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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시절, 고향집뒤 텃밭에서, 뒤편에 보이는 산이 지금의 부산구치소(학장)뒷산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학장리 이다.
국민학교 3학년때(1963년.1월 1일) 경상남도 부산시가 정부직할인 부산직할시로
그후 부산진구에서 북구가 분할(1978)되면서 북구 학장동으로
그 뒤엔 북구에서 사상구가 분할(1995)되면서 사상구 학장동이 되었다.
그 당시 학장리엔 지명도 많았는데 학성, 장문안(웃각단,아래각단), 개논, 붉은디이,
학장(鶴章)이란 명칭은 사람이 많이 사는 부락인 학성(鶴城), 장문안(章門安)의
내가 태어난 학장리 홍깨부락은 어머니의 고향이다.
우리가 다니던 학장국민학교가 생기게된 사연을 동네 어르신들한테 들었는데 그 내용인즉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1948)후 지방 순시 길에 경남도청이 있던 부산시를 방문하고 개교하게 되었다고 하며 학장리,주례리,엄궁리 아이들이 학장초등학교를 다녔다.
옛날 학장 사람들의 주업은 논농사였고 밭농사도 일부 하였다. 그리고 가축업 특히 닭을 많이 키워서 파는 집도 여러집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힘던 그런 일들을 농사일, 집안일에 또 한두명도 아닌 자식들
부지런한 동네 남정네들은 발로 밟아서 작동하는 새끼꼬는 기계로 새끼를 꼬아서 부산시내에
다디미 만드는 공장도 두어개 있었고 정미소 하는 집도 있었지 그런집은 제법 잘사는 집이었 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고생하며 사셨던 어르신들 세태의 변화속에 고생하셨던 만큼의 대접도 못 받고 살으시다
~ 사상 고문서에 따른 동별 유래 ~
ㅇ 학장동의 유래
학장동(鶴章洞)은 동쪽으로는 옛 주례 남천(南川)인 학장천 중간지점을 경계로 주례동과 경계하고 있으며 북쪽 감전동은 가야로를 가운데 두고 북서쪽으로 경계하고 있다. 서쪽의 엄궁동은 학장천 하류 중간을 경계로 하고 있다. 동남쪽 산지는 엄광산(嚴光山) 능선과 승학산(乘鶴山) 능선의 구덕령(九德嶺)을 가운데 두고 대신동, 당리동,엄궁동과 경계를 이루고 엄광산 동부쪽 능선을 가운데 두고 주례동과 경계하고 있다. 당시의 ‘학장 마을’은 현재의 ‘학장동 사무소’와 ‘학장천’을 부근으로 마을이 형성되어져 있었으며, 또 지금의 ‘구덕 터널’ 위 ‘부산 대남 병원’ 부근으로 ‘구덕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 엄광산(嚴光山) 기슭 을 따라 굽이굽이 나있는 비포장 길이 나있어 엄궁동(嚴弓洞)으로 연결되어져 있었고 길 주위를 따라 듬성듬성 집이 몇 채 씩 있었을 뿐이었었다.
당시... 지금의 ‘학장공단’ 부지는 전부가 논밭과 이었으며 당시...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부산市’에 편입되어 있었으면서도 ‘구덕산(九德山)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초가집에 호롱불을 켜고 살았었다.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1950년대 까지 학장동에는 일제 때 일본군이 개설한 좁은 도로가 있었으나 사상과 왕래하는 좁고 험한 자갈길이었고, 그 도로가 엄궁동을 통하여 사하로 이어졌지만 마을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는 통행 하지 않아서 외지에 볼일이 있을 때에는 사상이나 주례,하단까지 걸어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장동이 이러한 비 문화촌의 설움에서 벗어난 것은 사상공업지역이 조성되면서 부터이다.” 학장동에서 구덕령(九德嶺)으로 오르는 산길 좌측 산비탈에는 “구덕마을”이 있다. 지금의 ‘구덕 턴널’ 위에는 ‘노인복지병원’이 있고 ‘구덕 민속촌’으로 음식점이 있는 마을이다.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이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학성’과 ‘장문 마을’ 이 바다였을 때 이곳에 사람이 먼저 살았을 것으로 보아지며, 이 마을 여러 곳에 소규모의 조개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구덕리(九德里)의 농지는 계단식 자갈밭을 일구어 전답으로 개간하였다. 사상들판이 홍수의 피해로 물바다가 되어도 가뭄에 벼가 타 들어가도 이곳에는 수해와 가뭄이 없는 마을로 옛 부터 이 마을에는 ‘아홉 집’이 살았으며 아홉 호가 넘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곳에 서 생산되는 농작물이 9세대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되어있어 한번도 9호가 넘는 예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늘에서 복을 내려주시니 이 마을을 ”구덕마을“이라 했다는 속전이 있다.”
사상 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과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부민포(富民浦)에서 이곳 ‘구덕령(九德嶺)’을 넘어서 내륙지방으로 침공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학장동은 그들 통로의 한 요지였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부산장과 구포장 또는 사상장을 왕래하는 장꾼들도 ‘구덕령’을 넘어 통행하였으므로 장날 만 되면 최근세까지도 이 고갯길은 인파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구덕령을 넘던 시절의 옛 추억 을 잊게 해 주는 [구덕터널]이 민자 유치로 1986년에 개통되면서 시내로 가는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던 것이다.” 구덕리(九德里) 암자 앞을 지나 가파른 계단식 전답 사이로 뱅뱅 돌아 구덕고개에 이른다. 옛날에는 이 고갯마루 지역이 소나무 숲으로 되어있었는데 일제 때 이 숲을 벌채하고 이곳에 대신동, 부민동, 보수동의 ‘공동묘지’로 조성하였다. 옛날부터 ‘사상사람’들은 이곳 구덕령(九德嶺)을 넘어서 부산포 가는 것을 “관(館)에 간다”라고 하였었다. “성님 어데 가는기요?” “내 볼일이 있어서 관(館)에 간다!” 여기서 관(館)이라는 곳은... ‘부산포’에는 왜관(倭館)이 있었다. 이때 서민들에게는 ‘부산’ 이라는 지명 보다 ‘부산포’에 있는 왜관(倭館)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왜관 근처에 가면 진귀한 물품들을 살 수 있었고 우리 물품들을 비싸게 팔 수 가 있었고, 기모노 입은 일본인들을 구경할 수 있었기에 왜관이 더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냉정고개’를 넘으면 “부산 간다!”고 하였는데... 그곳에는 부산진영(鎭營) 즉 부산 첨사영(釜山僉使營)이 있었고 부산장(釜山場)이 있었기에 “부산 간다” 고 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6.25사변 때 피난민들이 이 ‘구덕고개’에 정착하여 동북쪽 분지에 꽃을 가꾸어 부산 시내 꽃집에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었다. 그래서 “구덕 꽃동네 마을”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구덕고개’는 예로부터 김해, 밀양, 양산 등지로 가는 ‘유일한 지름길’로 이곳 사상주민들은 등짐 을 지고 수없이 넘어가고 넘어오는 삶의 애환이 담긴 고갯길이었다.
ㅇ 주례동의 유래
주례동(周禮洞)은 고원견산(高遠見山)과 백양산(白楊山)을 등지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북서쪽이 주례 1동이고 남동쪽은 주례 2동이다. 동쪽은 개금 1동 2동과 이어지고 서쪽은 학장동(鶴章洞), 감전동(甘田洞)과 이어지는 한편, 산지는 서대신동(西大新洞), 당감동(堂甘洞), 괘법동(掛法洞)의 산지와 접하고 있다. 개금동(開琴洞)에서 냉정고개를 넘어서는 곳 부터가 주례동이다. 주례동은 산지가 넓어 산답(山畓)이 많고 지대가 다른 마을보다 높아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부터 홍수의 피해가 적었던 곳이다.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1902년 8월 부산 초량에서 구포까지 경부선 철로 부설공사가 시작되어 1905년 5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 되자 주례동과 감전동은 마을 가운데를 열차가 지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마을이 위 아래로 갈라져서 윗각단 아랫각단이 각각 생겼다. 1920년에 들어오면서는 사상에도 세칭 “신작로”라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서면에서 전답 사이로 도로가 개설되어 가야동을 지나 개곤(開坤:개곤이)고개를 넘어 개금동을 지나서 ‘냉정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 도로가 개설되어 사람들의 내왕이 빈번하게 되자 냉정 앞 철로 주변에도 주막이 생기고 철둑에 아카시아가 무성하자 이곳을 “아카시아마치(町)”라 불렀다. 경부선 철로 부설을 전후하여 감전동의 포플러마치와 주례동의 아카시아마치가 각각 생겨났던 것이다.” 특히 지금의 주례 2동의 “냉정(冷井)고개”는 길이 가파른 고개로 이름이 나 있었고, 서면 방면으로 통할 수 있었던 길이었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냉정(冷井)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목을 축였었던 우물의 터가 지금의 ‘냉정역’(고개)부근에 남아있다.
주례동(周禮洞)은 사상구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옛부터 모라동과 더불어 호구수가 많고 부촌으로 불리웠다. 또한 주례동(周禮洞)은 서쪽 낙동강에서 대중현 또는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였기에 <국방상> 아주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사상 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1740년의 <<동래부지(東萊府誌)>> 성곽(城郭)조에 목장성(牧場城)이 나온다. 거기에 보면 목장성 관련 기록이 나오는데 ‘엄광산’ 강변 산록에서 시작하여 부산 ‘범천산’까지 이어져 그 길이가 15리가 된다고 하였으며 지금은 무너져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성의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중현 때나 그 뒤의 동평현때 축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놈들이 낙동강에서 배로 주례까지는 순식간에 이르러 동평현을 공격했을 것으로 보아 이곳 둘레에 성을 쌓고 동편현으로 들어가는 [냉정고개]에 관문이 있고 중간지점인 학장에도 학성(鶴城)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관문이 있었을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냉정고개] 고갯마루에 주례성의 관문이 있었다고 하며 150년 전 까지만 해도 이곳의 소나무 사이에 성지(城址)가 있었다고 한다. 1960년 까지도 개금 안마을(개금3동)에서 당리(댕풍)로 넘어가는 산길 아랫쪽에 성지(城址)를 볼 수 있었다. 당시 동평현 성이 이곳까지 성지가 뻗어 있었던 것으로보아 이 성이 [냉정 고갯마루]의 관문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성(城)이 성(城)으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고 곳곳에 허물어진 곳이 많아 고려시대 부터 조선전기까지 목장성(牧場城)으로 변하게 된것으로 보여 진다. 이 목장성의 성지가 잘 보존된 곳이 [냉정마을]뒷산 범남산 중록이다. 이곳에는1950년 까지도 폭 2m 높이 1m의 석성(石城)이 군데 군데 있었으며 성위에서 아이들이 놀았었다. 이 성은 ‘가야공원’까지 남아 있었는데, 성벽을 쌓았던 돌은 자연석으로 깎은듯이 반듯한 돌로 몇 사람이 달라붙어도 들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무조건적인 [개발]만을 생각하다가 문화재를 잘 관리하지 못하여>, 미군 히야리아 부대를 조성할 때 이곳의 돌을 실어갔으며 ‘가야로 확장 공사’때 이곳의 돌을 실어다가 저습지에 깔아 사용하고 일부는 분쇄하여 자갈로 사용하고, 지금은 동서대학 경남정보대학이 건립되어 성지(城址)의 흔적을 찾을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ㅇ 엄궁동의 유래
학장(鶴章)에서 엄광산(嚴光山) 기슭을 따라 굽이굽이 나있는, 당시의 비포장 길을 가노라면... 산 아래에 나타나는 마을이 엄궁동(嚴弓洞)이며 사상의 ‘최남단 마을’이다.
엄궁동(嚴弓洞)은 "엄광산(嚴光山)의 서쪽 기슭의 높은 언덕위에 산을 등지고 자리를 잡은 마을로 해 뜨는 시간이 매우 늦고 겨울에는 낙동강의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주거지역으로서는 부적합한 마을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갈대가 우거져 있는 낙동강변을 내려다보며 갈대지붕에 토담집을 지어서 평화롭게 모여 살며 농사와 어업에 종사해 온 강안(江岸)의 빈곤한 마을이었었다. 엄궁동(嚴弓洞)은 사상에서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한 동리로 학장동과 이어져 있으며, 남쪽은 사하구, 당리동,하단동과 경계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사상 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는 일본군이 개설한 강안(江岸)도로는 있었으나 길이 좁고험하며 남과 북으로 고개가 높아서 버스가 운행되지 못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었다. 특히 하단 으로 통하는 도로는 지금의 도로가 아니고 수십 미터나 올라간 산복을 빙빙 돌아서 하단으로 내려 가는 길이었었다. 북쪽으로 통하는 도로도 고갯길이었으나 남쪽 길처럼 그리 높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 길로 사상까지 걸어나가야 버스를 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였겠는가? 짐작이 갈 것이다! 주로 보행이 많았었는데, 보통은 구포나 사상까지 낙동강 제방을 따라서 걸어 다니는 것은 기본이었었다."
“엄궁동(嚴弓洞)은 주민 모두가 농사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어민생활이었다. 사상, 감전, 엄궁, 하단을 잇는 낙동강의 하류는 “재첩”이라는 작은 담수패(淡水貝)의 보고로 강바닥의 흙을 한줌 쥐면 재첩이 한주먹 쥐여질 정도로 많았었다. “재첩”은 술꾼의 해장국으로 일품이려니와 간장과 폐병에도 좋다는 민간의속 때문에 널리 사랑을 받았 었다. 이곳 엄궁동(嚴弓洞)의 명산물은 “재첩”이라는 담수패와 잉어, 뱀장어 그리고 숭어였었는데 특히 재첩의 수확이 많아서 이 부락의 아지매들은 재첩국 장수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었다. 이곳에서 잡아들인 재첩을 자루에 담아서 인근 지역 재첩국 장사들에게도 보내졌었다. 이들은 밤새 끓여서 만든 재첩국을 동이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새벽녘에 마을을 떠나 걸어서 대개는 하단동을 돌아 ‘대티고개’를 넘어 가기도 하였었고 구덕령을 넘어 대신동, 부민동, 아미동의 새벽거리를 누비며 큰소리로 “재치국 사이소!~재치국!~”를 외쳤었다. 과거... 부산사람들은 이 소리를 매일같이 듣는 아침잠의 첫소리였고 동시에 기상을 알리는 신호처럼 되기도 하였었다. 특히 외지에서 부산을 찾아온 나그네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부산의 추억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인근 공단의 폐수와 오염 하수의 방류로 재첩의 생산이 매년 줄어들다가 1980년대 낙동강 하구 둑 공사로 산소가 없는 강이 되어 재첩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사상구청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동별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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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 추억의 사진을 잘 보관하고 계시네요 추억의 사진을 보니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부산의 동지명 역사자료를 참 많이도 공부하셨네요. 어릴적 추억은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도전을 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여생 부디 좋은 추억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