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우울증
신민섭
청소년기는 아동기의 끝과 성인기의 시작을 연결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서,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보다도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열려져 있는 활력 있고 역동적인 시기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아직 미성숙하고 아동도 성인도 아닌 경계선적인 불확실한 위치에 있는 데 비해 앞으로의 진학이나 직업 선택에 대해 고민하고 계획하는 등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선택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해지고 부적응 행동을 보일 취약성이 높은 시기이기도 하다. 청소년기에 우울증, 사회 공포증, 약물 남용, 비행 그리고 자살 시도 등 제반 정신 장애의 빈도가 급격히 증가된다는 사실은 청소년기가 정신 장애를 보일 취약성이 매우 높은 시기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청소년기에는 신체적 성숙과 심리-사회적 성숙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사춘기 변화에 수반된 성적 충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점 외에도 일상 생활에서 그들에게 부과되는 상충적인 요구와 역할들로 인하여 청소년들은 쉽게 우울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갈등에 휩싸이는 경우가 빈번하다. 즉, 청소년들은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하며 의사 결정 시에도 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따르는 위치에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이와 체격에 걸맞게 독립적이고 책임 있는 행동이 요구되는 등 서로 이중적인 기준이 적용되는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갈등과 의문을 강하게 야기시킨다.
우울증은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거나 관찰할 수 있는 정신과적 장애의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한 번 이상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한다.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우울한 기분, 죄책감, 무기력감, 자신감의 상실, 흥미나 즐거움 및 활동 수준 저하, 주의집중 곤란, 피로감, 식욕 및 성욕 감소,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생각, 자살 행위 혹은 생각, 수면 장애 등이지만, 청소년들은 성인들과는 달리 우울한 경우에 여러 가지 문제 행동을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즉, 우울하고 슬픈 정서보다는 짜증을 많이 내고 부모에 대한 반항, 공격적인 행동, 무단 결석, 가출, 도벽, 성적 저하, 주의집중의 곤란 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는 비교적 모범적이었던 학생이 상실, 좌절들을 경험한 뒤 비행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내면의 우울 증상이 문제 행동으로 외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청소년들이 내적인 갈등이나 좌절, 우울감 등 정서적인 문제로 인해 비행을 보일 때 이를 “가면쓴 우울증(masked depre-ssion)”, 혹은 “위장된 우울증”이라 하며, 공식적인 정신과적 진단으로는 우울증적 품행 장애(depressive conduct disorder)라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모나 행동, 생각, 감정에 대한 자기-자각(self-awareness) 능력이 급증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집착하게 되고,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증가될 수 있다. 또한 사춘기 변화에 따라 자신의 외모나 이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자신이 남보다 돋보이기를 원하는 등 자기 도취적 욕구도 증가되어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 자기(ideal self)와 현실적 자기(real self) 모습간에 괴리가 커질 경우 자기-도취적인 욕구가 좌절되어 고통스런 정서상태가 초래되기 쉬우며 이러한 심리상태에서 즉각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 강렬해진다. 따라서 청소년들은 학교 공부에 대한 흥미나 관심이 저하되고 친구나 가족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현실 도피적인 문제 해결 방법으로 전자오락이나 PC통신, 비디오를 통해 즉각적인 욕구 만족을 추구하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들의 음악에 몰두하기도 하며, 술이나 약물에 의존할 위험도 증가된다.
이같이 청소년기는 여러 가지 정신 장애에 대한 취약성이 높은 시기이며 자살 시도율도 급증하는 시기이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마는 성공적인 자살율은 성인에서 더 높지만 자살 시도율은 청소년기에 더욱 높은데, 이러한 사실은 청소년 자살 시도의 대부분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며 스트레스, 상실, 좌절, 우울 등 고통스런 경험에 대한 충동적인 자기-도피적인 행동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청소년기 특유의 정서적 문제나 심리적 특성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자아정체감(identity)” 형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아직 미래에 대해서 확신이 부족한 가운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감안하여 장래에 대한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삶의 의미와 가치관, 종교관, 이성관 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많은 경우에 심리적 방황과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자아정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집단 구성원을 동일시하거나 자기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람을 동일시하기도 하며 역사적 위인이나 작품 속 인물, 혹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영웅들을 동일시하여 그들과 비슷한 의상을 입거나 헤어스타일을 모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일시 과정을 통해 자아 정체감이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각자가 성인기에 예상될 수 있는 목표와 가치를 향해 일정한 방향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자신이 동일시한 여러 부분들을 개인의 고유한 특성과 전체적으로 통합할 때만이 진정한 자아 정체감이 형성될 수 있다. 청소년들은 자아정체감 형성과정에서 부모나 권위적인 대상에 대해 갈등을 느끼고 반항적인 행동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청소년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자아감(unique of self)을 확립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나의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은?” 등등에 대해 건강한 방식으로 자아정체감을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에 청소년들은 자아상(self-image), 성에 대한 태도, 장기적인 목표, 직업 선택 등을 포함한 삶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불확실감을 느끼게 되고 만성적인 공허감이나 권태감을 경험하기도 하며 때때로 죄책감과 책임감이 결여된 듯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함이 없이 즉각적인 쾌락과 욕구 충족을 무모하게 추구하기도 하고 불안, 우울감을 경험하고 도벽, 약물이나 알코올 남용, 무분별한 성적인 방종 행위 등을 보일 수 있으며, 심한 경우 자살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
청소년들이 자아 정체감을 형성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심리적 혼란과 갈등 그 자체가 반드시 정신과적 장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란의 심한 정도와 지속 기간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어 학업이나 친구 관계, 가족 관계를 포함한 전반적인 심리-사회적 적응을 저해하게 된다면 이는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이며, 조속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만성적이고 심각한 정신과적 장애로 발전될 위험이 많다.
이와 같은 청소년기의 발달과제를 잘 성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청소년들이 내적인 욕구와 충동, 갈등에 잘 견디고 대처하는 자아-강도(ego-strength)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의 애착이 안정되게 잘 형성되고, 화목한 가정 분위기에서 성격발달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자신의 욕구나 갈등에 대처하는 능력이 잘 성숙된 청소년들은 자아 정체감 형성이라는 청소년기의 막중한 과제를 큰 어려움 없이 성취할 수 있으나 부부간, 형제간에 불화와 다툼, 원망이 많은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에는 심한 혼란에 빠지거나 정신 장애로까지 발전될 위험성이 있다.
청소년들의 정서 및 성격 발달이 안정되고 건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신뢰 및 일관성 있는 훈육이 가장 중요하다. 늘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녀는 잘못된 길로 갈 위험이 적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면 청소년기에 인생에 대한 목표, 가치관, 종교관, 이성에 대한 태도 등 자아정체감 확립이 큰 갈등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 생각된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가 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 부모님,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생활에서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 장애가 결코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지 못하며, 자살과 같은 자기 파괴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은 결코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을 포함하여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른들이 먼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믿음과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신민섭/서울의대 어린이병원 소아정신과 교수이며, 서울대병원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E-mail:shinms@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