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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가 자신의 본성과 감성에 확고한 신뢰를 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 ||
전달하는 일에 요지부동의 확신을 가진 경우를 찾는다면, 아마 가장 틀림없는 하나의 | ||
실례를 폴 고갱에게서 찾을 수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되도록 전체적이고 근원적인 | ||
삶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실하게 드러내어 전하는 일에 회화적 표현 수단을 선택한 이상, 그 | ||
일에 한한 한에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확고한 신념 아래, 자신의 이성과 감성의 힘으로 머릿속에 있는 세계 | ||
를 토해 내는데 평생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예를 바로 이 화가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
우리는 흔히 일반적으로, 원시와 문명의 대립을 내세워, 과도한 문명의 세계를 벗어나서, 옛 습속과 옛정취가 간직되 | ||
고 있다고 믿는 원시 세계를 찾아나선 대표적인 예술가의 예로서 또한 고갱의 경우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째서 브 | ||
르타뉴와 파나마, 마르티니크와 타히티를 오가며 그다지 분주하게,부산하게, 그리고 고된 생활을 해야 했는가에 대 | ||
해서는 그리 많은 자세한 애기를 듣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고갱이 남긴 예술가로서의 생애와 작품 세계가 그 | ||
만큼 많은 측면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물론 거기에는 먼저 그가 나서 생존하던 시대적 | ||
배경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당시의 예술인들, 특히 화가들의 과제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모 | ||
두 합친다고 해서 고갱의 회화작품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예술가의 경우에 비해 유달리 많 | ||
은 예술 외적인 얘기는 어느 면에 있어서는 좀더 근접할 수 있는 그의 작품에의 이해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기 | ||
때문이다. | ||
갱이 1848년 파리에서 출생하자, 얼마 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일어 | ||
나고,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부친은 피신하게 된다. 부친의 피난길에 일가족이 따라나 | ||
선 것이 남미 페루의 리마(lima)행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여행 도중 부친은 사망하 | ||
였지만, 그곳에서 눌러 살게 된 4년간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고갱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 | ||
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점은 이와 같은 유년기의 기억이 하나의 구체적인 경험의 사실에서 벗어 | ||
나 나중에 가서 예술 이념에서 드러나는 보편성을 띤 과제로서 설정이 된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의 핵심이 되는 그 작 | ||
가의 감성 그 자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와 같은 그의 생각과 감성은 그 후의 과정에서도 계 | ||
속 지적될 수 있는 특수한 면을 지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남미에서 돌아온 고갱의 식구들이 남불 오를레앙에 일단 기착, 그곳의 신학교에 다니게 될 때의 고갱은 자기 이성과 | ||
감성에 맞지 않는 위선적인 덕행에 강렬한 반발을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과 같은 자기 보호의 태도는 그후 다른 | ||
동료 화가들, 특히 고흐(Van Gogh)와의 공동 행활의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잇는 면이라 하겠다. 그것은 | ||
그후 자신의 예술 세계를 옹호하기 위한 여하한 희생과 고통도 궁극적으로는 하나같이 자기의 심지를 지키기 위한 | ||
고행 같은 것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사회적 . 일상적 생활에 속하는 다른 희생도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 | ||
었는지도 모른다. | ||
갱이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코로(Corot)나 쿠르베(Corbet)의 영향을 받던 | ||
일요화가 시절이라고 하지만 옳게는 당대의 예술 운동인 인상파에 길을 터놓은, 코로 | ||
의 제자이며 전원 풍경을 잘그리던 피사로(Camille Pissarro)를 알게 되면서부터라 | ||
고 할 수 있다. 당시의 프랑스 회화, 더 나아가서는 서구 회화가 처해 있는 위치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 | ||
으로 내려오던 자연주의적 회화 표현은그 궁극적인 단계로서 쿠르베의 사실주의에 이르게 되고, 이에 한 걸음 더 나 | ||
아가서 빛과 색채에 의해 대상 세계가 용해되는 인상주의적 회화 이론에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인상파에 대한 비 | ||
판은 여러 국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었지만 고갱의 경우에서도 그것을 초극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 ||
그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1888년 그러니까 2년 전에 잠시 체류했던 브리타니(Brittany) 지방의 퐁 타벵(Pont Aven) | ||
에 두 번째 체재하던 때의 작품이 보여 주는세계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젊은 에릴 베르나르(Emil Bernard)와 친 | ||
교를 맺으면서 자극을 받던 고갱은 그의 새로운 회화의 표현 세계를 여기서 확립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실제적이면 | ||
서 동시에 환상적인, 따라서 거기에 맞는 테마의 발견과 그의 표현 기법의 구현이다. 고갱이 보여 주는 세계는 사물 | ||
을 개념적으로나 설명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불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 으로, 관념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현 | ||
존시키는 방식을 취하면서 드러내는 것이었다. | ||
가 주력한 화면상의 시도는 중앙 원근법이나 음영, 또는 양감을 무시하고, 부차적인 | ||
세부를 등한이 한, 완전히 평평하고 넓은 색면 공간을 대담하게 등장시킨 구성법에서 | ||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당시의 프랑스 화가를 포함한 서구 화가들이 | ||
당면하고 있는 과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통으로 내려왔던 자연 재현의 자연주의를 극복하려는 필 | ||
연성에서 맞이하게 되는, 소위 시각의 혁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당시 자극과 영향의 요인으로 작동하게 되었던 | ||
요소들에 대한 관심이다. 19세기 60년대, 70년대,80년대의 파리만국 박람회는 그런면에서도 큰 몫을 차지하는 의미 | ||
를 띠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소위 일본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일본물결'은 개별 작가의 경우에 단계적인 영향력 | ||
을 발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소위 일본 판화를 통해서 찾게 되는 단순한 선과 색채의 이차원적 평면적 장식적 화면 | ||
공간성은 바로 이런 시기의 그들의 개안에 하나의 자극이 되어 줄 수 있었으며, 고갱으로 말하면 화가의 개별 양식 | ||
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과거의 페루나 파나마나 마르티니크, 브르타뉴 체 | ||
재 경험이나, 당시 파리의 만국 박람회를 통해서 일본 판화나 자바, 불령 인도지나의 예술이나 사물을 익히는 거나 | ||
장차의 타히티, 또는 후년의 마르키즈 제도에서의 체재, 이 모두가 궁극에 가서는 일맥 상통으로 통하는 세계를 얻을 | ||
수 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든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이국적인 정서나 대상이 예술가로서의 그의 관 | ||
심의 대상이 되었다기보다는 바로 다름 아닌 원초적인 것에 초점을 둔, 자기 시각을 통한 새로운 화면 구성이라는, | ||
보다 예술의 고유한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처음 출발 에서부 | ||
터 도식적으로 시각을 설정하여, 그런 세계를 무비판적으로 기정 사실화시키면서 따라간다는 뜻이 아니다. 특히 그 | ||
화면의 성격상, 혹은 상징주의로 혹은 원시주의로, 혹은 일본주의로 불리는 1888년의 그의 작품을 보면 이 사이의 사 | ||
정을 아주 단적으로 잘 전해 준다. <마두가 있는 정물(1887)> 또는 <샤를르 라베르의 프로필(1886)> 같은 데서는 공 | ||
간의 평면뿐만 아니라, 깊이가 같이 추구되고 있고, 바탕과 형체가 구별 못할 만큼 함께 평평해진 것도 아니고, 조형 | ||
과 추상의 색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1888년의 작품 <설교 후의 환영>에 보면 시각의 발전은 | ||
월등히 차이를 보여, 같은 해 그의 자극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에밀 베르나르의 <풀밭 위의 브르타뉴 여인들>보다 훨 | ||
씬 강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을 택하고 있다. 그것은 같은 해 제작된 <세 마리의 개>나 <파도>에서도 마찬가지의 | ||
경향이라 할 수 있다. | ||
기에서 일본적 시각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마치 에밀 베르나르나 드가가 없 | ||
으면 고갱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거나, 일본적 시각이 없으면 고갱이 없는 것같이 생각 | ||
하는 것은 다 온당치 못한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도 또 | ||
한 사실이 아니라 할 것이다. 이와같이 고갱은 당시의 세계 전람회의 여러 경험을 통해 | ||
서 여러 원초적인 창작과 삶을 익힐 수가 있었고,그것을 연줄로 그의 직관에 따라 실제 | ||
적인 가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예술 속에는 그와 같은 낭만주의적인 원시주의적 관점에 따 | ||
라서, 페루와 브르타뉴, 일본과 자바, 이집트와 초기의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다종 다양의 넓은 범위의세계가 함께 하 | ||
게 된 것이다. 한편 그 원천이 어디에서 나왔든 그가 발견하는 그 새로운 원초주의에서는 고갱적인 창조 세계의 공통 | ||
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가서 그의 그림 세계는 그와 같은 원시주의가 빠지기 쉬운 민간 신앙적 내용 설명 | ||
의 수단으로 끝나지 않고, 엄연히 양식을 지키고 형식을 찾아냄으로써 그 속에 합치되는 새로운 예술적 내용을 담을 | ||
수 있었던 평형감을 가졌다는 강점을 들 수가 있다. |
고갱 Paul Gauguin (1848 ~ 1903) | |
1848년 6월 7일 |
파리에서 출생. 부친은 공화파 신문의 기자였고, 모친은 작가의 딸. 둘은 1846년에 결혼, 다음 해에 딸 마리를 낳았다. |
1849년(2세) | 부친은 나폴레옹 혁명 때 반대 세력으로 몰려 가족들과 함께 파리를 탈출, 남미의 페루로 이주하던 도중, 동맥경화증을 일으켜 10월 30일 급서했다. 모친 아리느는 고갱과 마리를 데리고 여행을 계속, 페루의 리마에 기착, 1855년까지 리마 시에서 살았다. |
1853년(5세) | 고흐 출생. |
1855년(7세) | 조부 사망. 유산 처리 관계로 일가가 파리로 귀환, 오를레앙에서 삶. 들라크로아, 프랑스 학사원 회원이 됨. |
1859년(11세) | 오를레앙에서의 소신학교 기숙사에 입숙. 고갱은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서 선생과 급우들을 예리하고 타협 없는 감성으로 비판. |
1861년(13세) | 마네 살롱에 <기타레로>, <양친의 초상>을 출품, 대성공을 거둠. 조각가, 마이욜 브르델 출생. |
1864년(16세) | 오를레앙의 공립 중학교에 입학. |
1865년(17세) | 해군병학교에의 진학을 단념, 견습수부가 되어 상선에 승선. 리오 데 자네이로에 최초로 항해, 6개월 동안 수부 생활. |
1866년(18세) | 3등 기관사로 승격. 10월 말부터 치리 호에 승선, 르아브르 항을 떠나 1년 이상에 걸친 세계 일주항해. |
1867년(19세) | 7월, 모친사망. 귀스타브 아로자가 후견인이 됨. 12월, 세계 일주 항해를 끝내고 귀항. |
1868년(20세) | 르아브르에서 해군에 입대, 3등 수병으로 순양함 제롬 나풀레옹 호에 승선. 6월부터 7월까지 동지중해를 거쳐 아드리아해로 항진. |
1869년(21세) | 4월부터 5월까지 순양함 제롬 나폴레옹 호는 지중해를 거쳐 아드리아 해로 항진. |
1870년(22세) | 7월, 제롬 나풀레옹 호 보불전쟁에 참전. 9월 19일, 배 이름이 르 드제 호로 개명됨. |
1871년(23세) | 4월, 르 드제호에서 하선. 제대한 후 후견인, 귀스타브 아로자의 주선으로 파리중심가의 주식 중개상, 폴베르탕 회사에 근무. 동료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 |
1872년(24세) | 중개인의 역할에 숙달됨. 이 해 모네, <인상 : 일출>을 제작 . |
1873년(25세) | 11월 22일, 덴마크 출신의 메트 소피에 가즈와 결혼. 메트는 이 해 23세. |
1874년(26세) | 장남 에밀 출생. 회사 동료와의 친교가 두터워졌고 둘이서 아카데미에 이따금 나갔으며 루브르 미술관도 자주 방문, 이 해 피사로와 만남. |
1875년(27세) | 겨울, <에나교에서 본 세느강>을 제작. |
1876년(28세) | 풍경화 <비로플레 숲의 잔디> 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 |
1877년(29세) | 플르노가로 이사. 장녀, 아리느 출생. 조각가 비요와 알게 되어 조각에도 관심을 갖는다. |
1879년(31세) | 인상파 화가인 마네,세잔, 피사로,르노와르, 모네, 시슬리 등의 작품을 빚을 내어 수집. 5월 8일, 차남 크로비스 출생. 여름. 피사로와 함께 퐁트와즈에서 그림 제직. 제 4회 인상파전에 참가, 소입상을 출품. 그러나 카탈로그 목록에는 게재되지 않았다. |
1880년(32세) | 카르세르가 8번지에 아틀리에를 임대. 제 5 회 인상파전에 유화 7점, 대리석상 1점을 출품.<나부 습작>을 그림. |
1881년(33세) | 제 6 회 인상파전에 유화 8점, 소입상 1점, 메다이용 1점을 출품. <나부 습작>이 유이스만스의 절찬을 받음. 4월, 3남 출생. 여름 휴가를 피사로와 함께 퐁트와즈에서 보냈고, 피사로를 통해 세잔과도 알게 됨. |
1882년(34세) | 제 7 회 인상파전에 유화, 파스텔화 등 12점과 조각 작품 <흉상> 1점을 출품했으나, 고갱의 출품을 인정하느냐,않느냐는 문제를 놓고 피사로, 드가, 르노와르, 모네 사이에 의견이 분분. 유이스만스는 고갱의 출품작들을 혹평. |
1883년(35세) | 1월, 가족과 친지들에게 상의 없이 돌연 회사를 퇴사. '이후 나는 매일 그림을 그리겠다.' 는 쪽지를 남기고, 피사로와 함께 퐁트와즈에서 몽스니로 옮기고 , 11월에는 루앙에서 집을 구하러 다녔다. 12월, 4남 출생. |
1884년(36세) | 1월, 가족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했다가 11월, 코펜하겐으로 다시 이주, 방수포와 서광포를 만드는 딜리 상사의덴마크 대리 판매인이 됨. |
1885년(37세) | 부인과 아이들 사이의 불화가 심해지자 차남만을 데리고 파리로 귀환. |
1886년(38세) | 5월, 제 8 회 인상파전에 유화 19점 출품. 6월, 차남을 파리 교외의 기속사 학교에 입학시키고 퐁타벵에 잠시 체재, 그 동안 에밀 베르나르와 만남. 11월, 파리로 돌아왔으나, 그사이 부인이 차남을 기숙사 학교에서 끌어냈고,고갱이 심혈을 기울여 모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몽땅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사라졌다. |
1888년(40세) | 3월, 재차 퐁타벵을 방문, 10월까지 체재,<야곱의 결투>를 제작. 인상파를 탈퇴, 몽마르트르에서 고흐와 비극적인 공동 생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이 터지자 즉시 파리로 귀환. |
1889년(41세) |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자바의 미술에 관심을 가짐. 인상파, 종합파의 친구들과 카페 보르피니에서 전람회를 개최. 일반인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어 1점도 팔리지 않았으나, 나비파의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줌. 고갱은 이 해에 <그리스도의 책형>, <황색의 그리스도> 등을 제작. |
1890년(42세)40 | 타히티행을 결심. 11월 파리에 머물렀는데, 상징파 화가들은 그를 새로운 회화의 거장으로 추대, 카페 볼테르에서 이따금 회합을 개최, 다니엘 드 몽프레와의 교우가 시작됨. |
1891년(43세) | 2월, 타이티행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작품 30점을 매각, 9천 8백 프랑을 손에 쥔다. 3월 코펜하겐에서 부인과 만남. 4월4일, 마르세이유를 출항. 6월 8일, 타히티에 도착, 곧 마타에아로 옮겨 원주민 여자 테프라와 생활. <이아 오라나 마리아>, <꿈>, <통나무 밑에서>등을 제작. |
1892년(44세) | 2월부터 1개월 동안 파페테 병원에 입원. 토착민들의 민간 종교를 믿으면서 <시장>, <영혼이 지켜본다> 등 제작. |
1893년(45세) | 병에 걸려 5월, 타히티를 출발. 8월 6일, 파리로 귀환, 자바의 여자 안나와 함께 파리에서 생활. 이때 오를레앙의 숙부가 사망, 유산을 받았고 11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 |
1894년(46세) | 이해 봄에 코펜하겐에 있는 처자와 만났는데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된다. 4월 자바 여자 안나와 함께 여러 곳을 여행. 11월 파리로 귀환. |
1895년(47세) | 3월, 타히티를 재차 방문하기 위해 승선, 프나비아 지방에 정착. |
1896년(48세) | 4월부터 새 여자 파프라와 생활. 고독과 병과 절망을 견디지 못해, 10월에는 거의 발광 상태.11월에 들어서자 제작을 개시. <나베 나베 마하나>, 자화상 <골고다 곁에서> 등 제작 . |
1897년(49세) | 5월, 딸 아리느의 사망 소식에 상심. 11월, 샤를르 모리스에 의해 고갱의 수기 '노아노아' 제 1 장이 파리에서 발표됨. 12월, 자살을 결심. 유서적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림. |
1898년(50세) | 1월, 자필판의 '노아노아'를 완성. 2월 11일, 자살하기 위해 비소를 마셨으나 실패, 병원에서 요양한 후 현지의 토목국에 취직. |
1899년(51세) | 토목국을 그만두고, <빨간 꽃과 유방>을 그림. |
1901년(53세) |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했다가 2월에 퇴원. 8월, 타히티를 떠나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에 옮겨 '즐거운 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움막집을 세우고, <그리고 그 여성들의 육체의 금빛은...>을 제작. |
1902년(54세) | 행정상의 문제로 섬의 관리들과 자주 분쟁. 8월 습진이 악화되고 심장마저 약해져 파리로 귀환 할 뜻을 세웠으나 좌절. 9월 '서투른 화가의 쓸데없는 이야기'라 제목을 붙힌 에세이를 집필. |
1903년(55세) | '아봥 에 알프에' 전후편을 집필. 화상 보라르에게 근작 10점을 보냈으나 무소식. 4월 원주민에 대한 관리들의 횡포를 항의, 관리의 명에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징역 3개월, 벌금 5백 프랑의 언도를 받음. 5월 18일, 심장병이 악화, 히바오아 섬에서 사망. |
(출처:http://my.netian.com/~hskim20/)
첫댓글 저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