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제록 특강 제1강-2 (전통불교문화원)
上堂(상당). 1-1 曲順人情(곡순인정) 方登此座(방등차좌) ~
1-2 佛法의 大意(불법대의).
1-3 三度發問 三度被打(삼도발문 삼도피타).
1-4 雜草(잡초)가 茂盛(무성)하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
住三聖嗣法小師慧然集(주삼성사법소사혜연집).
삼성사에 사는, 머무는 嗣法. 임제 스님의 법을 계승한 작은 스님, 慧然이라고 하는 이가 기록을 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자기가 쓰는 저술의 형식도 있고, 법문을 하면 그 제자가 밑에서 기록을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실은 어록이 완성이 됐지요. 요즘은 녹화도 하고ㆍ녹음도 하고 해서 기록하기가 아주 좋습니다.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을 런지 그것이 문제지요.
上堂(상당)은 이것이 너무 어려운 내용들이라서, 또 어렵더라도 이리저리 한 번 풀어보면 풀 수는 있겠습니다만, 맛만 좀 보고, 진짜 임제스님이
우리에게 정말 마음껏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示衆(시중)입니다. 示衆.
성철스님도 상당에서는, 상당법문은 한 번 올라가봐야 시간도 불과 10분 이내입니다. 그러나 그 소참법문. 소위 100일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씩 100일간을 했으니까요. 몇 시간 씩 하는데 100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임제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제스님도 사실 상당법문에서는 상당법어의 어떤 형식만 갖추었지, 정작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시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중을 주로 보도록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궁금한 점은 여러분이 공부할 그런 부분들을 남겨 놓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지요. 우선 상당 첫 번째를 봅시다. 이것이 임제스님이 처음 하신 것이 돼서 꼭 우리가 알든 모르든 한 번 짚고 넘어가야할 일이지요.
1-1 曲順人情(곡순인정) 方登此座(방등차좌)
府主王常侍(부주왕상시)가 與諸官(여제관)으로
請師陞座(청사승좌)하니 師上堂云(사상당운)
山僧今日(산승금일)에 事不獲已(사불획이)하야
曲順人情(곡순인정)하야 方登此座(방등차좌)하나
若約祖宗門下(약약조종문하)하야 稱揚大事(칭양대사)인댄
直是開口不得(직시개구부득)이라 無儞措足處(무이조족처)니라
山僧此日(산승차일)에 以常侍堅請(이상시견청)이니
那隱綱宗(나은강종)이리오.
還有作家戰將(환유작가전장)하야
直下展陣開旗麽(직하전진개기마)아
對衆證據看(대중증거간)하라
曲順人情(곡순인정)이라, 인정에 구부려 순해가지고서ㆍ인정에 못 이겨서 바야흐로 이 자리에 올랐다.
方登此座(방등차좌). 내가 법상에 앉고 싶어서 올라간 곳이 아니고, 정말 나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법석을 마련하고 떠밀어서 이렇게 올렸으니 “내가 마지못해서 하노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과목은 제가 의미대로 붙인 겁니다.
府主王常侍(부주왕상시)가 與諸官(여제관)으로 請師어 陞座(청사승좌).
이것은 府主. 하북부의 지방장관. 하북부 府主. 이를테면 “충청남도 도지사” 이런 뜻입니다. 그 격인 사람이, 그 사람은 과거의 벼슬은 王常侍 역할도 했어요. 왕상시는 왕을 항상 주위에서, 말하자면 비서지요.
왕의 비서 노릇도 했던 그런 사람인데, 현재로서는 지방장관이고, 지금으로는 도지사쯤 되니까 도지사 밑에 그 직원이 얼마나 많습니까?
與諸官(여제관), 제관이라는 말은 많은 부장ㆍ국장ㆍ직원들로 더불어
請師어 陞座(청사승좌), 스님을 청해가지고서 법좌에 오르게 했다. 그랬어요.
처음에 우리는 근래에 자기가 절을 짓기도 하고ㆍ포교당을 개설하기도 하고ㆍ물려준 절을 받아서 포교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임제스님은 법력이 높아놓으니까 소문이 자자하고 그러니까 정말 도지사쯤 되는 사람이 스님을 청해가지고서, 직원들 다 동원하고, 그러니까 시민들은 말 할 것도 없지요.
시민들 다 동원하고 해가지고 ‘스님을 법상에 올렸다.’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한 번 그려 봅시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이 쯤 돼야 되지요.
師上堂云(사상당운), 임제스님께서 上堂. 법상에 떡 올라갔어요.
처음 하시는 말씀입니다. 山僧今日(산승금일)에 事不獲已(사불획이)하야, 산승이 오늘 부득이해서, 일이 부득이해가지고서 曲順人情하야, 인정에 끌려가지고서, 인정을 따라서 方登此座라. 바야흐로 이 자리에 오르긴 올랐지만,
若約祖宗門下(약약조종문하)하야, 하지만 만약에 祖宗. 말하자면 가섭존자로부터 당신에게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그 어떤 전통. 그것도 선불교적 전통의 입장에서 稱揚大事(칭양대사)인댄, 큰 일. 정말 우리가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 우리가 쉽게 그렇게 표현하더라도 그 일은 어떤 일보다 큰일입니다. 그래서 大 事 그러는 겁니다. “큰일이다.” 生死大事(생사대사)ㆍ一大事因緣(일대사인연). 우리는 그런 표현을 잘 씁니다. 그러니까 이 大事라는 말은 보다 다른 차원의 인생입니다. 大事라는 말은 보통 평범한 그런 삶이 아니고ㆍ누구나 다 사는 그런 삶이 아니고, 보다 다른 차원ㆍ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大事라고 한다. 그것을 만약에 이야기한다면,
直是開口不得(직시개구부득)이라.
말하자면 이것은 곧 바로 입을 열 수가 없다. 開口不得이야. 입을 열 꺼리가 못 돼. 정말 제대로 법을, 우리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말을 초월한 그야말로 言語道斷(언어도단)하고 心行處滅(심행처멸)한 그 도리를 우리가 제대로 드날리려면 이것은 입을 벌려서 설명할 것이 못된다. 그리고
無儞措足處(무이조족처)니라.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어. 나도 입을 벌릴 수가 없는 자리고ㆍ또 듣는 여러분도 발붙일 곳이 없는 자리다. 그런데
山僧此日(산승차일)에, 산승이 오늘 날
以常侍堅請(이상시견청)하니, 왕상시가 굳이 나를 이렇게 청 해. 그러니
那隱綱宗(나은강종)이리오. 어찌 그 宗旨(종지)를 = 綱宗. 宗旨라는 뜻입니다.
전통 그 어떤 법의 핵심. 大機大用(대기대용). 그 綱宗을 어찌 숨겨만 두고 있겠는가? 되든ㆍ안 되든ㆍ망신을 하든ㆍ깨닫는 사람이 있든ㆍ이익이 있든ㆍ없든 간에 한 번 이것은 드날리고 볼 일이다. 그렇지요. 아니 도지사쯤 되는 사람이 직원들 다 데리고 오고 그~~ 아주 대 강당에서, 아니면 어마어마한 어떤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 모아놓고 법석을 마련했다면, 그 어찌 “할” 한 번 하고 내려 올 수도 없고ㆍ무슨 주장자 한 번 굴리고 내려 올 수도 없는 처지다.
還有作家戰將(환유작가전장)하야 直下에 展陣開旗麽(직하전진개기마)아? 그랬습니다. 여기는 作家戰將. 作家라고 하는 말은, 말하자면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일가를 이룬 장군. 장군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그런 임제스님의 사회적 배경을 이야기할 겨를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리는데요.
당시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임제스님 당시에 그래서 임제스님도 많이 고초를 당하고 그랬었는데, 그 어떤 사회적 분위기에 맞추어서 언어를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이것 아주 중요한 겁니다. 우리도 포교를 하면서 그 사회적인 어떤 분위기에 맞추어서 말을 쓸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 아주 큰 문제입니다. 강원에서 이렇게 글 새기면서 배우는 것 가지고, 밖에 나가서 이야기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외국 사람이 외국말 하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사회인들이 정말 귀에 쏙쏙 들어가게 사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그런 표현을 가지고 불교를 전해야 되는 겁니다. 이 보십시오. ‘여기에 깨달은 사람이 있거든 나와서 나하고 한 번 겨뤄보자.’ 이런 뜻인데, 作家戰將.
그야말로 일가를 이룬 장군. “내노라.” 하는 장군. 삼국지에 五虎將軍(오호장군)→ 유비나ㆍ장비나ㆍ관우나ㆍ상산 조자룡이나ㆍ황충이나, 임제스님 말은 이런 사람들 같은 일가를 이룬 장군을 뜻하는 겁니다. 그런 장군이 있거든, 최한도 법에 있어서, 불법에 있어서 그런 정도의 사람이 있거든 곧 바로,
直下에 나와서 우리 싸움 한 번 겨뤄보자.
展陣開旗라고 하는 말은, ‘진’ 을 펼치고ㆍ깃발을 열고, 이것 삼국지나 기타 다른 사극 같은 데서 보면 늘 그러잖아요. 군사가 척~~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누구 하나 척~ 싸울 사람이 나가면 그 군사들이 촥~~ 갈라지지요? 이것이 뭐지요? ‘진’ 을 펼치고, 깃발이 촥~~ 따라 나가면서 그래서 두 사람이 대표로 나가서 싸우지 않습니까? 영화나 그런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근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對衆證據看(대중증거간)하라.
여러 대중들은 한 번 증거 해서 보라. 딱 옛날 전투에서 보여주던 그 모습 그대로를 지금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제스님은 아주 대단한 말하자면 언변가 입니다. 그냥 우리가 절에서 쓰는 식으로만 이야기하면 이것은 안 통하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속인들 앞에서, 그리고 또 이 사람은 ‘왕상시’ 라고 하는 그 당시 소위 도지사쯤 되면, 말하자면 칼로 나라를 세우고ㆍ칼로 나라를 뺏고 하는 시대는 전부 장군입니다. 도지사고 뭐고 거의 장군 들이 다 그런 일을 하거든요. 그런 사람에게 너무 아주 가슴에 척 와 닿는 그런 효현입니다 이것이. 그냥 “누가 법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서 나하고 한 번 겨루고, 대중들은 한번 살펴봐라.” 이런 것이 아니지요. 그 다음에 佛法의 大意라.
“대중들은 한번 살펴보라.” 해놓고 이제... 그러니까 그 말 딱 하니까 거기도 스님들도 많이 모였을 것이고, 내노라. 하는 수행자ㆍ선객도 많을 것 아닙니까?
1-2 佛法의 大意(불법대의)
僧問(승문)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師便 喝(사변 할)한대 僧 禮拜(승 예배)어늘
師云(사운) 這箇師僧(자개사승)이 却堪持論(각감지론)이로다
僧問(승문), 보십시오. 어떤 스님이 용기백배해서 나왔어요. 나와서 하는 말이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그랬습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냐? 이것이 우리 만고의 화두이고ㆍ만고의 숙제지요. 佛法大意. 진짜 불법의 참 큰 뜻이 무엇이냐? 佛法의 大意 무엇입니까? 이것을 물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師便 喝(사변 할)한대, “할” 하고, 이것이 첫 할입니다. “德山棒(덕산방) 臨濟喝(임제할)” 그러지요? 우리가 많이 들어왔지요? 덕산스님은 몽둥일 가지고, 榜(방)을, 잘 후려 치고, 임제스님은 喝을 잘했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ㆍ자기가 깨달은 깊은 의미를 표현한 것이지요. 표현한 것인데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법 대의를 물었는데 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가 “불교가 무엇입니까? 大意만 좀 설명 해주십시오.” 라고 하면, 또 묻기도 “설명 해주십시오.” 이렇게 묻고, 그냥 “佛法大意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도 설명하려고 드는 겁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인도에서 어쩌고저쩌고 해서 무엇을 깨달아가지고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쭉~~ 그저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 불법 아니다 이 겁니다.
그것 모를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 불법 말고... 여기는 소위 선불교의 분위기는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임제스님도 설명하지 않고 할을 한 겁니다.
사실 이 “할” 속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진짜 생명이 있는 불법은, 불법 대의를 묻는 일이나 할 을 하는 이 사실에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할 소리를 듣고 예배를 했습니다. 알아들었다 이것이지요. 師云(사운) 這箇師僧(자개사승)이 却堪持論(각감지론)이로다.
‘아~ 이 스님이 나하고 한 번 이야기 해볼 만한 사람이구나.’ 이런 뜻입니
다. ‘아~ 이 스님이 나하고 이야기해볼 만한 사람이구나.’ 그 다음에
三度發問(삼도발문) 三度被打(삼도피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1-3 三度發問 三度被打(삼도발문 삼도피타)
問 師唱誰家曲(문, 사창수가곡)이며 宗風嗣阿誰(종풍사옥수)오
師云 我在黃檗處(사운 아재황벽처)하야
三度發問(삼도발문)하야 三度被打(삼도피타)니라
僧擬議(승의의)한대 師便 喝(사변 할)하고 隨後打云(수후타운)
不可向虛空裏(불가향허공이)하야 釘橛去也(정궐거야)니라
그러니까 그 스님이 임제스님으로부터 일단 인정을 받았어요.
할 한 번 하고는 일단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소문도 못 들었는데 어디서 뜬금없이 도지사의 대접을 받아가면서 이렇게 많은 관료들과 사람들을 모아놓고 저렇게 법문을 하는데, 거창하게 법문을 하는데 도대체 출신이 뭐냐 말입니다. 어디서 공부했고ㆍ어떤 경력이 있고ㆍ어떤 양력이 있느냐? 그런 뜻입니다. 그래 묻는 것도 그래요.
問(문), 묻기를
師唱誰家曲(사창수가곡)이며, 스님은 누구집의 노래를, 곡조를 부릅니까? 이렇게 물어요. 또 宗風은 嗣阿誰(종풍사옥수)오? 종풍은 누구를 이었습니까? 당신 스승은 누구냐? 이 말입니다.
師云, 我在黃檗處(사운, 아재황벽처)하야, 내가 황벽의 처소에 있어서,
스승이 황벽스님입니다. 황벽 처소에 있어서
三度發問(삼도발문)하야 三度被打(삼도피타)니라.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이것이 임제록의 大旨(대지). 우리가 경전의 大旨를 이야기하지요?
법화경 같으면 會三乘歸一乘(회삼승귀일승). 이렇게 한다든지,
서장 같으면 斥邪解現正見(척사해현정견). 한다든지,
금강경 같으면 破二執現三空(파이집현삼공). 이런 식으로 하듯이 임제록을 만약에 그렇게 표현한다면 三度發問 三度被打다.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이 뜻입니다. 그 이야기는 행록에 가서 다시 하겠습니다.
僧擬議(승의의)한대, 그 말을 듣고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린가? 내력을 모르니까 승이 머뭇거렸어요. 그러니까 師便 喝(사변 할)하고, 임제스님이 다시 할을 했어요. 그리고는 隨後打云(수후타운). 곧 바로 또 몽둥이로 후려쳤어
요. 주장자로 한 번 후려쳤어요. 그러면서 말하기를
不可向虛空裏(불가향허공이)하야, 허공 속을 향해서
釘橛去也(정궐거야)니라. 말뚝 박지 말라. 허공에다 말뚝 박아야 그것이 말뚝 박히나? 네는 뭐 아는 것도 없이ㆍ근거도 없이ㆍ깨달음도 없이ㆍ아무 밑바탕도 없이 그렇게 할이나 하고 나와서 남의 이력이나 묻고 그러느냐? 이런 표현입니다. 不可向虛空裏. 허공에다 말뚝 박지 말라. 이것 뭘 알려고 하느냐? 하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안목이 있어야 돼요. 자기 안목이 하나의 근거입니다. 말뚝은 땅에다 박아야지, 최소한도 땅과 같은 그런 자기의 깨달음ㆍ자기의 안목. 이것이 있어야 뭔가 선지식하고 이야기하지, 그것도 없이 이렇게 나와서 하느냐? 그런 내용입니다.
1-4 雜草(잡초)가 茂盛(무성)하다.
有座主問(유좌주문)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가
豈不是明佛性(기불시명불성)가
師云 荒草不曾鋤(사운 황초부증서)로다
主云 佛豈賺人也(주운 불기잠인야)리오
師云 佛在什麽處(사운 불재삼마처)오
主無語(주무어)어늘 師云 對常侍前(사운 대상시전)하야
擬瞞老僧(의만노승)이로다
速退速退(속퇴속퇴)하라 妨他別人請問(방타별인청문)이니라
有座主問(유좌주문), 座主라고 하는 것은 강사나ㆍ교수를 당시에는 좌주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강사가 있어서 묻기를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가 豈不是明佛性(기불시명불성)가? 그랬습니다. 三乘十二分敎. 저 8만 대장경이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닙니까?
三乘十二分敎는 전부 불성 밝힌 이야기다 말입니다. 그런데 삼승십이분교 제쳐놓고 무슨 선가의 선사라고 해가지고 이렇게 천지를 휩쓰니 한 마디로 꼴사납다 이 것이지요. 마음에 안 든다 이 겁니다. 이미 8만 대장경에 불성을 밝힌 내용 다 있는데, 무슨 禪旨(선지)라고 해가지고 특별히 敎外別傳(교외별전)으로 그렇게 떠드느냐? 이런 내용입니다. 이런 것들도 아주 임제록 편집의 묘를 살린 것이지요.
師云, 荒草를 不曾鋤(사운 황초부증서)로다. 거친 풀을 일찍이 호미질을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이 참 잡초가 너무 많다. 머릿속에 잡초가 너무 많다. 8만 대장경을 공부한 사람이니까 8만 대장경이라고 하는 지식의 잡초가 꽉~ 차있다. 임제스님 보기에는 그거거든요. 그거 가지고는 진짜 불법을 알기는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主云 佛豈賺人也(주운 불기잠인야)리오? 좌주가 말하기를,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으리요? 부처님이 전부 불성의 도리를 밝혔는데, 아니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전이면 다인데, 뭘 따로 선사가 나와 가지고 그렇게 할을 하고ㆍ주장자를 굴리느냐 이 것이지
요. 佛豈賺人也리오? 이렇게 하니까 임제스님은 아주 딱 질문꺼리. 정말 중요한, 그런 질문을 통해서 법을 거량할 내용을 하나 건진 겁니다.
질문 하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일단 잘 살펴야 됩니다. 그것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상대하고 이야기할 때도 이야기를 쭉~ 듣다가 이야기과정에서, 내가 정말 자신 있고, 그 대화의 어떤 핵심이 될 만한 그런 것을 딱 거기서 꼬집어가지고, 딱 지적해가지고서 그것으로써 상대를 깨우치는 방법. 그것 아주 중요합니다. 대화의 방법이고ㆍ포교의 한 방법이기도 한데요.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으리요?” 하니까 師云, 임제스님이 말하기를, 그 부처 佛자를 딱 건진 겁니다. “부처님” 하니까, 아! 佛在什麽處(불재삼마처)오? 부처님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말한 그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랬어요.
“부처님은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강사가 어떤 교학적인 상식으로 그냥, ‘아, 부처님이 8만 대장경에서 다 이야기했다.’ 그런데 임제스님은 ‘경전에 있는 그런 부처님이야기 할 겨를이 없다.’ 이 겁니다. ‘그런 이야기하려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이 겁니다. 정말 피가 튀고 맥박이 뛰는 살아있는 부처님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해야지ㆍ우리가 거기에 눈을 떠야지, 뭘 경전에 있는 그런 소리 지금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 佛在什麽處오? 그랬어요. 부처가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그런 이치를 모르지요. 主無語(주무어)어늘, 座主, 강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師云, 임제스님이 말하기를, 對常侍前(대상시전)하야, 왕상시 앞에서 그 당시, 지금은 대통령도 별것 아니지만 옛날에는 정말...
천자가 있고 각 지역의 왕이 있고, 벼슬하는 사람, 관료들의 말하자면 그 위세라고 할까? 그 권위라고 할까? 이것이 참 대단 했거든요. 여기서도 그렇습니
다. 常侍前. 상시를 대하는 앞에서, 도시사 쯤 되는 사람 앞에서
擬瞞老僧(의만노승)이로다. 노승을 속이려고 하는구나. 둘이 앉았을 때야 사기를 치든지ㆍ속이든지ㆍ거짓말을 하든지 그렇다 손치고, 이 많은 대중 앞에서, 그리고 저 왕상시 앞에서, 왕을 모시던 그런 벼슬 높은 사람 앞에서 노승을 그렇게 속이려고 하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람을 속인 바가 없다.” 라고 하니까, 그래 좋다.
“부처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니까 아무 대답을 못 했거든요.
대답을 못하니까, 임제스님은 살아있는 부처인줄로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 보니까 송장이다 이것이지요. 그 뜻입니다. 살아있는 부처가 나와서 지금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이것 송장이 나왔구나. 그럼 송장이라면 나를 속인 것이 아니냐? 速退速退(속퇴속퇴)하라. 빨리 물러가라.
妨他別人請問(방타별인청문)이니라. 다시 다른 사람이 물어야할 것이니까, 다른 사람이 묻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 법문. 이 내용, 임제스님의 첫 법문ㆍ첫 상당 법문의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이것입니다.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여기에서 불교내용이 일반불교와 선불교의 정말 다른 점이 어떤 것인가? 요 앞에까지는 너무 전통적인 상당 법문 형식을 취했고, 여기에 와서 상당 법문을 통해서 일반불교하고ㆍ선불교하고 다른 점. 그리고 불교에서 正見ㆍ정견. 바른 견해ㆍ바른 견해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인가? 이런 문제도 여기서 이야기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復云 此日法筵(부운 차일법연)은 爲一大事故(위일대사고)호니
更有問話者麽(갱유문화자마)아 速致問來(속치문래)하라
儞纔開口(이자개구)하면 早勿交涉也(조물교섭야)니라
何以如此(하이여차)오 不見(불견)가 釋尊云(석존운)
法離文字(법리문자)며 不屬因不在緣故(불속인부재연고)라하니라
爲儞信不及(위이신불급)일새 所以今日葛藤(소이금일갈등)이라
恐滯常侍與諸官員(공체상시여제관원)하야 昧他佛性(매타불성)이니
不如且退(불여차퇴)니라
喝一喝云(할일할운) 少信根人(소신근인)은
終無了日(종무료일)이로다. 久立珍重(구립진중)하라
復云(부운), 임제스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此日法筵(차일법연)은, 오늘 이 법의 자리는 爲一大事故(위일대사고)호니,
一大事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큰일을 위한 것이다.
更有問話者麽(갱유문화자마)아? 다시 나에게 물을 사람이 있느냐?
速致問來(속치문래)하라. 물을 사람이 있으면 빨리 물어라.
儞纔開口(이자개구)하면, 그대가, 만약에 누구든지 나와서 막 입을 열려고 하면 早勿交涉也(조물교섭야)니라, 벌써 交涉할 수가 없다.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고요. 우리가 그런 말 잘 하지요? 開口卽錯(개구즉착)이라.
그 다음에 한 술 더 떠서 미개구즉착이라. 입 열기 전에 이미 어긋났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요. 여기 막 입을 열면 早勿交涉이라. 벌써 交涉할 것이 없다.
何以如此(하이여차)오? 왜 그러냐? 왜 입대서 설명하면 안 되느냐?
부처님은 전부 입을 열어가지고 49년간 설법했는데 임제스님은 “입을 열면 안 된다.” 그랬습니다. 不見(불견)가? 그러면서 또 역시 부처님말씀을 인용 합니다. 이것이 선불교의 좋은 점이기도 하고ㆍ자가당착이기도 하고ㆍ또 선불교의 허점이기도 하고 그래요. 예를 들어서 선불교는, 禪은 不立文字(불립문자)ㆍ直指人心(직지인심). 이 말을 잘 쓰거든요. 경전은 필요없다 = 不立文字.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三處傳心(삼처전심)이야기를 합니다. 최초의 선의 근원은 三處傳心에 있다.
三處傳心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拈華示衆(염화시중)이지요.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니까 가섭존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 나머지 대중들은 아무도 몰랐다. 이것이 선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경전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경전에 있는 이야기라고요.
근래에 간화선인가요? 우리 조계종에서 만들어가지고 아주 무한정 돌렸지요? 한두 권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요. ‘간화선’ 이라고 하는 책을 돌렸는데 그 안에 소상하게 이야기해놨습니다.
大梵天王問佛決疑經(대범천왕문불결의경). 그 경전에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하면서 역시 不立文字.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이 어떻게 된 겁니까? 경전에 근거를 해서 三處傳心을 이야기를 하고, “삼처전심은 결국은 문자를 떠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釋尊云(석존운), 석존이 말하기를, 이것이 능가경에도 나오고ㆍ유마경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法離文字(법리문자)며, 법은 문자를 떠나 있다. 그랬어요. 진짜 법은 “문자를 떠나 있다.” 그리고 不屬因不在緣故(불속인부재연고)라하니라.
因에도 속하지 아니 하고 緣에도 속하지 아니했다. 因緣에 속해있지 않다.
우리 일반 불교에서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뭐냐? “연기다.” 그러지요.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 말하는 인연입니다.
“인연의 이치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럽니다.
지금 이 시대에 선사로서 법문을 가장 괜찮게 하는 그 어떤 스님도 입만 열면 연기이야기입니다. 입만 열면 緣起이야기하고ㆍ空이야기해요.
“그것이 불교다.” 라고... 아주 좋은 내용이지요. 정말 그렇게 모르는 상당 법문할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선사라도 손들고 자수해야 됩니다. “손들고 자수해야 된다.” 는 소리는 모르는 상당법문만, 저도 모르고ㆍ남도 모르는 상당 법문만할 것이 아니고, 정말 자기가 이해하는 불교를 이야기하는 그것이 양심적이고 솔직한 것이지요. 그 스님은 아주 존경받고 법문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緣起이야기입니다ㆍ空이야기고요. 아주 너무 솔직하지요. 선불교는 아닙니다. 선사 이야기는 아니에요.
선불교는 아닙니다. 여기보십시오. 법은 不屬因不在緣이라그랬어요.
因緣에 속해있지 않다. 그랬어요. 그런데 오늘날 대표선사가 입만 열면 인연이야기이고ㆍ연기이야기이고ㆍ공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솔직하고 참 고마운 입장인데요. 그러나 “선사의 법문은 아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도 알 것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저는 또 너무 고마운 겁니다. 정말 양심적으로 이야기하니까요ㆍ불교를 양심적으로 이야기하니까요ㆍ자기가 이해되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해 안 되는 주장자나 구르고ㆍ할이나 하고 하는 서로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으론 이야기 못 하겠다 이 겁니다. 그 선사는...
자기 아는 만치만 하니까ㆍ자기가 납득이 되는 불교를 이야기하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 보십시오. 선불교가 아니더라도 나는 인연의 이치를 아니까 인연 이야기를 하겠다. 연기의 이야기를 하겠다. 말입니다. 不屬因不在緣그랬어요.
因에도 속하지 않고 緣에도 있지 않다. 법이란 그런 것이다 이 겁니다.
爲儞信不及(위이신불급)일새. 인연에 속하지 아니한 그 존재가 있어요.
인연에 관계없는 존재가 있다고요. 여기 진짜 법. 임제록에서 그것을 다 밝힐 내용인데요. 이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뜻이 그 겁니다.
일반불교는 연기요ㆍ인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최소한도 다른 대승불교도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선불교. 그 중에서도 특히 임제록에 있어서는 이 인연하고 관계없는 그 무엇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요? 爲儞信不及일새. 그대가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연에 관계없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그대는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존의 것입니다ㆍ이미 있는 것입니다ㆍ이미 있는 것. 수행하고 관계없습니다. 수행하고 관계없고ㆍ고행하고도 전혀 관계없는 것. 고행을 한다ㆍ수행을 한다 하는 것은 인연에 해당 되는 것입니다. 무슨 十信ㆍ十住ㆍ十行ㆍ十廻向 이렇게 점차적으로 닦아 올라가는 것.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이것은 전부 인연의 도리입니다. 닦아 올라가는 것이니까 원인이 있고 또 보조적인 “연” 이 있고요. 또 거기에 따른 결과가 있고요. 그런데 선불교에서 이해시키고자 하는 그 자리는 인연하고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못 믿어요
爲儞信不及. 이미 있는 겁니다. 이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닦는 것 하고는 관계없습니다.
所以로 今日葛藤(소이금일갈등)이니라. 그래서 오늘 날 이렇게 법을 설한다. 葛藤한다 = 법문 설한다는 것이 결국 갈등이지 별 것 있나요?
이것이 葛藤입니다. 이리 얽히고ㆍ저리 얽히고ㆍ입만 뗐다하면 모순 많고, 입만 뗐다하면 모순이니까요. 저도 모순을 한 짐 짊어지고 하는 것이지요.
今日葛藤이니라. 恐滯常侍與諸官員(공체상시여제관원)하야,
常侍와 그리고 여러 제관들을, 여러 관료들을 꽉 막히게 한다.
滯 = 꽉 막히게 한다. 그 마음이 꽉 막히게 해서 昧他佛性(매타불성)이니,
그 사람들에게 佛性.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어둡게 할까 봐 오히려 두렵다. 불성이 활발발하게 작용을 잘 하고 있는데, 이미 불성이 정말 대명천지 밝은 날에 大機大用(대기대용)으로 작용을 잘 하고 있는데 괜히 설명해가지고ㆍ괜히 건드려가지고 그 불성을, 그 밝은 불성을 어둡게 만들까 두렵다. 그 말입니다.
不如且退(불여차퇴)니라. 차라리 그만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리고
喝一喝云(할일할운), 일할을 할에 이르되
少信根人(소신근인)은 終無了日(종무료일)이로다.
믿음이 적은 사람,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마침내 깨달을 날이 없다ㆍ알 때가 없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마침내 알 때가 없다.
久立珍重(구립진중)하라. 오래 섰으니 쉬어라. 이 뜻입니다. 이것은, 중국에는 지금도 가보면 법당에 전부 신발 신고 들어가서 무릎을 長跪(장궤)하고 예불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부터요. 우리처럼 바닥에 앉는다든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전부 서서, 법문을 전부 서서 들어요. 그리고 법문이 짧아요.
또 길게 할 것도 없고요. 강설이나 길게 하지 진짜 법문은 길게 할 것이 없고요. 그러니까 짤막ㆍ짤막, 이것도 상당히 긴 편이지요. 이 정도만 해도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좀 제대로 하고 넘어가야 되겠는데요.
첫댓글 _()()()_
少信根人은 終無了日이로다...믿음이 적은 사람은 마침내 깨달을 날이 없다 ._()()()_.
고맙습니다. "
허공에다 말뚝 박지 마라" 깊이 간직하고 생각 하겠습니다....()()()...
法離文字(법리문자)며, 不屬因不在緣故(불속인부재연고)라하니라...진짜 법은 문자를 떠나 있으며, 因에도 속하지 아니 하고 緣에도 속하여 있지 않다...고맙습니다._()()()_
_()()()_
佛在什麽處오?...고맙습니다_()()()_
_()()()_
儞纔開口하면 早勿交涉也니라 ..입을 열면 벌써 다 틀린다...釋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감사합니다. _()_
荒草를 不曾鋤( 황초 부증서)로다. 거친 풀을 일찍이 호미질을 하지 않았다...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매번 정말로 고맙습니다. _()()()_
法離文字며 不屬因不在緣故라하니라...고맙습니다. _()()()_
佛在什魔處오...고맙습니다._()()()_
_()()()_
_()()()_ "자기 안목이 있어야 " 고맙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_()()()_
久立珍重 ...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臨濟錄 特講 第1講 - 2 上堂. 曲順人情方登此座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감사합니다()
_()_
_()()()_
_()()()_
_()()()_
_()()()_
_()()()_
상당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