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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융 소설의 초국적(trans-national: 跨国性) 수용
이치수는 한국의 중국 무협소설 번역·소개의 역사를 ‘김광주 시대’, ‘와룡생/워룽성 시대’, ‘김용/진융 및 기타 시대’의 세 시기로 나누면서, 김광주가 한국에서 중국 무협소설의 독서 붐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평했다.
최근 한국 무협소설의 역사를 펴낸 이진원은 세밀한 조사를 통해 김광주가 번역한 작품, 워룽성, 쓰마링(司馬翎), 천칭윈(陳靑雲), 조약빙 등과 진융의 무협소설 번역 현황을 점검해 목록을 만들었다. 워룽성 시대는 1966년 『군협지(원제 玉釵盟)』의 번역으로 비롯되었고 이어서 1968년 『무유지』, 『야적』, 『비룡』, 『무명소』 등의 작품이 대량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홍콩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무협소설 작가인 진융(金庸)은 중국 무협소설 유행의 또 하나의 고조를 대표한다. 1986년에 『영웅문』시리즈가 출판되면서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외국 번역소설로 꼽혔고 1986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3년간 15편의 작품이 모두 번역되었다. 몇 년 되지 않은 기간에 외국작가의 작품이 모두 번역 소개된 것은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로, 우리나라의 번역 문학사상 특기할만한 사건이었다.
21세기 새롭게 출판된 『사조영웅전』(2003), 『신조협려』(2005), 『의천도룡기』(2007)는 판권계약을 통한 번역이라는 측면에서 무협소설 번역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보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전 판본과 비교할 때 원전에 충실한 완역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른바 ‘영웅문 키드’가 더 이상 ‘원전에 충실한 완역’에 환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앞당겨 말하면, ‘영웅문 현상’은 한국의 고유한 현상으로, 진융 작품 이해와는 무관한 문화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웅문 현상’ 분석에 앞서, 우리는 먼저 진융 문학의 탄생지인 홍콩과 관련해 진융의 작품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에게 홍콩문학은 생소하다. 더구나 1997년 중국으로 편입된 홍콩이기에 지금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 있다. 그러나 홍콩문학은, 독립 개념으로든 중국문학의 하위개념으로든, 분명 존재했고 지금도 그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홍콩문학에 대한 이슈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작품이 ‘홍콩의’ 문학인가 ‘홍콩에서의’ 문학인가 하는 공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홍콩 본토의식’ 유무이다. 본토의식은 홍콩문학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전자의 이슈에 대해 렁핑콴(梁秉鈞. 필명 也斯)은 화자와 관점에 주의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누가 어떤 위치에서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한 셈이다. 렁핑콴은 기존의 두 가지 서사―‘국제도시 서사’와 ‘중화 국민 서사’―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홍콩에 관한 모든 서사는 홍콩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지금 이 곳(now and here)의 우리의 생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7년 중국 편입 이후 재국민화(re-nationalization)가 진행된 지 20년이 넘은 현재 렁핑콴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화되고 있지만, 진융 문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진융 텍스트(text)는 홍콩 콘텍스트(context)와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진융은 1955년부터 약 16년간 ‘홍콩에서’ ‘12편의 장편과 3편의 중편’을 발표했다. 그러나 진융 문학은 홍콩에서 창작되고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의 텍스트들은 내용이나 배경에서 홍콩을 다루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앞의 논의에 따르면, 진융 작품은 ‘홍콩의’ 문학이 아니라, ‘홍콩에서의’ 문학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진융 소설이 ‘홍콩에서의’ 문학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홍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자는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른바 ‘대중문화’를 자본주의의 퇴폐적 산물로 규정하고 모두 금지시킴으로 인해 영화와 무협소설로 대표되던 대중문화는 타이완과 홍콩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동아시아의 현대문화는 홍콩영화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으며, ‘홍콩문학’이라는 말이 이미 20년 전에 등장한 것처럼, 새로운 동아시아의 도시문학이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후지이 쇼조(藤井省三)의 말처럼, 홍콩 문화(HK culture)는 영화와 문학에서 대중성이라는 특성을 아우르면서 독특한 풍격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독특한 풍격은 “본지 작가와 외래 작가의 병존, ‘통속문학’(주로 대중적 취미를 근거로 함)과 ‘엄숙문학’(내용의 심화와 기교의 創新을 추구)의 병존, 좌파 작가와 우파 작가의 병존, 컬럼의 잡문(雜文)을 주요 장르로 함”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진융 무협소설은 홍콩문학의 독특한 풍격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통속문학과 엄숙문학의 병존’은 최근 진융 무협소설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아속공상(雅俗共賞)’의 경지를 일컫는 말인데, 이는 홍콩의 개방적이고 혼종적(hybrid)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영웅문 현상’은 진융의 중국적 두터움은 탈각되고 한국적 맥락에서 수용되었다. 우선 지적할 것은 진융의 작품이 모두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유독 ‘영웅문’에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영웅문’의 원작인 ‘사조삼부곡’이 흥미로운 작품인 것은 틀림없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로 이어지는 후기 대작들이 훨씬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협객의 성격만 보더라도, 유가적 협객(원승지·곽정), 도가적 협객(양과), 불가적 협객(장무기)을 거쳐, 협객의 일반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비협(非俠)적 인물(적운·석파천)과 심지어 시정잡배에 가까운 반협(反俠)적 인물(위소보)로 변천해가는 계보만으로도 그 전복적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진융 작품에는 수많은 역사 사실과 문학작품 그리고 문화적 요소들로 충만하다. 중국 불교에 입문하려면 진융 작품을 읽으라는 천핑위안(陳平原)의 권고는 과장이 아니고, 송말부터 명 건국까지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사조삼부곡’에서 시작하고 명말 청초의 역사 공부는 『녹정기』와 함께 하면 좋을 것이라는 권유는 필자의 직접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은 장르문학으로서의 무협소설 애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영웅문 키드’들은 무협지 ‘영웅문’으로 충분할 뿐, 그 문화적 수준을 향상시켜야 이해할 수 있는 중국의 문사철(文史哲)과 제반 문화(25史와 13经注疏, 走也走不了,吃也吃不完), 중국 상상(imagining China), 전통 만들기(invention of tradition), 성별․국족 정체성(gender and national identity) 등의 주제에는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그동안 한국의 진융 관련 담론을 보면 중국 무협소설에 대한 오해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용 영웅문’을 중국을 대표하는 무협소설로 간주하고 그것을 독파하면 중국 무협소설을 정복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 ‘사조삼부곡’을 번역한 『소설 영웅문』은 완역이 아니라 양적으로 70% 수준의 번역이었고 그 문체라든가 문화적 측면까지 평가하면 50% 이하의 조악한 번역물이다. 그러므로 ‘김용 영웅문’은 ‘진융 사조삼부곡’과는 별개의 텍스트로, 한국의 문화현상인 셈이다. 김광주의 『정협지』를 번안소설이라 한다면, ‘영웅문’ 또한 축약 내지 생략했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번안이라 할 수 있다. ‘영웅문’의 번안․출판은 한국적 맥락에서 이전 단계의 무협지라는 통념을 깨뜨린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의미와 재미를 상당히 훼손시켰다는 것이 이 글의 판단이다. 그리고 ‘김용’에 관한 담론도 ‘영웅문’(원문 기준 각 4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소오강호』(4권), 『천룡팔부』(5권), 『녹정기』(5권) 등의 대작 장편 정도까지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진융 작품의 ‘문화적 두터움’이 이들 6부의 대작에 구현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검은구록』(2권), 『벽혈검』(2권), 『협객행』(2권), 『설산비호』(1권), 『비호외전』(2권), 『연성결』(1권) 등의 장편과 「월녀검」(30쪽), 「원앙도」(52쪽), 「백마소서풍」(104쪽) 등의 중․단편을 빼고 진융의 작품세계를 운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협객행』의 문자해독능력(literacy)에 대한 신랄한 풍자, 『연성결』의 인간의 처절한 욕망에 대한 철저한 해부, 『비호외전』의 미완의 종결 등의 ‘문화적 두터움’은 한국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충분히 수용되어야 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990년대부터 진융 소설은 중화권에서 교학과 연구의 대상이 되면서 이른바 ‘경전화(經典化)’ 작업이 진행되었고 전문 연구서만 해도 백 권을 넘게 헤아리면서 ‘진쉐(金學)’란 신조어까지 출현하고 있다. 1994년 베이징대학에서 진융에게 명예교수직을 수여하고 같은 해 ‘싼롄서점(三聯書店)’에서『진융작품집』36권을 출간한 것은 그 징표라 할 수 있다. 베이징대학과 싼롄서점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수의 대학이고 출판사이므로, 진융의문화적 수준이 증명된 셈이다.
중화권에서 진융의 작품은 무협소설에서부터 애정소설, 역사소설, 문화적 텍스트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문 현상’은 그 스펙트럼에서 무협적 요소를 가져와 조악하게 재구성된 텍스트에 의존한 것임을 확실하게 인지해야 한다.
에스닉(ethnic)/민족과 네이션(nation)/국족 그리고 국가주의
진융 텍스트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국가주의적 맥락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진융은 처녀작 『서검은구록』에서부터 에스닉 문제를 의제(agenda)화하고 있다. 만주족 황제 강희(康熙)는 공식적으로 한족 혈통이 50퍼센트 섞여있었다. 강희의 손자인 건륭(乾隆)이 한족 대신의 아들이었다는 민간 전설을 바탕으로 쓴 『서검은구록』은 네이션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스닉을 풍자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청나라의 기반을 안정시킨 강희제는 재위기간이 60년에 달했다. 당시 강희제의 아들들은 황태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알게 모르게 쟁투를 벌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황태자 선정에 신중하여 황자들의 능력뿐만 아니라 황손의 됨됨이까지 고려했다. (<步步惊心> 참조)
강희 58년 8월 13일, 넷째 황자 윤정(훗날 雍正帝)의 측비가 해산했다. 윤정은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자 매우 실망했다. 며칠 후 한족 대신 진세관이 아들을 낳자 사람을 시켜 데려오라 했다. 그런데 안고 들어간 것은 아들이었는데 데리고 나온 것은 딸이었다. 진세관의 아들이 바로 건륭이라는 것이다.
『서검은구록』에서 반청(反淸)단체인 홍화회의 우두머리는 진세관의 둘째 아들인 진가락이다. 그러므로 청 황제 건륭과 반청조직의 우두머리인 진가락은 부모가 같은 친형제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중국 네이션’의 개념이 없다. 오직 한족과 만주족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동생은 형에게 오랑캐 황제를 관두고 한족 황제를 하라고 핍박하고 형은 마지못해 수락했다가 결국 동생을 배신하고 만주족 황제로 만족한다. 우리는 유전학적으로는 한족인 청 황제가 자신이 한족임을 확인한 후에도 만주족을 선택한다는 줄거리를 통해, 역으로 ‘에스닉’도 구성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작품 연대기로는 『서검은구록』보다 나중이지만 시대 배경은 그보다 앞선 『천룡팔부』는 북송 철종(哲宗) 시기 윈난(雲南)의 대리(大理)국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한족의 북송, 거란족의 요, 돌궐족의 서하, 그리고 선비족 모용가의 비전으로서의 연까지 오족의 오국이 공간배경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북송이 중심이지만 1094년은 북송의 멸망(1126년)까지 30년 남짓 남은 시점으로 북송과 요의 갈등은 극단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작품의 제1 주인공 교봉은 무림의 최대 조직인 개방 방주로 등장한다. 한인으로 자란 교봉은 알고 보니 거란족 출신의 소봉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사실 30년 넘게 한족으로 살아온 교봉이 자신을 거란족 소봉으로 조정하는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처음의 황당함은 점차 포기로 바뀌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양부모와 사부를 해친 대악인을 추격하게 된다. 교봉은 우여곡절 끝에 거란족 소봉의 정체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거란족처럼 한족을 미워할 수는 없다. 교봉으로 자라서 두 개의 네이션/에스닉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소봉으로 죽는 그는 여전히 다음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 ‘한인 중에서 선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악한 사람이 있고, 거란인 중에도 선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악한 사람이 있다. 왜 한인과 거란인으로 나뉘어 서로 살상을 서슴지 않는 것일까?’ 그의 죽음은 요의 침략을 막지만 결국 북송은 망하고 남쪽으로 옮겨간 남송은 원에게 멸망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소봉의 문제제기는 결국 개인 차원에서 해소되었을 뿐이다.
# 정체성 이론의 핵심은 단일한 정체성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천룡팔부』의 시대 배경인 송 시절은 아직 네이션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교봉/소봉은 그 출생의 특이함으로 인해 요와 송 양국의 네이션 정체성을 경험하게 된다. 『서검은구록』의 시대 배경인 건륭 시절도 그렇고 아래에서 살펴볼 『녹정기』의 배경인 강희 시절도 마찬가지로 네이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연하게 두 개의 네이션/에스닉 정체성을 경험한 교봉/소봉은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고, 그러므로 그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진정한 비극적 영웅의 캐릭터에 부합한다.
진융의 마지막 장편인 [녹정기]는 그 제목부터 풍자적이다. 제1회에서 해설하고 있는 것처럼 ‘축록중원(逐鹿中原)’과 ‘문정(問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녹정공(鹿鼎公) 위소보는 평천하(平天下)의 큰 뜻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품었던 ‘큰 뜻’은 여춘원(麗春院) 옆에 여‘하’원, 여‘추’원, 여‘동’원을 열어 주인이 되는 일이었다. 그는 모십팔을 만나기 전 12-3년 동안 ‘여춘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 여춘원은 기방이다. 기방이란 여성의 육체와 남성의 금전이 만나는 곳이다. 특히 위소보에게 있어 그곳은 생존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들어간 황궁도 위소보에겐 기방과 다를 바 없었다.
『녹정기』 결말 부분은 네이션과 에스닉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강토를 안정시키려는 만주족 황제 강희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천지회 사이에서 거취를 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일곱 부인과 함께 퇴출하는 위소보는 마지막으로 어머니 위춘방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생부에 대해 물어 보니 위춘방의 대답이 걸작이다. 당시 자신을 찾는 손님이 많아서 누구의 씨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위소보는 한(漢)․만(滿)․몽(蒙)․회(回)․장(藏) 가운데 하나이겠지만, 작가는 위소보를 마치 ‘오족 공화’의 합작품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리얼리즘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희 시대에는 네이션 개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소보를 오족 공화의 산물, 다시 말해 중화 네이션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은 작가의 의식을 작중인물에 불어넣은 것이다. 더구나 위춘방은 ‘러시아놈이나 서양놈은 없었냐’는 위소보에 질문에 화를 벌컥 내면서 ‘그놈들이 여춘원에 왔더라면 빗자루로 쫓아냈을거다’라고 답한다.
이는 오늘날의 상황에 견주어보면 이해가 될법하지만, 위소보는 만주족이 한족을 학살한 ‘양주(揚州) 도살’(1645)이 일어난 지 10년 후쯤 태어난 것으로 추정 가능한데, 양주 기방에서 일한 위춘방이 만주족보다 외국인을 더 증오했다는 것은 리얼리즘에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진융은 『녹정기』에서 에스니시즘(ethnicism)을 고의로 국가주의(statism)로 전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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