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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 에 나오는 대사.
[당선소감]
누군가는 만남에 대한 어휘가 가치 있다 했지만 나는, 미래의 이별들을 모으느라 하루를 보내곤 했다. 가령, 눈이 오면 눈의 일부처럼 만남을 맞고, 흩날리거나 녹아 없어지는 눈을 보며 이별이 아팠다. 그러한 내력으로 연연해하며 살았다.
연연의 목록이 추가될 때마다 구덩이를 팠다. 얕기도, 넓기도 한 연유들이 둥글게 고인 구덩이들. 그 속에 풀리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녹아 없어지지 않을 삶의 문제를 대신해 스르르 몸을 녹였다. 그 구덩이 안팎에서 만만한 한 生을 들여다보려 시를 썼다. 게으름과 무책임을 가책으로나마 아플 수 있는 시간. 이제 서른이니 뭐라도 하나는 구원해야하지 않을까, 골몰하는 밤이 앞으로도 길겠다.
習은 어린 새의 퍼덕임이라고, 날기 위한 연습에 멈춤이 있어선 안 된다 알려주신 장석남 선생님, 다른 시선은 틀린 게 아니라 특별하다 가르쳐주신 권혁웅 선생님께 인사 올린다. 통증의 마디인 어머니, 일평생 소슬함의 자루를 매고 가는 아버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근원 창수 창현 창미 세 형제들, 많은 것의 동기가 되는 민혁,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이리, 내 모든 풍경의 흉곽인 달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아가는 연습을 하도록 어깨를 두드려주신 이시영, 남진우 선생님께 조금은 더디어도 주저앉지 않을 거란 다짐을 드린다. (김은주/1980년 서울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김은주의 작품은 심각한 현실에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보단 가볍게 우회해서 대응하는 여유와 다채로운 화법이 돋보였다. 비근한 현실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움을 끌어낼 줄 아는 이 응모자의 시는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한 양태를 포착하고 있다. 특히 대상에 따라 화법을 다채롭게 변주할 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축하와 더불어 정진을 당부한다. (이시영, 남진우)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늘은 달이 다 닳고 /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당선소감]
음성메시지로 당선을 통보 받았다. 식구들에게 번갈아 들려줬다. 대낮에 벼락을 맞은 것 같다고 하면 좀 더 그럴듯하겠지만 이로써 갈 길이 더 멀어진 기분이다. 그것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재촉한다. 두근거리게 한다. 웅덩이에 발이 빠지면 통째로 달고 가는 수밖에. 내 발이 썩지 않고 견딘다면 섬 하나를 띄울 수 있을까.
이제 시는 나를 주시하고 교대로 돌며 내 행적을 감시할 것이다. 교묘히 숨는 대신 얼굴을 드러내고 두 손에 들린 연장을 닳아 없어질 때까지 휘두르고 싶다. 꽃과 뿌리가 줄기만큼의 여백을 두듯, 나와 내 시도 끝내 일치하는 지점을 찾지 못하고 집요하게 거리를 두길 바란다. 부족하지만 시를 쓸 때만큼은 프로라는 자신감을 부여하겠다.
내 이름은 본명이다. 일의 자리 가운데 제일 높은 숫자라고 그런 이름을 달아주셨다. 많이 다르게 흘러왔지만 자잘한 기억 하나 놔줄 수가 없다. 깨물어서 아플 손가락은 전부 다 잘라버렸다. 그러니 내 고통의 빈도를 기록해둘 만한 서식이 달리 없다.
당선되고 사라진다면 그보다 더한 낭비는 없을 것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겠다.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나를 격려하는 분들께 더 나은 작품으로 답하는 것 말고는 이제 방법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인이 되는 생각을 한다. 벼락을 맞아도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한다. (민구/ 1983년 인천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심사평]
민씨의 작품들은 시가 일상언어 사용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서 시 아닌 것들과 스스로를 변별케 하는, 고유한 층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층위란 산문의 평지에서 좀 떠 있는 부력, 흔히들 말하는 시적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민씨에게는 그러한 발견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새들은 (…)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라든가, 그의 다른 시 〈배가 산으로 간다〉에서의 "물속에 매달아 놓은 조등" 같은 대목은 범상치 않은 발견이다. 그것이 있을 때 시가 스스로 뜬다. 이런 좋은 부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민씨에게도 있다. 다분히 서술적인 말투라든가, 시라고 하는 대단히 인색한 지면에서 동어반복하면서 낱말들을 낭비하는 것, 시적 상념이 더 깊은 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등등이다. 이런 악습은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 더 해당된다 하겠다. 특히 근래 판타지에의 경향성 속에서 스스로도 감당 못할, 실패한 은유들의 범람은 참 견디기 힘들다. 이 땅의 싱싱한 시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정진을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문정희, 황지우)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맆 피쉬 /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당선소감]
“뿌리가 없던 사람에게 뿌리가 생긴 것 같습니다. 시에서 많은 실패를 겪었고, 희망도 안 보여 스스로가 바람 같다고 느꼈어요. 제가 당선된 것은 시를 잘 써서라기보다 저 같이 뿌리 없이 사는 사람들, 존재감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40대 초반 자비로 시집을 내기도 한 그가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8년 전. 혼자 쓰는 시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에 시 공부모임에 나갔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 시사랑회 화요팀에서 공부하고 있다.
당선작 ‘맆 피쉬’는 양씨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목격한 젊은 걸인을 보고 가슴이 아파 시를 쓰게 됐다. “살다 보니 제가 모르는 사람도 스승이고,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스승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양씨에겐 시가 바로 그 자신이다. “그동안 혼자 즐기려고 시를 썼지만, 이제 사람들이 위안받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양수덕 55세. 성신여사대 국문과 졸)
[심사평]
양수덕씨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개성 있는 언어를 활달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에 개인적 표현이 많아 소통부재의 위험이 보이기도 하나, 당선작 ‘맆 피쉬’에서는 지하도의 걸인이라고 하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대상을 섬세하게 구현해내었다. 말은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을 이 세계로 실어 보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신춘문예의 당선을 계기로 세계 속으로 자아를 밀고 나갈 수 있는 힘도 함께 얻기를 바란다. (황지우, 최정례)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당선소감]
이런 날이 안 오는 줄 알았습니다. 전화를 받고 엉엉 울다, 마음 가라앉히면, 또 눈물이 났습니다. 대학 다닐 때, 스쿨버스 안에서 매일 시집을 읽었습니다. '틈'이란 시창작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사는 게 즐거웠습니다만, 시를 너무 못 써서 서러웠습니다. 제겐 시에 대해 이야기할 동기도, 등단한 선배도 없었습니다. '이 외로움은 내 거야, 동생들에겐 물려주지 말아야 해' 하며 늘 강한 척했는데, 속으론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당선한 것보다 '틈' 동생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겨우 서른인데 세상이 참 아픕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서, 지구를 지켜내야겠습니다. 이영주, 이용준, 김한선, 자랑스런 '틈' 가족, 치열한 '금요반' 식구들, 눈부심 그 자체인 'GQ' 스태프들, 왁자지껄한 '문장의 소리' 팀, 좋은 친구는 나의 영예입니다. 아빠, 엄마, 형, 당신이 곧 나입니다. 등 두드려주신 박상륭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종이야, 쉼표야, 말줄임표야, 오래오래 미안. (이우성 29세.
[심사평]
이우성의 시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생기 있고 활력이 있다. 목소리도 힘 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우성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함께 응모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편차 없이 고르게 살아있는 감각을 보여주어 앞으로 계속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신경림, 김기택)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녁의 황사 / 정영효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당선소감]
‘언젠가’라는 말을 믿으며 지냈다. 그 ‘언젠가’가 일찍 온 것인지 늦게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부유하던 밤들은 행복했다. 비록, 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자괴감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일지라도 그 속에 희망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출발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확신한다. 시라는 아포리아에서 계속 길을 잃고 싶다.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을 호명하는 것으로 들뜬 소감을 채운다. 존경하는 어머니 서 여사, 사랑하는 누나들과 매형들. 시를 쓰는 걸 모르고 지내줘서 오히려 감사하다. 끝으로 부족한데도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치열하게 살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정영효 1979년 경남 남해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심사과정에서 우리들이 주목한 것은 체험의 구체성이었다. 언어의 유려함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응모작을 검토하였다. ‘저녁의 황사’는 사막으로부터 발 딛고 있는 현실로 상상력을 끌어오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웠으며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나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자신의 표현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른 응모작 ‘마방’이나 ‘바람과의 여행’이 영상물을 통한 간접 체험을 다룬 것이라면 ‘저녁의 황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 우리들은 주목하였다. (황동규, 최동호)
■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심사평]
‘즐거운 장례식’은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으나 그러한 단점보다는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존의 생각을 즐겁게 뒤집는 역설적 묘미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름대로 높은 시적 성취도를 이루고 있다.
‘관을 들어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작은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긍정성과 순응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자 기쁨의 축제다. 작은아버지는 ‘암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릴’ 정도로 오히려 남은 가족들을 위로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하는 이 반어적 발상을 통한 시적 구현은 이 시인의 앞날에 대한 신뢰의 깊이를 더해준다. 앞으로 한국시단을 빛내는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황동규·정호승)
■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당선소감]
많이 부끄럽습니다. 아직 시인이 될 그릇이 못 됨을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밥 짓고 빨래하고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모든 일들이 시와 같아야 함을, 그 모든 일들이 이미 시임을 알면서도 순간순간 욕심 부리고 옹졸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으니 아직 시인이라는 이름을 받기에는 멀었지요.
하지만 한 편으론 참 기쁩니다. 3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당선의 소식이 마침내 제 몫이 되었다는 것이 꿈처럼 낯설지만 그래도 이 기쁨 무엇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저의 무엇을 보고 부족한 저의 손을 들어 주셨는지 심사위원님과 대전일보사에 빚을 진 기분입니다.
이 부끄러움과 감사함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길바닥만 내려다보던 제가 이제 손차양을 하고 길 너머를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 너머에 닿으려면 쪼그려 앉아 제 마음속 강물 줄기 오래 바라다보는 일 더 많아야 함을 압니다.
새벽마다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평생을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사신 아버지, 당선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하던 남편과 나의 보석 두 아들들 그리고 처음 시에 입문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제게 가르침을 주신 권선생님과 등단문의 산방거인님께 감사드립니다. 네 기쁨이 온전히 내 기쁨이 된다던 친구와 서림문학회 동인들 감사합니다. 평생 삶으로써 시를 쓸 것을 당부하신 중학교 은사님의 말씀이 앞으로 제 글의 지표가 될 것임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이어야 함을 또한 압니다.
[심사평]
<비 온 뒤>는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작품이며 메시지가 분명하고 시적 논리가 합당한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또르르! 굴러/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라는 첫 부분의 표현들에서 보듯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목격된 ‘빗방울들’에서 시적 사념을 출발시켜 그것을 약동하는 언어의 충전으로 끌고 나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시로써’ 터트릴 줄 아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괜스리 어렵거나 추상적이거나 한 표현 한 구절 없이 자기 소리를 하나의 작품 안에 오롯이 담아낼 줄 아는 그 시적 절제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한마디로 싱싱하고 단정하며 마지막 연에서 보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배시시 행간 밖으로 삐져나올 듯한 작품이다. 선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그의 감각이, 그의 언어가 사념과 철학을 동반하면서, 오늘의 유행에 주눅 들지 않으면서 더욱 깊은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세영, 이시영)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담쟁이 넝쿨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당선소감]
초등학교 때 나는 자주 옆길로 빠졌다. 실개천을 끼고 있는 쓰레기하치장에서 병뚜껑, 깨진 그릇, 털 뽑힌 인형, 몽당연필 보석 같은 소꿉놀이에 정신 팔려 학교를 가지 않거나 지각을 하기 일쑤였다. 지금 그렇다. 철없고 맹목적이던 어린 시절처럼 이른 밤 시와 지내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 등교시간이 부산스러웠다. 써 놓은 시가 잘 있는지 시간마다 만지작거렸다. 만지다 보면 상처 나고 스쳐간 모든 것들이 눈물나게 하였고 꿈틀거리게 하였다.
문을 두드릴 땐 몰랐으나 들어선다 생각하니 앞이 캄캄합니다. 한 발짝도 걷기 힘든 늪이거나, 하늘마저 보이지 않는 정글에 빠질까 두렵습니다. 시 한 편 내밀 곳 없이 혼자 걸어왔듯이 아프며, 아물며 헤쳐 가도록 하겠습니다. 내세울 것도, 재주도, 능력도 없습니다. 속살 끌어안느라 칼바람에 시퍼렇게 멍든 배춧잎 같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늘 가슴속에 계셨던 김창근 교수님 건강하십시오, 노원희 교수님. 마경덕 선생님, 이상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늦게나마 인연 맺은 '잡어' 동인의 최희철, 박진규, 김성환, 백진희, 최병문 님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 형, 같이 갑시다. '시담' 벗들에게 늦은 안부를 전한다. 해정, 혜정아, 너희들이 있어 내가 오래 살지 싶다. 애간장만 태운 딸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계신 어머니 아버지, 시 쓰는 일에 몰두하는 아내가 보기 좋다는 남편, 강이, 산이, 가족 모두 사랑합니다. 재주 없는 저에게 귀한 자리를 펴 주신 부산일보사에 거듭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조원 1968년 경남 창녕 출생. 동의대학교 미술대학 회화 전공)
[심사평]
당선작 '담쟁이 넝쿨'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능숙하게 끌고 가면서 일상적인 소재를 적절한 이미지와 결합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담쟁이 넝쿨이라는 시적 대상에다 건강하고 격조 높은 사랑의 고백을 매우 탁월한 기법을 이용해 얹어놓았다. 이 시가 발산하는 그윽한 울림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함께 응모한 '시루 속 콩나물'의 대담한 상상력도 이 시인을 믿음직스럽게 만들었다. 축하드린다. (김종해, 강은교, 안도현)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당선소감]
내 방에는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침은 내 방을 찾아오지 않고 멀리서 보고 있습니다. 그 어둠이 무서워 전등 스위치를 찾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스위치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끝이 없는 일은 나를 더욱 내 방에서 나갈 수 없는 외톨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후가 저물어가는 시간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서만 숨을 쉬었던 시에게도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다시는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기쁩니다. 당선 소식을 자랑하고 싶어 여기 저기 전화를 겁니다. 햇빛도 덩달아 신이 나서 내 방안 구석구석 돌아다닙니다.
아침 햇빛이 베란다 가득 들어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햇빛이 따라옵니다. 환하게 비치는 내 몸을 봅니다. 내 몸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서있습니다. 어둠에서만 숨을 쉰 내 언어들도 이 햇빛에서 고른 숨을 쉬게 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합니다. 오랜 기도를 끝내고 나는 일어납니다.
먼저 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국제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늦은 시 공부에도 늘 칭찬만 해주신 엄마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며 묵묵히 나를 믿어주고 밤 늦도록 컴퓨터 앞에만 있는 나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주곤 했던 남편과 우리 아이들, 민지 양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시의 씨앗을 찾으러 같이 다녔던 조덕자, 이궁로, 유금오 시인에게도 마음 가득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진영미 씨에게도 그동안 많이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도순태 1957년 경북 경산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는 시가 갖는 힘과 긴 시를 흔들리지 않고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이 돋보이는 시였습니다.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과 우리 사회의 구조조정이란 문제를 서정적인 문체로 제시하며 '희망'이란 메시지를 선물하고 있는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당선작과 같이 보낸 시들의 어떤 작품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어 그런 신뢰가 당선자의 앞으로 활동에 큰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당선자 도미솔 씨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다음에도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말을 전합니다. (천양희, 정일근, 문태준)
■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배롱나무꽃 / 정성수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당선소감]
언젠가 박사학위를 받은 친구에게 부러움과 수고의 말을 전하자 친구는 ‘학위라는 것은 별게 아니야. 그것은 다만 스승이 없어도 혼자서 학문을 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일 뿐이지’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나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진위를 확인한 바 없지만 지금도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신춘문예 당선이야 말로 이제 혼자서 글을 써도 좋다는 징표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 동안 많은 시간들을 시 쓰는 일에 매달려 왔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평생교육원이나 문학교실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해오면서 동시를 읽고 지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와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교사라고 하는 직업이 결국 나를 여기가지 데리고 온 셈이다.
가끔 보탬도 되지 않는 짓을 하느냐는 아내의 말이나 시 같지도 않은 시라고 혹평을 받을 때면 정말 나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약 같은 중독의 유혹과 시의 매력에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강단할 때가 다가온다. 그 동안 수없이 쳐 보내던 종소리도 여운만 남긴 채 허공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종은 찌그러져도 종소리만은 오랫동안 깨지지 말고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내 시를 어여삐 봐주시고 선해 준 심사위원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이제 출발선 상에 있는 마라토너가 된 기분이다. 시의 길은 멀고 해는 지고 있다. 가다가 쓰러질 때 까지 시를 끌어안고 달릴 것이다. 오늘 밤은 옴팡집 목의자로 친구를 불러내어 오랫동안 술잔의 깊이를 재고 싶다.
[심사평]
‘배롱나무꽃’을 당선작으로 내어 밀기로 하였다. 요설적 산문적인 시행 처리보다도 응축적인 시의 결정과 그 여운을 사기로 한 것이다. 정성수 시인의 시의 앞날을 빌어 마지않는다. (최승범)
■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증명사진 / 김재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당선소감]
오늘 순천만 갈대밭을 다녀왔습니다. 석양 속에서 푸른 날들이었으나 마른 화살들로 가득한 벌을 걸으며 나는 이 벌판처럼 아름다운 과녁이었는가, 푸르게 날아와 주었던 캄캄하게 식어가는 내 화상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기적인 연인처럼 시에게 세상을 변혁하라, 길을 보여달라 악을 쓰다 차갑게 배신했지만 긴 시간 동안 잠복해 있다가 불현듯 나야 나, 이 사람아, 어깨를 쳐준 시에게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다락에 넣어둔 먼지 쌓인 꿈을 닦아주며 다시 써 볼 것을 권해준 기연이 씨. 나의 아내여, 당신이 베풀어준 이 많은 것을 나는 다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해찬아 슬아야, 나의 신앙들아. 나는 너희에게 어떤 아버지일까. 주위에서 나를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렵고 무서웠단다. 나의 시는 미래의 너희들에게 남기는 편지일 것이니, 내 심장의 소리와 색깔을 적을 것이다. 비루할지라도 아름답게 보아주렴.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절벽에서 한 점 가능성을 귀히 여겨 손을 내밀어주신 정윤천 선생님, 시의 엄정함을 가르쳐 주신 강인한 선생님, 매 시편마다 쓴 소릴 아끼지 않으셨던 큰누님 강정숙 선생님, 다시 시를 쓰는 길의 절반을 대신 걸어준 고성만, 조성국 형. 놀이터가 되어준 시인회의, 시마을과 시마을 동인, 영원한 마음의 고향 터앝문학동인회 그리고 광주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심사평]
‘증명사진’을 흔쾌히 당선작으로 골랐다. 풍향계를 다룬 기성시인의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취업이라는 현대사회의 다소 무거운 고민을 예리한 관찰과 안정된 문장으로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의한 비유가 적절하고, 구조도 완결미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시인으로 성공하기 바란다. (이문재, 안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