인연이 없었다. 부모가 주신 유산도 못 써 보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돈을 호주머니에 넣어 두면 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없어진다. 어디 갔을까 하고 이 호주머니 저 호주머니를 한참동안 뒤졌던 일이 종종 있었다. 씀씀이가 헤퍼서 돈이 호주머니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돈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으로 체념했다. 나는 상과를 그만두기로 작정했다.
법정대학 시절
일본대학 철학과 입학
그때 일본대학에 철학과 교수로 「마쓰바라」라는 분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철학의 권위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 분의 철학개론을 읽어보았다. 어느 부분에 흥미를 느꼈는지 모르나 어쨌든 철학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법정대학 1년 만에 일본대학으로 옮겼다.
나는 돈을 남보다 곱절 더 썼다. 술은 내가 도맡아 샀다. 일요일은 대개 공원에 가서 잔디 위에 누워 삶은 계란과 오징어를 사서 나누어 먹기를 잘 했다. 그 시절에 가장 가까이 사귀며 다닌 친구가 이도영 군이다. 이 군은 함흥상업 2학년 때 일본 학생을 때렸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원산상업에 편입했으나, 함흥상업 때부터 친했고 동경에서도 매일처럼 만났다. 이 군은 일본대학 상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밖에 대정대학(불교대학)에 다니던 안종호군과 법정대학 예과에 다니던 이학영군과도 가끔 만나 술을 자주 마셨다.
나는 항상 일류 하숙에 있었다.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고오구 후지미쪼오라는 데 일류 하숙집이 밀집해 있었다. 하숙비는 한 달에 60원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셋방에서 자취하거나 밥집에서 밥을 사먹으니 학비가 한 달에 30원정도로 충분했으나, 나는 하숙비만 60원이니 다른 비용을 합쳐서 매월 백 원이 넘어야 했다. 그래서 매달 두 번 세 번 돈을 청구했다.
일본대학 시절
유학의 조언자 셋째 형
셋째 형은 함흥에서 맨 먼저 일본에 유학했다. 나보다 20년이나 연상이니 내가 걸음마 할 때의 일이었다. 그의 아들이 나와 두 살 차이가 난다. 그 형은 형제 중에서 인품이 제일 좋았다. 셋째 형은 중앙대학 재학 중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집에 처자식이 있었으니 첩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자 측에서 몰랐을 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이어서 인지 여자 측에서 절대 반대하는 것을 두 사람이 무리해서 결혼했다. 두 남매를 낳았다. 그래도 친정과는 왕래가 없었다. 친정어머니가 가끔 다니는 것을 보았다. 졸업한 후, 형은 일본에서 처음 생긴 인조가죽회사에 취직하여 과장급까지 승진했다가 동경 대진재 전前 해에 무슨 병으로 입원가료 중 돌아갔다. 그녀는 과부가 되었으나 재혼도 하지 않고 두 남매를 애지중지 기르고 있었다. 물론 훨씬 뒷일이지만, 내가 재학 중 가끔 놀러 갔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면서 자그만 바스켓 뚜껑을 열어 보였다. 동경 대진재 때 무참히 죽은 사람들의 사진이 깔려 있었다. 대진 재전 병원에서 편안히 침대에서 돌아가셨으니 형님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진과 같이 대지진 때 무참하게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한국 사람이 많이 학살당했음을 두고 한 말이다. 사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 내의와 생시에 쓰던 일용품이 들어있었다. 밑바닥에는 내가 보통학교 때 꼬불꼬불 쓴 편지도 있었다. 남편 생각이 날 때마다 이 바스켓 뚜껑을 열고, 대진재 때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우선 마음을 위로하고, 일용품들을 차례로 만지며 마음을 달랜다고 했다.
두 남매는 지금 50이 넘었을 것이다. 딸은 야마구찌 어느 부잣집 아들과 약혼한 일만 알고 그 후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른다. 20년 전 동경에 갔을 때 전화부에서 「아사누마」라는 성씨를 가진 번호에 모두 전화해 보았으나 모른다고 했다. 갔던 길에 아이들이나 한 번 만나 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멋쟁이 형제들
여섯째 형은 우리 8형제 중 특히 호사한 성격 자였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교복은 등교할 때만 입고 보통 때는 신사양복을 입었다. 학부에 다니는 사람은 신사 양복을 입고 등교하는 사람도 많았다. 여름방학에 귀국할 때에는 반드시 신사복에 나까오리 모자(중절모)를 쓰고 스틱을 집고 트렁크를 들었는데 학생같이 보이지 않았다.
일곱째 형도 호화스러운 학생시절을 보냈다. 보통 때는 신사복에 금시계 줄을 늘이고 일류 하숙에서 지냈다. 이 형은 나보다 5년 연상이다. 대학에 늦게 입학하여 나보다 1년 먼저 졸업했다. 2년 동안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하숙은 각각이었다. 어떤 형제는 셋방에서 함께 자취해 가며 공부했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하도 많아서 형제애가 없었다. 학비도 각자의 돈을 썼다.
대판에서 1년 동경에서 4년 동안 학생 생활을 했는데 그 동안 하숙집을 수 없이 옮겼을 것이다. 어느 집에 있어 봐도 그 집 식구가 한 사람도 노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애를 제하고는 유치원에 가기도 하고, 중학에 가기도 하고, 대학에 가기도 하고, 그리고 주인은 직장에 나가고 주부는 부업으로 봉투를 만들기도 하고, 일본 나막신 끈을 매기도 하고, 약병이나 화장품 병에 상표를 붙이기도 하는 일들로 온가족이 노는 사람이 없었다. 노인들도 위의 부업을 도우기도 하며 쉴 새가 없었다. 60년 전의 일이다. 언제부터 이런 습관이 있었는지 모르나 선진국이 되려면 그 국민이 놀고먹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몇 푼어치 안 되는 공부한다고 선조께서 땀 흘려 모으신 돈을 물 쓰듯이 뿌렸으니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우리 형제 뿐 아니라 일본 여자와 살림을 꾸린 학생이 많았다. 한편 신문 배달해 가며 공부한 학생도 많았다. 그 시대는 동경 유학하지 않고 출세 못 하는 줄 알고 모두 으스댔다. 그렇다고 졸업 후 적당한 취직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 사람의 군수가 고작 월급이 35원 정도 밖에 안 되었다. 한데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군수자리가 쉽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람으로 군수가 몇몇 사람 밖에 없을 정도이다. 하늘서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동경 유학생이 수 없이 있었으나 졸업 후 취직하는 사람은 백주에 별 보기 보다 더 어려웠다. 헛공부하고 헛돈 뿌린 결과 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함남일보사 취직
귀국 후 처음 취직한 곳이 함남일보사였다. 이 신문은 일본말로 간행되었다.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도청기관지 역할을 한 일간신문이었다. 한국인은 친일파 아니고는 구독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두 달 다녔는데 월급이 고작 20원이었다. 학생 시절에 백여 원씩 쓰던 내게 20원이 마음에 찰리가 없다. 그래서 그만 두었다. 다른 데 취직하려고 해야 그런 자리도 없고 또 흥미도 없었다. 결국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집에 돈깨나 있는 사람은 현금으로 술 먹지 않고 술집에 대놓고 연말에 가서 계산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도 한 집이 아니고 여러 집을 단골로 하고 돌아다녔다. 나는 하는 일이 없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 안종호와 불교 청년회
그 때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에 안 종호가 있었다. 안 군은 동경 대정대학(불교대학)을 나와 같은 해 졸업했다. 동경에서 자주 만나던 친구이다. 둘이서 상의했다. 이 좁은 함흥에서 매일 술타령이나 하며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는가! 어찌하면 좋을까? 결국 서울에 가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서울은 물도 사먹는 곳인데 빈털터리로 가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안 군에게 묘안이 있었다. 조선 불교단(朝鮮佛敎團)이란 단체의 돈으로 안 군은 불교대학을 나왔다. 이 재단은 현재 「미도파」의 전신인 「정자옥」백화점의 주인 「고바야시」씨의 것으로, 승속을 가리지 않고 한국인을 선발하여 일본 불교대학에 유학시킨 재단법인이었다. 물론 「고바야시」씨는 불교의 독실한 신자로 한국에 불교 포교사를 양성하는 데 뜻이 있었다. 모두 26명의 졸업생을 낸 것으로 안다. 안 군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불교재단의 유학생들이 모여 「불교청년회관」을 세운다고 하니, 안 군은 서울에 가보자고 했다. 나는 그 재단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더구나 불교를 알지도 못하여 곤란하다고 하니, 안 군은 그냥 함께 어울리면 된다고 하기에, 어쨌든 서울에 비약하기로 결정하고 안 군과 함께 함흥을 하직했다. 다시는 북녘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청년회관을 건립한다고 몇몇 사람이 매일 모였다. 그 청년회의 기구는, 불교재단에서 졸업시킨 불교대학 출신은 자동적으로 이사가 되었고, 그 밖의 뜻 있는 사람은 평의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안 군은 이사로 나는 평의원이 되어 매일 모임에 참석했다. 그러나 나는 바른 길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그 일 자체가 어느 정도 내 성격에 부합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함경도는 불교가 그렇게 센 지방이 아니다. 함흥에 귀주사라는 대본산이 있고 안변에 석왕사가 있을 뿐이고 그밖에 조그마한 비구니 암자가 몇 군데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불교를 좋아하셨는지 모르나, 어려서 「천불사天佛寺」라는 절에 기도드리러 갈 때 따라간 일이 있고, 중학교 때 넷째 형이 딸만 둘이고 아들이 없어 모 절에 생남生男을 기원하는 기도를 붙여 놓고, 가을․봄 나더러 대신 기도전祈禱錢을 가지고 가서 기도드리고 오라고 해서 몇 번 그 절에서 자고 온 일이 있다. 이 정도로 내가 불교에 잠재적 신앙이 배양되었을 리 없다.
유년 시절의 나의 심성
나는 어려서 동정심이 많아 남을 도와주려고 한 일이 많았다. 열 살쯤 되었을 때 일이다. 이웃에 가난한 노부부老夫婦가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앞 못 보는 장님이고 할아버지는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갔다. 초가 2칸에 살았고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살림이었다. 앞 못 보는 할머니가 바느질도 하고 밥도 짓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 시대에는 석유를 유리병에 붓고 솜으로 심지를 틀어 빨아 올려 등화燈火로 썼다. 좀 넉넉한 집은 램프를 썼는데 석유가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가난한 집에서는 쓰지 못했다. 그나마 석유 살 돈이 없어 불을 켜지 못하고 캄캄하게 지냈다. 그 할머니에게는 등잔불이 있으나마나 했었고 그래도 밤이면 불을 켜야 할 터인데 딱하기만 했다. 나는 그 집에 석유를 대주었다. 우리 집은 램프를 썼는데 가족이 많아 여러 등을 켰다. 석유를 한 말들이 큰 통을 사다 두고 썼다. 이 통이 사랑 부엌에 놓여 있었다. 나는 석유를 몰래 할머니 집에 뽑아다 주곤 했다. 화목이 없어지면 집의 장작을 한 아름 안아다 주기도 했다. 몇 해 동안 그랬는데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동네 가난한 집 친구에게 음으로 양으로 동정하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길가에서 거지를 보면 항상 한 푼 쥐어 주며 그냥 외면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 종교심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장난하다 옷끈이 떨어지면 내 손으로 집적 꿰맨다. 집에는 어머니는 물론 형수님들도 여러 분이 있었고 조카딸도 있었으니 꿰매 달라고 해도 군소리 할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어머니가 보시기에 안 되었든지 “저 애가 중이 되려고 저러느냐?”고 하시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조선불교재단
대판에서 이은계군이 권해서 기독교 교회에 갔다가 성미에 맞지 않아 그만둔 일이 있었으나, 불교에는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사람은 ‘인연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매일 오륙 명이 모여 잡담도 하고 앞일을 상의하기도 했다. 이 사업을 후원해 준 유력한 분은 학무국장(문교부장관) 히야시씨와 경무국장 이께다씨였다. 이 사람들을 각하라고 불렀다. 물론 불교 독신자였다. 일본인으로 불교 독신자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불사라면 잘 봐주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조선 불교재단의 상무이사 나까무라씨에 대한 일이다. 이 분은 한일합방 후 조선어 통역관으로 있었다. 부인은 한국인이고 자녀에 남매를 두었다. 조선 불교재단이 해산되자 그 재단의 기관지인 「朝鮮佛敎」를 인수하여 그가 발행인이 되었다. 물론 월간지고 일본말 불교잡지였다. 그 때 불교잡지라고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나까무라씨도 불교의 독신자일 뿐 아니라 특히 禪에 조예 깊은 고사高士였다. 그가 뒤에서 전적으로 지도했다.
불교청년회관 건립
불교청년회관 건립에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기부하는 사람도 없어서 우리는 큰 벽에 부딪쳤다. 매일 모여서 숙의 했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묘안이 하나 생겼다. 저명인사나 서화가의 서화를 받아 일본에 가지고 가서 팔아 기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모두 찬성이었다.
제 일착으로 오세창 선생의 예서 한 폭, 민병석 자작의 글씨 한 폭, 이 재창 후작의 글씨 한 폭을 비롯하여 3백여 장을 거두었다. 구한말의 명문대가를 모조리 찾아다녔다. 이러는데 2년이 더 걸렸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일본에 가지고 가느냐는 문제가 생겼다. 처음부터 이 일을 주도해 온 이 관승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동경 대정대학 출신이다. 이 일에 영향이 큰 이군이 선발되고 안종호군이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은 장도에 올랐다. 한 폭에 십 원씩이라도 3천원이 되고 그 당시 3천원은 거금이니 회관 건립 기금으로 넉넉했다. 앞날의 서광이 결정적으로 보여 모두 마음이 부풀어지기만 했다.
그러나 웬걸, 서화가 팔리는 대로 돈을 집어 썼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것이다. 돈이 좀 생기니 네가 판돈은 네가, 내가 판돈은 내가 보관한다고 하고 서로 각자의 입장을 취하여 결국 빈털터리로 각기 돌아왔다. 도대체 얼마나 돈을 거두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상대방의 잘못으로만 미루고 책임회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조선 불교청년 두 사람이 청년회관 건립기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서화를 팔아서 그 돈으로 유흥에 탕진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졌다. 그때는 라디오가 별로 보급 못 된 때여서 특권층이나 부유층이 아니고는 들을 수 없어서 다행이기는 했으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학무국장, 경무국장, 나까무라씨 등의 소개장을 많이 지니고 갔는데 이런 망신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불교청년들이라고 해서 음으로 양으로 후원해 주었는데 이렇게 탈을 냈으니, 미꾸라지 두 마리가 전 불교계를 흐리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센징’이라고 일본 사람들은 멸시하지 않았던가! 진실로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래서 불교청년회관 문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재기하려고 해도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관승군의 소식은 전혀 모르고 안종호군은 동경에서 병사했다 한다.
불교재단 유학생으로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1982년 10월 현재).
친구 장경모
고바야시씨가 불교 포교의 목적으로 유학을 시킨 26명 중, 포교의 일선에 나선 사람은 오직 한 분뿐이었다. 그도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바로 장경모군이다. 역시 동경 대정대학 출신이다. 장군은 일본 천태종에 입적하고, 천태종 승려 자격으로 서울에 「대각사大覺寺」를 건립하려고 활동했으나 뜻대로 안되고 8․15를 맞았다. 장군은 구한말 법부대신인 장박의 손자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고바야시 씨는 정재로 괜히 헛수고만 한 셈이었다. 발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불교청년회 해산 후 장 군이 계획한 「大覺寺」건립운동에 가담했다. 전셋집에서 불상도 모시지 않고 매주 일요일 장군의 설법이 있었다. 남녀 신도가 열 명 정도였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음은 물론이다.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법회를 기다려 열심히 듣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월간 ‘조선불교’
어느 날 ‘조선불교朝鮮佛敎’ 잡지에서 일을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원고 모집도 하고 교정도 하고 발송까지 도맡아 했으나 편집만은 발행인인 나까무라 씨가 했다. 편집은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편집하는 요령을 열심히 배웠다. 매월 발행하는 월간지인데 몇 달 해 보니 편집도 할 수 있었다. 나까무라 씨는 팔방미인 격으로 매우 분주한 분이었다. 특히 조선 사람 입장에 서서 많이 애쓴 분으로 유명했다. 조선 불교재단도 고바야시 씨에게 권유하여 조직되었고, 이 단체의 상무이사직에 있었다. 출자는 고바야시 씨가 했으나 운영은 나까무라 씨가 맡았다. 이래저래 매우 바빴으므로 ‘조선불교’는 내가 도맡아 꾸려 나갔다. 매월 천부씩 인쇄했으나 그 당시로 봐서 적은 부수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표지를 오프셋인쇄는 못했다. 무지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지대라고는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 결국 나까무라 씨의 사재로 속간되는 형편이었다.
한두 해 하는 동안 잡지 발행에 익숙해졌고, 더욱이 불교에 대한 상식이 늘어서, 불교의 문외한이라는 말은 면하게 되었다. 함남일보에 있던 때와는 달리, 취미도 있고 보람을 느꼈으니 불교에 인연이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불교사’ 이사 명함을 가지고 서울이남,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6도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이리하여 각도, 시, 읍, 면에 잡지가 매달 배달되었다. 이 대금을 수금하기 위해서 나는 6도를 돌아다녔다. 수금이라기보다 찬조금을 얻기 위함이었다. 여러 해 무대로 발송했기 때문에 간 곳마다 잘 내주었다.
보천교 교주 차천자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한 것은 전라북도 정읍에 갔을 때 보천교 교주인 차천자를 만난 일이다. 본명은 차 경석인데 자칭 천자였다. 나는 이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수부에 면회를 청하니 오늘은 도 경찰부장이 와서 분주하므로 내일 아침에 조용히 만나라는 것이다. 수부의 주임이 와세다 대학 출신의원 약재라는 사람인데 보천교 간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상투 틀고 대갓 쓰고 한복차림이었다. 그 때 본관[大法堂]이 준공되었으나 도 경찰국에서 허가해 주지 않으므로 개관은 못하므로 폐문하고 있었으나 특정인에게는 보여 주었다. 불교 법당처럼 꾸몄는데 부처님을 모시지 않으니 그 자리는 차천자가 앉을 것인데, 과연 천자 자리 같았다. 규모가 웅대했다. 결국 개관 못하고 차천자 사망 후 보천교가 해산되고 그 건물은 서울에 옮겨져 현재 조계사 대법당이 그것이다.
이튿날 아침 면회했다. 몸은 뚱뚱하고 큰 상투에 대갓을 쓰고 얼굴은 구리 빛으로 까만 수염이 보기 좋게 나있었다. 그 풍채가 과연 만인의 장 같았다. 저렇게 생겨야 무슨 일이고 할 수가 있구나 싶었다. 우선 체격이 좋고 외모가 잘 생겨야 협잡도 크게 해 먹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첫 말에 불교는 포교가 자유롭지만 보천교는 경찰의 제재가 심해서 애로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일제 때 사이비 종교의 탄압이 심했다. 독립운동이나 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천자를 만나러 안내인을 따라 갔을 때, 신관은 사용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옥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좌측으로 방 네댓 개가 나란히 있었고, 여기서 금방 잠자리에서 깬 듯한 사람들이 머리카락은 더부룩하고 얼굴에는 때가 다닥다닥 하며 여위고 옷엔 때가 낄 대로 낀 모습으로 내다보았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교주를 흠모하고 모시러 와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당시 이런 풍문이 있었다. 차천자가 머지않아 등극하면 벼슬자리를 준다는 말을 믿고 전답을 팔아서 바치고 그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앙도 이 정도에 이르면 오히려 편할 것이다. 일제 치하에도 이런 사이비 종교가 있었고 해방 후 경향 각지에 이런 종사가 발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까무라 선생과 분가分家
나는 ‘조선불교’의 일을 열심히 봤다. 불교와 인연이 점점 깊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나까무라[中村] 선생과는 사제 관계처럼 친해졌다. 그 때 선생 댁은 지금 중구 주교동 140의 2였다. 나는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장조카의 호적에 있었다. 그래서 나까무라 선생 주소로 분가했다. 내 본적이 주교동으로 된 것이다.
처음 함흥을 떠날 때 다시는 북녘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7천석 대지주가 망했으니 남 보기에 부끄러웠다. 내가 잘못해서 망한 것은 아니나 호화스럽게 지내던 가문이 망하고 보니 산천초목도 보기 싫었다. 이리하여 나는 독신으로 일가를 창립한 결과가 되었다. 일곱째 형은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호적에서 옮기지 말라고 만류하셨다. 그러나 나는 고향이 싫어서 가문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서울 사람이 되고 말았다.
三八선이 없어지면 어머니 아버지 산소에 한 번 다녀올 생각이 간절하다.
장조카의 패가망신
그러나 장조카가 우리 가문의 산소까지 다 팔아먹었으니 가보았자 참배할 곳도 없다. 옛날에는 추석․한식에는 골고루 산소를 찾아 차례를 올렸었다. 여러 대의 조상이 모두 합장으로 되어 있었고 산소 주위의 땅이 산소에 속해 있었다. 그 땅의 소작인이 무상으로 경작하고 묘소를 돌봐 주고 제물도 준비하고 우리에게 대우가 극진했다. 묘를 모신 산과 주위의 땅이 수천 평, 수만 평이 되었다. 이것이 대여섯 군데가 되니 수십만 평이 될 것이다. 이 땅이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갔으니 자연 묘소를 철거해야 했다. 모두 화장한 것으로 안다. 내 부모님 묘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고 보니 三八선이 없어져도 나는 성묘할 곳조차 없다. 나이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금할 수 없다.
여기서 장조카에 대한 이야기를 더 쓰지 않을 수 없다. 장조카는 사기꾼에 속아서 함흥 역전 토지를 샀다. 그 대금을 치루는 데 돈이 모자라서 자기 명의로 있던 토지와 산소까지 모조리 저당하고 고리를 채용했다. 저당 잡힌 토지에는 위에 말한 대로 삼촌들, 그리고 내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역전 땅이 헐값에도 팔리지 않는다. 살 때는 비싼 값을 치렀지만 막상 싸게라도 팔려고 하니 살 사람이 없다. 협잡꾼에게 속은 것이다. 매달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고 가용은 점점 과하게 지출되니 무슨 재주로 감당할 것인가! 결국 이 씨 가문의 모든 땅이 경매 붙게 되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삼촌들도 모두 거지가 되고 말았다.
아버님께서는 분재는 해 주셨지만 명의를 이전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불상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장조카가 자기 앞 토지만 탕진했다면 모르지만 삼촌들의 토지까지 몽땅 잃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내 앞의 토지도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아버님 별세 후 10여년 만에 우리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3대 부자 없고 3대 가난 없다는 속담이 옳은 말인 듯하다.
한 집안에 불량자가 나면 그 집은 망하고, 선량한 아들이 나면 흥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이다. 산소를 잘못 쓴 탓이나 아닐까? 아니다. 내가 7, 8세 때, 아버님께서 선조의 산소를 정리하시려고, 풍수 영감을 사랑에 모시고 융숭하게 대접하시면서 수개 월 동안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산소를 물색하셨다. 그러므로 좋은 곳에 모셨을 것이니 그런 산소에 무슨 탈이 있겠는가! 그런데 왜 망했을까? 풍수설도 소용없는 모양이다.
임제종 경성별원
나까무라 선생은 참선의 고사로 ‘삼소三笑’라는 거사호居士號까지 받은 독실한 분이었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절에 법문을 들으러 가셨다. 일요일이면 노사老師의 법문을 들으러 가자고 내게 자주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지다가 어느 일요일에 따라갔다. 항상 노사의 법문이라고 해서 나이 많은 노스님의 설법인 줄 알았다.
그 절은 일본 경도에 있는 임제종 묘심사파의 서울 별원이었다. 청계천 천일약방(지금 천일극장)과 관수교 다리 중간에 있던 이왕가李王家의 산실을 불하받아 지은 큰 절이었다. 임제종이란 중국 육조六祖 대사의 법손인 임제의현臨濟 義玄이라는 큰 스님의 법통을 말한다. 이 법통이 일본에 들어와 묘심사라는 일파를 형성했는데 물론 선종禪宗이다.
나까무라 선생의 뒤를 따라 대문에 들어섰다. 마당이 깨끗이 청소되어 신선세계에 온 기분이 들었다. 법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종소리가 七․五․三으로 요란하게 들리고 큰 북소리가 둥둥하고 울렸다. 10여명의 젊은 중들이 입장하여 자리에 질서 있게 앉는다. 똑같은 법복에 머리는 모두 삭발하여 그 모습이 예사 사람 같지 않았고 별세계의 사람으로 보였다. 이어 안내승의 인도를 받으며 40이 좀 넘어 보이는, 보통 키에 불그스름한 얼굴에 화사한 가사 장삼을 입은 스님이 정중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이 스님이 이미 준비해 놓은 강좌 대에 앉자 종소리가 나고 독경소리가 우렁차게 퍼졌다. 독경이 끝나자 강좌대의 스님의 엄숙한 어조로 설법을 시작한다. 무슨 법문을 했는지 그 내용은 기억에 없다.
설법이 끝나고 스님이 퇴장하자 또 종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대중과 설법 듣던 신도들이 와르르 종 앞에 달려가 질서 있게 앉는다. 나까무라 선생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종소리가 그치더니 멀리서 방울소리가 들린다. 이 방울소리에 맞춰서 한 사람씩 방으로 들어선다. 무얼 하느라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좌선 때 개별적으로 입실入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요일 설법 강좌가 끝났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행사가 질서 정연하고 매우 엄숙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마치 별세계에 온 듯 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는가 싶었다. 이게 불교 행사인가, 그렇다면 이 보다 더 엄숙한 행사도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대판 나니와 상업학교 재학 중에 이 은계군의 권유로 기독교 교회에 갔을 때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더구나 돈을 걷는 일도 없었다. 나는 그 분위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화산華山 노사와의 만남
집에 돌아와서 나까무라 선생에게 노사의 설법이 왜 없었느냐고 물으니, 법좌法座에서 설법한 분이 노사라고 했다. 나는 의아스러웠다. 노사라고 하기에 노스님으로만 알았는데 40이 좀 넘어 보이는 사람을 노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까무라 선생은 설명해 주었다. 선종에서는 수행이 끝나면 30이라도 존경해서 노사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 노사는 37세 때 이 별원에 포교 감독으로 부임했던 것이다. 묘심사파妙心寺派의 포교소布敎所가 전국 중요 도시에 산재해 있었는데 이 별원에서 총감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별원의 주지는 노사가 아니면 안 되었다. 이 노사는 이 절의 2대 주지였다.
나는 나까무라 선생이게 간청했다. 그 별원에 들어가서 노사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뜻이 있다면 노사와 상의해 보겠다고 대대적으로 찬성했다. 좋은 결심을 했으며 잘 공부해서 장차 조선에 선을 선양하라고 격려해 주시기도 했다. 나는 왠지 마음이 부풀었다.
며칠 후 노사의 승낙을 얻고 내가 입을 가사 장삼을 경도에 주문했고 이부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 3년 공부하고 나와서 ‘조선불교’ 지에 전력하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