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포로로마노를 관광한후 캄피도리오 언덕위에 있는 천국의 제단의 성당에 들어가 올리브나무로 만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나오니 성당문이 열리고 찬란한 햇빛속에 아름다운 한쌍의 젊은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야간에는 트레비분수에 가서 기념 촬영을 한후 우리 조카의 병이 기적적으로 쾌유되도록 나의 소원을 빌었다.
2004년 9월5일(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성 프란치스코성인이 태어나시고 활동하신 순례지 아씨시를 가기위해 테르미니역에서 8:14분 출발하는 열차로 아씨시에 10:24분도착 성지순례를 하였다. 9/6-7일은 늘 가보고 싶었던 물의도시 베네치아에서 곤도라, 유리공예, 낭만적인 여행을 즐겼다.
로마 관광을 마치고 아씨시,베네치아로
산타 마리아인 아라코엘리( 천국의 제단)(SANTA MARIA IN ARACOELI)
천국의 제단이 있는 성 마리아는 고대 주노신전 자리인 카필톨리노의 북쪽 정상에 있다.
그 곳의 기둥 22개는 여러 곳의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예를 들면 왼쪽의 세 번째
기둥은 거기 새겨진 조각으로 황제의 침실인 “쿠비쿨로 아우구스토룸”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의 교회였던 산타마리아인 아라코엘리는 많은 승리를 기념하는 장소였다. 바다를 주제로 하여 그려진 천장은 1571년 레판토 전투를 기념 한 것으로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지시로 만들어 졌다. 이곳에는 부주교 조바니 크리벨리의 묘비, 성당 내에 있는 프레스코는 피투리키오의 1480년대 작품이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삶과 죽음이 초기 르네상스시대의 화법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 성당에는 무엇보다 올리브나무로 만든 아기예수의 형상인 15세기의 작품 “산토밤비노” 때문에 유명하다. 이것은 프란체스코의 한 수도사가 게세마니 정원에 있던 나무에 조각한 것인데 이 조각의 놀라우리 만큼 경이로운 힘이 죽은 사람을 소생 시킬 수 있다고 믿게 하여 때때로 매우 아픈 환자의 침대 곁에서 이 조각의 이름을 소리치기도 한다. 이 아기 예수님상은 크리스마스 때는 성당 이층의 왼쪽으로 내려가면 5분정도 걸린다. 가운데 놓여지지만 평소에는 주리오 로마노의 성스러운 가족 그림과 함께 성당 성구 안치소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 성당을 순례 했을 때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고 있어 더욱 성스러움을 맛보았다.
트레비 분수(TREVI FOUNTAIN)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트레비분수는 누구나 다 아는
로마의 명소이다. 스페인 광장에서 남쪽으로 10여분 거리, 퀴리날레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
가면 5분정도 걸린다. 1762년 교황 클레멘트 12세의 명을 받고 설계는 니콜라실비, 조각은 브라치, 수반은 아루베르데에가 만들었다. 그동안 수년간에 걸쳐 복원공사를 하여 트레비분수의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1991년 7월에 공사를 완공하여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트레비분수란 “광장으로 이어지는 세 갈레길”을 의미하는 로마의 교외 “트레비오‘라는 지명 이름을 말한다.
트레비분수의 정면에는 바로크 양식의 걸작품으로서 두 해마와 신들이 끌어올린 조개위에 우뚝 서 있는 대리석 조각은 트리톤신과 바다의 신인 넵튠을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어
그 아름다운 분수의 모습을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하고 여가를 즐기게 한다.
또한 트레비분수의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하는데 전쟁에서 돌아온 지친 병사에게 물이 있는 샘물을 한 처녀가 알려주었는데 이 트레비분수의 샘이 그곳에서 끌어 왔다고 알려진다.
밤에는 관광객으로 늘 붐비는 광광의 명소로 유명하다.
* 동전 던지는 법*
동전을 던지는 방법은 오른손에 잡고 트레비분수를 뒤로하여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는 것
이 옳은 방법이다.
1) 동전은 로마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2)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소원하며
3) 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게 소원을 빌면서 동전을 던진다고 한다.
메트로(A선) 타고 SPAGNA역에서 하차
아씨시(ASSISI)
아씨시는 12세기 이곳에서 청빈한 성인이 태어나고 활동한 성지로 세계에 알려졌다.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탄생지이자 정신적인 고향이다. 수바지오산 중턱에 자리잡은 이 작은 도시는 특히 중심가를 벗어난 골목길에서 평온함을 유지하면서 건재하고 있다. 아래성당은 시모에 말띠니, 치마부에, 지오도 제자들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고, 프란체스코성인이 묻혀계신 지하무덤이 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가기위해 아씨시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르막길을 구불구불 올라가 성문 앞에서 빙글 돌아서면 주차장 앞에 내리게 된다.
성문을 통과하여 기념품가게를 지나 널찍한 마당을 걸어 올라가면 높다란 종탑과 커다란 성당이 나타난다. 우리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과 함께 11:00시 미사에 참례하여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살아오신 길을 묵상하고 또 우리 박 요셉신부가 대부도 성당에서 사제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전하며 대부도신자와 사랑이 넘친 성당이 되도록 기도를 드렸고, 중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조카도 주님의 은총으로 기적적으로 낳게 하여 주십시오 하며 간절히 기도 드렸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아씨시는 이태리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도시이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이 태어났고 또 그곳에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성인은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후에 회개하여
프란체스코파를 창시한 성 프란체스코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대성당이다.
이 성전은 수사 엘리아의 설계에 의해 1253년 건축하였고, 이 윗층 성당의 높다란 천정은
장엄한 느낌이고 양쪽 벽면에는 이 성당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 지오도 다 불도네(1,266-
1,377)에 의하여“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28개의 작품으로 1296-1304년에 그려진 일련의 벽화이다.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 성당 안에는 중세의 벽화와 프레스코화로 장식 되어 있는데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하층은 나지막한 천정의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이다. 치마부에와 지오도 등의 작품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스테인드크라스에 중세의 벽화를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다.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는 지하 납골당에 그가 입었던 낡은 수도복 등 유물과 함께 안치 되어 있다. 성 프란체스코는 1182년 아씨시에서 프랑스에 까지 지점을 둘 정도의 큰 상인의 아들로 태어 낳다. 그러나 그는 자라면서 속세에 물들어 있었고, 허영과 사치로 일관
된 생활을 하여, 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코는 아씨지 청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재산을 낭비
하며 방종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며, 아들도 상인으로써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신앙생활을 배웠다고 한다. 이런 프란체스코가 1,202년 아씨지 와 페루지아간에 벌어진 싸움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니, 단테의 말을 빌리면‘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오래 걸렸지만 점진적으로 좀더 뚜렷한 양상을 띠고 마침내 그의 동료들은 프란체스코가 딴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 자문하던 중 뜻밖에 한 나병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
으로 나환자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대면서 나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웃과 병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구걸하여 빌어
먹음으로써 자연과 가난한 이들과 형제 되어 일생을 살았다.
두 번째의 체험은 어느 날 반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주님께
인도하여 주시도록 간구를 하고 있을 때, 거기에 걸려 있는 십자가 고상으로부터 “프란체스코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 하여라”는 말씀이 들려와 , 그는 돌을 모아서 몰탈을 만들어 소성당을 재건하였다.
한번은 옛 동료들로부터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나는 가난과 결혼 하려고 해” 하면서 결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내부를 얻었다.
가난한자와 똑같이 된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이건 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 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209년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러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마태오 10, 9-10) 하신 말씀을 듣고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 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뼉을 쳤다.
이런 철저한 청빈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고 ,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3세(1198-1216)에게 수도원 인가를 청원하여“작은 형제회‘ 라는 이름의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있어 그야말로 흥분을 자아내는 사건들 중의 하나라면 자기 아버지와
결별이었다. 부유하고 성공적인 실업인 이었던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는 환상적인 이상을
추구하며 웃음거리가 된 아들을 캄캄한 방에 가두어 두기도하며 주교 앞에 데리고 가 판결
을 요구하자, 프란체스코는 자기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모두들 내
말에 귀담아 들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를 내 아버지라 불렀으나,
이제부터 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말 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는 가족과 이별,.
뒤에 프란체스코는 자기 생애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직히 “아버지와의 일” 이라고 말씀 하셨다.
프란체스코는 자기 형제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생활의 가난을 구현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는 돈을 쓰레기로 간주했다. 이런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증가하여 여러 분원을 마련하였으며 여성으로서 청빈, 보속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 제2회
“글라라회”를 세웠고, 또한 세상에 살면서 그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위해 “프란체스코
제3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태양의 노래”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성 프란체스코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지닌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여 예찬한 안목도 놀랍지만, 대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는 길을 찾아낸 것을 참으로 경탄할 만한 발견임에 틀림없다. 이제 일반에게 덜 알려진 성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 성인 자신이 이따금씩 노래했다는 이 찬미가를 함께 부르면서, 피조물에 대한 그의 모습을 헤아려 보자.
1224년 성 프란체스코가 ‘알베나’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친히 양 손, 양 발, 그리고 늑방 에다 오상을 박아 주셨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임은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오상은 주의 상처와 같이 심한 고통을 주는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1226년 10월3일 돌아가실 때까지 이런 시련을 기쁨으로 인내하시면서 생을 마치셨다.
44세의 짧은 일생동안 빛나는 성덕과 생전에 행한 불가사이한 일과 사후에 계속 일어나는
기적 때문에 임종한지 3년 후인 1229년에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아씨시를 찾는 이유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영성이 지금까지도 매력
적인 가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은 예수님의 삶을 철저히 따르고자하는 신앙과 열정, 단순하고 겸손한 삶, 재물에 억 메이지 않은 빈 마음(가난), 직업, 인종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 드리는 무조건적인 이웃사랑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정신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1962년 10월4일(성 프란체스코 축일) 교황 요한2세(1959-1963)가 이곳을 방문, 공의회의 성공을 위해 성인에게 간절히 기도를 바쳤다. 또 2002. 1.2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
종교지도자 250명이 화해와 평화의 수호자 성인의 고장 아씨지에서 열린“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 행사에 참석하셔 전 세계의 평화를 호소 하셨다.
엘레모(EREMO) 수도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래 주차장에서 택시로 산꼭대기에 있는, 성지 라틴어로 Carcei parco del monte subasio -운둔소, 수도원 이라는 곳으로 한 10분 올라갔다.
수바시오산의 분도 수도원에서 성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에게 휴식과 기도의 장소로 제공한 곳이다. 작은 수도원과 성당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업적으로 원래 12세기 성모의 소성당 옆에 세워지고, 이곳 에레모는 14세기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개혁파들에게 넘겨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정원에 있는 우물은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의해 물이 솟았다 고 한다. 성 베르나르디노 소성당과 보다 소박하고 은은한 성모의 소성당을 지나면 동굴로 내려가는데 그곳에서 성인은 그의 생애 마지막 피정을 가졌다. 다른 동굴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아직도 숲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볼 수 있다.
수도원위에 숲에는 산책로가 되어 있어 너무나 조용하고 순례하면서 몇일 더 있다가 가고
싶었다.
평화의기도
,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의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극히 가깝게 본받은 아씨지의 성인
프란체스코의 유명한 평화의 기도 입니다.
오늘은 9월6일, 로마와 아씨지 순례를 마치고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떠나는 날이다.
아침 7:00시에 산타마리아 마조레성당에 가서 새벽미사를 마치고, 인터넷을 열어보니
집에서 딸이 소식을 보내왔다. 참 좋은 세상이다. 전화를 하지 않아도 더 소식을 자세히
전하니 편리하다. 어제 저녁에 슈퍼에서 사온 과일을 배낭에 넣으니 짐이 더 무거워졌다.
테르미니역 1번 프렛트홈에서 유로스타를 탑승하고 지정된 1등석 우리좌석에 앉으니 여행객으로 꽉 차서 빈 좌석이 없었다.
열차 내는 아주 고급스럽고 깨끗하며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신부님이 레포트를 쓰고 계시고, 노년의 안경 낀 신사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고, 멋쟁이 신사들도 신문이나 책들을 읽고 있으며, 휴대폰은 밖에 나가 통화하고 돌아온다. 과연 선진국이 다른 것이 열차에서부터 느끼게 된다. 쾌적한 분위기, 달리는 열차 차 창가를 내다보며 이태리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여행을 즐기고 있다. 박 사장님은 카메라에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려고 사진촬영에 바쁘다.
베네치아(VENEZIA)
이탈리아 동북쪽, 아드리아 해의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177개의 운하와 118개의 섬, 그 사이를 400여개의 다리가 놓여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도시”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닌 곳이다. 물의도시 베네치아의 역사는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비잔틴제국이 이곳을 지배하던 6세기경부터 시작이다. 13-15세기에는 동서무역을 중계하는 독립된 부강한 국가였으나 17세기이후 이스람 세력의 확장과 희망봉을 경유하는 새로운 인도항로의 발견, 주변의 공화국들과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점차 세력이 쇠퇴하게 되었고 19세기에는 나포레옹의 지배 하에 놓기도 했다가 결국 1866년 이탈리아왕국으로 합병 되었다.
“물의 도시” 로 알려진 베네치아는 세계적인 관광지이다. 대운하 Canal Grarde를 비롯하여
100여개의 운하가 도시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져있어 상당히 복잡한 길 때문에 길을 잃기가 쉽고, 아주 혼잡하다.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수상택시, 수상버스, 검은 곤도라등
이 있어 교통은 편리한편이고, 광장에 면한 드넓은 운하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너무나 황홀
하고 운하위에 노 젓는 곤도라의 사공들은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여행객을 반겨준다.
저녁에는 카페에서 야외음악회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어 낭만적이며 우리가 머물고 있을 때도 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었으나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성 마르코광장(Piazza San Marco)
숙소를 나와 성 마르코광장으로 가는 길 도로변은 관광 상품가게, 각종가면 판매점, 가죽
제품, 구둣가게, 등 다양한 점포들과 젊은 남녀의 아슬아슬한 의상을 걸치고 세계의 미녀들이 다 이곳에 모인 것처럼 활기차고 혼잡하다. 성 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 광장의 중심지이다. 수많은 비둘기 들이 우리를 반겨주고, 광장은 관광객으로 넘쳐흐른다. 비둘기들은 모자 위, 손위 등에 앉고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각종포즈를 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한편에는 한국관광객 일행에게 가이드가 마르코성당에 대하여 설명하시는데 이 성당의 기둥을 이집트에서 가져왔고 금도 가져와 금을 칠하여 아름다운 성당을 세웠다고 하신다.
성당 옆에는 궁전도 있다. 마르코 성당 앞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숙소에 와서 인터넷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숙소에는 영국에서 유학중인 여학생이 2주 계획으로 인터라켄, 비엔나를 거쳐 이곳에 왔다고 인사를 한다. 반갑게 여행에 대한 환담을 하고, 샤워를 한 후에 베니스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첫날밤을 보냈다. .
성 마르코성당(Basilica San Marco)
9세기 베네치아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마르코의 유해를 찾아온 복음전도자 성 마르코의 이름을 따서 당시 베네치아의 통치자였던 쥬스티아노 파르티치파초 총독이 이곳에 성인의 유해을 보관할 성당을 지었다.
베네치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당으로 중세 이래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성당이다. 원래의 성당은 9세기에 소실되어 1066-1073에 걸쳐 재건하였고 건축양식은 로마네스코와 비잔틴 양식이 혼합되었다. 호화스런 정면에는 빛나는 모자이크로 장식된 5개의 문이 있다. 유일하게 남은 원래의 모자이크는 “맨 왼쪽문” 13세기 당시 성당 내부는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인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 교회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십자가의 가로부분에 줄지어선 작은 회중석 기둥들 위에는 그리스정교회 관습에 따라 남녀구분을 하면서 여성, 신사용좌석, 마트로네이가 있다.
리도 섬(LIDO)
본섬 남쪽에 가로놓인 총길이 12km의 가늘고 긴 섬인 리도섬은 이태리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리조트지역으로 아드리아 해에 접해 있는 해변거리에는 고급 리조트, 호텔, 레스토랑 등이 많이 들어서 있다.
눈부신 태양, 고운 모래사장, 반짝이며 은빛 나는 잔잔한 바다, 리도 해변은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휴양지로 부친토로와 산 니콜로 두 개의 해변이 있다. 구름한점 없이 맑은 하늘과 따사로운 태양, 고요하면서도 푸른바다는 아드리아 해변, 베네치아 섬 남쪽 4km 지점으로 산마르코광장에서 수상 버스로 20분 걸린다., 이탈리아의 최고급 해변 휴양지로 고급 호텔이 즐비하고 국제영화제가 한창 이었다. 바닷가에는 반나의 몸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선남선녀가 많았고 아이들은 모래집을 짓고 놀고 있으며, 우리도 함께 수영을 하며 리도 해수욕장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무라노 섬(MURANO)
베네치아의 전통공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유리공예의 고향이다. 1291년 제작기술의 누설과 화재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유리의 장인들이 이 섬에 모이게 되고 그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무라노그라스”라 불리는 섬세하고 화려한 공예품들이 꽃을 피웠다.
11세기경부터 유럽 산업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 베네치아 수상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뚝방을 걸어가면 유리세공 상점이 즐비하고 곳곳에 무료로 유리공예 작업실과 공장을 관람하는데 용광로에서 유리를 녹여 만드는 그 작품들은 하나의 예술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