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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찾습니다
밤새 잠 못 이룬 영혼들이라도 되는 걸까. 새벽 바다와 강이 마른 대지 위에 안다미로 퍼질러 놓은 물안개들. 강과 산 그리고 바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풍경 속에서, 귀만 자꾸 커져 당나귀 귀가 된다.
섣달그믐 어둠이라면 차라리 포기라도 할 터이다. 불투명하게 감싼 물안개는 어둠과 차원이 사뭇 다른 매직 쇼를 부린다. 구름 속이나 물속에 갇힌 듯하다. 승용차는 가는 듯 가지 않는 듯하며 어디론가 끌려간다. 속절없다.
길 위에서 길을 찾고 있는 아이러니. 잊힌 얼굴과 기억들을 자꾸만 들쑤시는, 영혼 같은 물안개가 사뭇 신비하고 몽환적이다. 하얀 두려움이 옷깃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든다. 모든 것은 물안개 탓만이 아닐 성싶다. 그 하얀 두려움 속에 동백 꽃망울 같은 검붉은 아픔 하나 똬리를 틀고 있다.
어릴 때 물속에 빠진 적이 있었다. 발이 미끄러지는 순간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뭔가가 발목을 잡아당긴 것 같았다. 발버둥을 쳤으나 수면 아래로 점점 가라앉았다. 몇 모금의 물을 삼켰다. 숨이 막혔다. 이명증을 느꼈다. 물속은 밖에서 볼 때처럼 파랗지 않고 온통 어두웠다. 이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아서 고개를 쳐들고 위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검은 장막 속의 희끄무레한 동그라미 하나가 파문을 일으키며 생명을 희롱하고 있었다.
지영은 지나간 기억을 먼지처럼 털어낸다.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는 줄 알면서,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전방을 톺아본다. 스텔스 차량을 피하려고 차창을 조금 내린다. 소리에 더욱 집중하려고 라디오도 끈다. 그 순간, 대형트럭이 굉음을 뿌리며 지나간다. 지영의 승용차가 뒤뚱거린다. 한참 후, 톨게이트를 간신히 벗어난다. 안개 장막은 여전하다.
“막내, 문일석 취재해.”
최 피디가 속사포 랩처럼 지시를 내렸다. 지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예, 예.”
“시간이 별로 없겠지만, 매우 중요한 취재니까 확실히 해.”
지영의 시선이 최 피디의 얼굴 위에 씹다 만 껌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그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고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저기, 어떤 콘셉트로 해야 할까요?”
지영은 옆자리에 앉아있는 김 작가와 최 피디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김 작가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토닥거리고 있었다. 최 피디는 벽면에 걸린 달력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알아서, 좋은 콘셉트 정해.”
최 피디는 붉은 펜으로 달력의 ‘23’이라는 숫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날은 연말 특집방송 예정일이었다. 나흘 후였다. 예전에는 이런 다급한 취재 지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 지영은 막막하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최 피디에게 매달리듯 시선을 박았다. 뭔가 도움말이 나오기를 애써 기대했다.
“급해. 내일 취재, 모레 오전까지 보고서 올려.”
“아, 그게…….”
지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 피디가 출입문 밖으로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막내 작가님, 왜 바쁘신 피디님 붙들려고 해요. 블루스라도 추게요?”
김 작가가 자드락길 위의 돌부리처럼 튀어나왔다. 웃고 있기는 했지만, 목소리는 얼음이었다. 지영은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눈동자를 굴리며 출입문과 김 작가를 번갈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황색경보가 울리는 순간이었다. 등에서 진땀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지금 청취율 조사 시즌인 거 잘 알고 있죠? 이번 연말 특집방송 결과에 따라 최 피디님 승진이 걸렸다는 소리가 나돌더라고요. 긴급한 건 둘째치고, 아주 중요한 임무라는 걸 명심해야겠죠?”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아닌가요?”
“방송밥 먹는 처지에 시간 타령이나 하는 건 사치죠. 그렇지 않나요? 안 되면 되게 하라, 그런 말은 군대에서만 쓰는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죠? 난 말에요, 그 취재 보고서 받자마자 하룻밤 꼬박 새워 생방송 대본 준비해야 한다고요.”
김 작가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지영은 김 작가의 요란한 손끝만 우두망찰 바라보았다.
공중파 방송은 허공으로 날아가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방송 준비는 피를 말릴 정도였다. 특집방송을 기획할 때면 더욱 그러했다. 각 시간대의 프로그램 스태프들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에 돌입했다. 청취율이라는 올가미가 그들의 목을 한도 끝도 없이 조였다.
김 작가와 보조 작가인 지영은 정규직이 아니라서 자칫하면 ‘파리목숨’이었다. 방송 결과가 좋지 못한다거나, 정규 방송을 개편할 때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취업 문이 바늘구멍인 시대를 살아가면서, 밥그릇 앞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자가 없을 터였다.
지영은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엄마가 없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하러 가면 책을 친구 삼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에는 백일장에 나가면 상을 종종 타곤 했다. 그런 계기로 문창과에 들어갔고, 등용문에 오르려고 기나긴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그런데 용문점액龍門點額이라고 했던가. 지영은 수년째 등용문에 오르려고 시도했다가 이마에 상처를 입은 잉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세월을 보낼 즈음, 대학 은사님의 소개로 이 방송국의 보조 작가 자리를 어렵사리 얻었다.
지영은 최 피디 담당의 ‘쇼양’ 프로그램에 배치되었다. 교양과 예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이런 프로그램은 청취자들의 인기에 정비례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방송 스태프들의 땀방울이 팥죽처럼 흐를 수밖에 없었다.
취재 준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망연자실해 있을 때 김 작가의 목소리가 인정사정없이 몰아쳤다.
“어이, 막내. 지금 그렇게 한가할 때가 아닐 텐데.”
팔짱을 낀 김 작가의 고개가 11시 방향으로 삐딱해져 있었다.
“콘셉트를 알아야 헬리콥터라도 부르든 말든 하겠는데….”
“흥, 방송밥은 공짜로 먹여주는 거 아니고, 머리는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는 거 아니거든.”
김 작가는 지영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메인’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어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지영은 아니꼬운 말투에 비위가 상했지만, 대꾸는커녕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콘셉트에 대해 더 물어봤자 답은 뻔할 터였다. 김 작가는 모든 것을 꼼꼼하게 통제하면서 정작 보조 업무에 관한 것은 ‘알아서’가 전부였다. 이럴 때는 취재를 앞세워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상수였다.
지영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트렌드’를 읽어내려고 인터넷 바다를 헤엄쳐 다녔다. 요즈음 ‘뉴트로’가 대세였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했다. 그런데 지영의 머리가 돌고 돌아 정신과 신세라도 져야 할 지경이었다.
작사자 문일석文一石.
웹에서 다른 유명 인물들의 인플루언서를 검색하면 콘텐츠가 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문文’에 대한 자료는 빈약하다 못해 존재 자체가 모호할 정도였다. 불투명한 안개에 싸인 신비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월북한 예술인들보다 자료가 적었다. 지영이 몇 시간 동안 고생해서 찾아냈던 문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면 대충 이러했다.
문일석의 본명은 윤재희였고, 목포에서 태어났다. 혹자는 함경도 출신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문은 1916년생이었고, 목포 북교동 157번지 윤경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전주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후,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무명시인이었다.
문이 20대였던, 1935년에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사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 공모를 했다. 거기에서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문이 1등 당선했다. 혹자는 그 노래 가사를 다른 사람이 작사한 거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노래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꿨고, 목포 출신 이난영이 노래를 불러서 공전의 히트를 했다. 그런데 가사 중에 ‘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어, 문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 후에는 징용을 피해 함경도 탄광에서 광부로 살다가 28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영은 ‘문文’을 찾는 게 아니라, 미궁에 갇힌 채 ‘문門’을 찾아 헤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느새 방향감각까지 잃고 말았다. ‘문’의 손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목을 졸라 숨까지 막힐 지경이었다.
“아, 아리아드네의 붉은색 실타래는 어디에….”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신화에서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혼잣말로 게워내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언감생심, 출구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특집방송 콘셉트는 생각할 수조차 없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먹통이 되어버린 머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힘없이 떨굴 때 책상 밑의 전기 콘센트가 보였다. 노트북, 휴대전화 충전기, 전기장판, 전열기의 선들이 겯거니틀거니 뒤엉켜있었다. 짜증이 나서 콘센트를 발로 찼다. 노트북 전원이 꺼지면서 노트북 바탕화면이 지영의 머릿속처럼 먹통으로 변했다.
그 먹통 속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이 피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 징용에 끌려간 광부였다. 막장은 부상과 죽음의 혀가 널름대는 곳이라고 했다. 어디선가 진폐와 규폐로 망가진 폐에서 토해내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바탕화면 속의 할아버지 모습이 깨진 유리창 조각처럼 흩어졌다.
도시로 들어선다. 안개가 점점 옅어진다. 아직 잠에 취해있는 도로가 한산하다. 왕복 4차선 도로 위에 육교가 보인다. 신호등에 붉은빛이 들어온다. 차들이 일시에 멈춘다. 앞차의 뒤 유리창에 붙은 ‘NO JAPAN’이라는 스티커가 유난스레 눈을 찌른다. 왼쪽 육교 상단에 한국인력공단 입간판이 서 있다. 육교에는 맛의 도시 목포와 낭만 항구 목포라는 정사각형의 하얀 광고판이 뜀박질하는 마음을 다독인다. 오른쪽 전신주 도로 표지판에서, 직진 화살표 방향으로 목포 가톨릭대학교를 안내한다. 그 앞에 커다란 글자의 ‘낚시’ 입간판이 바다 냄새를 미리 풍겨준다.
급한 마음에 길을 일찍 나섰다. 막상 도착해 보니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취재할 기관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시각이다. 취재에 보탬이 될 만한 장소를 머릿속으로 찾는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는 난영공원이 떠오른다. 거리가 활력을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상가들이 문 열 준비로 부산하다. 손수레에 폐지를 싣고 가는 노인의 광대뼈 위에 희망 같은 햇귀가 내려앉고 있다.
유달산을 에돌아 차가 지나간다. 도로 건너편에 보이는 바다는 파도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 인도에 깔린 붉은 벽돌은 ‘문’을 위한 레드카펫일까. 목숨 같은 취재 도구를 다시 점검한다.
공원 맞은편 도로에 건물이 보인다. 그 뒤로 커다란 배가 바다 위에 떠 있다. 지영의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린다. 산 위로 이어진 돌계단을 오르니 노래가 먼저 반긴다. 몇몇 어르신들이 운동하고 있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우뚝 서 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가사를 읽어본다. 노래가 바람에 날려 소나무와 유달산을 휘감는다.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드넓은 바다에 섬들이 올망졸망하다.
‘어, 이상한데.’
지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취재 수첩을 펼친다. 조사한 자료와 다르다. 운동하는 어르신들 옆으로 가까이 간다.
“안녕하세요, 저게 목포의 눈물 노래비 맞죠?”
“아니지, 진짜 노래비는 유달산 자락에 있네.”
“네에! 여기가 유달산 아닌가요?”
지영의 등줄기로 송곳이 깊게 훑고 지나간다.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발끝에 힘을 준다. 손에 들린 카메라가 흔들린다.
“어이, 괜찮은가. 얼굴이 창백하구먼. 목포 사람이 아닌 모양이지? 노래가 흘러나오니까 노래비라고 오해를 할 수밖에 없지. 허허, 여긴 삼학도라네.”
지영은 그분들과 산에서 내려오며, 삼학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60년대에 바늘 꽂을 땅 한 평이라도 아쉬워서 이교동 일대를 메워 삼학도를 육지로 만들었다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런데 바다를 육지로 만든 것은 일본인들이 먼저였다며 목소리를 곤두세운다.
지영은 알려준 대로 길을 간다. 삼학도를 끼고 돌면 두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꺾어지고, 거기를 지나쳐 조금만 가면 노적봉이 나온다. 거기서 이정표를 보고 찾아가라고 했다
대학교 다닐 때 문학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아르바이트에 꽁꽁 묶여 가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에 앞이 아득하다.
옥단이길 무료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물지게를 지고 양 갈래로 머리 땋은 옥단이가 그림에서 튀어나올 듯 웃으면서 반긴다. 유달산 둘레길 안내판 앞에 선다. 그곳은 원점 회귀형 코스로 어디를 가든 다시 만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6번,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정표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침목 같은 나무계단이 부드러운 울림을 준다.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둔덕을 오르는 느낌이다.
잠시 후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편으로는 기념품 가게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돌계단이 이어져 있다. 귀를 기울이자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끌려 오른쪽 계단을 오른다. 굴참나무, 소나무, 신갈나무에 둘러싸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보인다. 그 뒤로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정자가 배경처럼 서 있다.
나지막한 다섯 개의 긴 벽돌 모양 지대석 위에 올려놓은 노래비가 반긴다. 마치 2층 직사각형 탑 모양이다. 위층에 ‘목포의 눈물’ 노랫말 전문이 새겨져 있다. 1층은 4등분으로 나누어져 노래의 일화를 안내한다. 왼쪽 윗부분에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를 시작으로 ‘이난영의 노래가 문일석 가사 손목인 작곡의 여기 청호의 넋처럼 빛나고 있다’라는 소개말이 보인다. ‘문’을 직접 만난 것 같은 기시감에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문’은 없다.
노래가 유달산 자락에 스며들 듯 지영의 가슴에도 스며든다. 어릴 때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엄마 생각이 났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노랫말을 가슴에 새긴 뒤 돌아선다. 오른쪽으로 삼학도가 보인다. 왼쪽은 목포 근대역사 거리이다. 지영은 기념품 가게로 발길을 돌린다. 초로의 남자가 목포 시내 전경을 프린트한 스카프를 걸개에 건다. 아주머니는 총채로 먼지를 털어낸다. 벽에 화가들의 그림들이 걸려 있어서 인상적이다. 목포 특산물 조기, 꽃게, 민어 그리고 갈치가 그려진 수저 받침대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백자 도자기에 선으로 형태를 그리고 흘림체로 생선의 이름을 써 놓은 것이 앙증맞다. 선물용으로 세 개를 집었다가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찬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취재와 콘셉트를 찾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한데 해찰을 부린다고 꾸짖는 듯싶다. 정신을 곧추세운다. 취재와 콘셉트 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리목숨이 되고 싶지 않다.
“근대역사가 잘 보존된 동네가 어디인가요?”
지영은 ‘문’과 이난영이 살았던 그 시대가 궁금해서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근대역사, 어쩐다고라? 난 그런 거 잘 몰라라. 케이블카 타면 목포 시내가 다 보인다고 합디다. 그거 타고 찾아보시구려.”
“아니, 아주 예전에 조선인들이 살았던 곳을 찾으려고….”
지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초로의 남자가 대화를 비집고 들어온다.
“내가 토박이라서 잘 알지라. 바로 아래 옥단이길로 가보시오, 산비탈에 자연적으로 생긴 동네라 단독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찌그러질 듯 낡았는데, 진짜 옛날 동네구먼요.”
남자의 표정이 자신만만하다. 지영의 가슴 밑바닥이 뜨거워지면서 전율이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남자가 신바람을 내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농사짓던 조선 사람들이 벌이가 좋다고 해서 이 항구로 몰려왔지라. 그런데 오막살이 사글셋방에 살면서 왜놈 대신 허드렛일이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네요. 더 어려운 사람은 공동묘지 자리에 움막을 지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나구먼요. 남자들은 지게꾼을 하거나 생선을 팔고 여자들은 나물을 팔아 목숨을 연명했다고 합디다.”
남자가 아련한 눈길로 앞에 있는 노송을 바라본다.
“그럼 일본 사람들은요?”
“요 아래 근대역사관 건물 앞에 팔달로라는 신작로를 내놓고 떵떵거리며 살았대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짓밟은 것이지라. 거기나 한번 가보슈. 그럼 왜놈이 조선 사람들한테 어떻게 했나 잘 알 것이구먼요. 돈은 길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 있지라우. 그 길을 따라가면 목포 중심상가와 목포역, 목포 버스터미널이 나올 것이구먼요.”
지영이 그들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돌아선다. 구불구불한 길과 적산가옥들이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고 있다. 차를 몰고 노적봉 앞을 지나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향한다. 아침 해가 차창을 연신 노크하고 있다.
도로 표지석이 서 있는 주변을 둘러본다. 정원이 있거나 2층으로 된 오래된 집들은 적산가옥이다. 그것들은 세월의 무게와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 낡기도 했지만, 아직도 성한 것이 많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 언덕 위에서 고압적인 모습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근대역사 1관이다. 약간 휘어진 길로 올라간다.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평화의 소녀상이 반긴다. 태극기가 소녀상 둘레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벽돌 2층 건물 외벽 창문 위에는 하얀 돌로 욱일기旭日旗 문양이 박혀있다. 목포 시내를 비추는 아침 태양, 바다 냄새를 머금은 따사로운 햇볕과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 기는 군국주의 냄새를 온다미로 풍기고 있다. 내부로 들어선다. 이른 시각이라 개미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하다. 1900년대 목포 시내가 미니어처로 전시되어 있다. 벽난로와 거울이 그 시절 조선인들의 삶과 대비된다. 거울에 비친 샹들리에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할 정도로 화려하다. 축음기에서 목포의 눈물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잠시 기울인다. 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가 해조음처럼 밀려오는 듯하다.
건물 뒤편, 일제가 미군 공습에 대비해서 만든 방공호로 발길을 돌린다. 안내문에 ‘노동은 조선인이 하였지만, 일본인들만을 위한 시설이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컵을 엎어놓은 모양의 내부로 들어선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곡괭이로 돌을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와 ‘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지영은 ‘문’을 찾아야 그도 살고 자신도 산다는 말을 주문처럼 읊조린다. 머릿속으로 답사 계획안을 복기한다.
9시 30분, 도서관. 11시 30분, 목포 문학관. 14시 30분, 북교초등학교. 16시, 문일석 생가. 19시, 방송국 복귀.
평화의 소녀상 어깨를 보듬고 있는 태극기 끝자락이 들썩인다. 시각을 재빨리 살펴본다. 아뿔싸, 9시가 조금 지났다. 신발 소리가 다급해진다.
도서관 검색대에서 ‘조선대중가요사’를 찾는다. 없다. 손잰 걸음으로 서고를 찾아간다. 그곳은 지하에 있어 고분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문을 연다. 종이의 원료인 펄프에서 풍기는 냄새와 오래된 책의 향기에 잠깐이나마 마음이 느긋해진다. 어딘가에 ‘문文’과 연결된 과거로의 ‘문門’ 열려있을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설렌다. 그것도 잠깐, 책이 없다. 곤충 채집을 하려고 어렵게 잡은 나비를 순식간에 놓친 것처럼 허탈하다.
사서에게 명함을 건넨다.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잠자는 고분 주인을 깨우는 소리 같다. 시간이 꽤 걸린다. 스톱워치가 작동한 것처럼 갑자기 타이머가 째깍거린다. 그것이 북소리로 변해 귀를 때린다. 손목시계를 본다.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너무 빨리 간다. 심장 고동 소리도 덩달아 빨라진다. 사서가 시립도서관 고문서 실에 가보라고 안내한다.
경광등을 차 위에 올린다. 최대 속도로 달린다. ‘문’이 어깨 위에 올라타기라도 한 것처럼 팔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잠시 후, 시립도서관이다. 1980년대 발행한 두툼한 책을 보물처럼 받아든다. 시계를 틈틈이 본다. 그럴 때마다 심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초침 소리가 나는 듯하다. ‘문’에 대한 보편적인 자료는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특별한 자료가 필요하다. ‘문’이란 원석에서 어떻게 갈고 다듬어 다이아몬드 같은 콘셉트를 찾아내야 할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답답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문(門)이 보이지 않는다.
목포는 개항 100주년을 맞아 1997년에 ‘목포의 눈물’ 기념우표를 발행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의 존재는 미약하다. ‘문’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를 더 취재해야 하는지, 콘셉트부터 대충 잡아야 할지. 이젠 무엇이 중요한지도 헛갈린다. 그나마 목포문화원이 남아있어 다행이다. 11시 30분이 가까워진다. 오늘 취재의 핵심인 목포문화원에 기대를 걸고 허둥지둥 달려간다.
목포문화원은 사각형 2층 건물로 겉면에 붉은색 타일을 붙인 단아한 건물이다. 기품이 넘친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제의 고금리와 횡포가 심해 일본어와 일본인 고용, 일본인 융자를 금지한 호남지역 인사들이 설립한 최초의 민족은행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일제는 일본은행과 강제로 통합시켰다. 이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이다.
문을 열자 사무실에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이 4면을 빙 둘렀다. 내빈용 탁자가 보인다. 베레모를 쓴 노인이 고개를 들고 지영을 흘낏 바라본다. 안쪽에는 두 개의 사무용 책상에 책꽂이를 가림막 삼아 두 명이 마주 보고 있다. 훈훈한 온기에 몸과 마음이 젤리처럼 말랑해지는 느낌이다. 직원에게 명함을 건네며 자료를 부탁한다. 여직원이 가까이 오라며 모니터를 지영이 쪽으로 돌린다. 지영은 복사할 수 있는지 물어본 후 프린트를 기다린다. 다른 직원이 의자를 권한다.
“제가 문일석 선생님 자료 찾느라고 고생 많이 했어요.”
지영은 숨을 고르며 직원에게 말을 건넨다.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들은 취재원이다. 아니, 소설에 대한 끈을 아직 놓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적확하다. 베레모가 지영을 쳐다본다. 형형한 눈빛이 강렬하다.
“그러셨을 겁니다. 우리도 그분을 빨리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직원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배어있다.
“제가 문일석 선생님의 주소를 알긴 하거든요.”
“뭐라고요!”
지영의 말에 직원과 베레모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실내가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오른다.
“네, 여기 들렀다가 그분 생가를 찾아가려고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지영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베레모가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아참, 우선 그 주소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목포 북교동 157….”
지영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애드벌룬에서 기체 빠지는 분위기를 직감한다. 애드벌룬이 터지기라도 한 것일까. 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직원이 볼펜을 책상에 힘껏 내려놓는 소리다.
“에이, 그 주소 가짜에요.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죠? 그거 백 프로 믿으면 안 돼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문일석은 신비에 싸인 인물이에요.”
“목포의 눈물 가사 때문에 일제로부터 고난을 겪었다는 것도 말에요?”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크죠. 그 사람은 우리 목포의 아니, 우리 민족의 수난을 상징하는 인물이니까요.”
지영이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 사무실 바닥이 거센 파도에 밀리는 파도처럼 울툭불툭 솟아오른다. 그러면 그동안 자신이 찾아 헤맸던 많은 것들이 허상일 수도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 ‘문’의 실체를 찾아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문門이 보이지 않는다. 발밑에서 살얼음판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이 자료 읽어보세요.”
직원이 심란한 표정으로, 프린트물을 지영에게 건넨다. A4용지 열 장이 훌쩍 넘는 문서이다. 큰 제목과 소제목을 섬광 스캔한다.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그 파장이 물결처럼 몸 전체로 번진다. ‘문’을 찾아 정상에 올라갔다가 절벽 밑으로 미끄러진 느낌이다.
‘카톡’ 소리가 지영을 호출한다. 김 작가가 보낸 카톡이다.
―막내, 오늘까지 취재일지 제출 요망. 콘셉트는 확실하게.
그 옆에 이모티콘이 붙어있다. 열린 문틀 옆에 검은 바탕의 하얀 글씨로 ‘아웃’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제대로 취재하고 보고하지 못하면 각오하라는 내용이다. 지영이 감전되기라도 하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다리가 휘청거려서 탁자를 두 손을 짚는다.
“맞은편에 있는 전 사무국장님을 인터뷰해 보세요. 목포 종결자시니까.”
직원이 베레모를 가리킨다. 그가 헛기침과 함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다. 지영은 그 옆으로 바투 다가앉는다. 녹음기를 켜며 양해를 구한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문일석 선생님 목포 분 맞나요?”
“왜정 때 목포에서 살았으니까 목포의 눈물 가사를 써서 가수한테 줬겠지요. 그런데 가사를 지었다고만 했을 뿐 그 사람이 어디 사람이라는 것은 정확하지 않아요. 내가 목포 태생이고 목포시청에서 30면 넘게 근무해서 웬만한 것은 두루 꿰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요.”
지영은 손에 쥔 종이 쪼가리를 놓치듯 녹음기를 탁자 위에 놓는다. 턱을 들고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바라본다. 온 세상이 정체된 느낌이 들어서 눈앞이 깜깜하다. 마치 막장에 들어선 느낌이다. ‘문’이 여기에도 없다니, 그를 만났더라도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제 무엇으로 ‘문’의 콘셉트를 잡아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모했다는 느낌에 머리가 암전된 듯 까매졌다가 하얗게 된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는다. 대본 자료를 준비하려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베레모에게 일제 강점기 목포에 대해 부탁한다. 베레모는 숨을 고른 후 강단진 목소리로 열변을 토한다.
“개항 전 목포의 크기는 지금의 10분의 1이었다고 해요.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닌 일제만을 위한 새로운 도시를 만든 것이었죠. 일제는 쌀, 김, 소금 목화가 많이 생산되었던 우리 농산물을 수탈하려고 동명동에서 서산동까지 섬과 섬을 이어 제방을 쌓았어요. 유달산도 헐고 여기 문화원 맞은편 산도 헐어서 메웠거든요. 그때부터 조선인들의 수난이 시작됐습니다. 그 이전에는 호남평야의 쌀과 생선들이 포구로 몰려와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유달산이 북풍을 막고 고하도와 화원반도가 거친 바람을 막아줬거든요. 밥을 짓다가 바구니를 들고 앞바다에 나가 고기를 퍼냈던 곳이 사라졌으니, 조선인들이 목포의 눈물 노래를 부르며 울분을 해소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왜냐면 ‘삼백 년 원한 품은’이란 가사는 임진왜란을 의미하거든요. 문일석 선생이 가사를 지을 무렵은 친일 문학인들이 일제에 빌붙어 민중들에게 친일적인 사고를 주입하기 위해 날뛴 시기였습니다. 그분이 쓴 가사는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일제에 나라를 뺏긴 한이 숨겨진 노래였어요.”
베레모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의 말은 머릿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진다. 그는 비감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일본인들이 우리 농산물 수탈하려고 선창 쪽을 메우면서 아름다운 목포를 훼손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유달산 끝자락에 공동묘지를 만들고 화장을 했다는군요. 그들은 조선인이 죽으면 중유를 뿌려 태웠답니다. 시체를 태운 검은 연기가 조선인들 사는 동네로 날아왔대요. 그 당시, 목포는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닌 일제만을 위한 새로운 도시였던 셈입니다.”
지영은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난다. ‘문’의 콘셉트는 아직도 터널 속처럼 깜깜하고 답답하다. 시간이 없지만, 큰 그림을 그리려면 숲을 보아야 한다. 14시 30분이 벌써 지났다. 다음 코스는 북교초등학교다.
하늘이 끄느름하다. 겨울비라도 내리려는지 공기가 축축하다. 행정실에서 1916년생 문일석과 윤재희를 확인한다. 졸업생 명단에 둘의 이름이 없다. 김일석, 이일석, 박일석뿐만 아니라 김재희, 이재희, 박재희를 찾았지만 비슷한 이름조차 졸업생 명부에 없다. 문일석도 없다.
16시, 오후 4시이다. 느닷없이 ‘줄글 사死’가 떠오르는 시각이다. 다음 취재할 장소는 ‘문’의 생가, 마지막 코스다. 그 주소가 가짜라는 소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도 잠깐, 일단 출발한다.
상가를 지나서 좁은 길목으로 들어선다. 언덕배기가 나타난다. 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그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의 번지수를 찾는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오래된 건물이 보인다. 벽에는 세월의 새카만 더께가 두텁게 덮여있다. 실핏줄 같은 금도 보이고 모서리는 군데군데 부서졌다. 그곳이 ‘문’의 생가였으면 하는 마음에 둘레를 꼼꼼히 살펴본다. 몇 십 년 아니,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과거와 현재를, 우리의 삶을 이어주는 힘이다. ‘문’이 어딘가에서 담쟁이덩굴처럼 뻗어 나가고 있을 것 같다. ‘목포의 눈물’을 아직도 애창하고 있는 것처럼.
‘문’의 실체는 정확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차에 타서 노트북 전원을 누른다. 인물 다큐멘터리로 일생을 조명하려고 기본 프로필과 업적, 관련 기사를 찾아서 정리한다. 또한, 사진과 영상을 비롯해 그 인물에 관한 모든 것이 필요하다. 숫자를 매겨서 최 피디와 김 작가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승용차 안에서 노트북을 이용해 보고문을 작성한다.
*<목포의 눈물을 작사한 문일석에 대한 구전과 기록물 검토>
문일석에 대한 재조명 필요:목포의 눈물 작사가에 대한 실체는 여전히 미궁이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부분이나 새로 파악한 내용을 소개한다.
본명이 윤재희라는 설에 대해:윤재희가 1916년생으로 1935년 24세에 습작생으로 응모했다고 하나 나이를 계산해보면 19세가 된다. 해남 윤씨라고 하여 족보를 확인한 결과 1920년생이라고 했다. 1969년 한 신문에 짧은 머리 모양에 선글라스를 쓴 사진이 남아있다.
소설가 박화성이 기억하는 문일석:1940년 문일석이 요절했다고 아쉬워했다. 28살이라고 했으나 맞지 않는다. 그러나 1941년에 발표한 것도 있어 불확실하다. 또한, 1974년 어느 신문에 발표하기를 문일석 씨는 박화성 씨 집안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지역 출신이라는 것은 확실했으나 성까지 바꾸는 경우가 드물어 목포 문씨와 관련된 집안의 성을 찾아봐야 한다.
문일석이 남긴 대중가요 가사(1935년부터 1941년까지):‘목포의 눈물’, ‘홍등야화’, ‘사나이 걷는 길’, ‘목포의 추억’, ‘향수의 휘파람’, ‘뒷골목 청춘’, ‘그 여자의 눈물’이 있다.
시인으로서 문일석 작품:차재석에 따르면, <호남평론>에 참여하는 시인이었다. 1937년 ‘바닷가에서’라는 시가 일석이라는 필명으로 남아있다.
명곡 탄생의 비화, 또 다른 원작자:차재석 선생이 글에 여담으로 남긴 말이 있다. 오성덕 씨라는 사람이 문일석 군이 표절해서 응모했다고 뇌까렸다고 한다(이난영의 오빠는 오모 씨의 글을 그의 친구가 개작해서 필명으로 투고했다고 함).
앞으로의 과제:그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는 박화성과의 관계, 문씨 집안 활동에 대한 부분부터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문일석과 관련된 작은 정보라도 알고 있는 분이 있으면 제보를 받아야 한다.
지영은 보고서 작성이 끝난 뒤, 콘셉트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서 쩔쩔맨다.
‘문을 신비의 인물로 부각해야 하나? 그건 상투적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문門’도 찾기 힘들다. 또 시각을 살펴본다. 흐르는 시간은 덧없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일단, 차의 시동을 건다. 새벽은 안개, 저녁은 황사의 장막이 도시를 뒤덮고 있다. 그 장막을 벗겨내면 ‘문文’이든 ‘문門’이든 보일 텐데 눈앞은 여전히 부옇다. 답답한 나머지, 차창에 워셔액을 뿌린 후 와이퍼를 작동시킨다.
어둑한 근대거리는 시간이 멈춘 듯하면서 현대와 공존하는 모습이다. 조각 글씨로 제작한 글자가 떨어져 나간 양복점 간판과 출판사 건물이 눈길을 끈다. 날씨 탓인지, 무슨 바이러스 탓인지, 상점 대부분이 한산하다. 온종일 커피 한 잔 마신 것이 전부인데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 ‘문文’과 ‘문門’이 안개나 황사 속에 숨어있으니 그럴 수밖에.
목포역 앞을 지나갈 때이다.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 NO’ 대형 플래카드가 태극기처럼 펄럭인다. 그 옆으로 ‘노 재팬. 가지 않습니다’ 손팻말을 든 사람들이 서 있다. 유난한 애국 도시이다. 무슨 바이러스 때문에 전국이 패닉 상태라는데, 이 도시는 역시 굳건하다.
“그래! 문은 바로 저거야!”
지영의 동공이 부풀어 오른다. ‘노 재팬’ 글자가 클로즈업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클랙슨을 강하게 울린다.
고하대로를 타고 클로버 모양의 목포 나들목을 향해서 간다. 가로수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우듬지가 석양빛에 물들기 시작한다. 차량들이 등대 같은 안개등이나 전조등을 서둘러 켜기 시작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을 따라 진행한다. 길은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최성한 글 인용
첫댓글 2021년 전남여류문학 연간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