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을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 정운경(1305~1366)은 조실모하여 이모가에 자라다가 외숙 안분의 도움으로 학문의 길에 들었고, 학문의 성과에 대하여 안축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영주의 엘리트 선비그룹 안향을 비롯한 안축, 외숙 안분과 같은 순흥안씨가 외가였으며, 그들 안씨들의 외가인 영주의 토성 榮川禹씨를 아내로 맞아 혼인하였습니다. 이것은 안축과 외숙 안분은 동향인으로 상당한 혈족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정도전이 출생할 즈음(1337~1342) 아버지 정운경은 상주와 개경에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양촌 권근(1352~1409)`의 양촌집『동현사략』安軸기사에 의하면
안축이 [충열왕 정미년(1307)에 안분(安奮)의 방(榜)에 급제하였다.]라고 하였다. 우리 삼봉선조 문집중에 손수 쓰신 아버지의 행장 [고려봉익대부 밀직제학 형부상서 정운경행장] 에 염의 선조는 조실부모하고 이모가에서 자라다가 외숙 翰林 安壯元 奮을 따라 개경에 가서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안장원은 과거에서 장원급제 하였단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염의선조의 외숙은 막연하게 한림 즉 儒者일 것이라고 추측해 왔었다. 그래서 염의의 외숙 안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어떤 인물일까 하고 매우 궁금해 왔다.
안축은 1282년에 출생하여 1348년에 졸하였다. 염의선조께서 1305에 출생하여 1365에 만년 졸하였으니, 안축과는 약23세 정도 연하이다. 아마 외숙 안분은 안축과 비슷한 연배가 아닌가 여겨지며, 안축이 「충열왕 정미년(1307) 안분의 방에 급제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壯元급제 하신분 이다. 보통 "모모의 방"이라면 모모는 장원한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어 "宋天奉의 방에서 李穡이 급제하였다고하면 함께 과거를 보았는데, 송천봉이 장원을 하고 이색이 1등인 乙과나 2등인 丙과 또는 3등인 同進士로 급제한 것이다. 또 삼봉선조께서 임인과 박실의 방에서 동진사로 급제하였는데, 이 임인과에서 朴實(朴宜中)이 장원을 하였고, 삼봉선조는 3등 동진사로 급제한 것이다.
이로보면 염의선조의 외숙 安奮은 충선왕 정미과에서 장원 급제한 분으로 대단한 학문과 재능을 지닌 선비라고 할 것이다. 다만 그의 이력과 문집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런 외숙께서는 생질 염의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하였고, 개경으로 데려가 동향인으로 동년인 안축에게 재능을 시험하였고, 안축 역시 염의의 재능을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염의선조께서 성장과 학문 배경이 안향(1243-1286)과 안축(1282-1348), 외숙 안분 등 쟁쟁한 외가 순흥안씨 선비집단에 있고, 그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김사원(金士元, 1257-1319)은 삼중대광(三重大匡)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 시(諡) 정경공(貞景公)이었고, 손(孫) 휘 김진(金稹, 1295-?)은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禮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시(諡) 장영공(章榮公)이었다. 장영공의 외조(外祖)는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이었고,
고산(孤山) 윤선도 선생은 1587년(선조 20) 6월 21일 한경 동부 연화방(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예빈시 부정(禮賓寺 副正)인 아버지 유심(惟深)과 어머니 순흥안(安)씨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탄생하셨다. 생모 안씨는 좌의정 현(玹)의 손녀이다.
晉州姜氏, 恭穆公 後 通亭公派 先祖 諸位 內外戚考
(진주강씨,공목공 후 통정공파 선조 제위 내외척고)
공목공의 증손 문량공(휘, 강희맹)은 인재공의 동생이시다.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셨다. 經史(경사)와 諸子百家書(제자백가서)에 통달하셨다. 문량공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3대가 문장이 뛰어나 세 분의 글이 모두 기아동문선에 들었다. 이로써 ‘3대 문장가’에 ‘시, 서, 화 형제 三絶(삼절)’이 나셨다.
문량공은 따님이 네 분이 있다. 맏따님은 대제학(성임) 창녕성씨댁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따님은 좌의정(김질) 안동김씨댁 며느리가 되었다. 셋째 따님은 부사(신렴) 고령신씨댁으로 출가했다. 고령신씨 부사공(신렴)은 영의정(신숙주)의 증손자이다. 넷째 따님은 안동권씨 이조판서 화천군(권함)의 며느리가 되었다. 화천군 7대 손에 좌의정 수암(권상하)이 나왔다.
성종 때 일이다. 원자아기(연산군)가 아파서 避接(피접)을 할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병중인 원자가 자리를 옮겨 요양하자면 우선 나라 안에서 禮儀凡節(예의범절)이 出衆(출중)하고 家風(가풍)이 훌륭해야 한다.
문량공은 왕실과 戚(척)이 두텁다. 문량공의 이모가 소헌왕후이며 이모부가 세종대왕이다. 세조는 문량공과 姨從間(이종간)이다. 문량공 배위 봉보부인은 호조참판 한백당(안숭효)의 따님 순흥안씨이다. 한백당의 형은 대제학 문숙공(안숭선)이다.
문량공집이 文章(문장) 學德(학덕)으로 名望(명망)이 높은데다가 봉보부인 친정 순흥안씨댁도 장안에 名聲(명성)이 있었다. 특히 봉보부인이 훌륭하셨다. 열네 살에 시집을 온 안씨 할머니는 法度(법도)가 있고 行誼(행의)가 갸륵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에 궁궐에서는 兩家(양가)의 凡節(범절)을 중히 여겨 원자의 피접은 ‘숭례문 밖 순청골 강희맹 집’으로 하라는 御命(어명)이 내렸다.
봉보부인 안씨 할머니는 원자아기를 온갖 정성으로 키웠다. 몇해 동안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가르쳤다. 어느날 성종이 순청골에 원자 문병을 왔을 때 네 살에 불과한 원자가 그 책들을 줄줄 외웠다. 그뒤 봉보부인 품에서 자라다가 원자는 還宮(환궁)했다. 성종은 원자를 잘 키워준 봉보부인을 극구 칭찬했다.
공목공의 현손인 숙헌공(휘, 귀손)은 문량공 맏아드님이다. 원자가 문량공댁으로 避接(피접)을 나왔을 때 숙헌공은 청년이셨다. 그뒤 숙헌공은 부제학, 이조참의를 지내셨다. 원자가 자라 등극했다. 숙헌공은 연산군이 등극한 3년차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가시었다. 1498년 무오사화에 대사헌으로 김일손 등의 처벌을 가벼이 할 것을 주장하셨다. 이어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1505년 우의정에 오르셨다.
우계이씨 도촌공 우수형(秀亨)
휘는 수형(秀亨).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도촌(桃村)이다. 1435년 세종 17년에 탄신하시어 1528년 중종 23년 정월 4일 94세로 졸하셨다. 아버지는 우계이씨 세계상 10세 인숙(仁淑)의 장남인 경창(景昌)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참찬공 안구(安玖)의 따님이었다.<우계이씨대동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