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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철
김은철
2015.09.14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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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어제와 오늘의 대화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
성서 고대 전설적인 나라들. 메디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이다.
아시리아 점토판으로 세상의 그 정체를 드러낸 메디아.
이란 서부 지역의 아리아인들로서 말을 타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이들 손에 의해 거대한 전설적 나라 아시리아는 힘없이 무너진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메디아 마지막 왕은 아스티아게스(아하수에로)였다.
창세기 10장 21절에 있는 셈의 다섯 아들 중 전설의 거인 종족 리디아를 세운 룻이 있으며 이 룻의 후손에서 헤라클레스 가문이 등장한다.
이 헤라클레스 가문의 나라 리디아의 공주 그리고 아시리아를 무너뜨린 메대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결혼하였으며 둘 사이에 다리우스가 태어 난다.(단9:1)
다리우스를 낳은 후 아스티아게스 왕은 둘째 만다네 공주를 낳았으며 이 공주의 후손 중에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징조를 느끼고 기뻐하기는 커녕 엘람이라는 변방으로 그녀를 시집 보내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곳에서 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자가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퀴리우스이다.(고레스) 아스티아게스 왕은 퀴리우스를 죽이고자 애를 써보았지만 그 일을 맡은 신하 하르파고스의 실수로 성공치 못한다.
퀴리우스를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벌로 아스티아게스 왕은 만찬회를 열어 하르파고스 신하를 초대하였으며 만찬회 식탁 위에 그의 아들 손과 머리를 얹어 놓고 먹으라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하르파고스는 메디아 왕에게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으며 여러 군대 장군들과 함께 퀴리우스에게 전향을 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이로 인해 졸지에 퀴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만들어 갈만한 군대를 얻게 되어진다.
이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나라 메디아를 지배하게 된다.
그런 후 외할아버지의 아들 즉, 자신의 외삼촌 다리우스에게 메디아 나라 통치권한을 위임한 후 그와 힘을 합쳐 바빌로니아를 무너 뜨린다.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후 그 성의 지배권한을 외삼촌 다리우스에게 맡겼으며 포로로 묶여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유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을 짓도록 허용해 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고레스 칙령이다.(스 1:1~4)
퀴리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살해의 위협을 받아왔지만 우여곡절 끝에 생존하였으며 세력을 얻어 대국의 발판을 삼아 나아갔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유를 얻었으며 성전을 재건하게 되어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섭리라 생각한다.
퀴리우스는 그 길을 이어 서쪽에 있는 사대(사르디스)가 있는 리디아 나라 전설의 왕 크로이소스를 무너 뜨리러 발길을 돌린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주인이 되신다.
흥망성쇠와 생사여부는 그 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살리시기 위해 한 시대의 인물을 선택하여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그를 통해 세상 패권을 쥐게 하여 그 속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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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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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철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미술관에는 구에르치노(Guercino)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아브라함’이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 중앙에 서 있는 아브라함은 왼손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모습을 하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그들이 가야 할 광야를 지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쫓겨난 하갈은 어린 이스마엘을 데리고 죽음의 광야로 들어간다. 한 낮의 살인적인 태양과 더위, 밤이면 찾아오는 격렬한 추위 그리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주린 배를 움켜 잡는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하갈의 맘은 어떠했을까? 하갈은 어린 아들이 죽을까봐 서럽듯이 통곡을 한다. 그때 하나님은 그 울음 소리를 듣고 광야 한복판으로 찾아오신다. 사실 쫓겨나는 어린 아이 이스마엘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어머니와 홀로 사막 같은 광야로 쫒겨나는 그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이는 네 여호와께서 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의 고통을 들으셨냐면 이스마엘의 고통을 들으셨다. 우리는 사실 다른 이들 너의 고통에 관심이 별로 없다. 관심이 있다면 나의 고통이다. 인터넷은 유용하지만 맘에 안드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댓글이다. 말이 사람이고 사람이 글이기에 평상시는 함부로 말을 못하다가 익명성이 있다는것 때문에 빈정거리고 욕하고 비아냥거리고 타인을 모욕한다. 왜 그럴까? 상처가 있기에 그렇다. 상처가 너무 많다보니 남에게 상처를 주어야 상쇄가 되어지는것이다. 상처 많은 사람은 너무 힘들다. 이유는 그 상처를 남에게 주려 하기 때문이다. 상처가 참 많다.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다. 모두가 다 상처가 있다. 댓글 쓰는 사람만 상처가 있는것이 아니다. 똑같이 상처 받아도 어떤 사람은 삐딱하게 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건강하고 아름답다. 차이가 뭘까?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고통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흔치는 않지만 남의 고통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의 고통을 생각하면 사람은 아름다워진다. 똑같이 고통을 생각하는것인데 내 고통만 생각하면 사람은 나뻐진다. 그러나 남의 고통을 생각하면 사람은 참 이뻐진다. 내 고통 생각하면 사람이 사나워지고 남의 고통을 생각할 줄 알면 사람이 아름다워진다.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이유는 나의 고통을 들으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고통을 아시고 기억하시고 생각하신다. 광야로 쫓겨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죽게 된 어린 아이 이스마엘의 고통을 들으셨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남의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광야에 있는 이스마엘을 바라본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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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 Hu Yun.
부드럽게 내리비치는 한줄기 하얀 햇살이 반가운 4월의 아침.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상큼한 바람은 봄을 알리고 있고 마냥 길가 꽃들은 살풋 인사를 건네는듯하다. 한잔 향그러운 모닝 커피를 마시며 이 아침의 생기와 기운을 느껴본다. 쉽사리 지는 벚꽃처럼 이 봄날도 얼마 되지 않음을 잘알기에 모든 일을 뒤로하고 조용히 차분한 풍경 속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겨 본다. 흔한 길 가 이름모를 풀. 저 풀로 살아간다는건 어쩌면 뿌리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채 여기저기 헤매며 사는 우리네 삶과는 사뭇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얼마나 걸었을까? 이곳 저곳 경치 좋은 곳에 시선을 멈추어가며 잊고 지냈던 마음 속 소리에 집중해본다. 더러워진 물도 고요히 있으면 맑아지듯 그렇게 고요함 가운데 혼탁하고 복잡한 맘이 가라 앉기를 소망해 보면서 말이다. 항상 이런 여유를 갖고 싶다는 생각에 골몰해 질 때쯤 그럴 수 없는 지금의 삶이 떠올라 못내 서려있던 서글픔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 창밖은 어둡다. 어두운 저 창 풍경도 수없이 낮과 밤을 반복해 온 것처럼 우리네 인생 역시 그러함을 생각해 본다. 가끔은 혼란한 마음일랑 접어 두고 멀리 보이는 멀고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고픈 때가 있다. 삶의 한 가운데서 그저 저어만가던 노는 잠시 내려 놓고 잊었던 마음을 찾아 떠나고픈 그런 날이 있다. 수많은 그리움들을 잠재우고 말대신 향기를 바람에 실려 보내는 이 봄을 마주할 때면 더더욱 그러하다.
시간은 늘 어김이 없다. 기다리거나 더디 가는 법 없이 그저 말없이 제 할 일만 다 해 나간다. 그래서일까? 계절이 바뀌고 하루가 마감되는 시점이 되면 아쉬운 마음 한켠에는 간절한 소망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한 송이로 피어나 머물렀던 꽃의 자리 처럼 늘 떠난 자리에 향기를 남겨 두는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마다 모든 이들은 각각 자기 앞에 걸어가야만 하는 길들이 놓여 있다. 가다가다보면 다른 이들과 만나 그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길목 어디서쯤 누구와 마주칠지 몰라 걸음 걸음에 신중을 기해본다. 봄 바람은 생명의 기운을 옮기는 바람인가보다. 어느새 눈에 익숙한 길은 새단장을 하였고 잊고지낸 지난 일들을 떠올리게만 한다. 아직은 바람 부는 땅에 생명을 움트게하는 풀씨들만큼 충실하게 살지 못한 일들이 봄 길을 걷는 날 사뭇 부끄럽게만 한다. 날이 따스해지면 지난 밤 기억은 옅어만가고 어느새 새로이 밤은 곧 찾아온다. 어두운 밤 필요한것은 홀로 누운 자리 곁 등불을 끌수 있는 용기만이 아닌 밝아올 내일을 직시하는 지혜라 생각한다. 그렇게 이 봄을 보낼 수 있기만을 꽃 길을 걸으며 바래본다.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 - 파스칼 - 죽음이란 무엇일까? 모든 인간은 죽음을 겪게 되지만 죽음에 대해 아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죽음을 정확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일것이다. 인간 아담도 하나님께 반드시 죽을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무엇이 죽음인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추정컨대 아담은 우리보다도 더 죽음을 모르던 자였을것이다. 이유는 인류 최초의 인간이었기에 자신보다 먼저 죽은 자들을 본 바가 없었으며 자신 역시 죽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관념은 사실 지금까지 살면서 남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는 의학적 사망 상태를 죽음이라 말할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의미는 다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죽음이라는 말을 할때의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등지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가 죽음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류는 죽음을 갖고 있다. 어떤 사물이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지면 결국 어둠 속에 갇히듯 죽음 속에 인간은 아담 이후에 예속 되어진 것이다. 이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는 죄라는것이 있다. 왜 죄를 짓는것이 빛으로부터 어두움의 결과를 가져올까? 성경은 죄를 지을때 대가를 지불한다는것을 늘 강조한다.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 지불할 대가, 형벌의 경중이 다르다. 신호 위반한것과 뺑소니로 사람을 죽인 일의 형벌이 다른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누구에게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 형벌의 경중이 결정 되어지는 방식이다. 남의 의자인줄 알면서도 몰래 앉다 들켰다면 도덕적 실례이기는하나 그것이 중죄에 해당되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 황제의 왕좌에 몰래 앉다 들켰다면 그것은 사형감에 해당되는 죄인것이다. 참 희한한것은 황제를 살해할 음모를 계획하다 들켜도 사형이고 황제 얼굴에 침을 뱉어도 사형이며 황제 왕좌에 몰래 앉다 들켜도 사형인것이다. 죄의 내용은 다르나 결과는 동일하다. 이유는 죄를 지은 대상이 황제이기에 그렇다. 어떠한 죄를 범했느냐가 형벌의 경중을 결정 짓는것 같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범한 죄이냐에 따라 동일한 결과를 가져 오기도 하는것이다. 우리는 죄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짓는것이다. 그것이 작은 죄이든 큰 죄이든 하나님께 짓는 죄이다. 하나님에게 작은 죄 큰 죄라는것은 없다. 그저 죄는 죄일 뿐이며 그 결과는 죽음으로 동일한것이다. 고난주간, 주님은 그 죄의 정당한 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셨다.
봄에 필 꽃눈이 터지지 않아 나무가 아파하고 방황하듯 성숙을 위해 치루어야 될 저마다의 고통이 있다. 곧은 길 따라 온듯하여 과감히 등 뒤를 돌아 보면 가끔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조차 인식 되어지지 않는 때가 있다. 흐르는 강줄기의 물은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가고 초라해 보이는 불빛도 어둠 속에서 꿋꿋이 자신을 밝혀 나간다. 그렇게 살아 있는 모습들이 하나,둘씩 어우러져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 간다. 찬 바람은 저 석양 너머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며 주의 사랑은 더더욱 깊어져만 간다.
밤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으려니 뭔가를 말하려는듯한 별 빛을 보게 된다. 별이 가리키는 곳에서 홀로 피어 조용히 별처럼 지셨던 그리스도. 오가는 계절의 여울목에 서 있는 내 가슴에 그 낙화 한송이 한송이가 쌓여간다. 때론 내 속에서 나의 영혼을 울릴 정도의 외침은 나를 힘겹게만 한다. 내 안에 있는 뜨거운 꿈틀거림은 비록 나에게만 있는 특별한 감정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강가를 거닐고만 싶다. 아무 생각없이 유유히 흐르는 물결 속에서 잊고 지낸 뭔가를 다시 소유해 보고 싶어 그럴지도 모른다. 가야될 남은 길들 속에서 잠시나마 작은 휴식을 그리워 할때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윤이 이케아 나들이~
하나를 포기하면 그만큼의 여유는 생기지만 그만큼의 슬픔이 생기는 때가 있다. 처음 지녔던 열정이 식어가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할 때 더더욱 그러하다. 이룰 수 없어 보이는 현실이 내 나이와 더불어 하나둘씩 늘어난다는 마음 때문일까? 아직 그 끝 지점을 가본것도 아니고 본것도 아닌데 왜 가끔 끝 모서리 지점에 서 있는듯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비록 지나버린 시간, 비록 되돌릴 수 없는 시간, 비록 아쉬운 마음, 이젠 모두 잘 고이고이 접어 밤바다 저 어둠 저편 파도 속으로 띄어 보내고만 싶다. 살아 있는 모습들을 하나씩 내 속에 남기어 나의 맘에도 희망이라는 씨앗을 뿌리고만 싶다. 언제 부터인지 맘 속의 폭풍이 지나간 후 나무들이 쓰러지듯 사라진 내 안의 흔적들에 대한 아픔이 느껴진다. 갈 길이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면서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무언가가 그 무엇인지 진정 묻고만 싶다. 어찌되었든 삶인 까닭에 참고 인내하고 아무도 모른 방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견뎌내야만하는 외롬과 눈물이 있다. 이젠 그 모든걸 가만히 생각해 보며 다시 떠나야 될 여정을 위해 조용히 짐을 꾸려본다. 앞으로 더 걸어야 할 길, 더 살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쉴새 없이 분주하다 분주하다 느낄때 잊고 지냈던 여유는 갑작스레 성큼 다가온다. 소란스레 드나드는 해안가의 통선, 화물선, 예인선, 바지선들 처럼 요란한 바다 같다가도 어느 순간 어린 시절 봄날에 맞이했던 모래 사장 같은 적막감으로 다가오는 날도 있다. 아스팔트의 굳어버린 살갗처럼 내 맘도 굳어 버려 가는건 아닌지.. 여유를 여유로 받아 들일수 없는건 어른이 되어간다는 변명보다 또 다른 슬픔으로 내게 주워진다. 분주할 때 내 안에 없던 슬픔이 이 차디찬 겨울 갑작스레 주워진 여유 속에서 몸서리를 친다. 강물 냄새 기억하는 연어는 사는 일이 시간의 양이 아닌 제 걸음으로 돌아오는 과정인것을 알듯.. 등시린 지난 날들을 잊지 않았다면 지금 이정도의 거리를 아파할 이유는 나에겐 없다. 내겐 지금의 모든 과정이 그저 제 걸음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며 강물의 시작점을 가리키는 이정표인걸 알기에 더욱 그러하다.
생각해보면 지루하도록 긴 겨울이다. 긴 밤 그리고 짦은 낮의 반복 때문인지 주워진 하루는 너무나 쉽게 지나쳐만 간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지난 시간들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는것일까?” 막연한 상념과 관념에 깊이 빠져 들때쯤 다시 또 한 해는 이리도 성큼 찾아와 버렸다. 시린 가슴을 가진 자에게 겨울이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을 마른침 삼키듯 가슴에 묻고 지내야 되는 길고 긴 하얀 어두움의 긴 터널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산에 올라갔을 때 보았던 몇잎 안되는 꽃잎들이 다시 오늘 아침 내린 눈보라에 시들지는 않았을까 걱정이다.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하늘거리기 위해 긴 겨울을 아프게 숨쉬고 있는 많은 꽃들을 만날날도 멀지 않았다는 기대감을 눈을 맞으며 가져본다. 어딘가 멀리서 봄은 서둘러 찾아오고 있다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리는것만 같다. 지금은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다가오는 봄은 시린 가슴으로도 막을 수 없나보다. 나의 지금 가슴속 처럼 말이다.
"신은 어떤 이들에겐 충분히 크지 않다." 세계적 지성이라 불리어지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사람들에게 없는 이유는 신이 작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자신 보다 작은 존재라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탄이라는 계절이 다가왔다. 어떤이들에게 있어 가장 고요하고 숭고하며 거룩한 밤이 상대적으로 어떤이들에게는 가장 큰 유흥의 때로 인식 되어져만 가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바뀌어져만 가는 세상이다. 이 세상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기념일을 자신의 기념일로 만들어 가는 추세이다. 마치 두번째 자신의 생일처럼 즐기려는듯한 모습이다. 경건함 속에 설렘 가득했던 고요한 밤이 이제는 유희 가운데 흥분 가득한 화려한 밤으로 변질 되어져만 가고 있으며 많은 기업들은 이러한 심리를 이용해 수많은 마켓팅을 시도하고 있다. 괴테는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의 일종의 노예 계약을 이야기한다. 살아 있는 동안 악마는 파우스트를 주인으로 섬기겠지만 죽음 이후 세계에서는 악마인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라는 일종의 사후 노예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자신이 주인이지만 죽음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 되어지는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모두가 다 자신이 주인이라 여기는 세상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듯이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성탄절은 그저 자신을 위해 존재해주는 또 하나의 휴일일 뿐이다. 출애굽 역사를 주도했던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친구처럼 하였다고한다. 홍해를 건넌 후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부터 증거판을 받아 내려올 때 백성들 머무는 진중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싸우는 소리라 착각하지만 그 소리는 승전가도 패전한 자의 울부짖음도 아니었다.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고 춤추고 노래부르는 소리였다. 성탄과 연말이 어우러진 12월 많은 이들의 모습이 흡사 이와 같다라는 생각은 무슨 까닭일까? 모세는 송아지 형상을 불사르고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민족이 마시게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 “목이 곧은 백성, 더는 기적으로도 표적으로도 안됩니다. 주를 알리시옵소서.”라며 기도한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친히 가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내 얼굴이 너와 함께 가리라.”, 영어로는 "My face will go with you."이다. 긴 애굽의 터널을 지나 미지의 땅으로 나아가는 미숙한 그들에게 주신 간결하고 힘있고 결연한 약속이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저마다 주인이 되어 화려함으로 장식해가는 세상 풍경 속에서 다시 들을 수만 있기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간결한 언약의 음성, 바로 "My face will go with you."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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