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결혼식 때에 생긴 일
1979년 5월 3일,
이날, 남편 될 사람의 사정으로 선을 본 지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남편 될 사람은 총각으로 목회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부임할 때에 교인들과 약속하기를 1년 안에 결혼을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남편 될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시댁에서는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된다고 하니까, 시댁 식구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내놓은 자식으로 여기고 있던 차에 결혼을 한다고 하니, 시댁에서는 우리 결혼에 대하여 거의 무관심하고 있었습니다.
신랑신부 두 사람의 결혼 준비를 친정어머니께서 혼자 거의 다 마련해주셨지만, 저의 패물만은 시댁에서 해주리라, 설마 반지 정도는 해주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날,
끝내 반지 하나 받지 못한 채,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삼아 말하지만, 그 때 남편 될 사람은 단돈 15만원을 가지고 결혼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 교회 교인한테서 빌린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남편이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는 모든 것을 다 합쳐서 5만원이었습니다.
반지 하나 끼지 못한 채 결혼식을 치르고 한복으로 갈아입으니, 목과 손가락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못내 섭섭했습니다.
그 때,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 청년 하나가 찾아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자에서 자수정 메달이 달린 목걸이를 집어내어 내 목에 걸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척 황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적잖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오랫동안, 그 목걸이 하나로 결혼한 여자라는 것을 표시하고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그 정도였으니, 신혼여행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기가 무섭게, 우리는 학운교회(그 당시 남편의 담임교회)로 직행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남편 될 사람은 그냥 일반버스를 타고 가자는 것을, 내가 우겨서 겨우 택시를 대절하여 신혼여행 삼아 학운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택시비가 남편의 한 달 생활비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신혼여행을 버스타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우리의 결혼식은 이처럼 황당한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신랑은 신부되는 나에게 결혼 10주년 되는 해에는 꼭 제주도로 여행을 가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2.결혼 10주년에 생긴 일
어느새 결혼한 지 10주년이 되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어렵사리 조립식 건물로 예배당을 마련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경제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멀리 여행을 간다는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몇 만원의 돈을 내놓으며 온천이라도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그때는 ‘오갈 데 없는 사람은 다 모여라’해서, 함께 사는 식구가 7-8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식사준비를 부지런히 해놓고서는 오후에나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결에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 소풍을 간다면서 금일봉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망설이다가 몇 만원을 드렸습니다. 조금 있자, 동네 사는 아기엄마가 열이 펄펄 나는 아이를 업고 왔습니다. 기도를 해주었으나,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엄마에게 몇 만원을 쥐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주머니에 남은 돈은 겨우 몇 천원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나간 돈이 꼭 아까운 것만은 아니지만, 어쩐지 마음이 섭섭하고 우울했습니다. 내 눈치를 살피던 남편이 비원이라도 다녀오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나머지 돈으로 차비와 입장료 등을 계산해보니, 그래도 캔 음료 하나 정도는 사먹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계란 두 알을 삶아 겉옷주머니에 넣고서는 내 손을 잡고 비원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라도 잘못 탈 경우에는 어쩌려고, 우리는 당당히 캔 음료 한 개를 샀습니다. 남편이 벗겨준 계란을 꾸역꾸역 먹고 음료수도 마셨습니다. 한 모금만 더 마시라고 자꾸 재촉하는 남편을 바라보자니까, 그동안 꽁꽁 얼어붙어있던 내 마음은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남편은 다시금 새로운 약속을 했습니다. “20주년에는 꼭 제주도 가자!”고 하면서 강제로 손가락을 걸었습니다.
3.결혼 20주년에 생긴 일
세월은 흘러서, 어느덧 결혼 20주년이 되었습니다. 속아 사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이젠 딸아이 대학진학 문제로 인해서 경제형편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10년 전에 약속했던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아예 접어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당시 남편이 PC통신을 하던 중에 ‘하이텔의 새로운 이름 짓기’에 응모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름 짓기에 당선이 되어서 제주도 여행권이 나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여행권을 팔기로 했습니다. 한 130만원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하이텔 측에서 말하기를 ‘여행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제천의 어느 아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가 용돈을 듬뿍 주면서 ‘여행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니 제주도에 꼭 갔다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숙소는 하얏트호텔이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급호텔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남해바다가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에서, 우리는 2박 3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바닷가 모래사장도 거닐고, 고급스런 뷔페식당에서 저녁식사도 했습니다(물론, 이런 모든 것은 여행권에 다 포함된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를, 바다처럼 넓은 사랑과 깊은 마음, 그리고 돌을 던지거나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요동하지 않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4.결혼 24년 주년을 맞이한 오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며 은혜였습니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따라다니던 남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끝내 신학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고로, 나는 과감하게 그 남자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은 나에게 너무나 잘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신혼 초에는 얼마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그 후 우리는 잉꼬부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늘 말하기를 ‘당신이 나와 결혼해준 것이 참으로 고맙다’고 합니다. 저도 또한, 내 남편이 나를 선택해준 것이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반지 하나를 해주겠다면서 돼지 저금통에 부지런히 동전을 모으더니, 얼마 전 탈북자 돕기에 그 돼지 저금통을 통째로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다 망가진 손에 어떤 반지가 어울리겠는가 싶기는 합니다만,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탈북자 돕기에 돼지저금통을 내놓고 마는 남편의 행동이 그리 밉지는 않으니, 이런 내 마음을 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24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하여 진정으로 부부일심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남편이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인생의 동반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지난 결혼생활을 회고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