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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 프랑스 군부는 중요한 군사 기밀이 독일 대사관을 통해 빠져 나가고 있음을 탐지했다. 단서는 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군부는 패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희생양 또는 전범을 필요로 했고, 유태계 장교 드레퓌스는 그러한 희생양에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드레퓌스는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피카르라는 프랑스군 고위 장교가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을 적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피카르는 한직으로 좌천당하고 만다. 그의 무죄 주장도 묵살되었음은 물론이다.
1898년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대통령에 대한 공개장을 통해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과 군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함으로써, 프랑스는 일대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정치가 클레망소, 작가 아나톨 프랑스 등이 졸라측에 가담했고, 끈질긴 재심 요구 끝에 군부는 결국 1906년에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단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럽 전역을 들끓게 하였는데, 결국 이후 파시즘적 정권이 공작 정치를 통해 진실을 은폐, 호도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행태, 또한 그러한 행태에 맞서 싸운 양심적 지식인들의 승리 등을 통칭하는 일종의 일반 술어로 자리잡았다. 또한 처음에는 드레퓌스의 처벌을 옹호하던 언론이 나중에 가서는 그를 살려낼 것을 주장함으로써, 언론 특유의 카멜레온적 속성을 드러낸 것도 이 사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다.
실로 프랑스 또는 유럽 전역이 양심적 지식인 세력과 수구적 음모세력 또는 반유태주의, 인종차별주의적 세력으로 나뉘어져 갑론을박했고, 그 결과 양심적인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프랑스 또는 유럽 지성계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한편 이 번역서는 본래 1977년에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1978년에 "드레퓌스: 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재출간 되었으며, 다시 1979년에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역사적 전개 과정과 집단발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82년에는 언론인 임재경 선생이 집필한 '드레퓌스 사건의 사회사적 배경'이라는 해제를 대신한 서문이 추가되어 역시 한길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저자는 헝가리 출신 언론인 니콜라스 할라즈인데, 원서는 1957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이 출간 당시의 우리 나라 사회에서 지녔던 의의랄까 그런 것이 있다면 역시, 고문과 음모에 의해 조작된 간첩 사건이 잊을만 하면 한 건씩 터지곤 하던 우리 현실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공안 정국 속에서 선거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또는 야당과 재야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용공 조작이 적지 않게 이루어지던 우리 현실과 맞물리는 책이었던 셈이다. 이른바 '문민 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에 이른 지금, 예전과 같은 파렴치하고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용공 조작이나 간첩 조작은 더 이상 없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보다 유연한 형태의 그래서 일반 국민들로서는 감지하기 더욱 힘든, 교묘한 공작 정치와 음모가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어쩌면 그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한 보편적인 행태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효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책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1995년 9월 12일자 '리베라시옹'지에 따르면, 드레퓌스 사건 이후 100년만에 처음으로 프랑스군이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고 한다. 프랑스군 역사학자 장 루이 무뤼 장군이 프랑스 유태인 중앙 종교법원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한 것이다. 드레퓌스는 1906년에 대법원에 의해 복권되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은 당시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뤼 장군은 유태인 종교 법원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반유태주의 정서에 편승하여 무고한 사람을 조작된 서류에 입각하여 추방한 군사적 음모임을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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