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 전통의 한옥마을, 그 고향의 품에 안기다
- 남사예담촌 돌담길을 걸으며 마음에 안식을 얻다 -
흙돌담길에 기와 한옥이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남사예담촌은 선비의 기풍이 남아 있는 옛 마을이다. 선비의 상징인 회화나무가 골목을 빛내고 700년 매화나무 600년 감나무가 꽃피우고 열매 맺는 이 마을은 푸근하고 넉넉한 고향의 품 같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길에 들러 유숙한 이 마을을 걸어보며 숨은 역사의 이야기를 들어볼 일이다.
남사예담촌에서 해봐야할 농촌체험 프로그램
농심체험 : 전통물레방앗간체험, 내 꿀벌 갖기, 1일 농사꾼
전통놀이체험 : 삼곶놀이, 풍물 캠프파이어
전통배움체험 : 고가ㆍ문화재ㆍ산청9경 탐방, 서당체험, 종이 한옥짓기
(사양정사)체험, 전통 혼례 체험, 다도체험, 돌담장 쌓기 체험.
약초체험 : 선비나무염색, 한방떡메치기, 야생화탐방, 오가피 술 담그기
숙박 및 특산물
남사예담촌에는 옛 한옥을 이용한 숙박시설이 있다. 농촌체험과 함께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여행자에게 큰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또 이 지역 특산물인 친환경딸기, 밤고구마, 예담된장, 청국장 등이 있다.
남사예담촌에서 꼭봐야 할 것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하연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에 600년 된 감나무와 700년 된 매화나무가 있다.
최씨고가 -이씨고가 -사양정사 -이동서당 -이사재 -사효재
햇볕 고인 뜰 댓돌에 앉아 돌담을 바라보다
담장 아래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마당에 고이면 어둔 밤도 환하다. 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아와 누운 고향집 밤. 볼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에 눈 비비며 일어나면 달빛에 젖어 돌아오신 아버지가 산처럼 나를 안아주셨다. 남사예담촌 돌담 아래 감나무에도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가을은 오겠지.남사예담촌 한옥과 돌담길은 그 자체로 사람 마음을 위로 한다. 도심의 빌딩 숲 직육면체 아파트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자연미와 여유로움으로 일상에 찌든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
한옥 돌담길을 걸으면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 떠오를 것이다. 단성면 남사리에 있는 남사예담촌은 여행자를 넉넉하게 안아준다.
맨드라미 피어나는 여름 돌담길에서 들풀의 향기가 풋풋하게 풍긴다. 허브식물의 그 향기가 세련된 도시의 향기라면 남사예담촌 돌담길 흙길에서 피어나는 풀향기 꽃향기는 한옥과 꼭 어울리는, 그래서 여행자의 마음을 더 풋풋하게 만들어 주는 향기다.
한옥 마당으로 들어가 댓돌에 앉았다. 돌담에 빼앗겼던 눈길을 끌어 마당에 꽂는다. 부서져 내리는 햇볕이 황금빛 가루로 떨어져 마당에 고인다. 바람만 불지 않았다면 그 고운 햇볕 가루는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이다. 고즈넉한 한옥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을 느끼는 일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길에 하룻밤 묵었던 곳 보기
임진왜란 당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인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을 위기에 놓였다. 이때 영의정 류성용과 판중추부사 정탁 등의 진언으로 사형의 위기를 넘기어 1597년 4월 1일 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왕의 명은 ‘백의종군’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계급 없는 군인으로 강등된 이순신은 같은 해 4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일 초계에 도착했다.
난중일기에 이때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의 행로가 나와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6월 1일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출발하여 오후 늦게 산청의 단성면 사월리 박효원 종의 집에서 유숙했다. 종의 집 헛간에서 빈대에 물려가며 잠을 설치면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날이 새자 길을 재촉하여 6월 2일 늦은 아침에 단계천(현재 산청 단계마을) 가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후 삼가를 거쳐 권율 장군의 진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46일 간 머물다가 칠천량 해전의 참패 소식을 듣고 나서 권율 장군의 말에 따라 남해의 전세를 살피기 위해 7월 18일 삼가현을 거쳐 7월 19일에 단계천변을 지나 지금의 신안면 백마산성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피고 단성현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남사예담촌 이야기 보기
남사예담촌은 니구산(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산 이름에서 따온 산 이름이다.)이 마을을 둘러싸고 사수가 마을을 감싸고 돌아나간다. 산과 물길이 만들어 놓은 마을은 반달모양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마을 한가운데를 빈터로 남겨두고 있는데, 마을의 운세가 보름달이 되어 다시 기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에는 왕비를 배출하고 고려 말 문인 강회백과 조선 세종 당시 영의정을 지낸 하연 등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100가구가 넘게 사는 이 마을에는 목조한옥과 전통한옥 등에서 사람이 진짜로 살고 있다. 민속촌처럼 그냥 꾸며 놓은 한옥이 아니라 시골 생활이 고스란히 배어 오랜 삶의 윤기가 배어 있다는 얘기다.
이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18호), 최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17호), 사양정사(연일 정씨 문중의 재실. 문화재자료 제453호) 이사재(송월당 박호원의 재실. 문화재자료 제328호), 이동서당(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업적을 이룬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한 서당. 문화재자료 제196호), 사효재 등은 이 마을에서도 유명하다. 이런 한옥들이 만들어 내는 돌담길의 옛 담장 자체도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됐다.
아버지를 향한 화적들의 칼날을 몸으로 막아낸 효자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효자각을 세워줬는데 불이 나서 소실 됐다. 그 비와 효자각은 남사예담촌 다른 곳에 세웠고 문중에서는 마을에 사효재를 지어 그의 효심을 기리고 있다. 저 멀리 넘실거리는 산 능선, 산 능선을 닮은 한옥 기와의 곡선, 그 부드러움을 닮은 남사예담촌 마을 사람들의 마음. 사효재에 깃든 효자 이윤현의 이야기가 이 마을의 이름과 함께 한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 대한민국 국악의 큰 스승인 기산 박헌봉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다. 선생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민족음악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악계에 온 몸을 던졌다. 1945년 국악국립원 창설을 주도 했으며 원장을 지냈다. 1960년 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고)를 설립,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국악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창악대강'은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안겨줬다.
남사마을에 ‘예담촌’이란 이름을 붙였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옛 담의 신비로움과 전통과 예를 중요시하는 이 마을의 단정한 마음가짐을 담아가자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매년 이 마을에서 전통문화축제가 열린다. 옛집과 돌담이 정겨운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옛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다. 전통혼례체험, 전통국악공연, 풍물한마당, 선비체험, 천연염색, 전래놀이, 솟대만들기, 예담그림그리기 등의 공연과 행사가 진행된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단성IC→20번 도로를 타고 단성면 남사마을 방향. 남사예담촌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81-1
첫댓글 예담촌 전통 찻집도 한몫하는데,,,,ㅎㅎ
예담촌 전통찻집......차뿐만아니라...콩국수와 녹차수제비...강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