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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9일 아침. 구럼비의 여명이 밝는다. 이 고요, 이 평화 영원하기를. ⓒ심영섭 | 밤이 깊어 뜨락에는 풀벌레 소리 울려옵니다. 엊그제 입추를 지나고 나니 자연의 시간은 신기하게도 서늘한 바람을 밤으로 토해 놓습니다. 모처럼 펜을 들어 편지를 쓰려 하니 마음은 이처럼 서정에 넘쳐 차오르는 달처럼 고요해집니다. 그러나 이 밤, 강정의 밤은 얼마나 뜨거울지…. 태풍으로 쑥대밭이 된 구럼비의 텐트들을 추스르며, 한편으로는 강제 진압이 임박했다는 소문들 속에서 오늘도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마을 곳곳을 지키고 있을 도연 씨와 평화의 길벗들을 생각하면, ‘서늘해지는 바람’이며 ‘풀벌레 소리’니 ‘입추’니 ‘뜨락’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사치에 겨운 언어인지를 부끄럽게 되돌아봅니다.
엊그제 CCA(아시아교회협의회) 파견단 일행과 강정마을 방문을 마치고 난 후 4·3평화공원으로 향하던 도중 핸드폰으로 날아 온 문자 하나, “[강정마을 속보] 주민들과 경찰 대치 중! 둥글이님 연행, 도연 씨 전경 방패 폭행으로 실신!” 그런데 그 때 저는 한가롭게도 CCA 방문단 일행과 함께 4·3공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주상절리의 풍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잘 통하지도 않는 언어로 손님 일행을 안내하면서 제 가슴은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있어야 하나? 아, 내가 지금 이렇게 한가히 풍광 속을 거닐 때인가?’ 하여 저는 통하지도 않는 언어를 넘어서 저의 마음을 어떻게든 쏟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서러운 마음으로 떠오르는 노래 한마디를 읊조렸습니다.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피인 꽃다지. 나 오늘 밤, 쓸쓸한 창살 아래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없어도, 퀭한 눈 올려다 본 흐린 천장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 그저 그 노래에 깊숙이 배어 있는 서정이 저의 답답함과 부끄러움을 위무하는 것을 느끼며 말입니다.
그런데 도연 씨! 그 때 제 가슴에 울리던 물음 - ‘아, 내가 지금 여기 있을 때인가?’ 하는 물음말입니다. 그 물음의 근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흰 옷 입은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마리아에게 전하신 말씀! - “가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나니 너희가 거기에서 그를 뵈오리라!” 하신 말씀에 잇닿아 있음을 느낍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고백하는 우리의 설 자리는 온갖 정치 권력·종교 권력·경제 권력이 서 있는 기득권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온갖 권력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갈릴리, 무지렁이 어부들과 소작농들만 득실거리는 천덕꾸러기 땅 갈릴리임을요. 예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영원토록 변함없이 그 변방의 땅 갈릴리를 걷고 계신다는 말씀인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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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기지 획책하는 해군기지 결사반대! 전국화 초기(올해 4월)에는 평화지킴이 보다 현수막이 더 많았다. 평화의 투쟁현장에는 십자가와 연등도 서로 어울려 온전한 평화 그대로다. ⓒ심영섭 | 강정마을 구럼비 언덕의 도연 씨! 몸으로는 제도권교회를 떠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품고 갈릴리 예수를 그리워하며 ‘참 예배의 현장’에만 가면 눈물 글썽이며 간절히 두 손 모으는 도연 씨! 그 바쁜 강정마을 평화의 현장 일터에서도, 크고 작은 예배와 기도 모임들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먼저 달려와 주변을 살피고 손길을 도우며 끝까지 예배 자리를 지키는 도연 씨! 당신의 그 간절한 기도의 모습 앞에서 오늘의 제주지역교회는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이름도 낮선 분쟁 지역을 찾아가 10여 년 세월 속 청춘을 바치며 평화운동을 이어 오고 있는 당신 앞에서 한국교회와 제주지역교회는 도대체 무엇인지! 주일이면 온갖 화려한 조명 아래 성가대를 출연시키며 온갖 종교적 이벤트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관에서 이끄는 허울 좋은 ‘세계7대 자연 경관 선정 이벤트’에는 ‘평화의 섬 제주’를 들먹이며 대대적인 기념 예배와 참가 몰이에 나서면서도 정작 깨어지는 평화의 섬 - 짓밟히는 강정마을 주민 곁에는 얼씬도 않는 제주지역교회들. 힘이 곧 평화라고 주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맞서 ‘그리스도의 평화·십자가의 평화’를 지키겠다며 단식으로 기도하는 소수의 목사들이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한복판에서 ‘제주 해군기지 유치 적극 지지 성명서’를 기획하며 엉터리 여론 몰이에 앞장서는 제주 기독교 지도자들. 이 어처구니없는 무지몽매는, 이 어이없는 반신앙 · 비양심 · 파렴치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당신은 언젠가 그렇게 물으셨지요? 이 어처구니가 혹시 지난 제주의 역사적 비극인 4·3사건에서 폭력과 광기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서북청년단과 그 후예들이 제주 기독교에 깊숙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요인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 속에서 친일의 잔재와 후손들이 각계에 포진한 채로 끝없는 기득권 지키기에 나서고 있는 것처럼 제주 기독교 깊숙이 뿌리 내린 채 온갖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서북청년단과 그 후손들의 기득권적 행태와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제주의 비극적 역사 구조상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것입니다.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에 있다는 소장 역사학자의 소식도 전해들은 바가 있습니다. 아마도 머지않아 분명한 학술 자료를 통해 구체적인 증거들을 확인할 날도 멀지 않을 듯싶습니다.
하지만 도연 씨! 오늘 한국 사회의 수구적 보수성이 친일 잔재 세력의 영향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오늘 제주 기독교의 이 숨 막히는 반역사적 행태 또한 단지 서북청년단과 그 후예들의 영향력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단초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두려움 즉 비존재로 화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뜨악하시지요? 도대체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고 말입니다. 이제 잠시 그 사설을 늘어놓겠습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일제 식민 시대가 길어지고 공고화되어가면서 한국교회는 ‘자기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침내 신구약 성경의 근본정신인 구약의 출애굽정신과 신약의 하나님나라운동 정신을 망각하기 시작합니다. 하여 점차 당시의 애굽 세력인 제국 일본에 협력하거나 그 그늘 아래 안주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자기 생존 전략이었던 거지요. 이 자기 생존 전략은 1945년 민족의 해방/분단과 더불어 새로운 진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당대의 새로운 애굽 세력인 제국 아메리카가 마치 우리 민족에게는 출애굽 해방의 하나님처럼 여겨지는 상황 속에서 가뜩이나 새 애굽 세력인 제국 아메리카는 이승만 세력을 앞세워 ‘기독교-자본주의-승리자’의 모습을 띠고 들어오게 됩니다. 겉모습은 해방의 하나님인데 속 내용은 애굽의 맘몬과 가나안 땅의 바알신앙을 고스란히 지니고 들어온 것이지요. 이때부터 한국 기독교 사회 속에는 주류에 편승한 ‘승리주의-성공주의-패권주의 세력’과 이에 맞서는 소수의 ‘예언자적 십자가 정신-갈릴리 예수 정신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한국 주류 기독교 세력의 영적인 환상과 바벨탑은 1960년 4․19혁명과 더불어 잠시 주춤하는가 하였지만 곧바로 이어진 박정희 군사 쿠데타와 더불어 시작된 개발주의 독재정권에 기독교 주류 세력이 기생하면서 다시금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적극적 신앙-물질주의-축복론’ 속에 파묻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두 세력이 독립된 개체의 연합과 같았지만 점차 오랜 공생의 역사를 거치면서 ‘물질주의-패권주의-자본주의’ 세력과 ‘적극적 신앙-성공주의-승리주의’ 주류 기독교 세력은 뗄 수 없는 두 머리 한 몸뚱이의 야합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지탄받기에 까지 이른 비극의 역사 드라마입니다.
도연 씨! 여기에서 다시금 이야기의 근본으로 돌아가 봅니다. 도대체 한국 기독교 주류 세력이 패권주의-승리주의-성공주의에 빠지게 된 근본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국 기독교 주류 세력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겁니다. 그 두려움은 구체적으로 교회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대로 현실에 저항하다가는 주님의 몸인 교회가 끝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이었지요? 예수께서는 일찍이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나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십자가-부활-생명)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신앙의 본질, 그것은 두려움의 극복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극복은 일시적 위안이나 평안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의 전 존재를 십자가 복음의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전적인 신뢰와 자기 포기 곧 전폭적인 내어 맡김에 있습니다. 이 신앙에는 어떠한 타협이나 중간 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 앞에 선 존재에게는, 오직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함이 있을 뿐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그 분께 달려 있는 거지요.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마침내, 기나긴 일제의 어둠 속에서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겁니다. 자기 소멸과 멸망에 이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하나님이 패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참으로 어이없는 두려움이지요. 그러나 냉정히 돌아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실은 십자가의 하나님이 ‘뻥’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던 게지요. 그것은 사실 불신앙이요, 자기기만임에도 불구하고 그 캄캄한 애굽의 암흑 속에 사로잡힌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광야의 시험에서 두려움의 끈에 붙들려 마침내 사단에게 절하는 반신앙의 길을 택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도연 씨! 저 자신 또한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지난 짧은 9년여의 목회 생활 동안에 나는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하고 말입니다. 때때로 해군기지 문제 등 첨예한 사안에 나름 ‘부끄러운 참여’를 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저의 내면은 온통 두려움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당회에서, 제직회에서, 심방과 대화의 시간 속에서, 심지어 설교단 위에서도 저는 두려움과 싸우며 온갖 미망에 사로잡혀 왔습니다.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것이 성경의 변함없는 음성이건만 저는 수없이 주저하고 망설이고 타협하고 침묵하였습니다. 저는 수없이 믿음을 배반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제 믿음은 두려움에서 온전히 자유하지 못한 부끄러움 가득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누구를 비난하겠습니까? 그저 부활의 주님께서 저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자비를 베푸시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이 코앞에 다다른 지금, 이 새벽 공권력 투입이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새벽기도회 인도를 핑계로 그저 이렇게 멀찍이 서서 주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문득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나오는 ‘진짜 주인공’ 기찌로가 떠오릅니다. 닭 울기 전의 베드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단 한번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주님을 아주 버리지는 못하고 부끄럽게 울며, 배반하며, 찌질하게 주님을 아주 멀찍이서 따라가는 기찌로. 그것이 오늘 저의 모습입니다. 언제일까요? 이 부끄러움을 벗는 때가. 언제 비로소 이 부끄러움을 벗고서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 주님을 그렇게 바짝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 때가 언제일까요?
저는 오늘도 그 믿음의 때, 십자가 - 부활 신앙으로 거듭나는 그 때를 부끄럽게 앙망하며 기찌로처럼, 닭 울기 전의 베드로처럼 그렇게 주님을 따라갑니다.
도연 씨! 강정마을 구럼비 언덕의 도연 씨!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 2011년 8월 어느 날, 제주 서림마을에서, 부끄럽게 ‘흐르는 강물’ 드림 -
※추신 - 도연 씨! 새벽 기도 끝에 곧바로 휴대폰 문자를 살핍니다. 아무것도 떠 있지 않습니다. 연이어 인터넷을 열어 살핍니다. ‘강정마을, 야당의 국방예산연계 압박으로 공권력 투입 연기!’. 비로소 안도합니다. …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합니다.
송영섭 제주 서림교회 목사 |
첫댓글 부끄럽네요..현실에 타협하고 안주하려는 자신이..끊임없이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