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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봉 詩集
夢遊記
自序
새의 비상飛翔은 공기의 저항에 의존하면서 자연을 관통하는 흐름을 거스르지 말아야 추락하지 않고 날 수 있다는 것을 이순耳順에 다다라서야 눈치채게 되었다. <나> 안에 내재된 인식작용의 오류의 한계를 추스르다 보니 詩集이 늦어졌다.
공자는 역경易經에서 ‘글로써는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는 사람의 의사를 다 표현할 수가 없다 書不盡言 言不盡意’라 했다. 詩人으로 산다는 것은 해서 아득한 일이리라. 더군다나 잃어버린 詩精神을 회복하는 일도 詩人 스스로의 몫이니
夢遊記 1
잠결에 놀라 일어났다 황급히 창밖 세상을 살핀다 맞은바라기 마을의 창마다 덕지덕지 들러붙은 일상의 상흔傷痕들이 쌓이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받은 삶인데
슬픔은 슬픔으로 쌓일 수밖에
夢遊記 2
조금은 터득한 것 같다 여길 때부터 잡문이 눈에 자꾸 보인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건 하잘것없다 詩가 아니면 어떠랴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면서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때맞추어 후두둑 쏟아지는 빗방울
우렁이 각시가 왔나
夢遊記 3
괭이잠에 뻐근하다 必有人道之患이고 必有陰陽之患이라 德이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 할 겨를이 어디 있을까 오늘도 다름없이 사람들은 슬프다 그곳에
내가 홀로 있다
夢遊記 4
잠들어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고요히 잠에 빠져 내면의 세계를 기른다 기뻐하거나 춤추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까딱하지 않는다 깊고 깊은 고요에 도달한 세상
네 안에 내가 있다
夢遊記 5
비가 주룩주룩 내려 계명축시鷄鳴丑時를 적신다 창밖 어두운 세상을 내다보다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숨죽이다 마음자리는 홀연히 빗속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사천삼백사십칠 년 팔 월 스무닷새 날
夢遊記 6
누구나 꿈속에서 제 몸 아닌 다른 몸을 안고 살지 금강錦江에 바람이 불어 일렁이는 탁류濁流에 떠내려 보낸 살갗들이 찾아드는 새벽 안개비가 화안하게 밀려오지
그곳에 가면 내가 아닌 내가 있다
夢遊記 7
꿈꾸기는 스스로의 마음을 터득하는 거울이다 내면의 고요로부터 고요함이 번져 나와 주변세계를 빨아들이는 힘이다 꿈이 맑으면 때가 끼지 않고 때가 끼면 맑은 꿈이 아니다
몸 밖의 세계만 쫓다 비로소 몸 안의 세계를 깨닫다
夢遊記 8
하늘이 하는 꿈을 꾸고 사람이 하는 꿈을 꾼다 하늘이 사람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 무색무취無色無臭인 하늘을 닮은 사람이 하는 꿈은 어떤 꿈일까 二筍에 이르러서야 눈뜨는 사랑아
텅 빈 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
夢遊記 9
늦가을이 되어서야 찾아간 浦口 하늘이 내려준 인연의 끈을 버리고 살아온 세월만큼 마른갈꽃이 아린 상흔傷痕을 후빈다
서로서로 기려야 한다는 깨달음
夢遊記 10
“달 속에 머가 있지?”
“껌정 뒤에 머가 있지?”
“땅속에 머가 있지?”
“지진나면 친구들은 어떡허지?‘
네 살 아이의 심안에 만상萬象의 감성이 울린다 마치 천지일기天地一氣속에서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참모습이다 깡충깡충 뛰며 까르르르 웃다 하늘에 박힌 맑은 눈, 하느님의 눈곱지보다 조그만 시간을 살며 너무나도 아프게 이미 깨우쳤다
하늘의 소인이리라
인연, 혹은
아직도 졸음이 온전함을 위해 술을 마신다 밤새 차오른 술잔이 거덜나고서야 눈꺼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결국 한 번의 조그만 성장뿐인데 새벽일 나가는 이웃들도 계시다 올망졸망한 인간사회다 그 모호함이 두엄내나는 보이차를 마시며 파리한 찻잎을 떠올리는 우리 생각이 좁았구나
오늘, 당신은 안녕하신가?
첫 눈
첫눈 내리는 날
그대, 오신다 하기에
함박눈으로 오지마라 했어요
바람으로, 지금처럼
온다고만 하라고요
나, 그리고 당신의 Rhapsody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내 가슴속에서 갓 볶은 원두커피 탄내가 난다.
가창오리 떼의 하늘
하늘 향해 마음을 열면 무리가 하나 되고
금강을 향해 자신을 열면 강물과 하나 되고
飛翔하며 붉은 하늘 가득 群舞로 하나 되네.
문득, 고개 들어 금강, 붉게 물들었네.
씨
씨는 껍질 속에서 빛을 파먹고 산다.
씨는 빛 속에서 어둠을 파먹고 자란다.
雨
늘 울어야 하는 물새의 젖은 눈에 빗방울이 고여 있네 제 외로움이 한밤 내 울어울어 파르라니 야위었네
엄니
새벽 강을 건너다 무명 이불 둘러 감고 밤새 아픈 숨소리 겨우겨우 눌러 잠들다 저세상 바람이 무섭다
가을이 가다
어스름이 길게 밟힌다 예술의 거리 같지 않은 예술의 거리 촉탁 수도계량기 검침원으로 나가는 詩人 김정수네 술집 같지 않은 술집에서 해석 불가한 詩人 박성구 형이랑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고 있는 학사장교 출신 전병조 詩人 환장하게 살고 있는 詩人 김승일이도 돌새*의 살내가 그립다며 한참 조이다 간다 뒤늦게 들어선 오인덕 詩人은 묶은 꽁지머리를 나풀거리며 웃는다 세월은 참 슬픈 살로 오른다 가을도 모르게 가고 그새 손발이 땡땡 얼어 길 너머의 길은 아득하다 다시 걷기 시작하면 슬픔으로 밀려들어올 것인데 걸어가자 한다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내린다 잠시 생각; 모두 둥글둥글 납작해졌을까 키 높이는 낮아졌을까 마른 장작 타는 냄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사람과 하늘 사이보다 가까워야 하는데 사람과 詩人 사이가 詩人과 하늘 사이보다 더 멀다고 느낀다 해묵어 세월 흐른 뒤 낭랑한 입이 열리고 빈말이 오가다 다만 빈말일 따름이라 생각했다 견디기 연습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모두 들앉아 불꺼진 거리 예술의 거리 세상의 슬픔이란 슬픔 모조리 거기 함께 있었다 슬픔에 대하여 생각중이다
錦江의 浦口이야기
- 西鯠浦
山竹들 길죽길죽하게 맨몸으로 부딪치는 둠벙을 지나 째보선창 돌아서 서래나루까지 가봐 장날마다 비릿한 생선전, 쌀전에 가득 담긴 민초들의 고단한 장터가 있었어 경포천 물길이 막히자 어판장도 문 닫았지 말라붙은 하잘것없는 생선 비늘들이 안쓰럽지 팔마재 언덕이 잘려 신작로가 되었지 착취의 수레바퀴 자국이 선명한데 繁榮路라 하지 농장주들의 下焦를 씻겨주다 이제는 세상의 아랫도리를 씻고 있어 어부들이 떠난 빈자리 갯벌이 쌓이고 강물도 말라 끝내는 찡한 악취가 나지 고깃배들이 넘쳐나던 시간들이 지워졌음을 알지
錦江의 浦口이야기
- 月浦
뒷산에서 달이 뜬다 하여 달개나루라 뒷두랭이 지나 월포천月浦川이 흘러 세월은 가고 이름만 남았지 멍지매재 넘어 죽곡제에 이르러 오백년을 살아온 정자나무 그늘 아래 전설은 舒川으로 향하는 거룻배에 몸을 싣고 있었지
아이야, 금강하구둑이 길게 누워 있구나
錦江의 浦口이야기
- 西浦
무리를 이룬 뫼들이 갯벌에 촘촘히 박혀 섬이었던 그 옛날 오성산 끝자락에서 휘돌아온 짠물이 비단강물을 만나 물안개로 오르다 서쪽나루 장날에 왕골 돗자리며 바구니장수, 생선장수 마을 앞 수래 따라 안말, 바깥말, 곰꺼리를 지나 새터, 감나무골, 가루개, 장갑산을 넘나들더니 대명산이 기세 넘치는 오성산 정기를 받쳐 주다 또다시 봉우리에 올라서면 저 멀리 무리뫼들이 보이고 또다른 봉우리들이 보인다 인간보다 몇 만 겹이나 다져진 선녀바우 잘려나가 꼬리만 뎅그러니 남아 갈대밭을 지킨다 굽이굽이 갈대들이 서로의 몸을 부비며 서걱거린다
錦江의 浦口이야기
- 羅浦
한밤 내 눈 내린 비단나루에 가창오리 떼 날아오른다 빨래하는 아낙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 공주산公主山 장수바우에 부딪쳐 알몸이 되어 돌아간다 남병산성南屛山城에 암탉을 풀고 뒷구메들에는 새 떼,옥골제에 백련를 풀고 왕골 돗자리를 펼쳐놓고 신선한 흔적으로 나룻가 어디쯤 숨어 살았으면 하는 생각, 가슴이 쿵쾅거린다
癌
온몸으로 불고 있는 암세포와 전쟁 중인 元老소설가 신곡 라대곤 님의 소설적 해학 속으로 깊숙이 쏠려 들어가다 찻잔을 떠돌던 개똥쑥茶香이 목젖을 간질입니다. 가슴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이놈이 그냥저냥 있어만 주면 지놈을 죽이려 허지 안는디, 자꾸만 힘들게 헝게로 너 죽고 나 살자 헐 수 빢이 없지잉 안그냐?”
몽매를 몸으로 깨우치는 그는 언제나 따뜻한 몸으로 거기 그대로 있다.
월명산 솔바람소리 내음 싸아한
홍차와 국화*
도심재생 바람에 쓸려 출렁출렁 모여든 월명동 현재와 과거, 그 나뉨의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 <홍차와 국화>가 있다 눈물겨운 끌어당김이 있다 글쟁이들과 환쟁이들이 드나들며 그들끼리만 풀어내는 언어가 있다 간혹 덧나는 상처처럼 그늘이 드리워져 상상의 시작과 끝을 잘라낸다 우매한 일이다 앞 뒤 두 개의 방房은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그 사이 아무 쪽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에 비가 내린다 회색 하늘 아래 회색 아파트와 세파에 그슬린 장옥長屋* 아래, 빗물이 홈통을 타고 흘러넘친다 서로 다른 공간 사이의 빈틈을 지우려 넘친다 茶香이 사그라들 즈음 스스로의 색깔을 제외하고 빛깔이란 빛깔은 남김없이 지워 갈 그때, 사람들이 모여든다 哀而不傷 樂而不淫*이라 삶과 역사는 그 넘침과 함몰을 경계한다 因緣生起*라 詩人과 詩人, 혹은 미술가, 음악가의 만남을 소롯이 담고 있다 어스름한 窓에서 번져오는 비가 흔흔히 적신다 여행길에 만나는 思念의 하늘, 아래 緣起의 세계가 있다 옹알이소리로 교감하는 家族이 되어 있다
맨몸 열어 보이는 빗소리에 새살이 돋는다 스스로 빈 몸일 때, 몸 하나 거기 묻어 두었다
* 홍차와 국화_ 군산시 월명동에 있는 쬐그만 찻집
* 長屋_ ながや로 불리는 일본식 주택. 기다란 집을 칸막이하여 여러 세대가 쓸 수 있게 한 주택.
* 哀而不傷 樂而不淫_ 傷과 淫에 이르지 않도록 그 넘침과 함몰을 경계한 말로 김춘수 詩人이 사용.
* 因緣生起_ 모든 존재는 모두 상대적인 의존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宇宙萬有에 대한 불교의 세계관.
詩作노트
우리는 살아 있음으로써 발생한 사유思惟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의심 한 자락을 남긴다. 우리는 이런저런 자아들 가운데 왜 지금의 <나>가 선택되었는지, 왜 나는 지금의 <나>인지 대답할 수 없다. 덧붙여,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는, 그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생겨났는지 모르는, 필연성이 없는 임의적인 자아(주체)를 전제하고 사유하는 것이리라.
꿈, 소설의 화자와 주인공처럼 상상력은 그 한계에 직면할 것을 강요받을 때가 있지 않은가.
喪我, 그 다음
문은 열려 있다 문 밖에서 서성거림은 불안하다 들여다보임은 불쾌하다 문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 <밖>은 <안>, <안>은 <밖>을 본다 점점 서로 극미極微한 두께로 멀어져 간다 곧 <이쪽>은 어둠이고 <저쪽>은 불이 켜질 것이다 밝음은 훤히 들여다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멀거니 <밖>에 붙들린 생각들 그 사이 들킨 건 바로 나였다
상상想像은 모든 것을 확대한다
眞空妙有
한참씩 잊고 살았다 떠날 사람은 떠나가리라 바람이 바람 속으로 떠나고 긴 장맛비를 맞으며 떠나고 제 몸을 적시기 시작할 그때, 처음으로 돌아간다
聽止於耳 心止於付라 괜한 짓했다
옆집아기 4
<이게 머지> 첫 마디 물음. 톡톡톡 작고 조그마한 입술에서 터져 나온 물음이 가슴에 고인다 물음은 절대 충만이자 앎의 탄력이다 더불어 물음은 결핍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쫑알거리다 또 묻고묻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묻는다
<머지 머지 머지> 줄지어 나오는 물음들 : 금새 <도道가 머지>라 물어 오리라
옆집아기 5
스무 달을 채운 아이가 입으로 못하고 몸으로 말한다 손을 잡아끌고 엄마 머리채를 움켜잡아 끈다 같이 놀자 떼쓴다. 냉장고 문을 열라 하고 <애프을>, <바나나>, <아키_ 아이스크림>, <지지_ 치즈> 허참, 입맛대로 골라 먹는다
또래들 보다 훌쩍 커버린 아이가 오동포동 무겁다
옆집아기 6
아이가 주니어네이버에 빠져 푸욱 빠져 창작동요, 놀이동요, 민속동요, 영어동요 입맛대로 골라 <으응>, <응>, <아아> 몸 비비고 손가락으로 짚으며 열라 한다 화면 속으로 숨어들어 간다 먹거리는 가당치도 않다 집중을 방해하면 버럭버럭 아~앙 납작 엎어진다 승질머리가 있음이다 저를 건드리지 말라는 항의이다 지가 하고 싶은데 감히!
옆집아기 7
아이는 손에 잡히면 기어오른다 책상 위로 오르기 식탁 위로 오르기 자동차에 오르기 화들짝 놀라게 기어오른다 아이는 틈만 보이면 기어들어간다 싱크대 밑으로 들어가기 사물함으로 들어가기 신발장 안으로 들어가기
處暑
밤벌레들이 언어 밖으로 빠져나와
언어가 사는 세상을 향해 부딪쳐 죽는다.
영혼을 적시는 情念
물빛다리 안개비
연잎 위로 쌓이는 안개비
시든 잎 떨어질라
물속으로 숨은 바람이다
뿌리만 있으면야
새순은 돋거니
깊으면 깊은 색으로
얕으면 엷은 색으로
가까이 다가서면 어느 순간
너는 사그라지고
매달려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
영혼의 냄새로 만나
스멀스멀 사라지는 물안개에 젖다
不立文字
별은 별이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왜 뜰 앞에 버드나무라 하였는가
왜 똥막대기라 하였는가 **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아는
思量分別로 그것을 해석하지 말라
죽음은 무엇과 같은가
태어남은 무엇과 같은가
그대는 태어남도 죽음도
누구로부턴가 들어서 아는 것일 뿐
어리석음에서 조금, 아주 조금 벗어나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별은 별이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 不立文字_ 고타마가 깨달은 이후, 처음 했던 말.
** 불립문자 해설에서 빌려온 말.
물음표, 혹은
내 몸속에 무엇이 들어와 살기에 들끓는 신열이 난다냐 물안개 헤쳐 놓은 월명산 호수길 솔숲을 지나, 사방이 온통 물안개뿐인 새벽 공기를 너는 알까 모르지 이슬 머금은 풀잎들이 지나는 발길마다 기웃거리다 잡초는 잡초대로 꽃가지들은 꽃들대로 벌써 예감에 시달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아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내 알몸 훌러덩 보여주고 온 것 같아 물음표 같은 목을 길게 올리고 하늘이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내 몸뚱이는 왜 이리 불덩이다냐
老 眼
돋보기안경을 쓰고 그대의 이름을 썼다 섬진강물에 어리는 달빛에 슬그머니 바꿔 앉는 밤
가을병이 도졌나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옆집 아기·1
몸이 점점 작아져 아기의 눈높이로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아이가 말랑말랑하게 웃는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란 뽀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한 가지씩 다른 짓을 한다 한 마디씩 사람 말을 흉내낸다 경이롭다. 사람으로 아홉 달 살아온 그 마음 둥글게 말아 온몸 가득 담았다
아이와 내가 이미 환한 滿月이다
옆집 아기·2
몸을 스스로 뒤집더니 어느 순간 재빠르게 기어 온다 싶더니 끝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제 스스로 일어선다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는 길 뒤뚱뒤뚱 몇 걸음 딛더니 쓰러진다 하늘에서 별 하나 툭, 떨어졌다 겨우 열한 달을 살아낸 여자아이가 손가락 힘만으로 책상에 기어오르다니 심상치 않다
벌써 뒹굴어 떼쓰는 방법을 터득했고, 하고 싶은 짓을 하려 앙탈을 부린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계단과 계단 사이를 넘나들고 사다리를 오르며 성취감에 이빨 두 개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게 이미 사람이 되어 있다 제 몸을 제가 길들이고 있다 제 몸의 힘을 힘으로 과시하고 있다
또록또록 한 마디씩 당돌하게 내뱉는 사람 말
땜~!!
벨리하우스
금강하구둑에서 장항으로 가는 강변길 끝트머리에 바다와 몸을 섞고 있는, 벨리하우스가 있다 동지달 석양에 속살까지 물든 갈대, 탁류에 젖어 더디게 서걱거리는 갈대, 크로키croquis 속 裸女를 닮은 바다가 있다 하얗게 부풀어 오른 창틀 너머 어둠이 밀려와 커피잔에 잠긴다 어김없이 몸 벗어 나를 기다리는 裸女, 그를 만났다 몸을 수줍게 숙이고 남루가 가득한, 그런 바다를 오늘 만났다
일순 비어 있는 흔들의자 모서리가 조금씩 조금씩 닳아져 가고 있음을 오늘 알았다
가을나기
“어이 좋은 친구 소주 한 잔 하지.” 樂에 미쳐 있다는 그가 쩌렁쩌렁한 울림으로 묻는다. “오늘은 딴따라 불지 않누?” 우매한 물음이다 “뭐, 만만하니 조개구이에 소주나 마시자잉.” 징허게 싫은데 어거지로 먹어준다는 말이리라 얼큰하게 취한 그가 교육공무원스타일 폭탄주를 조제하여 옆자리까지 넘나든다. “이보. 젊은이 삶이란 뭐요?” 생뚱맞은 질문을 뿌리자 “삶이란 樂입니다.” 조건반사작용으로 즉각 튀어나온다 “樂이라, 참으로 공감되는 말이네.” 그는 연신 소맥을 들이키며 한참을 주억거린다.
소라구이를 맛스럽게 먹으면서도 옆자리의 소라횟감에 눈독을 들이다 소라는 날것으로 먹어야 제 맛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래 식도락은 사람의 입에서 비롯되는 것이여 날것으로 먹을 때 더욱 그러하겠거니 바다소리 싸아한 내음새 향긋 입안으로 퍼지는 싱그러운 맛이야
“어이, 친구 삶이란 뭐여?” 그가 또다시 묻는다 왜그럴까 그는 삶이 궁금하기는 하는가 “그걸 알면 속세를 벌써 떴지잉” 우매한 답이다 “卽問卽答인겨 禪問禪答인겨 不立文字가 뭔지 알어?” 되묻고 싶었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갸루상의 아니므니다 아누?” 사람도 아니므니다 아무도 아니므니다라는 말에 웃음으로 넘어간다 생김새며 분장이 똑같아야만 한다 저를 가둔 나를 여미려 갇힌 저를 찾아내야 한다
폭우에 잠긴 서점을 빠듯이 뚫고 지나서야 그가 내게 쏠리는 삶에 대한 卽問을 고백하건데 삶이란 나무를 한 번도 실물 크기로 그리지 못했다 늘 넘치거나 모자라게 그린 솜씨다 어제는 넘쳤고 오늘은 모자랐다 그게 바로 삶이라 웃었다
해마다 이맘때쯤, 몸 벗어 내 일부를 버리는 가을병, 그것들을 만났다
첫댓글 가을이 가다 中 -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고 있는 학사장교 출신 전병조 詩人 - 이 부분을 빼 주심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