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100년 전은 우리나라도 새로운 근대 국가를 세워야 할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강점당하면서 36년간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는 철저하게 그들의 국익과 야욕만을 위해 우리 강토 구석구석을 샅샅이 조사하고 계측해 지도를 만들었으며,
그 지도를 바탕으로 주도면밀하게 수탈과 착취를 자행했다.
당시 토지조사사업에 직접 참여했던 조선총독부 관료 와다 이치로(和田一郞)가 1920년에 펴낸
<조선토지지세제도조사보고서(朝鮮土地地稅制度調査報告書)>의 복간판(1967년)에
역사학자 하타타 다카시(旗田魏)가 쓴 해설을 보면
“(전략) 이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에 있어서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확립과 지세 부과의 정리를 목표로
조선병합(1910년) 직후부터 1918년까지 8년여의 세월과 2천만 원의 거비를 들여 단행한 대사업으로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조선 농민이 토지를 잃고, 막대한 국유지와 지주 소유지가 창출된 것은 주지한 그대로이다.(후략)”
이와 같이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병합하면서 조선총독부 산하에 임시토지조사국을 두고
주 산업인 농업을 구조적으로 개편해 식민지 통치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먼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토지조사는 크게 지적제도(地籍制度)의 확립을 위한 토지소유권 조사, 지세제도(地稅制度) 확립을 위한 토지가격 조사,
한반도의 지리를 밝히려는 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한반도 전체의 토지 종류와 소유자를 조사해
토지조사부와 지적도를 만들어 토지 소유주와 경계를 사정(査定)함으로써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던 토지에 대한 분쟁을 일거에 해결하려는 지적제도의 확립이었다.
▲ 이 지도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1월에 제정된 삼림법에 의거, 융희 4년(1910년) 4월 민간인이 소유하고 있던 임야를 개인이 측량수수료를 부담하고 측량을 실시한 후 작성한 민유임야약도다. 임야의 소재나 면적, 소유자, 측량자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당시에는 이 약도를 첨부해 기간 내에 농상공부대신에게 신고하지 않으면 국유지로 환수당했다 한다.<필자 소장>
소재·지번·지목·면적·경계·소유관계 등 기록
지적도(地籍圖·cadastral map)란 한마디로
지적, 즉 토지의 각 필지에 대한 소재·지번·지목·면적·경계·소유관계 등을 기록해 놓은 지적공부(地籍公簿)의 하나로
토지소유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토지구획정리사업이나 용지보상 등에 있어 기초자료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필지(筆地)란 토지의 등록단위로 지적공부에 등록하는 법률적 단위 구역이고,
지번(地番)은 필지에 부여하여 지적공부에 등록한 번호, 지목(地目)은 전이나 답 등 토지의 주된 용도에 따라
토지의 종류를 구분해 지적공부에 등록한 것이고,
경계(境界)란 필지별로 경계점들을 직선으로 연결해 지적공부에 등록한 선을 말한다.
지적공부란 지적을 명확히 하기 위해 작성된 토지대장·임야대장·지적도·임야도·수치지적부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