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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한국불교의 역사속에서 쟁점이 되었던 중요한 논쟁거리가 몇 있다. 원효와 의상의 사상적 대립이 그것이고, 백파의 삼종선(三種禪)을 둘러싸고 후학들에 이르기 까지 100년간이나 벌어진, 그 유명한 "초의 백파 논쟁"이 그것이다. 삼종선과 이종선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에 임제선의 위상을 두고 벌어진 두 고승 백파 긍선(1767 ~1852)과 초의 의순(1786~1866)간의 선 수행 논변은 조선 후기 지성사의 한 면을 크게 장식한 일대 사건이었으며, 시간만으로도 1790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약 1세기 반에 걸친 대 논쟁이었다. 당시 백파 긍선과 초의 의순 간의 선 논쟁, 백파에 대한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비판등은 훗날의 불교계에서도 다시 찾아보기 힘들만큼 치열한 것이었다. 이후 "초의 백파 논쟁"은 조선 후기 불교계를 활성화 시키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백파는 조선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오랜 정체기를 헤치며 조선후기 불교의 참신한 중흥을 일으킨 화엄종주이다. 성리학이 주도하는 조선후기 불교사회에서 당대 선불교의 정통성(조사선, 간화선)을 추구하고자 한 백파는 "선문수경"을 내놓았고, 이에 맞서 반박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 선사였다. 초의는 실학의 불교적 수용자라고 지칭되는바, 그는 교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며 반박했다. 이리하여 초의는 선을 넷으로 나누어 구분한 선문사변만어를 펴냈다. 이 논쟁의 와중에 추사 김정희가 끼여들어 백파와 한판의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이게 되어, 추사가 백파망증 15조를 써 보냈는데, 백파는 이것을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 꼴"이라고 한마디로 무시했다고 한다. 백파의 삼종선 이론은 임제선의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객관화 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기존의 선 이론은 이종선, 즉 의리선=여래선, 격외선=조사선의 선 분류법인데 반해 백파는 의리선-여래선-조사선의 삼종선 구도를 세워 깨닫고 수행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리선, 중근기의 중생이 본분과 향상을 깨닫는 것인 여래선, 상근기의 중생이 진공과 묘유를 향상함을 깨닫는 것인 조사선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백파의 이론에 반기를 든 이가 초의와 추사였고 이후 100년간 진행된 논쟁의 전개과정과 연구결과는 초의와 추사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그의 법손인 優曇 조차도 백파의 선론을 비판했다. 그리하여 이 논쟁의 결과는 불교계의 흐름을 초의계로 기울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신랄하게 백파를 비판했던 추사는 뒷날 임종한 백파를 위해 "우리나라에 율사가 없던 차에 백파율사가 나타나 일종(一宗)을 이루었다"는 말로 시작되는 칭송의 글을 지어 비문을 만들 정도로 서로를 존경하였다. 추사는 백파가 달마를 닮았다 하여 자신이 숭봉해 오던 달마상을 백파에게 보내면서 찬을 지어 [기연도 기이하다. 달마는 서쪽으로 갔는데 그 보신이 동방에 나타났는가] 하였고, 또 백파 비문을 지으면서 [전면 글씨를 대기 대용으로 대서 특서 않으면 백파비가 될 수 없 다] 하고 찬을 하여 [가난해서 송곳 곶을 곳도 없으나 기는 수미산을 제압했고,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듯이 하여 가풍이 아주 진실했으니 그 이름 긍선이여, 더할 말이 없구나] 하였다. 저서로 선문수경, 귀감을 비롯하여 정혜결사문, 법보단경요해, 오종강요기, 금강팔해 경, 선요기, 선문염송기 등이 전하고, 탑을 문인들이 선운사 부도전에 세우고, 영정을장단의 화장사에 봉안했으며, 추사가 짓고 쓴 비(선운사 부도전)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백파의 혜안과 추사의 흠모
한영은 출가전 이름이다. 법호인 영호(映湖), 법명인 정호(鼎鎬)보다 속명이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한영의 시호 석전은 절집이 아니면 찾아보기어려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선객 백파(白坡ㆍ1767~1852)와 동시대의 석학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깊은 우정에서그 시호가 탄생한 것이다. 스물 다섯의 한영은 스승 설유의 부름을 받았다. “그대에게 법을 전하니법호를 영호라 할 것이니라. 그대는 백파스님의 육대손이니 부끄러움이 없도록 용맹정진해야 하느니라.” 스승은 간곡한 부탁과 더불어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오동나무 상자를 열었다. 스승이 꺼낸 빛 바랜 종이에는 ‘石顚’의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추사는 석전과 만암(曼庵)의 시호를 써 백파에게 보냈다. 마음에 들면 가져도 좋고 아니면 제자에게 주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백파는 스스로 가질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제자 중에서도 합당한 재목이 없었다. 백파는 후세에 시호에 걸맞은 그릇이 있으면 전하라고 이른 뒤 열반에 들었다. 그의 생전에는 시호가 주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유언을 전해들은 추사는 흠모의 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백파의 혜안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 것이다. 부모의 비문조차 쓰지 않았던 추사는 백파의 비문을 손수 지었다. 그리고 “백파는 화엄종주이자 율사이며 대기대용(大機大用ㆍ대선사의 보살행)의 격외선사(格外禪師)”라고 추앙했다. 격외선사는 달마와 대등한 경지의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을 일컫는다. 시호 석전의 전(顚)자에는 ‘구르다’ 는 뜻 외에도 ‘이마’라는 의미가담겨져 있다. 돌처럼 단단한 이마, 즉 명석한 두뇌와 불퇴전의 정신까지상징한 시호라고 할 수 있다. 만암의 시호는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송만암(宋曼庵ㆍ1876~1957)에게 전해졌다. 송만암은 한영을 사사한 선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