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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인생설계
김영훈(동화작가)
지난 봄 어느 일요일이었다.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내가 아내와 계룡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좀 넘어서였다. 오랜만에 계룡산을 찾은 셈이다. 바쁜 일상에 쫓겨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보니 한가하게 산을 오르기도 어렵다. 그래서 내가 늘 그리워하는 이 계룡산에도 자주 오질 못했다. 아내는 틈만 있으면 건강을 위해서라도 산에 오르기를 권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질 못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오랜만에 짬을 내어 그 동안의 내 삶을 뒤돌아보며, 내 인생의 좌표를 다시 설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산행을 결심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내와 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제법 날씨가 쌀쌀한데도 계룡산을 찾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나는 사람들 속에 섞여 매표소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앙상하게 드러낸 벚꽃 가지에는 벌써 새봄을 맞아 그 화려함을 드러낼 꽃망울들이 추위 속에서도 안으로안으로 내연(內燃)하고 있었다. 멀리 계룡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삼불봉도 보이고, 연천봉 쪽으로 까마득한 봉우리들도 점점이 보인다.
나는 그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어린 시절 유년의 꿈이 묻혀 있는 산도 아닌데, 이 계룡산 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왤까? 내 삶의 방황과 좌절을, 그리고 다시 일어섬을 알고 품어주던 산이라서 일까? 그렇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산을 찾았었다. 그 때마다 계룡산은 나를 품어주었고…….
그러니까 내가 계룡산을 처음 찾은 것은 공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 무렵 나의 좌절과 시련은, 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었다. 두 번에 걸친 입시의 좌절, 그래서 방황하고 흐느적거리다가 찾은 산이 바로 계룡산이었다. 나는 틈만 있으면 공주에서 거의 도보로 계룡산을 찾았다. 한 두 번이 아니다. 갑사로, 연천봉으로, 삼불봉으로, 남매탑으로, 다시 계룡산 상봉으로 이렇게 온 산을 헤매며 젊은 날의 좌절과 고뇌를 치유하려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상관없이 찾고 싶으면 찾고, 오르고 싶으면 오르던 산이 계룡산이다. 그 때마다 계룡산은 침묵으로 나를 품어주었다.
그러면서 계룡산은 꾸준히 나의 문학에 대한 집념의 불씨가 되어 주었다. 작품을 빚는 산실이 되어 준 셈이다. 공주교육대학으로 진학해 소설가 최상규 교수를 은사로 맺는 귀한 인연과 함께 나는 내가 그렇게도 열망하던 소설 쓰기에 불을 붙여 준 곳도 계룡산이었다. 이미 나는 고등학교 때 ‘포도원의 회상’ 등 어줍지 않은 소설들을 이 계룡산에서 구상하며 습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공모하는 소설 부문에서 ‘도토리 깍지’로 당선하여 계룡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도 이 계룡산 산행을 하면서 구상한 작품이다.
그 무렵, 문학은 내 삶의 전부였다. 난 계룡산에 올라 내 삶을 설계하면서 지표를 세웠었다. 나는 죽어 흙에 묻혀도 내가 쓴 작품은 흙 위에 남아 영원하기를 두 손 모아 빌던 곳도 그 무렵 계룡산에서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대학 2학년 겨울에는 방학과 때를 맞추어 아예 계룡산 갑사 속으로 숨어버렸다. 갑사 별채인 대적전에 스님들과 기거하면서 절 방에서 죽비 소리에 맞춰 함께 공양을 올렸다. 불경도 익혔다. 40일간의 침잠은 내게 정신적인 성숙을 더 해주었다. 그것이 예수가 겪은 광야에서의 시련과 결코 비견되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계룡산의 골짜기와 봉우리들, 그리고 그 곳에 선 나무와 천년을 묵묵히 앉아 산신령이 되어버린 바위들은 늘 나를 안아 주며 방황하는 젊은이를 오히려 지탱하게 해 주었고, 감싸주었다.
나는 그 후로 틈만 있으면 계룡산에 올랐다. 계곡마다 새로운 등산로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그러니 그 날, 나의 젊은 시절 좌절과 시련 속에서 나를 일으켜 준 이 계룡산에 올라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며 남은 인생을 설계할 곳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나는 아내가 건네주는 입장권을 검표원에게 내고는 집찰구를 통과했다. 물론 아내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였다. 그렇게 한참을 동학사를 향해 걸었다. 아내가 가만히 내 손을 잡는다. 아내의 손이 참 따뜻했다. 나는 아내에게 손목을 잡힌 채 말없이 걸으며 회상의 늪에 빠졌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홍성 벽지에 있는 반계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부임한 것은1969년 3월이었다. 지금부터 36년 전 내 나이 스물 두 살 때였다.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혼기에 찬 나이로 나는 아내와 만났다. 내가 1981학년도 대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는 난 나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그리고 내 아이들과 함께 계룡산엘 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방황했던 젊은 시절의 방황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등산은 아니었다. 물론 그 때보다 안정되고 행복된 마음이었지만, 일상에서 오는 데리케이트한 삶이 더러 흐트러진 마음이 될 때 계룡산에 오르면, 난 더 차분해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거듭난 채로 하산할 수 있었다.
나는 소설 쓰기에서 동화로 장르를 바꾸고 나서 더욱 부지런히 정말 몸바쳐서 고등학교 때, 이 계룡산에서 다짐한대로 열심히 글을 썼다. 아직도 미흡하고 부끄러운 작품으로 일관되고 있지만, 그 옛날 계룡산에 올라 와 나는 죽어 흙에 묻혀도 내가 쓴 작품은 흙 위에 남아 영원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던 그 자세로 글을 썼다. 그 때의 초심(初心)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계룡산에 오르면 경건한 자세로 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땅의 어린이를 가르치면서 그들의 미래를 밝게 열어 주는 초석을 닦아줄지언정 아름다운 유년을 훔치지 말게 해달라고 교육자로서의 소망도 함께 띄워보냈었다. 그러면서 동화집을 꽤 여러 권 출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교육자로서는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교단을 지키면서 교수-학습 방법 개선, 현장 교육 연구, 독서지도와 창작 실기 지도, 학교 교육 과정 개발에 노력해 왔다. 그렇게 꾸준히 교단을 지킨 덕으로 내가 지금 한 학교의 경영자로서의 위치에 와 있는 지도 모른다.
내 삶을 뒤돌아보다보니 문득 쑥스러워진다. 한 발만 물러서서 관조하는 자세로 보면 내 삶이 참으로 부질없는 자잘구레한 일상인데도, 그리고 내가 땅에 묻히면 다 지워질 발자국인 걸 잘 알면서도 지나간 추억들을 나는 지금 애써 붙잡으려 하고 있다.
어떻든 그 때마다 찾았던 계룡산, 내 삶이 구겨질 때마다 찾아와 새 삶을 설계하던 곳을 그 날 나는 또 찾아 간 것이다. 이제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어떻게 삶을 정리해야 할 지를 골똘히 생각하며 나는 나의 반려자인 아내와 이 계룡산에 오른 것이다.
문득 바람이 분다. 아직은 초봄이라 찬바람이었다. 낙엽이 다 떨어진 빈 가지가 잔 바람에 흔들린다. 머지 않아 초록색 이파리가 돋아날 빈 가지였다. 이름 모를 산새가 운다. 등산객도 더 많아진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도 벌써 동학사를 지나 은선 폭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 때까지 손을 놓지 안았다. 등산객이 스쳐 지나고 있는데도 아내는 여전히 내 손을 놓기 싫어한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은 채로 마음을 굳힌다. 열심히 곁에서 아내가 도와주는 내조의 힘을 바탕으로 이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늙어 가는 나이에 난 아직도 소망이 많다. 욕심이 많은 것일까? 그러기 위해선 내 곁에서 걷고 있는 아내를 설득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 날 많은 소망 중에 두 가지를 띄어 보냈었다.
첫 번째 소망은 ‘김영훈 동화 마을’을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사실 오래 전부터의 꿈이었다. 처음에는 고향 마을 칠갑산 기슭에 만들기로 했었는데, 지금도 그 마음은 굳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생각이 흔들리고 있다. 대전의 어디쯤 자리를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담하게 집을 두 채 짓고, 한 곳에는 나 개인의 작품과 문학 생활의 흔적, 그리고 대전․충남 그리고 우리나라 아동문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자료를 정리하고, 다른 한 곳에는 어린이 도서관을 꾸며 이 땅에서 자자나는 어린이들에게 읽을 거리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적 소양을 넓혀 주고 싶다. 때묻고 찌들은 삶을 사는 어른들에게도 잃었던 동심을 회복하는 ‘김영훈 동화 마을’을 꼭 만들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을 정리하고 싶은 첫 번 째 설계이다.
두 번째 소망은 ‘김영훈 동화 전집’을 발간하는 일이다. 그 동안 열심히 써 펴낸 작품집, 그리고 앞으로 창작할 동화들을 정리하여 팬터지 동화, 생활 동화, 소년 소설, 중편 동화, 장편 동화로 분류해 내 작품을 총 결산하는 전집을 내고 싶다. 그러면서 나의 인생을 정리하고 싶다.
물론 나는 아직 나의 인생을 정리할 만큼 노년에 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꾸어 온 나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새로운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그 날의 계룡산 등정을 난 귀하게 생각한다. 물론 젊은 시절의 꿈이 절반도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정말 주옥같은 소설 작품을 한 편만이라도 남기고 싶었던 꿈, 그리고 한 때는 국어학자가 되어보고 싶었던 꿈도 있었다. 그러나 변변히 이룬 것이 없고 변죽에도 가지 못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는 구약 성서의 한 구절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삶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이제는 알게 된 오십대의 후반이지만 나는 앞으로의 인생을 더 헛되지는 않게 하려고 새로운 설계를 하고 있으니 이 또한 헛되지 않는가? 참 역설적이다. 하지만 소망했던 이 두 가지 일은 꼭 이루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서 추구하는 바가 다 다르다. 또한 가치관도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특기나 적성 그리고 소망에 따라 하고 싶은 일에 의미를 크게 부여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선상에서 나는 교육과 문학 이 두 가지가 내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버팀목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차원에서도 이 두 가지의 소망은 꼭 이루고 싶은 마지막 인생 설계가 아닌가 한다.
나는 그 날, 그 동안 생각해 왔던 바를 머리 속에 다시 정리하면서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말도 잊은 채 말이다. 그런 사이에 난 어느 새 은선 폭포에 다 와 있었다. 바로 앞 산장이 있는 쪽에서는 제법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도 저쯤에 가 쉬면서 아내에게 따뜻한 커피를 한잔 얻어먹으며 내 마지막 인생 설계를 하고 있는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아내는 나의 인생 설계에 동의 해주리라 믿으며, 나는 발길을 더욱 재촉했었다. 아내도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첫댓글 "김영훈 동화 마을" 세계에서, 가장 아담하고, 가장 동화적으로
건축 되시기를 고대하면서 목표를 향해 정진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카페 동화마을을 잘 꾸려나가려고 합니다. 복담이님이 많이 놀러와 주셔요.
시골 아산 집에는 지난해 장마에 번개를 맞았어요.
컴푸터, 심야 보일러, 에어컨, 모두 못쓰게 되었다네요 ㅎㅎㅎ
그렇지만~ 난방용 이라서 심야 보일러는 즉시 수리를 해서 사용했지만요
에어컨과 컴터는 올해 수리를 해야 사용을 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김준섭씨는 직장에서 컴터를 하구요,
저는 일산에서 사용 하구요, 시골에는 컴터를 끊었습니다.
시골에 가면 비행기와 새들과, 나무들, 벌레...등
완전 차단 된 곳에서 있다가 옵니다 ㅎㅎ
하루에 버스 운행도 4번 정도일까 ?
버스이용을 안해서 잘 모르겠지만요.
요즘 보기드문 시골 입니다. ㅎㅎ
그외 시간에는 자주 방문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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