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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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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무렵 은은한 바이올린 선율이 연세대 교정에 흐른다. 소리의 진원지는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교수의 연구실. 마침 레슨을 끝낸 그는 나이에 맞지 않은(!) 해맑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숱한 연주회에서 격정적으로 활을 놀리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포근한 기품을 한껏 풍긴다.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오던 연구실의 모습은 에디터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 외에는 소품 하나 없이 황량함마저 느껴진다. 마치 음악 이외의 것들은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공간은 주인을 닮는다 했던가. 세계 음악계를 놀라게 하며 이름 석 자를 날리던 시절엔 다부진 몸속에 음악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세월의 강을 지나자 그곳엔 가족의 자리가 생기고 이제 희망이라는 두 글자도 아로새겨졌다. 바이올린의 시인, 현의 귀공자로 불렸던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이 이제 희망 바이러스가 되어 치명적인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에디터 배만석 포토그래퍼 이창재
재능 기부로 희망을 전한다
연구실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것도 그렇고. 피아노야 음대 교수들 방에는 다 있는 거고. 내 방이 좀 썰렁한 편이지(웃음). 다른 교수들 방에 가보면 정말 눈이 휘둥그레진다. 호텔 뺨치도록 잘 꾸며놓은 교수들도 있으니까. 근데 어차피 여기서는 학생들에게 레슨만 해주면 되니까 조금 썰렁할 뿐 불편한 건 전혀 없다.
조금 전까지도 레슨이 있었던 거 같던데.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거의 개인 레슨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시간이 딱 정해진 게 아니다. 각자 스케줄에 맞춰서 하다 보면 저녁에 할 때도 있고 주말에 할 때도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강동석의 희망 콘서트’를 진행한다. 그러니까 올해가 11년째네. 지난 10년 동안은 간염 퇴치를 위해 콘서트를 했는데 올해는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해피 스마일 포 칠드런’이란 이름으로 진행하는데 수익금은 기아대책에서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터 ‘행복한 홈스쿨’에 전달된다. 한마디로 저소득층 결손가정 아이들을 위한 콘서트다.
간염 퇴치를 위한 희망 콘서트로 시작했다는 게 참 독특하다. 내가 직접 기획한 건 아니고 글로벌 제약 업체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서 제안해서 하게 됐다. 나도 간염 퇴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 콘서트를 시작할 무렵이 간염 백신이 처음 나온 때로 기억한다. 그래서 간염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한 게 지금까지 오게 됐다.
10년 넘게 음악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셈인데. 이렇게 의미 있는 음악회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영광이지. 순수하게 음악만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음악가들이 사회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거든. 콘서트에 오는 청중들도 좀 다르다. 콘서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10년 넘게 계속하니 이걸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욱 커지더라. 매년 음악회를 여는 곳은 많지만 한 사람의 이름을 걸고 한 가지 주제로 10년 넘게 한 음악회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희망 콘서트 외에도 자신의 재능을 여러 곳에 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뭐 기부라고 말하기는 너무 거창한데(웃음)…. 3년 전부터 불우청소년들에게 무료로 레슨을 해주는 ‘사랑의 바이올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악기도 사주고 자원봉사 하는 선생님들이 레슨도 해준다. 난 직접 가르치진 않고 음악회 연습할 때 봐주는 정도다.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도 벌써 5년이나 됐는데. 그건 이제야 조금 인정받는 분위기다. 처음 축제를 시작할 땐 실내악이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많아 아예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랬던 게 5년 만에 자리를 잡았으니 뿌듯하긴 하지. 잘 모르니 어렵게 느껴지는 거지 내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실내악은 두세 명이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는거니까 청중들과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거든. 원래 이런 축제는 작은 시골마을이 더 어울린다. 서울 같은 큰 도시는 좀 안 어울리지(웃음).
클래식이 어려워? 일단 즐겨봐
예전보다는 클래식 공연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일반인에게는 어렵게 느껴진다. 클래식이 왜 어려울까? 클래식을 듣는 습관이 안 돼서 그렇다. 클래식 중에는 물론 어려운 것도 있지만 듣기 좋고 이해하기 쉬운 곡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어렵다고만 생각한다. 일단 들어봐야 알게 되고 관심도 생기지. 무조건 즐기는 거, 그게 가장 중요하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접하면 좋을 텐데. 영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이 들어 공부하려고 하면 잘 안 되지만 어릴 때 영어를 접하는 환경에 있으면 저절로 되지 않나. 음악도 똑같다.
어떻게 처음 바이올린을 접하게 됐나. 어릴 때 내가 뭐 알았겠어. 부모님이 악기 하나 정도는 배워야 한다고 해서 시작한 거지(웃음).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기타도 치고 하모니카도 불고 하셨으니까. 누나가 피아노를 배웠고 나도 처음엔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다 바이올린으로 바꿨는데 거기서 재능을 발견한 거다.
어릴 때 ‘바이올린 신동’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던데. 그 나이에는 뭐든 조금만 잘하면 다 신동이라고 한다(웃음). 당시엔 클래식을 하는 애들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수준이 높지도 않았으니 더 주목을 받았던 거지.
출중한 재능 때문에 일찍 미국 유학길에 오른 거 아니었나. 일단 전공은 바이올린으로 정했고, 한국에서 배울 만큼 배웠으니 당연히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 내 생각도 그랬고 부모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외국에 갈 수 있지만 당시엔 유학은커녕 외국에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더구나 까까머리 중학생이 간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게 지금의 강동석이 있게 한 밑거름이 됐을 텐데. 한국에서 할 때와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었으니까. 거긴 또래 애들끼리 경쟁도 심하고 음악적 수준이 훨씬 높으니까 엄청난 자극을 받았지. 선생님한테 배우는 것도 있지만 애들을 보며 배우는 것도 많았다. 또 훌륭한 음악가들의 공연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었다. 한국에서는 1년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음악회가 매일 열리는 곳이 바로 뉴욕이었으니까. 단 한 명의 스승이 아니라 그런 분위기와 환경이 세계적인 음악가를 키우는 거지.
그런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바이올린 3대 콩쿠르를 석권하며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반열에 오르게 된 건가. 아이고, 난 바이올린 3대 콩쿠르가 뭔지도 모른다. 콩쿠르를 목표로 연습한 적도 없었고 콩쿠르에 자주 나가는 편도 아니었다. 그냥 몇 번 나갔고 몇 번 우승한 것뿐이었다. 당시에도 콩쿠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요즘은 더하지. 콩쿠르는 결과보다 좋은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 하는 게 딱 좋다. 콩쿠르가 엄청나게 많아져서 별 의미도 없을뿐더러 실력보다 연주 외적인 요인들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치니까. 옛날엔 90%의 실력에 10%가 더해져 훌륭한 음악가가 됐는데, 요즘은 10% 아니 5%의 실력만 있어도 유명해지더라. 훌륭한 음악가와 유명한 음악가의 기준이 달라진 거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걸 싫어했던 적은 없었나. 음악을 좋아했고 연주하는것도 즐겼는데 연습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기계적으로 계속 반복해서 연습해야 했으니까. 친구들은 밖에 나가서 실컷 노는데 난 바이올린과 씨름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솔직히 난 연습을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었다. 나 혼자 그 과정을 견뎠다는 건 말도 안 되고 다 혹독하게 연습시킨 부모님 덕이지(웃음). 연습은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이거든. 고독과 싸우면서 진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거지.
음악과 함께하는 난 복 받은 사람
외국에서 활동하다 우여곡절을 거쳐 16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그때가 1983년이었다. 그 전에도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군대 문제 때문에 올 수 없었지. 결국 미국 시민권을 받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고국에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적이었는데 어찌나 뜨겁게 환영해줬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다. 첫 공연으로 서울시향과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반응이 정말 뜨거웠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중 프랑스인 피아니스트와 결혼했고 지금도 가족들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외로울 법도 할 텐데. 연주자들의 삶이 원래 집에 붙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연주해야 하니까. 가족들이 이해해주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니 여기 있지만 방학 때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한다.
가족보다 음악이 우선이라는 말인데 당신에게 있어 음악이란 어떤 의미인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음악은 내 직업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음악은 삶과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보면 행복한 거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 속에 있으면서 먹고살 수 있으니까(웃음). 한마디로 복 받은 거다. 근데 음악이라는 건 나한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 당장 세상에 음악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공허하겠나. 물론 지금은 음악이 넘쳐서 탈이기도 하지(웃음).
넘치기는 해도 음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정서적으로 꼭 필요하지. 음악으로 인해 삶이 윤택해지니까. 아무리 야만적인 부족이라도 북소리가 울리면 절로 몸을 흔드는 법이다. 그게 바로 음악의 힘이지. 더구나 음악은 다른 예술과 달리 따끈따끈하거든. 그림은 걸어놓고 언제든 감상하면 되지만 음악은 그 순간을 놓치면 들을 수 없다. CD도 있고 MP3도 있지 않느냐고? 싱싱한 채소로 막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과 통조림에 든 음식을 먹는 게 같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음악은 살아 있어야 제맛이다.
클래식이 아닌 대중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나. 학교 앞 거리만 나가도 귀에 들어오니 안 들어봤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학창 시절엔 비틀스의 음악을 듣기도 했는데 큰 관심이 없으니 일부러 찾아서 듣지는 않는다. 대중음악이 달콤함만 가득한 사탕이라면 클래식은 멋들어지게 차려진 스테이크라고 할까. 아무래도 맛이 다르니까.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성공한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으니까 성공한 음악가라고 할 수는 있겠지. 예술가로서 후회없는 삶을 살았고 지금도 만족하면서 살고 있으니 성공한 거 아닌가. 더 욕심을 부려 유명세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더 유명해질 걸 알면서도 오히려 피하는 편이었지. 이젠 정말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젊었을 땐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거든. 근데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그동안 안 했던 걸 하게 되더라. 실내악도 그렇고 희망 콘서트도 그렇고. 그저 지금처럼만 사는 게 남은 내 꿈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