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 진주와 진주소년회 활동 심국보 _
진주시교구2011 년 5 월 5 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진주교육지원청 앞 마당에서는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 >라는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 이 기념비는 2006 년부터 진주문화사랑모임 (대표 : 리영달 )에서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 발상지인 진주에 기념 표지석을 세우자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결과 세워진 것이다 .
제막식 2011.5.5
‘진주문화사랑모임 ’은 2008 년 5 월 5 일 어린이날을 맞이해 ‘진주소년운동과 강영호의 문학세계 ’라는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여 진주소년운동의 의의를 조명하기도 하였다 . 이 토론회에서 당시 경상대 강희근 교수는 “진주가 1920 년대 우리나라 아동문화나 소년문화운동의 발상지였으므로 거기에 대한 인식의 확대가 필요하다 . 진주의 소년운동지도자 강영호의 활동 자료를 발굴하 는 것이 시급하다 . 동경대 신문에 실린 동화를 비롯하여 동경 유학생 시절 강영호의 작품들을 찾아내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 강영호의 문학작품 (시 ·소설 ·수필 )은 『천도교회월보 』에 온전히 보관된 것이 2009 년 5 월 확인되었다 . 이러한 사실이 진주지역의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 > 라는 기념비 건립에 속도를 내고 , 진주시의 예산지원과 진주교육지원청의 도움으로 2011 년 5 월 5 일 어린이날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 진주의 소년운동 ,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시작인가
국가기록원 나라 기록에는 “소년운동은 3·1 운동 이후 민족 실력양성운동의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 소년단체의 조직은 서울보다 지방인 안변 , 진주 , 광주 , 왜관 등에서 먼저 결성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 진주 외에도 안변 , 왜관 등지에서도 소년회가 세워지기도 했으며 , 안변 , 왜관의 소년회는 진주보다 앞서기도 한다 . 그런데도 진주를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로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진주소년회가 조직된 것은 1920 년 8 월로 , 1921 년 서울에서 천도교소년회가 만들어지기 9 개월 전이었다 . 우선 관련 사실들을 몇 가지 살펴본다 . ① 『천도교회월보 』 - 1922 년 5 월호“금일의 소년문제는 실로 천하의 문제이며 소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데 의하여 비로소 천지운절 天地隕絶 의 기를 보할 수 있다 하는 것이 금일 식자배 識者輩 의 공통으로 떠드는 소리이외다 … 춘만건곤 春滿乾坤 에 복만가 福滿家 라 . 우내 宇內 의 태운 泰運 이 청제 靑帝 의 수레를 타고 동출 東出 의 고국 故國 을 두루 찾을 때 그 태화 泰和 의 일지운 一技運 이 어리고 고운 소년의 사회에까지 핑돌게 되었습니다 . 경남 진주의 소년들이 제일착으로 그의 대운에 참여하였으며 , 천도교의 소년 남녀들이 연 連 하여서 새빨간 횃불을 들었습니다 .” ② 『어린이 』 - 1923 년 3 월 (창간호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띈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 ” ③ <동아일보 > 1923 년 5 월 1 일 자“진주지방은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발을 든 곳인데 , 오늘은 300 명의 회원을 가진 천도교소년회 주최로 오후 3 시에 선언문을 돌리고 밤에는 기념강연을 한다더라 ” 진주소년회보다 안변 , 왜관의 소년회가 앞섰음에도 진주소년회를 본격적인 소년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어린이 』지 창간호에서 소파 방정환이 언급했듯 ‘사회적 회합의 성질 ’ 때문이다 . 방정환을 비롯한 소년운동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식민지지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린이운동을 독립운동 ,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시작했다 . 당시 소년 (어린이 )의 연령층은 19 세까지로 폭이 넓었으며 , 압박받는 자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메이데이 (노동절 )와 같은 날인 5 월 1 일로 어린이날을 제정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진주소년운동 기념비 제막식 때 기념품으로 제작한 다포
진주소년운동과 우리나라 어린이운동 발상지.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