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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 지난 3월 8일 오후 9시경 서울 서초구청 앞에서 장애인 한 명이 분신을 했다. 노점상이었던 그는 구청의 극심한 노점단속으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갈 터전을 잃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중증장애인인 최정환 씨는 결국 3월 21일 새벽 1시 50분에 그의 고달픈 인생을 마감했다.
장애등급 1급 1호인 노점상 분신!
37살인 최정환 씨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고아이다. 16년 전 교통사고로 하반신마비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그는 마천동에 있는 해바라기회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행상으로 고달픈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는 고아가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그의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85년 광고를 통해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아버지와 몇 차례 만남을 가졌으나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다. 후에 그의 동료가 최씨의 아버지를 찾아가 최씨를 만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니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아보니 내 자식이 아니었다"라며 친자 사실을 부인했다. 비정한 세태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최정환 씨는 부자간의 정을 나눈 것도 잠시, 다시 고아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친자부인을 했지만 법적으로는 아버지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최정환 씨는 혼자 사는 중증장애인이었음에도 정부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가 한 행상의 종류는 다양하다. 껌, 수세미 행상으로 시작해서 결국에는 테이프 행상에 이르기까지 그가 안 해본 행상은 없을 정도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행상은 정말 쉽지 않았다. 밤낮없이 감시하는 단속반원들은 행상인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존재라고 한다. 이 단속반원들의 마수가 최정환 씨에게도 뻗쳐오고 있었다.
지난해 6월 최정환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양재동 전철역 부근에서 테이프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불시에 들이닥친 단속반원들에 떠밀려 넘어졌고, 이 과정에서 하나 남아있는 왼쪽다리마저 부러지고 말았다. 당시 피해보상을 받으러 서초구청을 찾아갔는데 "고소만하지 않는다면 편안히 장사하도록 해주겠다"는 담당자의 말에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피해보상을 요구하지도 않고, 나아가 고소도 하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최정환 씨였다.
입원 3개월 만에 돈이 부족해 퇴원한 최정환 씨는 다시 행상을 하러 양재역 부근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나갔다. 그러나 고소를 하지 않은 그가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 서초구청의 단속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다리가 낫지 않아 기브스를 한 그를 계속 괴롭혔던 것이다.
참을 수 없었던 최정환 씨는 결국 계속되는 단속에 견디다 못해 서초구청의 단속반원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병원에서 끊은 전치 8주의 상해 진단서를 가지고 "과잉단속으로 부상을 당했으니 보상을 받게 해달라"라고 서초경찰서를 찾아 갔지만 서초경찰서는 그의 호소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겨울철은 노점장들이 장사를 하기 힘든 계절이다. 행상 장애인들에게 더욱 힘들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최정환 씨는 작년 겨울을 일절 장사를 나가지 목하고 다른 행상 장애인들과 함께 마천동 움막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올해 봄이 되어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직 기브스를 풀지 못한 몸을 이끌고 행상으로 나섰다.
그러나 양재역 부근에는 여전히 단속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8일 신고를 받고 나왔다는 단속반원들은 그의 생계수단인 스피커의 배터리를 압수해 갔다. 최씨는 서초구청 당직실로 찾아가 단속반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배터리를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서초구청 담당자는 그의 요청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서초구청 앞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당겼다.
최씨의 동료들은 당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얘기한다. "아무래도 작년에 고소한 것에 대한 보복조치 같아요. 고소를 했는데 곱게 놔둘리는 없잖아요"
다른 견해도 있다. 최정환 씨와 마찬가지로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한 노점상은 "3월에 대대적으로 노점상 철거를 했어요. 단속반원들이 시범적으로 몇 군데 겁을 준 것 같은데 재수없게 최정환 씨가 걸린 것 같아요...., 사람 잘못 건드린거죠. 갑자기 일이 커져버렸으니까" 라고 말했다.
분신 후 강남시립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최정환 씨는 얼굴에 3도, 신체 2도, 전신 88%의 화상을 입고 14일을 누워 신음해야 했다. 분신 직후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찾아온 동료들에게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복수해달라",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3월 21일 최정환 씨는 그 힘든 인생을 끝냈다. "최씨는 자기보다 더 딱한 처지에 있는 장애인에게 자신의 노점자리를 두말없이 내주었어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동료들은 최정환 씨를 추억하며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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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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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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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 장례식 제대로 치르지 못해
최씨의 동료들이 그의 분신을 가슴아파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최정환 씨의 분신이 가슴 아픈 문제로 받아들여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최정환 씨의 분신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애인이 비단 최정환 씨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씨의 동료들은 최씨 사건이 발생하자 1992년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승학 씨를 떠올리고 있다. 박씨는 최씨와 마찬가지로 노점을 하며 근근히 살아오던 장애인였다. 그도 극심한 노점상 단속으로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막막해져 부인과 2명의 자녀를 두고 1992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최형도 분신을 하잖아. 그때 우리가 무슨 대책을 마련했으면 최형이 분신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러면 과연 행상 장애인들에게는 어떤 대책이 필요한 것인가?
최정환 씨가 분신하자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가 꾸려졌다. 비대위는 대한성인장애인복지협회(이하 성장협)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이하 전장협), 전국노점상연합회 등 세 개 단체를 중심으로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 등 장애인 단체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은 강남병원에 비대위 사무실을 마련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최씨의 분신을 알려내고자 애를 썼다.
3월 21일 최정환 씨가 숨을 거둔 뒤 비대위는 "고 최정환 열사 장례준비 위원회"로 그 체계를 전환했다. 장례준비위원회는 3월 23일 기자회견을 통해 장례식 이전의 일정과 이후 그들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에 대한 향후 일정을 발표했다.
비대위는 현재 소외받는 민중들이 분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국가경제 발전 논리에서 항상 민중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라며 정부에 대해 최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장례준비위원회는 24일 성균관 대학교에서 규탄집회를 가졌다. 이 날은 고 최정환 열사에 대한 추모와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16m 철탑 아래로 투신한 철거민 박균백 씨의 가슴아픈 사건을 함께 규탄하는 자리로 서, 1천5백여 명이 모인 이 집회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의 행렬을 지켜볼 수 없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진행됐다.
3월 25일, 최정환 씨의 장례식이 예정돼 있었으나 결국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다. 당일 새벽 2시30분경 강남시립병원에서 장애인과 노점상인 150여 명이 빈민장을 치루기 위해 최씨 주검을 1t트럭에 싣고 연세대로 출발하던 중 병원 앞에서 상주하고 있던 전경 500여명에 의해 시신을 탈취당한 것이다.
장례준비위원회의 위원들은 바로 강남경찰서로 달려가 "시신을 돌려 달라"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고 오전 7시30분경 법정 시신인도자인 홍남도(최씨의 동료, 행상 장애인) 씨가 경찰에게 "빈민장의 영결식과 노제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준 뒤 겨우 주검을 찾을 수 있었다.
최씨의 주검이 동료들에 의해 경기도에 있는 용인 카톨릭동원묘원에 조용히 묻히는 같은 시각, 시내 곳곳에선 최정환 씨를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치열한 시위가 벌여졌다. 특히 최씨의 장례식이 예정돼 있던 연세대 정문 앞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깨어진 유리조각들, 희뿌옇고 매캐한 최루탄 가스, 그리고 여기저기 그을려진 모습은 왜 이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왜 이렇게 울분을 토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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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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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 빈민 중증장애인에 대한 대책 필요해
3월 23일 장례위원회가 집회와 이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한창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 시대를 맞아 성장우선주의에서 탈피해 삶의 질을 높이는 방안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복지정책의 확대 방침을 밝혔다. 또한 세계화추진위원회 보고회의를 주재하면서 "이제는 낙후된 소외계층의 복지문제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며 "장애인에 대해서 재활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고용기회 창출을 위한 정부지원을 강화하라"며 새로운 장애인 복지정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최정환 씨의 분신을 무마하려 이런 발표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발표로 복지정책이 확대 실시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실제로 비위대는 김대통령의 발표와 상관없이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정환 씨 사건을 바라보는 장애인 단체들의 의견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이 있다. 더 이상 장애인들이 이렇게 죽어가서는 안된다. 장애인에 대한,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최씨의 장례식 아닌 장례식이 끝난 후 공대위로 전환된다던 장례위원회는 3월 29일 이번 사건을 평가하는 것으로 최정환 씨의 분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던 많은 사람들은 얻은 것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끝낸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씨의 분신으로 인해 장애인 단체들의 중증장애인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들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최정환 씨를 땅 속에 묻으며 일단락 지어진 이 사건이 사람들 속에서 그대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소외받던 장애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터뷰/
‘무조건 단속이 능사가 아니다’
최정환 씨 장례준비위원장 김도현 (대한성인장애인복지협의회 회장)
- 이번 최정환 씨의 분신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최정환 씨의 분신은 단순한 감정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본다. 1급 1호의 장애를 가진 최씨는 중증장애를 가지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힘든 자신의 생활을 비관하고, 희망이 업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위해 분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이 사건을 통해 비대위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을 동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본다. 우리가 이번 사건을 통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사회의 인식전환이다. 장애인 자신의 능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가족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최씨의 경우 2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 못했다.”
“이러한 장애인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생계수단을 가지지 못한 중증장애인들이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는 생활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중증장애인에 한해서만이 아니라 기층민증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확대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또한 노점상을 무조건 단속한다고 노점상이 사회에서 없어질지는 의문이다. 즉 무조건 단속으로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분명한 이상 무대책인 노점상의 단속이 아니라 오히려 노점상을 합법화시켜야 한다.”
- 앞으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이번 사건은 400만 장애인의 문제이다. 장애인 단체들은 단결해서 생계수단이 없는 장애 우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일에 우리도 기꺼이 동참해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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