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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살아 계신 주님 (1) *
본 문 : 계1:9-20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로마 황제가 있다면, 도미티안 황제일 것입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티투스 황제의 동생입니다.
티투스 황제는 A.D 70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해서 예루살렘을 정복한 유명한 황제로서,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또한 대단히 지혜롭고, 명석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짓밟기도 했지만,
결코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티투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도미티안은 자기 형과는 달리,
대단히 잔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단히 반기독교적인(antiChristian) 사람입니다.
바로 이 도미티안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인 황제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로마시민들은,
로마의 황제를 가리켜서,
“우리 주(主)”, “우리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사용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은 아니더라도,
로마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에 거주하는 자는 누구나,
“씨이저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서로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기록하고,
또 박해를 받았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가이사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고백 때문에,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제물로 희생당한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차하게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순교의 제물로, 자기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들이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30대 초반에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는,
그때 이후로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인데,
그때에도, 요한을 위시한,
모든 제자들의 주님을 향한 충성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 뿐만 아니라,
제자로써, 주님을 따르며 살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제자들에게는, 신앙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뭔가를 이루어 보려고 꿈꾸던 많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후에,
깊은 실망을 하고, 신앙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들어서, 그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제자들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박해와 역경과 환난 속에서, 목숨을 던질지언정,
자기들의 사랑의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신앙의 길로 달려가게 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기록했던
사도 요한도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다가 붙잡혀서 밧모 섬으로 귀양을 왔던 것입니다.
9절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밧모라는 섬은 지금의 터키에 부속된 섬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과 에베소 근처의 항구 도시 밀레도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는데,
그 밀레도라는 섬 건너편에,
밧모라는 작은 섬이, 지금도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서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바위 섬입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이 섬에서,
꼼짝 못하게 묶여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무인도와 같은 이 섬에서,
살아 계신 주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 날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한 거룩한 주님께 기도하다가,
혹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요한은,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초점은 한마디로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아마도 18절 말씀일 것입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陰府)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입니다.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 계시며 지금도 물론 살아 계십니다.
고통받고 박해받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소망의 주님이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고통과 전쟁과 역경과 말할 수 없는,
혼란의 세상 한복판에서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살아 계셔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1장 11-16절에, 이같은 메시지가 나와 있습니다.
먼저 11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 일곱 교회가,
다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에,
이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교회들보다 훨씬 큰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교회를 뽑은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이들 교회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의 형편을 대표한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를 대표할 수 있었던 일곱 교회를 선택해서,
사도 요한에게 이 편지를 보내게 하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이같은 모든 교회를 다스리시며 심판하시고,
주관하시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12절입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유태인들이, 『메노라』라고 부르는 것인데,
가운데 가지가 있고 양 옆으로,
세 개씩의 가지가 있어서 모두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촛대만 본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13절)를 보았습니다.
이 촛대는 무엇의 상징입니까?
요한계시록 1장 마지막 절에서 촛대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왜 하필이면 교회가, 일곱 금 촛대로 싱징되었을까요?
촛대는 빛을 발합니다.
그것이야말로,(촛대에서 빛은)
주님이 자신의 몸 된 교회에 대해서 가지시는,
가장 커다란 기대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 세상 속에 나타날 수 있도록,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고, 교회 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교회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주님은 친히 그 교회를 심판하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스스로 그 교회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그 주님의 그 안타까움은.
2장과 3장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주님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마르틴 루터와, 칼빈과 같은 사람을 통한, 위대한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예언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자기가 뛰어들었던,
종교개혁만으로, 교회가 새로워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입니다.
오늘 교회를 다스리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신지 13-16절을 보십시오.
“촛대 사이에 인자(人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죄우에 날선 검(劍)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주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선포하실 때,
물론 우리가 전혀 몰랐던 사실을 계시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메시지를 받아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닙니다.
계시라는 말 자체가 뚜껑을 열고,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의미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닙니다.
주님은 계시로써,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세기의 성도들이 처음 이 계시를 받았을 때,생각해 보면,
그들은 여기에 나오는 표현들에,
익숙해 있었음을 짐작케 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은,
이미 구약에서 사용된 것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에 끌리는 옷이라고 하면,
쉽게 제사장의 옷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특별히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히브리서에서 잘 말씀됩니다.
대제사장의 책임은,
사람들의 문제와, 죄와 고통과 염려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해결자(중보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면,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세상의 짐과 성도들의 짐을 해결하시고 역사 속에 진정한 소망으로 등장하십니다.
2. 가슴의 금 띠
사실 제사장은 금 띠를 띠지 않았습니다.
이 금 띠는 왕이 띠고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왕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하잖아요!
주님은 자신의 제사장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의 문제를 담당하시고,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역사 속에 관여하시고,
하나님의 경륜을, 펼쳐 가십니다.
그분은 왕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제사장이고 왕이십니다.
3.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머리
이 상징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소극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무죄성(無罪性)을 상징합니다.
적극적으로는, 그분의 거룩성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4. 불꽃 같은 눈
그분은, 나를 꿰뚫어 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공의로우시고,
참으로 전지(全知)하십니다.
그분의 이러한 이미지를, “불꽃 같은 눈”이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5.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은 발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발로 밟아 버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확 발로 밟아 버려!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정복자 혹은 승리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 “발”이라는 단어는,
로마 당시의 문화적인 표현으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사단을 그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표현이 성경에도 나오는데,그것은 정복자의 이미지,
승리자의 이미지입니다.
주님은 진정한 정복자요,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더군다나 그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그만큼 견고한 승리자의 발을 가지고 계신 그분이,
진정한 역사의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메시지를 받을,
당시의 세상에서는 네로가 승리자였고,
도미티안이 승리자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패배자차럼 보였습니다.
이때 주님은 승리자의 이미지로 등장하십니다.
사실 주님은 언제나 승리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 주세요!
6. 많은 물 소리와 같은 음성
나이아가라 폭포가, 한참 대단하게 쏟아질 때처럼,
거대한 폭포소리 같은 음성,
이것은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는,
바로 이 부분을 주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깨지는 거대한 파도 소리 속에서,
사도요한은 자기의 고독의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도 세계를 장악하고,
이 세계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많은, 물 소리 같은 권세 있는 하나님의 음성,
그분은 침묵하지 않고,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7. 오른손에 있던 일곱 별
별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이라고 한 이유는, 오른손이 더 힘 있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도미티안 황제가,
아무리 교회를 흔들어도,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경멸해도,
교회 자신이 가진, 연약함 때문에,
혹은 세상의 핍박 때문에,
때로 교회가 넘어져도,
주님은 아직도 자신의 능력의 손안에, 교회를 쥐고 계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승리와 격려의 메시지가 되었겠습니까?
8. 그 입에서 나온 좌우에 날선 검
아마도 어떤 사람은,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을 생각해서,
아니면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관한 말씀을 생각해서,
이 표현이, 말씀을 상징한다고, 해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2절로 가기 전에,
에베소서 6장으로 가기 전에,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성경 해석의 순서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에 보면,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의 입에서 이(利)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여기에서 나오는 입의 검은, 심판의 사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마지막에 열방들과 민족들과 온 세계를 심판하실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9.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얼굴
떨떠름하게 비취는 해가 아니라,
힘 있게 비취는 해 같은 영광스러운 얼굴입니다.
베일을 걷어 버리고,
모든 것이 드러날 대로 드러난, 그분의 영광스러운 얼굴의 모습입니다.
그분의 빛 앞에는 아무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 완전한 영광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놀라우신 주님,
영광의 주님이 교회들 가운데 다니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들은 지금보다 더 미미하고,
연약한 교회들이었습니다.
지금 터키에서 볼 수 있는 교회는,
1세기의 것보다는 A.D. 600년대의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소위 비잔틴 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초대 교회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주 미미합니다.
반면에 하드리안과,
도미티안 같은, 로마의 황제들을 숭배하던,
전당(殿堂)이나 아폴로와 제우스 같은,
희랍의 신들을 숭배하던 신전은,
지금도 기가 질릴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이방 신전들의 위압 아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싸웠던 모습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겁에, 질렸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도,
용기백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살아 계신 주님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방 신전의 규모가 크면 무엇합니까?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이 받았던 그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살아 계셔서 교회를 붙잡고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 주님 때문에 ::::::::::!
둘째, 살아 계셔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17,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인간이 가지는 최대의 공포는, 바로 죽음의 공포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그것은 죽음 건너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입니다.
또 그렇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중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도 죽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한 번 경험하고,
다시 경험할 수 있지만,죽음은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정말로 다시 살아 올 수 있다면,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쓴 짤막한 희곡 가운데,
“나사로”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사로를 소재로 해서 쓴 것입니다.
그 희곡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나사로가,
“나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난 후에, 다시 죽었을까요?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또 그래야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죽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한 번 경험한 나사로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정말로, 사신 분이 나옵니다.
다시 살았다가, 다시 죽은 분이 아니고,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그래서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18절에서 주님은,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아십니다.
친히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죽음을 경험하신 분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경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세계를 친히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독재자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모든 인간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 역사 속에서,
이 역사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바로 그 교회의 주님일 뿐만 아니라,
죽음을 다스리시고, 죽음 이후의 음부의 세계까지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1세기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핍박에 직면하여,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통해서, 나타나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죽어 보았다. 염려하지 말라. 내가 이 죽음을 다스린다.”
세세토록 살아 계신 그분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놀랍게 만들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저 유명한 콘스탄틴 황제 때,
기독교가 국교(國敎)로 공인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이 일단락되었지만,
그것으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A.D.360년대에, 줄리안이라는 황제가 등장합니다.
그는 콘스탄틴의 조카 뻘 되는, 황제였습니다.
그에게는 “배도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는 도미티안 이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한 무명의 성도가, 원형 경기장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줄리안 황제가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나의 주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줄리안 황제가 비웃으면서, 이런 대답을 합니다.
“네 주님이 살아 계시다고? 그렇다면 지금 그 나사렛의 목수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그때 그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줄리안 황제를 향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폐하,내 주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폐하 같은 사람을 위하여 관을 짜고 계십니다.』
이것이 361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 다음 다음 해인 363년에 이 줄리안 황제가,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죽어 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 유명합니다.
“오 갈리리 사람이여, 그대가 승리자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죽음을 다스리십니다.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바로 그분이, 함께하신다면,
비록 죽음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죽음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 죽음을 다스리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자들은,
죽음 앞에서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계신 내 주님앞에,
역사를 다스리시고, 사람들을 다스리시고, 생명을 다스리시고,
죽음을 다스리시는 바로 그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한 성도의 특권인지요.
셋째, 살아 계셔서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계시록 1장의 시점에서,
사도 요한이 이미 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또 보게 될 일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본 것은 요한계시록 1장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장에서 본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살아 계신 주님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처음에 죽음 권세, 사망권세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보여 주고,
바로 이어서 주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아야 할, 이 땅에 있는, 주님의 교회들의 모습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2,3장에서는, 교회에 대한 비전이 나오는데,그것이 현재의 일입니다.
그리고 6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까지가, 장차 있을 일입니다.
그 내용은, 역사 속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불러서, 사도 요한에게 그것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역사를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역사가 그분의, 계획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과거를 아시고,
그분은 현재를 아시고,
그분은 미래를 아십니다.
바로 그분이 역사의 주(主)가 되십니다.
6장 이하에는,
땅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역사 속에 어떻게 간섭하시고,
어떻게 자신의 뜻을 펼쳐 가십니까?
하나님은 역사의 부조리와 영광과 수치와 환희를 아시며,
그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
세워 놓은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시며,
마침내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에 주님 자신의 비전을 보게 하신 다음에,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속해 있는 교회를 보게 하시고,
또 죄 많은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보여 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본 사람들이,
그 영광의 주님을 신뢰하며,
교회에 속한 자로서, 교회를 통하여,
이 죄 많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어떻게, 승리를 향해서, 걸어갈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는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기 전에 먼저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이 주님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교회와 세상에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울어야 합니다.
셋째로, 그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죄 많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펼쳐나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지만,
그리고 사실 연약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 세상 속에 펼치십니다.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사 그분의 발 아래, 만물을 복종시키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만물 위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위에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이 교회가 얼마나, 엄청난 존재입니까?
많은 실패와 얼룩진 상처들을 안고 있지만,(그러한 지체들을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주님이 쓰시는 몸입니다.
바로 이 교회를 통해서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당신은 당신을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도구로서,
쓰임을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런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세계를 복음화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이 놀라운 사역 가운데 내가 쓰임을 받고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아닐까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자 굴에 몸을 내어 주면서도,
자신은,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 자부심 말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가,
요한계시록 1장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 섬에 있었다. 밧모 섬 안에서 그는
고통이었으나, 성령 안에서 그들은 역사를 다스리는 자들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나에게 고통과 역경과 절망을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사는 자는 역사를 다스리는 자이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자입니다.
죽은 자 같고 넘어지는 자같고 찢기는 자 같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결국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을 뜻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로 인한,
기쁨과 환희 때문에,
박해와 고통을 이기면서 승리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이 놀라운 승리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승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 목 : 사단의 도시 안에 있던 버가모 교회 (1)
본 문 : 계 2:12-17
요한계시록 2장 12-17절입니다.
미국인들이 원하는, 주거 환경 요소 세 가지는, 다음과 같았어요!
첫째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곳이고,
둘째는 공동체의 환경이 좋은 곳이고,
셋째는 교육 환경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이라면, 자녀들의 학교 문제를, 제일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학구하면, 강남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환경 평가에서는, 서울 강남이 교육 환경으로 볼 때,
평균치가 못 나왔다고 합니다.
강남의 소음, 공해, 주변 환경이,
공부할 조건과는 멀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주거 환경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좋을 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좋은 영적 환경이 마련된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는, 좋은 의료 시설이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적인 건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육체의 건강입니다.
몸이 병들었을 때, 좋은 의료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시실 의료 해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세번째 요소로, 좋은 도서관이 있는, 교육적 환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서관이 있어서,
책을 통해서 지성을 기르고,
좋은 문화적 해택을 누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의 교양을 쌓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도시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는데,
주변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단 교회가 있고,
사단 숭배자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고,
그리고 집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는데,
잘못된 사상을 담은 책들로 꽉 차 있는 그런 곳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들을 기른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자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도, 파괴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버가모라는 도시가, 바로 그런 도시였습니다.
버가모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곳으로,
해발 300m 이상 되는 고지대입니다.
이 도시는,
산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일종의 성읍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서,
에베소,서머나와 함께 소위 소아시아의 3대 도시로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로마 치하 식민지의 수도(首都)와 같은 역할을 했던, 중요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제우스 신전입니다.
터키에서 에베소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고고학적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이 버가모입니다.
지금도 산 위에 올라가면,
제우스 신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 옆에는 로마의 황제들을 숭배하던 신당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아스 클레피온이라는 고대 병원이, 있습니다.
이곳은 주전 400년 부터 주후 400년까지 계속해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병을 잘 고치는 장소로 이름나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몰려왔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숭배하던,
아스 클레피온이라는 치유의 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의 상징은 뱀인데,
군대 의무대의 상징이 뱀으로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또 이 도시에서는,
히포크라테스 다음으로 유명한,
갈렌이라는 의사가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해부로 유명했던 의사라고 합니다.
아스클레피온 신전의 뜨락을 거닐어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는 데,
우선 들어가는 길목에 대리석이 죽 깔려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곳을 찾는 병자들은,
그 대리석 길을 맨 발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걸어갔다고 합니다.
뜰 중앙에는 온천수가 솟아오르고 있는데,
병자들은 그 온천수로 목욕을 한번 하고,
지하 터널로 된 치료실을 지나게 됩니다.
그러면 치료실 위쪽으로난 창문에 의사들이,
“네 병은 곧 낫는다.나을 수 있느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심리 치료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치료실을 나와 극장에 가서 음악을 듣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신 앞에 가서 기도를 하고, 서약을 하기도 합니다.
병을 고치고자 하는 열망까지는 괜찮은데,
이것이 그들을 마침내, 우상 숭배자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데,
이 도시의 불행이 있습니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도서실입니다.
당시에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규모 도서관에 대해서 그 도시 사람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도서관의 대부분의 책들은,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풍요하게 만들고,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도시에서 자녀들을 기르고 있었던,
버가모 주민들의 상태를 짐작해 보십시오.
1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 “사단의 위”는 “사단의 보좌”라는 말입니다.
사단의 영향력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도시가 바로,
이 버가모입니다.
다시말하면,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속화의 도시속에 버가모 교회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어두웠던 도시 버가모 한복판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는,
그 시대에, 그 도시를 향한 사명을, 얼마나 감당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 속에서,
이 버가모 교회의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읽을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다행스럽게도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 안디바를 가리켜, “충성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람 때문에, 이 교회는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충성된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증인이, 바로 안디바였습니다.
안디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안디바는 특정 인물보다는,
이 교회에 있었던 충성된 무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디바』의 뜻은,
“모든 악을 대항한다,
모든 어려움을 대항한다,
세상의 모든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대항한다”는 것입니다.
이 안디바의 이름으로 볼 때,
버가모는 어두운 도시였습니다.
죄악의 도시였고
우상의 도시였고
귀신들의 도시였고
사단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속에 우뚝서서,
이 도시의 악을 대항하여 거스리며 살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아마도 안디바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거스리는 불신앙의 사조가 우리를 뒤덮고 있는,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가 있는데,
박해가 심하고, 불신앙의 세력이 자꾸만 일어나게 되니까?
크리소스톰의 제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고 있습니다.어쩌면 좋습니까?”
이에 크리소스톰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면 되지 않느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과 대결할 수 있었던,
안디바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안디바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교인들의 신앙의 흐름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3절에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늘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써 넣고,
그것을 붙들고,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권능, 권세)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의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을 말한 것입니다.
제우스와 로마의 황제들이,
주님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버가모에서,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는 진리를 수호하고 있었던,
버가모 교인들의 승리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있습니까?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있나요?
얼마나 예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교리를 수호하는 열정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저는 이 버가모 교회의 승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 고백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불신앙의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의 입술로 또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고백을 얼마나 지키고 있습니까?
본문은 이 신앙 고백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던,
버가모 교회, 성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안락과 출세를 위해서는 쉽게 신앙을 던져 버릴 수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 같은 사람이 얼마나 그리워지는지요?
종말의 때에 필요한 교회는,
안디바와 같은 증인들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 고백을 갖고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교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 진리를 지키고,
입술과 삶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교회,
여기에 버가모 교회의 승리가 있습니다.
* 버가모 교회의 실패
그런데 14절에서,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발람에 관한 것입니다.
발람 선지자가 이방 선지자임에도,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하였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 까?
그는 과연 선한 하나님의 선지자 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25장과 31장 16절을 읽어 보면,
발람과 발락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민수기 31장 16절을 보면,
특히한 면이 나옵니다.
“ ”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게 만듭니다.
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맞춰져야 할 초점을,
우상에게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을때,
그 결정적인 시작이 모압 여인들과의 성적인 부도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눈이 어두워지면,
자기 삶의 표준이 사라집니다.
결국 무슨 일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떠나서,
우상 숭배자들로 변신하는 타락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
우리는 발람의 역사를 통해서 이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이같은 모습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주께서 1세기의 성도들에게, 발람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옛날에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해서,
그들에게 성적(性的)인 부도덕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한 것과 똑같은 일이,
버가모 교회 성도들가운데에도,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주의 모습을 볼 때, 이같은 면이 있어요!
그래서 영적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버가모 교회에 존재하던 니골라 당은,
발람이 전에 이스라엘에 끼쳤던 것과 같은 영향을 미치는, 그룹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이같은 그릅이 있으면, 가까이 하지 마세요!
그렇게 권면하세요!
버가모는 제우스의 신전도 있고,
로마의 황제 숭배도 열렬하게 이루어지던 도시입니다.
버가모 도시의 집권자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황제 숭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 안에서 이런 생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신전에 가서 절하고‘로마의 황제가 주님입니다’라고 한번 말했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교회에 와서는 우리 주님을 열심히 섬기되,
이 세상에 나가서는 가이사가 주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손해를 보고,
박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즈음의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해 볼까요?
술 한잔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술도 마시고, 또 끼짓것 점도치고 합니다.
이중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과 합치될 수 없는 그룹들이 교회 안에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충성된 증인의 목소리 보다도,
세속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 갑니다.
결국 그런 교회는, 진리를 잃어버리고 순결을 잃어버립니다.
이런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오염과 타락과 부패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던 교회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정반대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려고 애쓰다가 사랑을 잃어버렸는데,
반대로 버가모 교회는,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인들과 어울릴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다가, 진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
살펴볼 때도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에 대해 언급했는데,
어느 시대에나 이런 두 가지 양상의 이단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율법주의가, 독선적인 바리새주의를 낳는가하면,
무 율법주의는 쾌락적인 방종주의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아니고,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와 사랑을 함께, 간직해야 합니다.
진리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속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117편이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이라면,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모두 8구절씩 22단락으로 된 무려, 176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단락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찬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기초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토라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양한 별명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칭호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들을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법, 여호와의 증거, 주의 도, 주의 법도, 주의 율례, 주의 모든 계명, 주의 의로운 판단, 주의 말씀, 주의 계명, 주의 입의 모든 규례, 진리의 말씀--"
실로 성경은 오늘날도 여전히 변치않는,
인생의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이 완벽하게 조직된 위대한 시편 119편의 서두를,
행복의 선언으로 열고 있습니다.
마치 산상수훈의 서두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시119편은 시편 1편을 다시 풀어서 쓴 시편 1편의 주해 시편이라고도 할만합니다.
복있는 자의 행보는 말씀과 더불어 시작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행복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보다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은 이 길을, 내일은 저 길을--
많은 사람들은 길을 찾다가 마는, 방황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기가 걷는 길이,
흔들릴 필요없는 정해진 길임을 아는 사람은,
다소간의 고난이 있어도, 부끄럼이 없는 담대함으로 그 길을 걷습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길 - 그 길만이 우리를 참 행복으로 진리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종말의 때에,
이 어두운 시기에도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이 균형을 이룬 교회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버가모 교회,
하나님께서는 세속화되어 버린 교회에 대한 경종으로서,
이 교회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 버가모 교회를 향한 권면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임하여 내 입의 검(劍)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경고합니다.
버가모 교회와 관련해서는 “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
요한계시록에서는 “검”이라는 말이,
주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진리를 떠나 세속화되고 있는 이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심판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할 때에도, 검으로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진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던지는,
버가모 교회의 승리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속화를 용납함으로써,
마침내 그 본질이 변질되기 시작하는,
버가모 교회의 실패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버가모 교회를 향한 권면의 내용이 나오는데,
16절은, 크게 두가지 경고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경고입니다.
이 도시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로마 황제는,
버가모의 통치자에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던,
'글라비’라고 하는 검을 하나 하사했다고 합니다.
세금도 잘 내고,
로마의 정책도 잘 따라 주니까, 그런 포상을 했겠지요?
뿐만 아니라 버가모의 집정관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죄인을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 황제로부터,
사형 집행권을 부여받은 도시 버가모,
이 도시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그 '글라비’검이었습니다.
여러분!
중국 무술영화를 보셨습니까?
무슨 용검이네, ::::::::!
그런데 주께서 이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로마의 집정관이 가지고 있는 칼보다,
더 무서운 칼을 가지셨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고,
온갖 박해를 다 받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로마 집정관의 손에 들려진 칼보다 더 두려운 칼을 가진 모습으로,
주님이 등장하신 것은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개역]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肉)과 영(靈)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오늘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1세기 크리스챤들은)
로마 황제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 황제가 주(主)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안디바 같은 충성된 증인들은, 순교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진정한 승리를 누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초리,
친구들의 눈초리,
가족의 눈초리,
직장 동료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쉽게 타협하고,
죄를 범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고, 복음 증거를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의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늘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에 우리의 실패와 타락의 원인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함의 비밀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비밀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godly fear)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당시 타락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肉)과 영(靈)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사람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내 친구와 주위 사람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지금 나를, 불꽃 같은 안목으로 감찰하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동자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는 열쇠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습니다.
로마 집정관의 칼보다도,
주님의 심판의 칼을 더 두려워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1세기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더럽혀짐과 타락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약속하십니다.
이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그들의 몸과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십니다.
* 주님의 약속입니다.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7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승리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나와 흰 돌과 흰 돌위에 기록한 새 이름을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사단은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기만 하면,
자기가 쾌락과 만족을 줄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인들 가운데서,
발람의 교훈을 따르며 우상의 제물을 취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만족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만족은 어디에서 옵니까?
주께서는 이기는 그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리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배고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께서 예비했던 이 만나는 얼마나,
신선한 만족을 주었을까요?
진정한 만족, 참된 만족은 주님 자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진정한 만족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둘째,“또 흰 돌을 줄 터인데.”
중동 지방에서 재판을 할 때, 이 흰 돌이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재판관이 까만 돌을 던지면, 유죄를 의미했고,
흰 돌을 던지면 무죄를 의미했다고 합니다.
또 죄수들을 무사(武士)로 등장시켜,
맹수와 싸움을 시켰을 때,
그 사람이 워낙 싸움을 잘해서 맹수를 이길 경우에는,
높은 사람들이 흰 돌을 집어던져서,
그가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의 흰 돌도,
비슷한 의미의 자유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죄악에,
꽁꽁 얽매여서 꼼짝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인 면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 주께서는 진정한 자유를 속하십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죄수인 무사가 승리할 경우에는, 자유의 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새 이름을 받아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노예 되었던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입니다.
마치 영화 벤허에서,
벤허가 노예 신분을 벗고,
귀족의 아들이 되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께서는 이 어둡고,
더러운 시대에 신앙을 지키고 경건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만나와 흰 돌과 새로운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안에만, 진정한 만족과 자유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만, 진정한 명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주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소유하는 이 위대한 명예!
당신은 어떤 명예를 추구합니까?
어떤 자유를 추구합니까?
그리고 어떤 만족을 추구합니까?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세우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신앙 고백을 지키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신이 위대한 축복!
주께서 이 어두운 종말의 시대에,
우리들을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같이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제 목 : 악을 간과(看過)한 두아디라 교회
본 문 : 계 2:18-29
미래 학자 하면,
앨빈 토플러가 생각납니다.
그가 쓴 책중에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제3의 물결』입니다.
이 책 말고,
그가 쓴 유명한 책이 있는 데,
『힘의 전환』이라는 책입니다.
여기에서 앞으로의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에 대해서 기록했어요!
앞으로의 세계를 지배할 사람은,
첫째로 지식을 가진 자,
둘째로 권력을 가진 자,
셋째로 부요함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꼭 예언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사람들이 너무도 목말라 하는, 요소들을 잘 지적한 듯합니다.
토플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이 세 요소를 거의 광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부요를 좇아서 헤매는 사람들,
그들은 어찌보면,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정안수 떠다 놓고, 비는 것만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문명이 발달한 만큼,
우상의 성격도 간교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현대인들을 공략하기 위해서,
현대적인 우상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식의 우상,권력의우상, 부요의 우상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오늘 이 우상 앞에 항복하며 쩔쩔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지식에서 자유합니까?
당신은 얼마나 권력에서 자유합니까?
당신은 얼마나 물질에서 자유합니까?
당신 자신은, 우상 숭배자가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자문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도 이 우상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앞 장에서 공부한,
버가모 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우상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우상, 지식의 우상, 건강의 우상입니다.
나에게 권력이 주어질 수 만 있다면,
나에게 특별한 지식이 주어질 수만 있다면,
나에게 건강이 주어진다면,
양심까지도 팔아넘길 수 있었던,
버가모 주민들의 모습은, 현대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건강을 위해서,
아스콜레피온에 찾아가,
그 신 앞에 절하고 기도하는 버가모 사람들의 모습이나,
병 고침을 위해 성경적이지 못한,
치유의 수단 앞에,
영혼을 파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나 같은 것입니다.
주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지적하고 있는 죄는,
이러한 우상숭배의 죄와 또 하나 음행의 죄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죄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지적됩니다.
오늘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버가모 교회는,
지식과 권력과 건강의 우상을 추구하다가 결국,
우상 숭배와 음행의 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바로 물질적인 풍요의 욕망을 이용해서,
우상 숭배와 음행의 죄악에 빠져들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가장 간교한 우상은,
물질이라는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모든 도시를 점거하고 있는,
가장 거대하고 힘있는 우상은,
바로 물질의 우상입니다.
두아디라는 바로 이 우상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동쪽으로 약 6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서,
별로 큰 도시는 아닙니다.
그러나 직조,염색,피혁,도기업 등이 성행했습니다.
특별히 옷감 장사로 유명했습니다.
또 이런 산업의 발달로,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길드’라는 동업 조합이 발달했습니다.
여성으로서 일찌감치,
해외진출을 시작한 사업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도시가 배출했던 유명한 여성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자주 장사 루디아입니다.
이 여인이 마케도니아 빌립보에 왔었는데,
장사하려고 소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진출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사람들은, 부지런히 돈을 모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사업에도, 아주 열심으로 투자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에서 사업은,
비지니스(business)가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그들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 살면서,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믿고 봉사하고,
인내하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던 사랑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출발을 잘 했다가,
첫사랑을 잃어버려서 주님 앞에 거의 버림받는 교회로,
전락해 가고 있던 반면에,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에 좋은 일을 더 많이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있던 교인들이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면서 더욱더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던 번영의 교회,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물질의 축복 속에서 주님을 섬기던 두아디라 교회가 서서히 그 생명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권면하십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실수
첫째로, 그들은 이세벨을 지도자의 자리에 용납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의 부인으로서 이미 구약에 나타났던 인물입니다. 아합 왕 당시에 아합 왕의 통치력도 막강했지만 그 부인의 영향력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들게 했고 도덕적으로도 문란한 생활을 하도록 부추겼습니다.20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많은 학자들은 이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 지도자의 부인이 아
닐까 하고 생각합니다.이런 추측은,구약 시대에 이세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 유도했던 것처럼 어떤 특정한 여인의 영향이 그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에게 미친것이라는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이 여인은 아마도 경제적으로 대단히 부요한 여인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여인일 것입니다.이것 때문에 두아디라 교회는 이 여자를 쉽게 지도자의 자리에 용납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두아디라 교회는 중요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 그의 신앙보다도 물질을 우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물론 이 여자가 신앙이 전혀 없는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이 여자에게 붙은 명칭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자칭 선지자라는 것을 보아서, 이 여인은 아직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지도자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그러나 신앙적인 영향력을 상당히 갖고 있는 여인임은 틀림없습니다.여하튼 이 여인이 물질적인 풍요함으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갔다면,이 교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이러한 풍토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를 쉽게 정죄할
수 없음을 압니다.우리도 바로 그 정죄 속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세벨의 철학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
운데 던지고.”문맥을 잘 살펴보면, 여기서 말하는 간음은 반드시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즉 이 여인의 잘못된 사상을 동조하면서 그것을 따라가는 영적인 음행을 언급한다고 볼 수있습니다.
23절에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세벨의 잘못된 *사상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세벨의 잘못된 철학과 사상이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두아디라 도시가 자랑하고 있었던 것은 동업 조합입니다. 그곳에서 장사를 잘 하려면 특별한 절기마다 조합 내에서 지내는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제사 지내는 대상은,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였습니다. 아폴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또 그의 관심을 사면 장사가 잘 된다고 해서, 그곳 상인들은 정기적으로 아폴로 신전 앞에 절을 하고 그의 도움을 빌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위기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살면서 장사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 하나님밖에 숭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폴로 신에게 제사하는 문제에서 *갈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마도 이세벨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영향력을 끼쳤을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살면서 조합에 들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장사를할 수 있단 말이오.그리고 장사할 때 관습적으로 문화적으로 절 한번 한다고 해서 신앙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돈을 벌어서 많이 헌금함으로써 열심히 주를섬깁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이윤을 취하기 위해서 이세 벨의 철학에 동조하게 되고, 이세벨은 이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거느리기 시작한 것입니다.이것이 옛날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이윤 추구를 위해서는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사고 방식이 얼마나 통하고 있습니까?
장사하는 순간만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좋고, 기독교적인 생각을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중에는 그리스도인다운 양심을 팔아 버리고 맘몬의 제단 앞에 무릎 꿇는 자들이 없습니까? 어느 신문을 보니까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교회 건축 헌금을 갖고서 돈놀이를 하다가 그 돈을 모두 잃었다고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
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부딪치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이런 삶의 현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적이고 반성경적인 철학을 따르도록 선동하고 있는 이세벨의 유혹 앞에 한덩이가 되어서 돌아가고 있던 그녀의 제자들 때문에, 이 교회는 심각한 윤리적인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그들은 이세벨의 철학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를 거절했습니다.21절에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라고 말씀합니다.왜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지키는 것보다 황금과 권력과 출세가 더 중요했습니다.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일이 급해 보이니까 거기에 매달리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모습이 서서히 부패하고 변질되어 갑니다.여기에서 우리는 맘몬의 신이 가져다 주는 그 추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기회를 거절한 *두아디라 교회의 비극이 우리의 비극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경고의 말씀
2장 22,23절에 두 가지 경고가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병 나게 한다는 말입니다.그래도 듣지 않으면,23절에서는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질병과 사망은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훈계하고 일깨우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 이 말씀의 배경은 성찬식에 관한 것입니다.성찬식은 하나님과 내가 바른 관계에 있는가를 검토하는 자아 성찰의 시간입니다.
깊이 자기 자신을 살피지 못하고 타락하고 변질되고 부패해 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채찍을 드십니다. 징계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장 30절은 그 징계의 세 가지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처음에 나를 약하게 하십니다.자신의 몸이 갑자기 약해지면 ‘이것이 혹시 나를 사랑하는 징계의 채찍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침상에 눕게 하십니다. 누워서 곰곰히 생각해 보도록 말입니다.그래도 듣지 않으면 육체적인 사망을 주십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들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십니다.
우리는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우리를 침상에 눕게 하시고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 앞에 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25절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합니다.그 앞 절에서는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그것은 주께서 칭찬하셨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말하는데 거기에서 더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잘못됩니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면서 조금 더 해 보려고 욕심을 낼 때,뜻하지 않았던 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면서 무엇을 더 욕심 내려 합니까?
서양 속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우리가 죽고 나서 입게 될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를 위하여 이 땅에서 남겼던 고귀한 삶의 발자취만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 입니다.그러므로 다른 것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그것을 굳게 잡고 사십시오.
약속의 말씀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두 가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첫째/철장의 권세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돈에 매달리는 것은 결국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나중에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릴 자라는 것을 알면, 이 세상에서의 시시한 권력 추구를 위해 기를 쓰고 덤벼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새벽별
히브리 사람들은 새벽별을 새로운 시대,새로운 세계,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간을 알리는 신호로 이해합니다.별은 언제나 왕의 상징입니다. 새로운 나라의 왕,새로운 시대의 왕,이 새벽별은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6절을 보면,그 새벽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새로운 세대의 왕,다가올 시대의 왕,저 영원한 나라의 왕이신 새벽별이신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릴 자들입니다.우리가 온 세상을 다스릴 그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안다면,이 세상에서 작은 것을 조금 더 얻기 위해서 발버둥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은 참된 의미의 내세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주인이고 우리가 다가 올 저 영원한 나라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조금 더 잘살고 조금 더 못사는 것이 그렇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 한 분이 부산에 살았는데,그 분은 자수성가해서 큰 회사의 중역이 되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경건한 기도의 어머니였고,자식들도 다 잘되었습니다.그 어머니는 옛날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기르던 그 조그만 집에서 살기를 언제나 고집하셨다고 합니다.자식들이 자기들 체면을 생각해서 라도 어머니에게 좋은 집으로 이사가시라고 권면했더니 한번은
이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좋은 집 주기를 그렇게 원한다면,내가 원하는 집을 지어다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가 이사하마.”『어머님,염려 마시고 어떤 집인지 말씀만 하십시오.』“내가 원하는 집은 바닥을 다 금으로 깔아야 하느니라.그리고 집에는 열두 개의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그 열두개의
기둥도 다 금으로 입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열두 개의 문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문도 다 금으로 입혀야 하느니라.”
『어머니, 무슨 농담을 하십니까? 세상에 그런 집이 있습니까?』
“없다면 말아라.나는 이미 그런 집을 하늘에 가지고 있단다.”
이 경건한 신앙의 할머니의 교훈!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되셨다면, 너무 욕심 내지마십시다.사담 후세인의 교훈을 기억합시다.그가 망한 것은 쿠웨이트의 유전을 욕심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작은 욕심 때문에 서서히 병들고 추해져 가고 있는 내 모습!
지금까지 잘 달려 왔지만 그것이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섰던 두아디라 교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분노하시고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면서 말씀하시던 그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우리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주여,우리를 더욱 순결하게 세워 주시옵소서.”
제 목 : 주님이 설계하시는 교회(5)
본 문 : 요한계시록3:1-6
명절이 다되어,
어느 집에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로부터 친정에 다녀오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돌아 올 때,
큰 며느리는 바람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고,
작은 며느리는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각각 친정에서, 며칠 동안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게 지냈는 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돌아 갈 때가 되니까,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동네 마을 어귀에서 두 며느리가 만나기로 했어요!
“형님, 어머니 말씀대로 바람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셨어요?”
“아우님은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왔는가?”
며느리들이 근심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백발 노인이 불안해하고 있는 두 여인네를 보고,
이유를 묻고 사연을 듣더니,
“그것은 간단한 일이지.
바람을 종이에 싸는 것은 종이 부채를 말하는 것이고,
불을 종이에 싸는 것은 종이 초롱불을 말하는 것이오“
그래서 큰 며느리와 작은 며느리는,
읍내 시장에 가서 가장 좋은 부채와 가장 멋있는 초롱을 사 가지고,
집에 가서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언제나 명절이 돌아오면,
온 가족이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여성분들이 애를 많이습니다.
특별히 여성분들의 믿음과 지혜가,
가정의 화목을 이루는 귀한 재료들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소아시아 7교회 중 5번째 교회인 사데교회를 방문합니다.
사데교회는 사데에 있었고 사데는 고대 루디아 왕국의 도읍이었습니다. 사데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일은 세계 최초로 금속화폐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금화도 만들었는데 이는 그 만큼 도시가 부유하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루디아 왕국의 크로에수스(Croesus)왕은 거부의 대명사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부자 도시가 되었을까요?
도시 외곽 산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도시를 관통하는 파크톨루스(Pactolus)강이 흐르고 있고 이 강에서 사금을 많이 캐내어 자체적으로 금화도 제작하고 소아시아에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사데에 사는 사람들은 외적의 침입만 잘 막아낸다면 그다지 어려움 없이 살수 있었습니다. 크게 힘쓸 일도 없고 고민하고 노력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데에 사데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 사데교회는 어떤 모습의 교회이고 어떤 영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까?
사데교회는 서머나교회처럼 교회 외부의 탄압과 핍박, 순교의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가모교회처럼 발람이나 니골라당이 있어 믿음을 위협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며 두아디라교회처럼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선량한 교인들을 유혹하는 것도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분이 미국에서 오면서 여러 모습의 교회들을 찍은 큰 사진책을 선물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들판에 있는 뾰족탑 교회,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지붕이 널찍한 교회, 시골 시냇가에 자리 잡은 전원교회, 울창한 숲 속의 성곽과 같은 교회,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첨탑이 우뚝 솟은 튼튼해 보이는 교회 등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설계와 시공은 누가 했고 규모는 얼마정도이며 기간은 얼마 등등, 외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설계, 수치 등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교회가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내적인 상태가 어떤가? 하는 내면의 영적인 상태, 믿음의 형편 등은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사진책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교회의 외적인 모습을 사진으로는 보여주지 못하지만 내면의 진정한 모습은 말씀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수련회 가서 단체사진 찍었는데 인화해서 보니 뒤에 서 있는 목사님이 나를 째려보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평소에 나를 아껴주시던 분으로 째려 볼 리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찍힌 모습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진은 진정한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째려본 일이 없는데도 그렇게 찍힐 수가 있고, 속으로 슬픈데도 잠시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찍어 보여 주십니다. 순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를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사데교회를 향하여“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금강산 초대소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재작년만 해도 전국적으로 생중계하고 같이 눈물 흘리고 같이 기뻐하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흥분이 덜합니다. 남북가족상봉이 뉴스거리가 안될 때 진정한 자유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25 전쟁에 나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립묘지에 전사자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번에 그 죽었던 남편은 만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남편은 죽은 이름을 가졌으나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정 반대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죽은 교회)입니다.
살아 있는 것 같이 움직이는 것 같으나 사실은 껍데기뿐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있는데 생명이 없고 껍데기는 있는데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6월 문경세제 산행을 마치고 식사를 했는데 식당 카운터에 통나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길이 끊임없이 활활 타올라 자세히 보니 사그라지지도 않고 더 피어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나무가 불에 타지도 않고 만져도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모조 장식품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아무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 불로 실내를 덥게 할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타는 나무에서 나오는 불과 같이 보이나 그 안에 불의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데교회(교인들)는 한 마디로 무기력한 교회(교인들)입니다.
무기력한 교회는 비전도 없고 도전도 없는 교회이고, 무사 안일주의 교회를 말합니다. 무기력한 사람은 변화하는 것을 싫어하고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도전이 없는 곳에 응전이 없고, 응전이 없는 곳에 발전도 없습니다”, “영적 도전이 있는 곳에 믿음의 응전이 있고, 믿음의 응전이 있는 곳에 신앙적 발전도 있습니다”
신앙의 고민이 있습니까? 직장생활, 사회생활하면서 말씀대로 안 되는 영적 고민이 있습니까? 믿음의 길이 이런 것은 아닌데 하는 말씀에 부딪혀 오는 성경적 고민이 있습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은 그런 교회(성도)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2)
사그라져 가는 생명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다시 불붙게 하라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구조된 사람, 생명이 붙어 있으면 인공호흡으로 살려 낼 수 있습니다.
샬롬부 여름수련회에 갔었습니다. 강원도 수련회장에서 밤에 캠프 화이어를 했는데 주인아저씨가 통나무를 쌓아 주었습니다. 모두가 둘러앉았고 석유를 붓고 종이를 가져다 넣고 불을 붙었습니다. 그 불은 식당 카운터에 장식으로 놓여진 불이 아닙니다. 조금은 쌀쌀한 밤에 불의 열기가 있었습니다. 통나무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습니다. 통나무가 젖어 불이 수그러들기 시작하면 불을 활활 붙이기 위해 영락없이 석유를 더 부어야 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석유를 붓고, 어느 집사님은 긴 막대기로 뒤적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래야 잘 탑니다” 잘 타고 있을 때 더 잘 타도록 하기 위해서는 타 들어가는 통나무를 적당히 뒤적거려야 합니다.
쌓아 놓은 통나무는 우리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신앙생활입니다. 행함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석유도 부어야 하고 더 잘 타도록 뒤적거리기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형식, 본질을 놓친 외양만 강조되고 두드러지고 고집됩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 우리의 인격도 껍데기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하듯이 신앙에도 껍데기 보다 알맹이가 중요하고, 그래서 믿음에는 살아 있다는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생명력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오고 성경의 진리로부터 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 (3)
기도의 문이 막히지 않고 잘 작동하고 있는지? 은혜의 통로가 막히지 않고 잘 열려있는지? 말씀을 듣는 귀가 닫히지 않고 잘 열려 있는지? 스스로 잘 확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닫히지 않고 막히지 않고 꺼져가지 않도록 점검하여 믿음의 생명력이 살아있기를 기원합니다.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5)
학교에는 학적부가 있고 교회에는 교적부가 있고, 출생 본적지에 호적부가 있듯이, 하늘 나라에도 호적부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호적부의 이름이 생명책이라고 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승리한 사람이며 믿음의 생명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시인하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믿음과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말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요한계시록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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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본 문 : 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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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행자가 스위스에 가서 아름다운 호숫가에 좋은 별장이 있는 것을 보고 출입문에 있는 벨을 눌렀더니 나이가 많은 관리인이 나왔습니다. 별장을 좀 구경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습니다. 정원과 별장 안 전체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손질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몇 년 동안 계셨느냐고 물었더니 24년간 있었다고 했습니다.
별장 주인은 자주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4번 오셨다고 했습니다. 4번째 다녀가신 것은 언제냐고 물었더니 12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주인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오시지 않은데 별장을 이렇게도 깨끗하게 잘 정리해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이 오늘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날마다 깨끗하게 손질해 놓고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도 이러해야 합니다. 날마다 준비하고 항상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데는 두아디라 남동쪽 약 48키로 지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섬유산업이 발전하여 의류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의류산업이 발전하다보니 돈 많은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자연적으로 돈이 있다보니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데 지역은 대부분 높은 암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으로부터 단 두 번 밖에는 점령당한 적이 없을 만큼 완벽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게을러지고 나태해졌습니다.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되고, 퇴폐적인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칭 거짓선지자나 이단의 공격이 없다보니 신앙생활에도 별로 열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름뿐인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라고 주님은 사데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이어서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주님은 ‘일깨우라’ 고 말씀합니다. 깊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나 사모함이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대한 바램도 없고 그저 현실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고 싶은 욕망도 없고 기도를 하려 해도 기도가 터져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픈 마음도 없습니다. 만사가 귀찮습니다.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과 지체들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존재로 다가옵니다. 모든 것이 짜증이 납니다. 이처럼 죽은 모습으로 전락한 교회를 향해서 ‘깨어나라’ 고 주님은 간절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라’ 고 심판까지 예고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잠자는 신앙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신앙이 일깨워지려면,
첫째로 편안함과 안일함을 물리쳐야 합니다
영국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해안 지방을 지나는 중에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한 인부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인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보고 먹이를 던져 줍니다. 갈매기들은 과자, 사탕, 등 여러 가지 맛있는 것들을 받아먹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음식들이 갈매기의 몸에는 해로운 음식들입니다. 갈매기들이 날마다 과자나 캔디나, 사탕 같은 것들을 받아먹다 보면, 일반 먹이에 대해 식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관광 시즌이 지나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먹이가 바다 속에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갈매기들이 이렇게 굶어 죽는답니다.”
편안함과 안일함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나중에는 우리를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와 이단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무사안일주의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편안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데 교회의 안타까운 점은 실상은 죽었지만 스스로는 살아 있다고 믿는 점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모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정신병자는 남들은 다 걱정이요 안타까워하는데 자기는 태평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을병에 걸렸는데 내가 건강한 줄 믿고 있으니 참으로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내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데교회는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죽었다는 주님의 선언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다시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편안함과 안일함이 사데 교회를 죽였습니다. 신앙은 생명력입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려 올라가듯이 살아 있는 신앙도 악과 싸우고 유혹과 싸우고 시험과 싸우면서 전진합니다.
어려움과 싸우는 가운데 신앙은 더 힘을 얻고 강해집니다. 그러나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 경계를 풀게되고 점점 안일에 빠지게 되며 나중에는 겉모양은 살아 있으나 생명력은 다 상실한 죽은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죽어 가는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다시 열심을 내어 살아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생각하며 회개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학교의 교사가 학생들에게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업을 마치고 나서 학생들에게 질문합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고백하고 싶은 죄를 얼마나 가지고 있나요?" 그러나 이 물음에 소년들은 조용히 앉아있습니다. 마침내 작은 한 소년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하나님께 고백할 죄가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만 죄를 고백해야 될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있어요." 이것이 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입니다. "회개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남의 말로 들리면 영적으로 점점 병들어가고 죽어 가는 증상입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라고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살길이 열립니다. 회개할 때 구원과 기쁨이 넘칩니다.
본문3절은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의 말씀합니다. 영어로 Receive, Remember, Repent 라는 동사 셋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맨 처음 어떻게 복음을 받았는지, 그 첫 시간을 생각하고 그 순수한 감격과 열정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성령세례 받았을 때, 처음 은혜를 체험했을 때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할 때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복음을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되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처럼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분이 있다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감격을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다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멀어졌다면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고, 봉사의 자리에서 멀어졌다면 봉사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죽었다고 진단 받았던 사데 교회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각종 애견용품 중에 사람이 마시는 생수보다 몇 배나 비싼‘애견 전용 생수’까지 등장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생수는 제주도에서 퍼 올린 맑은 샘물에, 감귤나무 추출물과 자일리톨, 비타민C 등을 첨가해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생수를 판매하기 시작한 지 두 달만에 각 지역 판매점에서 3만병이나 팔려나갔다는 것입니다. 모 호텔에서는 닭 가슴살 등의 애견 전용 요리와 애견 전용 생수를 음미할 수 있는 고급‘도그쇼’가 열릴 예정인데, 주인 두 명과 강아지 한 마리가 이 쇼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5만원의 참가비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함께 온 강아지들에게는 애견 전용 레스토랑에서 조리된 닭 가슴살과 육회 등 값비싼 요리가 제공된다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실감이 나게 됩니다. 강아지는 하는 것도 없이 주인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주인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닌데 주인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도, 주인은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강아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엄청난 행위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무슨 큰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성결의 옷을 입고, 세상의 안일함에 물들지 않음으로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이름은 있지만 그 속에 아무런 내용이 없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에 구원은 받았지만 그 생활 속에 복음의 능력이 없으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끊임없이 내용을 찾습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은 예배의 형식보다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내용을 찾으십니다.
선교회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지 않으시고 얼마나 전력을 다하여 선교를 하는가를 찾으십니다. 찬양을 복음성가를 부르나 찬송을 부르나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가를 보십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의 생활이 그리스도인다운가를 더욱 찾으십니다.
이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생활을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자극시키고 민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일로 왕성하게 활동될 때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영적인 것에 깨어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목 : 열쇠를 가지신 예수
본 문 : 계 3:7-13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던 당시,
소아시아에 대표적인 일곱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 교회는 책망 받은 교회였고,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는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다섯 교회는, 책망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 중 오늘 요한계시록 3:7-17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첫째, 우선 수신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어서 발신자가, 밝혀집니다.
셋째, 그 다음에는 대체로 칭찬이 나옵니다.
물론, 칭찬이 없는 교회가 두 교회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사데 교회입니다.
넷째, 이어서 책망이 나옵니다.
물론, 책망이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서,
전혀 책망을 받지 않았던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다섯째, 권면 혹은 경고가 이어집니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약속이 나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문구로,
경청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이어집니다.
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마지막에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첫째, 먼저, 수신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빌라델비아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중 비교적 짧은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기독교가 짓밟힐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류로써,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았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지만, 암미아 라는 여성에 의해,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고 합니다.
둘째, 이어서 발신자가, 밝혀집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했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열쇠란 무엇입니까?
열기도하고 잠그기도 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이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은,
잠그실 수도 있고, 열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되게 할 수도 있고 되지 않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흥하게도 망하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에겐 흥망성쇠를 조정하고, 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민족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들어간 이야기에서,
출애굽한 이야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의 40년을 거친 이야기,
가나안 땅에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킨 이야기,
그리고 나라가, 멸망한 이야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나긴 역사를 꿰뚫고 있는, 하나의 궤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라도 왕권도 건강했고 부흥했지만,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왕조도 국가도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공식은 우리들의 경우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믿음과 고백이 전제되고 정립될 때,
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열쇠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BC 2천년 경이었다고 합니다.
이집트 사원 벽화에,
칫솔모양의 열쇠가 그려져 있는데,
주전 2천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경우 중국에서는,
주나라와 한나라 문헌에 이미 열쇠가 사용됐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열쇠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재는 열쇠의 기능이 최 첨단화하고 있습니다.
지문인식, 음성인식, 얼굴인식 등으로 문이 열리고, 잠기는,
열쇠 기술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열쇠를 만든다 해도,
그 열쇠는 열 수 있는 문이 있고, 열지 못하는 문이 있습니다.
요즘 영화를 보면,
열쇠와 관련되지 않은 영화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가지신 열쇠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만능 열쇠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고, 안 열릴 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를 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13~21을 보면,
벳세다 광야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장정만 5천명 넘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날이 저물자 걱정이 커졌습니다.
빨리 말씀을 끝내고,
해산을 시켜야지,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는데,
무리를 붙잡아 두는 것은,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보내, 각자 저녁을 사먹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갈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리 중, 어느 어린아이가 내놓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경제문제를 푸시는 길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빌립은 경제정책을 세우고,
경제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500데나리온의 돈으로 빵을, 사도 모자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경제 원리로는,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아합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당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엘라야 선지자가,
사르밧이라는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길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물을 주고 떡도 한조각 주기 바란다”고 하자,
그 여인은,
“나에게 있는 것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입니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내 아들과 죽을 작정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흉년과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자 왕상 17:13을 보면,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라 그러나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떡을 만들고 내게로 가져오라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이 먹도록 하라”
내가 먼저 먹을 테니,
너와 네 아들은 굶어 죽든지 말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5~16절을 보면,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사건 후에서,
하나님의 전혀 다른 차원의 해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빚을 내라든지 원조를 받으라든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호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도 먹는 것도 그 해결책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그 여인이 무슨 소리냐 이 흉년에 내가 살고 내 자식이 살아야지 떡 만들어 당신 주고 우린 굶어죽으라는 거냐” 라며 대들었다면,
그 가정의 경제 위기는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4:22절 이하에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물결을 인하여 고난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26절을 보면, “무서워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바다와 그 배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풍랑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사회에도 역사에도 정치에도 교육에도 있습니다.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도 힘들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여야는 떠넘기기에 바쁘고,
문제는 점점 더 얽히고 설키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1940년 5월 26일을 기도의 날로 정하고, 전 국민이 금식하고 기도 했습니다.
그 해 9월8일은 영국과 미국이 함께 기도함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봉쇄했고,
2500척의 군함을 안개와 파도로 흩어지게 해,
던커크 반도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매일아침 4~5시에 일어나 성경 읽고 기도했습니다.
링컨도 매일 아침 4~5시면 기도하고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23대 대통령 해리슨도, 기도의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위기 때마다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이 기도로 풍랑을 해결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풍랑은, 이미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국회 안에도 각 군대마다 기업마다,
경찰청안에도 시청마다 신우회가 있습니다.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합니다.
그 힘이 모여 오늘 여기까지 대한민국호가 항해해 나왔고,
앞으로도 항해를 계속 할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란 무엇입니까?
다윗왕조의 열쇠,
교회의 열쇠, 영원한 나라의 열쇠도 주님이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열면 열립니다.
주님이 닫으면 닫힙니다.
주님이 일으키시면 일어납니다.
죽은 나사로도 주님이 나오라 하셨을 때,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절망도 물러가라 패배도 물러가라 귀신도 물러가라,
불신과 불법도 물러가라, 질병도 고통도 물러가라시면, 물러갑니다.
이 시간 그 열쇠로 열어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멘.
셋째, 그 다음에는 대체로 칭찬이 나옵니다.
물론, 칭찬이 없는 교회가 두 교회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사데 교회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았던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말세에 교회가, 어떤 상황 속에 처하게 될 것인가,
혹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에 맡겨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왜 빌라델비아 교회가,
말세의 교회를, 대표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하였습니다.
성경은 “시험의 때”라는 말을 통해서,
교회에 닥칠 위험뿐만 아니라,
장차 이 땅에 임하게 될,
소위 대환난에 대한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역사의 종말에 큰 환난의 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주께서 예언하신 것을 읽게 됩니다.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역사에는 언제나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쟁을 비롯한 큰 사건들이 계속 있어 왔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환난은 그런 종류와는,
전적으로 다른 환난입니다.
그래서 대환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있어야 할, 큰 환난의 때입니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 보면,
“내가 속히 임하리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특별히, 종말론이 고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기사에서는, “이것은 바로 아마겟돈 전쟁이다”라고 까지 했습니다.
일류 역사상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의 무대는,
이스라엘의 므깃도 평야라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세론을 공부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언제냐?”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는 것보다도,
임박한 주님의 재림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는 모본을 보여 준, 교회입니다.
이 환난의 때에 그리고, 역사의 이 어두운 시기에,
성도들은, 어떤 마음과 어떤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본받을 만한 교훈을 던져 준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책망만을 받았던,
사데교회에서 남동쪽으로,
40∼4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이 교회는 어떤 면에서,
마지막 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모본이 되고 있습니까?
첫째, 말씀에 순종했던 교회입니다.
8절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들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교인들의 순종은,
두 가지 면에서 두드러집니다.
첫째로,그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이 적은 능력이 교회의 크기를 말하는 것인지,
교인들의 재산의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영향력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관론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던 교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적은 지식, 적은 재산,
적은 시간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든가,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그 적은 것으로, 주님을 위해 할 일을 물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고난 중에 순종했습니다.
본문은 이 교회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8절에 보면,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할 수도 있는,
역경에 직면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 9절에,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 말하는 자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 교회의 대 부분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도 이런 고난이 있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고난 속에서의 순종이라는 면에서, 더 값진 것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어려움에 처했다고 합니다.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게 되면,
동족인 유대인들이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라고 해서,
그를 추방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의 문화의 중심지이며,
예배 장소였던 회당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도 박탈해 버리고,
심지어는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자들이라는 이유로,
로마의 관청에 고발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신이 만약 이런 입장에서 고난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원망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의 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에 더 집중했습니다.
인간 관계가 어려워질 때,
그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우리는 더 큰 어려움 속에 빠집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살피고,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이웃 때문에,
아픔과 상처와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이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모본입니다.
둘째, 선교의 기회를 포착했던 교회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선교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선교와 전도가 강조되고 있음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선교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교회는,
선교의 명령 앞에 순종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선교의 기회를 포착한 교회,
선교의 명령 앞에 순종했던 교회였습니다.
넷째, 이어서 책망이 나옵니다.
물론, 책망이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서,
전혀 책망을 받지 않았던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다섯째, 권면 혹은 경고가 이어집니다.
내가 속히 임하게 된다는 말씀
제 목: 우리가 본받을 교회
본 문: 계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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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델비아는 소아세아 일곱 도시 가운데 제일 역사가 얕은 곳으로 버가모 왕조 아탈러스가 건립한 도시였습니다. 아탈러스는 그 동생 유메네스를 극진히 사랑하여 이 도시의 이름을 빌라델비아 즉 <형제의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합니다. 이 도시에 세워진 발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주님의 책망이 없는 사랑과 칭찬만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고데는 말하기를 "그 어떤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과연 빌라델비아 교회는 오늘 우리가 본받을 교회입니다.
1. 기회를 지닌 교회
8절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노니..."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표면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열어 놓으신 문을 닫아 버리려는 방해 세력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문을 아무도 닫을 수 없으리라는 그리스도의 강경한 이 선언은 이 문을 닫으려고 노력했던 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열린 문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있으나 그중 가장 유력한 견해는 선교의 문, 혹은 선교의 기회를 의미합니다.
고후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골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델비아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북으로 로마에 직결하는 서머나 항과 남으로는 에베소와 직통하는 교통 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이 열민 문의 기회를 이용하여 빌라델비아 교회는 널리 복음을 전파할 수 있어습니다. 이 선교의 보수로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더 좋은 선교의 기회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충성스러운 교회였습니다. 그 충성에 대한 구체적인 상급은 더 많은 선교의 기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교가 그리스도의 명령이요 우리의 책임과 의무인 것을 압니다. 우리의 삶의 궁극의 목적이 예수를 전하고 증거하는 선교인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더 많은 선교의 기회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상급인 것을 미쳐 모르고 지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은혜와 축복은 선교에 있습니다.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를 부러워 하고 흠모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자물쇠도 열 수 있는 열쇠, 가장 단단히 잠겨 있는 문도 열 수 있는 열쇠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의 뜻대로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는 최고의 능력을 가지시고 그의 일에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문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과거의 전도와 봉사가 그리스도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는 보다 더 큰 일을 하라는 소명이 주어지는 기회임을 발견케 됩니다. 즉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은 더 많은 선교의 기회를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더 큰 더 넓은 선교의 문, 선교의 기회를 우리는 부러워 합니다. 그런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교회의 특별한 영광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광 교회에 이 열린 문을 주옵소서."
금면 우리 교회 표어처럼 가족에게, 구역 안에, 세계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시다. 우리가 선교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능력을 지닌 교회
8절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적은>이란 말은 <μικραν>으로 `작은 것', `작다'는 뜻입니다. 현대는 매스의 시대입니다. 무조건 큰 것, 대량적인 것을 숭배하려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입니다. 크면서도 속이 텅 빈 것이 있고 적으면서도 알찬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 교회가 소유한 영적 자원의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 적은 능력을 가지고 큰 일을 하느라고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교회였습니다. 사회적인 세력이 빈약했고 교인 수도 얼마되지 않아서 마음대로 활동하며 일 하기에 큰 지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고 적고 약한 교회였으나 주님을 위한 충성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치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연명거리인 엽전 두 닢을 바친 것과 같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이 <적은 능력>을 인정하셨습니다. 적은 능력을 지니는 것은 가능성의 기초인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인간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연구하고 활용하고 개선해서 보다 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데 삶의 의의 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은 열시으로 장사하여 배를 남겼고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수건에 싸서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본전만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이 좀스럽고 게으른 종의 달란트를 빼앗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달란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땅 속에 묻어두거나 그것을 악용할 때 결국 때가 오면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문제는 양의 적고 많음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바르게 활용하느냐 않는냐가 문제입니다. 많거나 적거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분량에 따라 달란트를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발휘하느냐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생활에서 까지도 열등감이나 절망 의식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나는 가진 것이 변변치 못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사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무에 관심을 두지 말고 유에 관심을 가집시다. 사람은 누구든지 남이 못가진 몇가지 보배와 자본이 있는 법입니다.
여기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봅시다. 주어진 것이 변변치 못한 것이어도 좋고 그 분량이 적어도 좋습니다. 그것에 첨부하고 개조해서 더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창조의 노력과 활동이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것을 가지고 방종하는 자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적은 것을 가지고 힘쓰는 자를 귀하게 보십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천재였느냐? 그가 얼마나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타고 난 것을 가지고 얼마나 일했느냐가 문제입니다.
구약 『사사기』 7:13-14에 기드온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 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15절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라 했습니다.
보리떡 한 덩이가 미디안 군을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보리떡 한 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굴러가는 보리떡이 되어야 합니다. 굴러가는 보리떡은 파묻혀 있는 소장되어 있는 금덩이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없는 자들을 택하여 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보리 떡 같이 약한 교회였으나 주님을 위하여 움직이는 충성스러운 강한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본받아 가진 것이 적지만은 큰 일을 만들어 내는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인내를 지닌 교회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니..."하고 했습니다.
여기 인내의 말씀이란 몇 가지로 해석됩니다.
1) 인내하라고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말씀.
2)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씀.
등으로 해석합니다.
그런고로 여기 나의 인내의 말씀이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을 함께 포함한 말씀입니다. 과연 그리스도는 인내의 가장 큰 모범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 말하는 어떤 자들에 의하여 심히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심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켰으며 그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또한 시종일관 그리스도의 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매달렸으며 그 말씀과 분리될 수 없었으며 다른 것은 다 놓친다 해도 그의 말씀을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힘은 약하고 자원은 적었으며 큰 지진으로 막대한 고난까지 겪었으나 끝까지 참고 충성하는 신앙을 간직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극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말씀에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그 사실에 대하여 두번씩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가 내 말을 지키며"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그리스도께서 인내의 본보기와 인내의 근원과 그 보상자가 되신다는 말씀이 그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련을 감당하기에 어려웠어도 그들은 주님을 회상하고 무거웁고 부끄러운 십자가를 온유하게 짊어지고 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진 시험과 시련을 겪으렴서도 인내의 말씀의 힘으로 그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장점이 순교였다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경우는 그 견실성, 그 인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는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도 배불러 보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거름을 안 주고 많은 추수를 거두려는 사람은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영양소의 공급이 적어지면 강한 신체도 마르고 쇠약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과 그 힘으로 견고한 교회, 굳건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약속이 나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문구로,
경청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이어집니다.
■ 결론으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약속을 받은 교회입니다.
1) 내가 너를 지키리라.(보호와 승리)
2) 하나님 성전의 기둥.(하늘에서의 위치와 부동)
3) 주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나님의 것)
이스라엘 나라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텔아비브에 국제 공항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여객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돌에 새긴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벤 그리온 International Air Port>
1945년 종전 후 1948년 독립된 나라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이요 또 하나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해 5월 14일, 나라를 잃은지 2,000년 만에 독립했습니다. 벤 그리온은 이스라엘의 첫 수상 겸 국방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국부라는 존칭을 받았습니다. 그의 말 가운데 아주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을 잃었다. 이제는 더 잃어 버릴 시간의 여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위대한 지도자 벤 그리온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더 잃을 시간의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을 잃어서도 안 되고 또 잃지 말아야 합니다.
1) 선교의 기회를 지닌 교회
2) 영적인 능력을 지닌 교회
3) 인내의 말씀을 지닌 교회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