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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ju"라는 Golden City 소행성으로
천년이라는 시간 되짚으며 휴가 한 번 떠나 볼까?
... 千年의 時間 (천년의 시간) ...
발품 팔며 감동 줍고
감사로 마음 양식 채우며
멋지게~ 우리 그리 살아요.
산다는 것은
숨쉬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늘 함께해야 하죠^^
별거 아닌 경주 지도도 계속 들여다보니까
쪼매 예쁜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이 말처럼 경주라는 땅에 들어가서 걸으니
경주라는 도시가
제게 하나의 꽃으로 활짝 피어났습니다.
하트 뿅뿅
아무리 더워도 물가, 그리고 그늘은
바람 드나들며
잠시 멈춤의 시간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네요.
문천교를 지나자마자 우측,
남천 강가 의자에서 한 숨 돌립니다.
더운 날씨와 상관 없다는 듯
유유히 흐르는 남천의 물 바라보며...
물 저 너머로는 '오릉'이,
그리고 도시 한 복판에
작고도 커다란 산 하나가
진귀한 보물을 많이도 숨기고 있네요.
남산이 있습니다.
남산의 '남' 자는 어쩌면
배방장님의 '옷치렁치렁할 배' 처럼
'보물 빼곡할 남' 그런 한자가 아닐런지...
남산은 한자로 '南山' 이렇게 씁니다.
남녘남이라는 글자는
악기로 사용하던
종모양을 본떴다고도 하는데...
'종'이란 것은 대체로 불교 유물로
많이 만들어졌고
대중들을 모을 때 사용.
동양의 종 중에서
'한국종' 이 가장 높이 평가 받고 있다는데,
소리의 울림이 가장 길고
오랫동안 높고 낮은 울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유의 맥놀이 현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풍수지리설에서 맥(脈)은
지세(地勢)에 정기(精氣)가 흐르는 줄기로
기운(氣運)이나 힘을 나타냅니다.
소리를 통해
세속의 번뇌를 정화시켜주는 '종'
산 속에 들어가도 어쩐지 우리는
마음이 정화되곤 하지요.
경주 남산의 맥
그 소리의 울림 찾아
조만간 다시 한번
경주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쬐매만 기다려라
남산아~
신라 박혁거세왕 개국 당시 국호는 서라벌
65년(탈해왕 9년)에는 국호를 계림으로 고치고
503년(지증왕 4년)에 국호를 신라라 명명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6·25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우리나라 최대의 유물·유적이 보존된
왕들의 성역
거대 야외 박물관.
2000년 12월 유네스코 등재
유적 성격에 따라
5개의 경주역사유적지구로 나뉩니다.
불교 예술 남산지구
천년 궁궐 월성지구
왕을 비롯 고분군 대릉원지구
불교의 정수 황룡사지구
방어 시설 산성지구
고구려, 백제보다 늦게 발전하긴 했지만
불교 문화를 꽃 피우며
삼국을 통일한 나라.
아라비아 사람 이븐 쿠르다지바의
'왕국과 도로 총람'에
황금이 많이 나오는 나라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해적들이 찾아 헤매던 황금 도시가
바로 다름 아닌 이곳
신라땅 경주이지 않았을런지...
전 세계 10여 점 남짓한 금관 가운데
6점이 신라의 금관,
그 외에도 황금으로 만든 신라의 유물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쉬고 있던 의자 뒤쪽으로
할아버지 두 분 막걸리 드시며 계시던
황남동 정자에 올라
잠시 담소 나눕니다.
이 두 분 에어컨 빵빵한 무더위쉼터
마을회관에 안 계시고
왜 여기 계시냐 물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거기가면 이 분들이 막내래요.
그래서 잔심부름 다~ 해야한다며
여기가 편하다고 하십니다.
바람도 잘 불고~
이야기 하다 보니 어찌어찌~
오늘밤 우리 노숙할 장소로
이곳이 낙점됩니다.
이 할배들이 자고 가라고
허~하셨습니다.
꽤 넓은 터에 건물이 보입니다.
설명 한번 읽어 보시구요.
재매정(財買井)
월성터 가는 길에 있는 우물로
재매는 김유신 부인 이름 입니다.
건물 안에는 유허비와 우물이 있습니다.
어쩐지 바로 옆에서
갑옷 입고 서서
더위에 땀 뻘뻘 흘리는
김유신 장군이 대접 하나 들고는
"우리집 물 맛 은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웃고 있는 듯하여
주위를 한 번 둘러 봅니다.
잠시 김유신에 대해 살펴보면^^
진평왕(579~632) 때부터~선덕여왕(632~647) ~진덕여왕(647~654)~
태종무열왕(김춘추)(654~661)~그리고 그의 아들 문무왕(661~681)까지
김씨성의 다섯 왕을 모신
김유신(金庾信)(595~673)
<위 사진은 인터넷 발췌>
가야(伽倻)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던
여러 국가들의 연맹왕국으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노래 쫌 잔인합니다.
ㅠㅠ
예언대로 노래하고 춤을 춰~
여섯 임금이 태어나고 나라를 세우니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기름진 낙동강 하류 평야를 바탕으로
벼농사가 발달했고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해
중국, 왜(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던 가야
신라 최고의 정복 군주였뎐 진흥왕에 의해
562년 흡수되면서
가야 문화는 신라 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신라는 가야 유민을 적극 받아들이며
왕족은 귀족으로 후하게 대접.
<위 사진은 인터넷 발췌>
가장 힘이 강했던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
알에서 나온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족.
가야 왕족 출신 삼대
할배 김무력은 10대 구형왕의 아들이며
김유신의 아부지는 김서현
그들 가야는 일찍이 철기 문화가 발달하여
군사적 능력이 월등~
가야인이라는 신분적 제한으로
신라에서 발이 묶이자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를 왕족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게 되고, 성공~
...이에 얽힌 사연도 드라마급...
유신이 춘추를 집에 불렀다가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리고
여동생 문희를 불러
옷고름을 달아주게 하며
두 사람을 만나게 합니다.
그렇게 남녀간에 불이 활활 붙어
동생 문희가 춘추의 아이를 가집니다.
그런데...
춘추가 결혼을 주저하자~
(이미 부인이 있었기에, 후에 아이를 낳다 죽음)
김유신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덕만(선덕)이 춘추와 남산에 행차하는 시간에 맞춰
임신한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웠고
덕만의 책임지라는 한 마디 말에
두 사람의 결혼은 성사됩니다.
이로써
멸망한 가야 왕손 김유신과
신라 왕족 가문의 김춘추는
가족이라는 돈독한 관계를 이룹니다.
비담과 염종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며
이 둘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지며.
소용돌이 속에서
선덕여왕인 '덕만이'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했던
사촌 진덕여왕
'승만' 마저 재위한지 10년도 안돼 죽자
많은 사람들이
김씨인 알천을 왕으로 추천~
하지만 김알천이 아닌...
춘추가 두 여왕들에 이어
29대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합니다.
김유신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신라시대 호적 정리는 어떻게 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
후에 김춘추는 자신의 셋째 딸을
60살이 넘은 나이든 김유신 삼촌에게
시집보내기도 합니다.
660년 나당 동맹을 이룬 김춘추
김유신을 필두로 백제를 정벌~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을 무너뜨리고...)
우리 계백장군님 돌리도~~~
Jiri-깽이는 백제인~
이글스님과 방장님은 신라인~
두 분 내 칼을 받아랏~
쳉! 쳉!
저 앞에 건물은 뭔고??
우리나라 건물 맞는교??
월정교(月淨橋)
남천(문천)이 가로막은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통로
중요한 다리 되시겠습니다.
통일신라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어졌구요.
조선시대 유실된 것을
2018년 4월 최근에 복원하였습니다.
어쩐지 신라시대 우리나라와는
안어울리는 듯
방장님, 이글스님, 저 까지
셋의 공통된 의견
아~ 뭔가 쫌 많이 아쉽슴돠~
ㅠㅠ
우리는 월정교 직전 좌측으로 돌아
월성으로 가 봅니다.
월정교는 그냥 눈으로만 보면서...
'원효대사(617~686)는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으로 들어갔다'
요석궁은 요석공주가 거처하던 곳^^
ㅋㅋ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지는거죵~
뾰로룡~~~
이때에 원효대사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요?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노래를 부르고 다녔고
원효대사가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무열왕이 보낸 신하였겠죠^^)
옷을 입은 채로 남천 물에 빠지니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였고,
그렇게 그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무열왕의 노림수인지, 원효의 노림수인지...
^^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요석공주와 원효의 만남
러브러브
이렇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 법의를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가 됩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려다가
해골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던 원효대사
위 설명도 한 번 읽어보세요.
에고고.. 귀여버라~~
신라시대 월성 주변 숲속을 날아다니던
비단벌레에서 착안한 전기자동차
비단벌레 전기자동차 가는 길은...
출발 - 계림 - 향교 - 최부자집 - 교촌마을 - 월정교 -
월성 - 꽃단지 - 월성홍보관(유턴) - 첨성대 - 출발지도착
오전 9시부터 11시, 오후 1시부터 5시(막차)
전기차라 충전 시간도 필요해서
12시~1시까지는 운영 안한다고 하네요.
2.9km거리를 하루 15회 운행,
30분 간격, 약50분 소요.
참고하세요.
콩나물시루~
ㅎㅎㅎㅎㅎ
사람들 날이 더우니 걷기는 싫고
이렇게 자동차로~
또는 자전거로~ 이동하네요.
사실 걸으면서 좀 느리게 볼 때
우리는 들여다볼 수 있고
세상에 떨어진 어여쁨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첨성대(瞻星臺)와 반월성(半月城) 사이에 있는 숲인
경주 계림(鷄林)숲 옆을 거닐고 있습니다.
사적 제19호
면적 7,273㎡
'삼국유사' 탈해왕(4년) 8월 4일 밤
호공(瓠公)이 반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 숲이
황금 궤에서 나오는 광명으로 가득 차고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였더랩니다.
왕이 즉시 이 숲으로 가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알지라 이름하였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라고 기록.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전설이 있는 계림숲
4대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를 양자처럼 키우죠.
^^
제 탄생 전설도 있는데...
팩트에 살좀 붙이고 꾸미면
이런 전설보다 더 재미나게 먹힐 듯^^
팩트 하나면 이야기하자면
제가 태어나던 날
우리집에서 키우던 소 한마리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자살이었던거죠.
희대의 믿기지 않는 소 자살 사건
그 소 왜그랬을까요?
사주를 좀 공부하셔서 볼 줄 아시던
서울사시던 할아버지('서울 할아버지'라 불렀었습니다.)가
마침 저희 집에 와 계셨고
제가 태어난 시를 따져 보시더니
"거참, 시 잘 타고 났네~"
그러셨다고..
참고로 저는 언니 둘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환영받지 못할 셋째딸이었던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아닌 딸을 낳은 울 엄니는
덕분에 싱싱한 소고기국을 드셨고.
그것도 맘껏~
(제 아래로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까지)
아들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들 하나 더~' 를 외치다가
우리집은 이렇게 5남매가 되었습니다.
^^
ㅋㅋ
뭐 전설 이런식으로 만들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월성은 지금 발굴조사로
이렇게 막혀 있는 곳이 많습니다.
월성(月城)·
사적 제16호로
건립시기는 파사왕 22(101년)
5대 파사왕은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 도성(都城)으로
성 모양이 초승달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구요.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
또는 그냥 월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첨성대와 (반)월성 갈림길...
높은 곳에 있는 숲 쪽~
석빙고 방향으로 길 잡습니다.
어여 갑시데이~ 이글스님^^
식히면서 가도 이글스님
온 몸이 뻘겋게 익었습니다.
과일도 익어야 하지만
사람도 익어야죠.
익어야 제맛 듭니다.
ㅎㅎㅎ
궁 이름 이쁘네요. 월성~
내가 거하는 곳에 이름을 지어준다^^
어쩐지 꽤나 낭만적이지 않나요?
설명에도 나오는데.. 좀더 자세하게~
월성터는 원래 충신이었던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는데
BC 19년(박혁거세 39) 석탈해(昔脫解)가
금성(金城)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
수를 써서~
호공의 집을 빼앗아
후에 월성을 만들게 됩니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2대 남해왕(南解王)의 눈에 띄어
그의 맏사위가 되었고,
남해왕의 태자 3대 유리왕에 이어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습니다.
지도 보니 성 모양 초승달 같나요?
굽이져 흐르는 문천 물줄기에 맞춰
성이 지어져서 달 모양이 되네요.
강 건너 남산이 바로 지근에 있구요.
여기까지 걸어오면서도 내내 봤죠.
김유신 집이 궁 밖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알게 됐구요.
재매정.
만덕이(선덕여왕)가
아마도 춘추와 월정교를 건너
남산으로 가려는데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에 태워죽인다~
쇼~를 한 거였겠죠.
지도보며 이야기 반추하니
더 쏙~ 들어옵니다.
옛 화려했던 궁궐터~
누군가 무수히 밟고 걸으며
발자국 남겼을 이 땅~
2019년 무더운 여름 8월 초에
J3-club의 배방장님, 이글스님, Jiri-깽이도
발자국 보태보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잠시 찍혔다 사라지는 발자국과 같을테지요.
원효대사가 그랬다죠~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어야
생사에 편안함을 얻느리라'
지금 걸음은 누가 뭐래도
그저 편안하기만 합니다.
아~좋다~
이글스님이시구요^^
갱주에 오라~청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땀으로 옷은 축축~하십니다.
어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실꼬~
방장님은 이글스님에 비하면
뽀송뽀송한 편~
그래도 역시 땀이 몸 밖으로~
더워서 인상쓰는거 보이소~
여기 저기 걷다보면 발굴 조사터
경주는 온갖 땅덩이가 유적 그 자체~
멀리서보면 꼭 무덤 같았는데....
여기는 월성 내에 있는
석빙고(石氷庫)
대한민국의 보물 제66호
얼음 저장 석조 창고
1738년(영조 14)
"경주 부윤 조명겸(趙明謙)이
나무로 된 얼음 창고를
돌로 고쳐 만들었다"
고 석비에 적혀 있으며,
목조의 빙고를 석조로 축조하였다가
4년 뒤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였다가
오늘처럼 푹푹 찌는 여름에 꺼내 사용.
아~ 얼음 곱게 간 팥빙수 또 먹고 싶어집니다.
여름이 좋은건 팥빙수 때문~
빙수야~ 팥빙수야~
너무나 사랑해~
석빙고 안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어둠속 바라보며
없는 한기 잠시 느끼다~ 갑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지증왕 6년 11월에
시명소사장빙(始命所司藏氷)
즉 유사에게 명해 얼음을 저장하도록 했다.
얼음창고를 관리하는
빙고전(氷庫典)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대사(大舍) 1명, 사(史) 1명의 관원을 두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더운 여름, 신라에 얼음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대단한 문명입니다.
엄지 척~입니다.
이것으로 월성 구경을 마치고 나가구요~
도로 따라 걸음합니다.
도로 가에는...
차량 음료수 판매대가 주~욱 늘어서 있고
시원한 슬러시는
투명 통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오오~ 첨성대 방향으로
꽃밭이 형성되어 있네요.
신라 시대와도 잘 어울릴 것 같은
고귀한 연꽃부터...
백일홍, 그리고 칸나까지...
꽃 종류도 곳곳에 많습니다.
우리는 무덤 만나보러 왔습니다.
꽃구경하러 경주 온건 아니니까...
그냥 가볍게 보면서, 즐기면서 통과
꽃밭으로 들어오니
방장님 얼굴 인상쓰던 주름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스마일 ~~
ㅎㅎㅎ
이글스님 물로 샤워한 듯~
땀이여유? 물벼락 맞은거여요?
얼굴은 꽃향기로 샤워~
활짝~
바닥에 설치된 스프링쿨러는
더위에 지친 꽃을 위해 쉼없이 물을 뿌려대고~
관광객들에게도 물총 장난을 걸어댑니다.
저도 물총 맞았어요.
이 더위에 물총 맞으면
시원하니...좋아요.
스프링쿨러 따라 계속 꽃밭 돌고 싶어요~
물총 맞고, 더위 좀 물리며...
원기 충전~
이곳은 첨성대 옆의 꽃밭단지입니다.
이글스님 그늘막 보이니
잠깐이라도 들어가 있습니다.
더위 그 기세는 시간이 가도 꺾일 줄 모르고...
첨성대 바로 코앞 도착.
우리가 내내 발걸음했던 왕릉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더니...
이곳에는 사람들 제법 많습니다.
저 첨성대 보러 처음 와봅니다.
우와
히힛~
여기서는 우리 단체 사진 한 번 찍어볼까요?
이글스님, 방장님
이리 온나~
셋이 친친모드로~
근데 사진 가만히 보니
저만 신나하고 있는 듯..
두 분 표정은...
더위야 나~ 살려라~
그러시는 거 같아요.
아~ 첨성대 예쁘다.
예술작품 맞네요.
저 네모난 구멍에 사다리 대고 올라가면 되는거죠?
^^
제가 생각했던 첨성대보다 한참 작아요.
요녀석 키가 줄어든건가?
어제 만들어놓은 듯, 세수 한 듯 깔끔~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왔구요>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
건립시기, 연도는 632~647년
높이는 약 9.5m
우리 선덕여왕 덕만 시대에 만들어진 천문 관측대
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첨성대가 천문대임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
상원하방(上元下方)의 형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元地方)설
첨성대를 만든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의 일수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27단의 몸통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인 것과 관계하고
꼭대기 우물 정(井)자 모양의 돌을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데
이는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상단 12단과 하단 12단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1년 12달,
합치면 24절기에 해당~
고대 문헌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했다는 글이 있고.
천문기록의 양이 선덕여왕 대를 기준으로
4배나 늘었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오행성에 관한 기록도 늘어났다고 하는걸 보면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지어 천문 관측을 함으로써
백성들의 농업에도 신경썼다고 하는 말이
맞는 듯^^
첨성대 맞은편으로 인왕동 고분군사진입니다.
옆으로 계림숲
고분군 뒤쪽으로 내물왕릉이 있습니다.
17대 내물왕
(내물 마립간)
14대 유례, 15대 기림, 16대 흘해
세 석씨 왕에 이어
다시 김알지의 후손 김씨가 왕위를 잇습니다.
김씨 왕으로는 13대 미추 이사금이 첫 왕.
내물 마립간이 17대로 두 번째 즉위
기존 거서간->차차웅->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호칭도 바뀝니다~
위에 왕 계보 정리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이후로 쭈~~~욱
김씨가 왕권을 계승하게 되죠~
드디어 김씨 세력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내물 마립간은
미추 이사금의 사위(비는 미추왕의 딸 보반부인)로
백제의 근초고왕,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깨갱~
오후 5시가 다 되어 갑니다.
아침에 만나서 아이스크림, 음료수, 팥빙수 먹다보니
밥 먹을 기회도 놓쳤습니다.
끼니 때 놓치면 못 찾아 먹으니
끼니 거르지 마세요.
자전거 대여해주는 곳...
이 근처에는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들 참 많습니다.
좌측 방장님, 우측 이글스님~
무슨 싸운 사람들마냥 뚝 떨어져 가네요
ㅋㅋ
밥이 몸에 안들어가서 그래요.
대릉원지구 돌담길 옆의 길 따라 걷다보니
유적 발굴터 쪽으로도
무덤들이 보입니다.
경주는 지나가다가 살짝 돌덩이만 건드려도
어쩐지 보물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올 거 같은 그런 곳.
근데 함부로 파면 안되겠죠?
절대적~ 보호구역인
여기는 경주.
길 건너 맞은편으로
경주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황남빵.
그러고 보니 이글스님이 집에 갈때
사 준다고 하셨었는데
으잉?? 어찌된거지?
저 맛있는 것을 못 먹어보고 왔네요.
이글스님과 저는 더위 식혀줄
시원한~ 밀면
냠냠~ 참 맛있는데^^
방장님은 밀면 싫다시며
뜨끈한 콩나물국밥 드신다고
바로 옆집 식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방장님 진짜 밀면 싫어하시는가보네요
이글스님하고 둘이 들어가면
쫓아오실 줄 알았더니만...
ㅎㅎㅎ
방장님 담부터는 방장님 계실 때
밀면 절대 안먹을께유~
회원님들도 숙지하세요.
덥다고 맛있는거 사드린다고 하고는
방장님 데꼬~
밀면집 가시면 절대 앙돼요~
식사 후 돌담길 다시 돌아
대릉원 안으로 들어갑니다.
꼭 경복궁 돌담길 걷는거 같은 느낌
경복궁 돌담길은 연인들이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고 하던데
우리 셋이 여기 같이 걸으면 어찌 되려나??
ㅎㅎ
덕수궁 돌담길 뒤쪽으로
예전에 가정법원이 있어서 나돌았던 속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대릉원 담장을
허물자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는데...
담장 없는 대릉원
그것도 생각해볼 문제네요.
^^
돌담길 걷고 있는 바닥에는
신라 56왕 계보 친절한 설명이
더딘 걸음, 더 더디게 하고 있구요.
한 개~ 한 개~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들여다보며 걸으니
앞에서 이글스님과 방장님
빨리 오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알겠어요. 가요가~ 갑니다.
뜀박질~
대릉원 앞.... 도착.
일단 안내도 한 번 보고...
이 곳에는 뭐가 있나 스캔 시작~
대릉원 한 곳에서
총(塚)과 릉(陵)을 같이 만나게 되겠네요.
천마총과 미추왕릉
총(塚)은 무덤 주인을 알 수 없죠.
다른 무덤과 특별하게 구분 될 수 있는
중요한 유물 발굴 등의 특징을 가집니다.
릉(陵)은 왕이나 왕후의 무덤으로 주인을 알 수 있는 묘.
설명도 한 번 빠르게 읽어보구요.
밥 먹고 움직이니
시간은 여섯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해의 기운도
그 뜨거움을 아주 쪼끔 내려놓고
몇 백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나무들이며...
천년의 시간을 훌쩍 넘긴
시대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
공원화되어~
사람을 불러들이는 휴식 공간으로
이렇게 함께한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이곳 대릉원에서 우리가 먼저 만나 볼 곳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
고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황남대총
(여긴 그냥 보며 지나갑니다.)
이곳이 대릉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사연의
미추왕릉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지고 있고....
앞에 보이는 것이 바로 천마총
세계문화유산인 대릉원 일원은
사적 제512호
천마총(天馬塚)
신라(6세기 초엽)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정부의 경주종합개발계획에 의해
거대한 황남대총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 했었고
이를 발굴하기 위해서
경험과 정보를 얻으려
이 고분보다 소형의 고분을 발굴하여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는 방침 아래
그렇게 천마총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는데
엄청난 것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던거죠.
방장님이 천마총 입구에서 인증해야한다며
저와 이글스님 차렷~하고
서보라고 하셨어요.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무덤안은 아늑하고 시원합니다.
더위 피해 들어와서
바닥에 주저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천마도는
1973년 발굴된 천마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障泥)에 그려진 말그림
하늘을 날아 오르는 천마
그래서 이곳 이름도 천마총~
재료는 자작나무껍질
천마는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다리 앞뒤에 고리모양의 돌기가 나와 있고
혀를 내민 듯한 입의 모습은
신의 기운을 보여준다.
이는 흰색의 천마가 동물의 신으로,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나르는 역할이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천마총(天馬塚)은 이 천마도와 금관 등
많은 유물이 발굴~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래서 총(塚)이라 불립니다.
자~ 뭐가 있나??
시원하니까 천천히 둘러봅니다.
금 장신구와 금 신발도 보이고요~
우와~ 금~
저는 그냥 보는 것으로도 대만족
우리 최영 장군님께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하라~'
그리 가르치셨거늘...
최영 장군님이 신라 때 사셨다면^^
뭐라 하셨을지...
최영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집이 초라했음에도 만족하고 살았다.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해
때로 식량이 모자랄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의복을 입은 것을 보면
하찮게 여겼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했으나
뇌물과 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그 청백함에 탄복했다.
고려사 열전에 위처럼 적고 있습니다.
저도 뭐~ 황금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나름 만족하며 살고요.
저는 그냥
앞으로도 쭈~~욱~~~
사람 보기를 꽃같이 하며 그리 살랍니다.
천마총 안에서
천마총 발굴하는 영상도
느긋하게 감상하며 구경~
한동안 푹~ 쉬었다 갑니다.
하하하..
설명 읽어보니....
저 안의 금 유물들 복제품이었네요.
저는 진짜인줄 알았습니다.
짜가가 판~~치는
천마총이었습니다.
천마총 외부 사진 찍고
방장님, 이글스님 쫓아서 뛰어가니...
방장님이 느닷없이 손 내밀어 보라십니다.
엥?
제게 반지를??
ㅋㅋ
근데 제법 예쁘네요.
어느 코찔찔~ 어린 소녀가
흘리고 간 모양입니다.
초등학교 앞 뽑기에서 많이 만날 수 있을 법한~
어떻게하죠.
껴보니~
제 새끼손가락에 딱 맞아요.
근데 이 반지 지금은 어디 있을까요?
없떠요~
방장님~
지.못.미
(지켜주지 못해 미안)
이런 엉뚱깽뚱 방장님 덕분에
재밌게 신나서 웃으며 갑니다.
이 반지 이글스님 손가락에 끼워드렸으면
더 재밌었으려나?? ㅎㅎ
황남대총(皇南大塚) 옆으로 지나갑니다.
국보 제191호인 북분금관
금제목걸이, 금제 허리띠, 금제 장신구 외
금동장고리자루큰칼 등 다수의 유물 출토
황남대총은 부부총으로 어울무덤~
남분의 피장자를
내물마립간이나 눌지마립간으로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여기도 총(塚)되시겠습니다.
미추왕릉 만나러 갑니다
대릉원 지도 한번 살펴보며~
미추왕릉
『삼국사기』에...
“미추왕은 백성에 대한 정성이 높아
다섯 사람의 신하를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의 애환을 듣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돌아가니 대릉에 장사 지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설명에서도 언급했는데 설화 하나...
삼국유사 ‘기이’편의 ‘미추왕과 댓잎군사’
제14대 유례왕 시대에
이서국 군대가 와서 금성을 치니,
신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한데 돌연히 이상한 군사들이 와서 도왔다.
그들은 모두들 댓잎을 귀에 꽂고
신라 군사들과 힘을 합쳐
적을 쳐서 깨뜨렸다.
적군이 물러간 후,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댓잎사귀들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었다.
이를 보고서야 비로소
선대(미추왕)의 음덕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능을 죽현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석'이 다른 곳들과 다르네요.
의자 같기도 하고~
이글스님, 방장님 같이 인증해드리려는데
방장님 바로 움직이는 바람에~
^^
요로코롬 찍혀버렸네요.
미추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참 대단하였다고 하니
없던 설화도 만들어 내지 않았을런지...
또, 13대 왕이었던 미추 이사금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김씨의 첫 왕(시조격)
그 왕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신격화하여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을 수도~
죽어서도 신라를 수호한 미추왕~
나라를 순회하며
약자를 살피고 백성을 위했던 왕~
사실 미추왕에 대해서도 저는 잘 몰랐었습니다.
ㅎㅎㅎ
산이지부장님과 보라님이
우리들 보러 오셨다네요.
빨리 만나러 가야죠~
여기 근처에 도착.
주차장에서 만나서
일단 산이 지부장님, 보라님, 이글스님 먼저
통일전으로 보냅니다.
방장님 차 수거하러 가야해서~
저는 방장님과 갑니다.
사실 제 마음은 콩밭에 잠시 가 있어서...
제가 경주 오면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 들르러~
방장님께 땡깡좀 부려서
반 억지 걸음으로 들렀다
차 수거하러 가자~ 그랬습니다.
그곳도 이곳 대릉원 근처니까!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
어서어서 독립서점인 책방~
천마총 맞은편쪽에 위치하고요.
저는 작은 책방, 도서관 이런 곳에서
시간 보내며 구경하는 것도
참 많이 좋아라~ 합니다.
읽는 약 처방전 봉투에 책을 담아서 주는 곳~
"읽는 약"이라는 문구 때문에
마음 빼앗겨서
언젠가 꼭 가봐야지 했던 곳
근데 이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좁은 책방 안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요.
방장님은 밖에서
찌릿찌릿
눈치주고 계시지~
쪼매 눈요기 구경만 하고
책도 한 권 못사서 나오니
마음이 흉흉~
진짜로 꼭 한 번 오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사람들 많을 건 예상 못하고...
여유있게 책 구경하다가
보물처럼 책1권쯤 기분좋게 발견해서
사갈 것만 기대했었네요.
통일전 정자
바로 옆의 식당
(문 닫고 집에 가시려던 주인장 붙잡아서 부탁~)
맛난 쭈꾸미 시켜서
이곳 정자 위에서 매운맛좀 봅니다.
보라님과 산이 지부장님
우리 보러 수박이랑 모기장,
맛난거 사 들고 와 주셨습니다.
좋은 분들
감사합니데이~
이렇게 해안길 아닌 곳에서 얼굴 보니
참말로, 억수로 좋습니다.
이글스님 매운거 못 드시는거 같은데...
밥 더 비벼드시라고 해도
그냥 드십니다.
맵긴 엄청 매워요.
근데 맛있어요.
맵게 쓱쓱~ 비벼서
마른 김 싸서
동치미 국물이랑 먹습니다.
오늘 밤 사실 여기 정자에서 잘까 싶었는데...
여의치 않네요.
그래서 아까 낮에 찜해뒀던
황남동 정자로 이동~
보라님과 산이지부장님
정자까지 같이 들러서 살펴봐주고
집으로 가고~
우리는 모기장 치고 바닥에 돗자리 깔고
잠자리 만듭니다.
강가, 풀밭이라 그런지 모기 억수로 많네요.
한밤이 되니 바람도 안불고...
여기 왜이랴~
폭망~
아까는 바람도 잘 불고 그러더니만~
더워서~ 내내 잠이 안오다가
얼음물 한 통 품에 안으니
그제사 쿨쿨~ 꿈나라로~
경주에서의 새 날이 밝아왔습니다.
8월 3일(토요일)
새벽 5시 기상~
정자는 간밤 우리 오기 전과 똑같이~
사람 다녀간 흔적 없이 치우고
오늘의 일정 시작하러 떠납니다.
통일전에 차 세워두고
또다시 뚜벅이로 돌아가서
열심히 걸어봐야죵~
통일전 향해 차 세워두려고 가다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며
이곳에 멋진 무덤섬을 만들어놨네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 황홀한 모습에
차에서 내려 사진도 찍고...
그 모습 마음에 담아 봅니다.
아침으로 편의점 들러~
작은 사발면 하나씩~
이런 소소한 재미와 행복~
어제 산이지부장님이랑 보라님이 사오셔서
맛나게 먹었던 수박
이만큼만 같이 먹고
나머진 가져가서 드시라고 보냈습니다.
밥을 너무 배부르게 먹어서
어제 저녁엔 많이 못먹었습니다.
수박 엄청 좋아합니다.
^^
지금이라면 또 먹을 수 있는데
남은 수박 다 보낸거 쪼매 아쉬워하며~
차에 놔뒀던 이 수박 껍질은
잘 버리려고 가지고 걸어 갑니다.
이글스님 그거 머리에 쓰고 걸어가면
엄청 시원~할낀데...
ㅋㅋ
여기는 지금 통일전 주차장 입구구요.
통일전 전각 안에는
태종무열왕(29대), 문무대왕(30대),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삼국통일기념비와 위 세 분의 사적비가 있고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건립.
금오봉 등산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쪽 남산이란 의미로 동남산이겠죠^^
잠시후 근처에 있는
'정강왕릉'과 '헌강왕릉'부터 들르며 걸을 예정입니다.
주차장을 벗어나고
숲 속 등로로~ 진입
아침 햇살이...
고요한 이 숲 속으로
마구마구 쏟아져 들어와요.
**^_____^**
이른 아침 왕릉 가는 길은
요로코롬 좋당게유~
ㅎㅎㅎ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뒷모습 인증도 좀 남겼구요.
행복 기운이 스멀스멀
제 피를 타고
온 몸으로 뻗어나갑니다.
정강왕릉 아랫단 돌 둘레에서
어쩐지 세월의 흔적이 기어나오는 듯~
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기간(1년) 886~887
경문왕의 맏아들인 49대 헌강왕이
적자(嫡子) 없이 죽자
둘째 아들이었던 정강왕이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병으로 1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또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누이동생인 김만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김만은 신라 여왕 중
마지막 세 번째인 진성여왕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왕(王)된 자녀들은
49대 헌강왕 (김정)
50대 정강왕 (김황)
51대 진성여왕 (김만)
정강왕의 누이였던 진성여왕(眞聖女王)
왕권 계승도 안정적이며
처음 시작은 좋았는데
숙부이자 애인이었던 위홍의 죽음~
그 이후의 남자들과 정을 통한 음란함
아첨꾼들까지 꼬이고
온갖 뇌물이 기승을 부리며
나라는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하늘도 노했던지 큰 흉년마저 들고
나라 창고는 텅텅 비어버리며
반란의 무리, 도적떼까지 생겨 납니다.
사치 풍조 만연에
대규모 농민 반란까지...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헌강왕의 서자였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그해 12월 죽었다고 합니다.
숲속의 다리도 건너며 다음 왕릉 찾아서...
길은 제법 잘 다져져 있습니다.
헌강왕릉(憲康王陵)
사적 제187호
49대 헌강왕(憲康王)
삼국사기에는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나갔다가
길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해
수레에 태워 막사로 데려가 범해서
김요를 낳았는데...
뒷날 진성여왕이 그의 소식을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골격으로 헌강왕의 아들임을 확인하고는
(이 집안 골격은 남달랐던가 봅니다)
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태자가 바로 헌강왕의 서자인 효공왕
바로 위에서도 잠깐 언급 됐었죠^^
헌강왕 재위 시절
큰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회도 안정되고 풍요로웠는데...
왕족 귀족들이 향락 문화에 빠져
사회는 점차 썩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헌강왕에 대한 설명 한 번 읽어보시구요.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신(疫神)을 쫓기 위해
지어 부른 8구체 향가인 처용가도
어쩌면 문란해진 시대상이 반영되어
노래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삼국유사 일연의 처용 이야기
헌강왕이 울산 세죽을 순행하다가
자욱한 안개를 만나게 되는데
절을 지어 동해용왕을 달래라 명하니
안개가 걷히더랍니다.
용왕과 일곱 아들이 나와 감사를 전했고
일곱 아들 중 하나인 '처용'이
헌강왕을 따라 궁으로 들어가
관직을 얻었다 전해집니다.
왕이 어여삐 여겨 미녀를 아내로 주었는데...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고.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아래 처용가 적어 봅니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 놀며 다니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겼음을 어이할꼬.
_ 처용가(處容歌) _
그 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자~ 오늘도 날씨가 제법 요란할 듯~
숲 안에 있다가 나가려니...
발길이 안떨어집니다.
도로 옆으로 소나무 길 따라~
길 예쁩니다.
동쪽에서는 해가 잠든 대지를 깨우고~
방장님 도로로 나가 이글스님과 저
담아 주십니다.
집 근처에 이런 길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싶네요.
이제 도로 따라서 화랑교육원을 지나고~
아침이라 발은 가볍습니다.
더위도 아직은...
보라 언니가 어제 가져다 주셨던
자두 하나씩 입에 물고~
앞의 한창 공사중인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을 걸어 지나갑니다.
형산강으로 합류되는 남천이 흐르는 화랑교를 건너
사천왕사지삼거리를 통과~
선덕여왕 덕만이 보러 갑니다.
궁금했던 곳 중 하나~
신라 여왕의 묘는 어떨까???
아무래도 좀 다르겠죠^^
덕만아~ 깽이 왔데이~
다른 무덤들과 비슷하네요.
여왕 무덤처럼 뭔가 다르게 보이진않네요.
27대 선덕여왕릉 이구요.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이름은 덕만(德曼)
아버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인터넷 발췌 후 조금 수정>
당시 신라 왕은
부모 둘 다 왕족인 성골만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던 인물은
진평왕의 딸인 덕만공주와
사촌동생인 승만공주 둘 뿐~
선덕여왕에 대한 글 한 번 읽어 보시구요.
여기가 도리천(忉利天)이라고 하는데...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꼭대기의 이상세계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은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천왕
이글스님과 깽이
선덕여왕 어깨에 기대서 인증~
선덕여왕은 화랑세기에
두 사람과 세 번 결혼했다고 나오는데
자신과 오촌간인 진지왕의 두 아들 용수, 용춘.
(진지왕은 행실이 좋지 않고
나랏일을 잘 보지 못해 왕위에서 쫓겨나 죽었다고)
선덕여왕과 친자매인 천명부인 남편 또한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수.
용수는 여왕과 그 동생의 남자~
이해 안가는 그 시대...
무열왕의 이모가 선덕여왕 덕만 되시겠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하지만, 지혜로웠던 여인 덕만
선덕여왕 이야기에 또 모란(牡丹)이 빠질 수 없죠.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
꽃 중의 꽃.
'삼국유사'에 당나라왕이
모란 그림 1폭과 모란 씨 3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니
모란꽃에서 대단한 향기가 날거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으니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 하죠.
실제로 모란 씨를 심어 꽃을 피워보니
향기가 나질 않았다고 합니다.
선덕여왕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
근데 모란에 향기가 있죠~
ㅎㅎㅎ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고 하네요.
저희집 마당에서도
배롱나무 아래
모란꽃이 피었다 지면 작약이 피어오르니
그 꽃구경 하며 지나가는 봄도
행복하답니다.
선덕여왕 왕릉을 떠나가며...
낭산을 왼쪽에 두고 갑니다.
김영랑의 모란이 덕만과 겹쳐지며~
덕만이 이 시를 알았다면
참 많이 읖조렸을 것 같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져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_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어쩐지 여자인 왕으로~
후사 이을 아이 없이 사는 동안~
많이 힘들었을 듯.
살아생전 찬란한 슬픔의 봄을 지나고
무덤 속에서 마음 편한
푸른 여름을 지내고 있을런지...
여행의 길은 평범한 길조차
특별함으로 바꿔버리는 마법같은 시간~
초록의 고운 벼가
잔디처럼 예쁘게도 자라고 있습니다.
선덕 여왕은 남자로도 힘든 왕위
그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고
신라를 불법으로 다스리기 위해
불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재위하는 동안 분황사를 비롯
무려 25개의 절을 세우고,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은 불탑과 불상을
많이 만들게 했습니다.
첨성대도 선덕 여왕 때 만들어진 것^^
여기 황복사지 삼층석탑 주변도 온통 막아놓고
문화재 발굴 조사 중...
황복사지 삼층석탑(皇福寺址 三層石塔 )
국보 제37호
낭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한 통일신라 석탑
1942년 해체복원 때
제2층 탑신에서 사리장치가 발견
태종무열왕 계보 보시구요.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이 탑은 692년에 32대 효소왕이
그의 아버지인
31대 신문왕(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손자)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
물길 따라 걸어가며...
이글스님, 방장님
두 분 이산 가족 되셨습니다.
그라믄 나는 어느쪽으로 가야하나??
고민 아닌 고민도 잠깐~
이글스님 어릴적 농사 때
동네 물 전쟁 치른 이야기 들으며 갑니다.
농사지으려고 논에 물을 대 놓으면
동네 아저씨가 와서는 자기 논으로 그 물 끌어가고
아부지에게 물 빼앗겼다고 혼나고...
ㅎㅎㅎ
지금도 물 때문에 싸움 날 일 있으려나?
그러면서도 막걸리 한 사발씩하며
언제 싸웠냐는 듯 지냈던
그때 그 시절
방장님이 갱주 할배라고 하니까...
저까지 물들어서
갱주 할배라고 할 뻔~ ㅎㅎㅎ
이글스님은 방장님을 대프리카~ ㅋㅋㅋ
처음에 이게 뭔 말인가 했습니다.
대구에 사는 아프리카(피부가 까맣게 타서?^^)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럴 듯.
재밌죠.
이 더위에 같이 고생길 걸어가니...
이러면서 친해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고...
서로만이 부르는 애칭들~
저는 논산 처자~
아이고~ 할매~
더분데.. 뭐하시는교??
우리가 이렇게 물었어야했는데...
할매가 오히려 우리 걱정해 주십니다.
날 더운데 왜 그리 고생하느냐고...
이곳은 입장부터가 남다르네요.
주변의 논을 지나면
그 크기가 말해주는
엄청난 수령의 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네요~
보문동 평지에 자리하는 진평왕릉.
수령도 수령이려니와
그 생김도 꽤나 신령스럽습니다.
신 한 분 살고 계실 것 같은 고목~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 봅니다.
이곳에서 가끔 웨딩촬영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멋지죠?
^^
의자도 꽤나 이 풍경과 잘 어울립니다.
너무 사랑스러운 이 공간~
풀숲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서 사진 담아 봅니다.
이 곳에는 어떤 나쁜 기운들도
감히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 넉넉하면
의자에 앉아서 눈감고
오래오래 쉬었다 가고 싶은 곳~
ㅎㅎㅎ 너무 커서 다~ 담으려면
더 깊은 풀 숲으로 들어가야하는데...
더 들어갔다가 뱀 나올까 무서버서...
여기까지만~
풀 숲으로 들어가고 있는 접니다.
이 소나무도 너무 멋지죠?
그냥 지나치기 아까우니
방장님도 사진에 담으려고 대기 중...
걸어오는 저 찍어 주셨구요.
저 앞에 보이는 묘가 바로 진평왕릉입니다.
산책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여기가 뒤쪽이라고 앞으로 가서 보라고 알려주십니다.
사진 찍는 동안 이글스님은
진평왕릉을 한 바뀌 휘~ 돌고 계시고...
제26대 진평왕릉(眞平王陵)
사적 제180호
진평왕(眞平王)은
시조 혁거세 다음으로 길게~ 재위.
진평왕은 키가 무려 11척.
제석궁(帝釋宮)에 갔을 때 돌계단을 밟는데,
돌 두 개가 쪼개지더랍니다.
'이 돌을 움직이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라'
그가 얼마나 거구인지 알 수 있는 대목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옵니다.
홀로 있는 묘지만
전혀 외로워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가 바로 위 첨부 사진 속에 담겨있습니다.
딸인 선덕여왕과 마주보고 있는 형국
죽어서도 가끔씩 만나
담소도 나누고 그러실 거 같습니다.
진평왕에게 딸이 셋이라고 전해지는데
덕만(선덕여왕)
천명부인(태종무열왕 모친)
그리고 선화공주(??)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선화는
실존인물인지 아닌지를 두고 아직도 논쟁 중
선화공주가 실존인물이었다면
얼굴이 얼매나 이뻤을까? 궁금~~
저희 친척 언니(큰엄마 맏딸)가
선화공주 선발대회에서 상도 탔었답니다.
그 대회 끝나고 찍었던 사진 속에
간난쟁이 저도 있었구요.
진평왕릉을 나서며 다리 가려워서 보니...
헉~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무릎부터 그 아래로
이렇게 붉은 반점이 처절하게도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풀독이라는거????
우짭니까?
같이 걸었는데 저만 이래요.
진평왕님 제가 뭐 잘못했더랬습니까?
왜 제게 이런 시련을...
ㅠㅠ
고구려에 장수왕이 있었다면
신라에는 진평왕이 있었을 정도로
나라의 주춧돌을 공고히 다지며
신라를 꽃피게 한 왕이었던 진평왕.
진평왕릉 앞쪽으로 나와
보문마을쪽으로 갑니다.
마을 주민들도 한 두 분 보여
인사하며 지나갑니다.
집과 집 사이지만..
꼭 누구네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듯~
소 키우는 곳도 지나며...
녀석 이쁘네요.
좀 놀아주다 가고 싶지만...
그러면 또 앞에서
이글스님, 방장님
빨리 오라고 소리지를테구...ㅋㅋㅋ
보문 마을회관 화장실도 이용하며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갑니다.
저는 정자 위에서 쉬면서...
내 다리 우짤꼬~
한숨 푹푹 내려놓고 일어섭니다.
이 풀독~ 병원을 가야하나???
조금 걸어 나가다 보니...
설총 묘가 있네요.
묘(廟 )는 기타 왕족이나 일반인들 무덤
설총묘, 김유신묘~ 등등..
설총(薛聰)
아버지는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
어머니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
문무왕의 맏아들인 31대 신문왕(681~692)의
총애를 받으며...
문화 발전에 이바지
이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해 하는 백성들을 보고는...
우리말의 조사와 한자 뜻을 조합해
이두(吏讀)를 체계적으로 정리.
우리가 처용가처럼 향가라고 하는 신라 시가도
대부분 이 이두로 기록 되어 있죠^^
배반동 효공왕릉 찾아서...
어느새 고추가 실하게 익어서 말리고 계시네요.
특 중의 특 상품~
크기도 빛도 좋고
이글이글 태양에 그대로 말린 태양초~
52대 효공왕릉
효공왕(孝恭王)
(897~912)
49대 헌강왕의 서자로
51대 진성여왕 1년 재위
그 뒤를 이어 김씨 왕을 잇습니다.
효공왕 재위기는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렸고
효공왕은 애첩에게 빠져
정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다가
912년 후사 없이 죽으니
<인터넷 발췌>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받아
신덕왕(神德王)으로 즉위
이로써 신라 말기
김씨 왕조가 막을 내리고
박씨 왕조인
53대 신덕왕-54대 경명왕-55대 경애왕으로
갈아 타게 됩니다.
53대 신덕왕은 '49대 헌강왕의 사위'입니다.
효공왕릉 갔다 나오는 길에...
안에 손님인 듯 사람들도 보이고
그냥 지나가려는데...
주인장님께서 지나가는 우리 일행들에게
시원한 물이라도 드시고 가라며
발길 잠시 잡습니다.
이곳 이름은 수오재(守吾齋) (배반동)
->나를 지키는 집
정약용의 '수오재기'에서 착안~
큰형님이 자신의 집에다 붙인 이름을 이상히 여겨 쓴^^
여기 주인장님~ 기행 작가 이재호님이십니다.
이런 의도치 않은 만남~
너무 좋습니다.
안에 들어갔다가 이 분이 쓴 책을 들춰보고는...
아~ 재밌겠구나 싶어서 한 권 선물처럼 집어듭니다.
어제 서점에서 책을 못 만난게
오늘 이렇게 만나려고 그랬었나 싶습니다.
싸인도 정성스럽게 해주십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누구에게나 해주는 싸인이 아니라
책을 가질 사람을 잠시지만 주의깊게 살피고
나름 글을 지어 빼곡하게 한 페이지를 채워 주셨습니다.
경주에서 득템~
후기 쓸 때 참고도 하려고 샀었죠.
이분도 기행문 쓰시며 발품 꽤나 팔고 다니셨던 듯...
수오재 뒷산..
효공왕릉과 연결된 공간, 숲이기도 합니다.
이 뒷산은 이곳 수오재라는 공간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기꺼이 안내해주십니다.
집 뒤로 이런 멋진 산책 공간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숲을 안내해 주고 계십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 볼까요?!
우리는 지금 그 넓은 들판 바라보며
바람 맞고 있습니다.
이곳 효공왕릉~
선덕여왕릉과 그녀의 아버지 진평왕릉으로
삼각 편대를 이루며~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
넓은 논 들판
그 너머 경주 산성지구가 펼쳐지고..
수오재 숙박 공간에
잠시 허락 맞고 들어가 둘러 봅니다.
주인장님 과일 조금 내오신다며
바쁜 걸음 옮기시고...
우왕~ 책 많은 곳.
제 한 때 이상형이
방 한 공간을 책으로 가득 채워놓고
같이 살자~ 그래주는 남자.
ㅎㅎㅎ
같이 책 보며
놀고 먹고 자고 그래도 참 좋을 듯.
책만이 채워줄 수 있는 그 느낌~
'수오재'
이곳 고택과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
열린 뒷문으로는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시원~합니다.
관리하시려면 힘드실 것 같은데
가시더니
시원한 물과 복숭아를 한 쟁반 가득 담아 오셨습니다.
우리 말고도 손님들이 계셔서
(숙박 하셨던 손님들?)
왔다갔다 바쁘셨습니다.
우린 뭐 돈 내고 숙박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던 객인데...
이렇게 불러 아낌없이 내주시네요.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참 멋지게 사시는구나~ 싶은 주인장님.
기회되면 또 만나지게 되겠지요.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
허락해 주셔서 참 좋았습니다.
계속 들고 다니시던 대금(??) 맞나??
꼬마손님들에게 연주해주시는 모습 바라보고는
인사 드리고
길 다시 떠납니다.
ㅎㅎㅎ
뒤에서 걷고 있는데...
방장님, 이글스님
두 분 팔뚝에 송글송글 땀방울~
신기해서 잡아 세우고 찍어 봅니다.
보이고 드러나는 곳에도 이렇게 땀이 올라오는데...
얼굴, 등은 말할 것도 없었네요.
잠시 대나무 그늘 속에서 쉬었다 갑니다.
우리 이글스님 완전 넉다운~된 듯한 표정~
제가 제대로 담아냈네요.
^^
지금 표정은 이러셔도
잠시 설정샷이었습니당 ㅋ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이글스님.
5대강 이번달부터 시작하신다는데
바짝 더 힘 내이소~ 퐛팅~
좀 거리 단축을 위해
지름길 선택해서
제대로 정비 안된 길로 들어갑니다.
걷다가 대나무 숲을 비집고 담치기~
릉 안으로 입성~
대나무 풀숲 모기 완전 많아요.
밤새도록 굶주렸다가 사람 나타나니
벌떼처럼 몰려듭니다.
후덜덜~
왕릉 뒤쪽 보이시죠? ㅎㅎㅎ
모기 많으니 절대 그쪽으로 오시면 안됩니다.
사람은 무릇 제대로 문으로 다녀야 하는 법
혼쭐 제대로 났다니께요.
45대 신무왕릉
신무왕(神武王)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에게로 도망했다가
839년 4월(민애왕) 대군을 이끌고
민애왕을 죽이며
왕위에 올랐다가...
같은해 7월 사망하여
46대 신무왕의 장남 문성왕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줍니다.
신라 왕들 중 가장 짧은 재위~
방장님 신무왕릉 앞에서 대나무 하나 구해들고~
소성거사처럼...ㅎㅎㅎ
이글스님 수건 고거이 웃겨요.
안어울리는 듯 묘하게 어울리십니다.
배낭색과도 깔맞춤~
관리원 없는 철도도 건너고~
신문왕릉길 걸어갑니다.
도로가는 역시 뜨거움 작렬입니다.
버스 정류장에 계시던 할머니께
'안녕하세요~'
인사드리며 가니
안쓰럽게 바라보십니다.
방장님이 정자를 그냥 지나치는 법은 별로 없죠.
배반동의 배반쉼터~
정자에 고운 할매 한 분 앉아서 마늘 까고 계십니다.
한쪽에는 이미 고구마줄거리
벗겨 놓으셨구요.
여기 정자 무슨 집 같이
냉장도고 있고
수납장에 아이스박스도 보입니다.
"할매요~ 잠깐 쉬었다가도 되겠습니까?"
어서 올라오라며 반겨주십니다.
이글스님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신다고 하시고...
조근조근 받아주시는 그 말씨며
고운 얼굴
무릎 안좋으시다고 하셨는데...
건강 잘 챙기세요.
덕분에 잘 쉬었다 갑니다.
정자에서 몇 발짝 떼니,
신문왕릉 주차장 도착이네요.
ㅋㅋㅋ
이글스님과 저 저렇게 수건으로 싸매고~
댕겼습니다
잠시 그늘에서 땀 식히며....
31대 신문왕릉(神文王陵)
사적 제181호
신문왕(神文王)
반란 세력이었던 장인을 죽이며
왕권강화를 이루고
귀족 힘을 누리기 위해 녹읍을 폐지~
(녹읍은 국가 관리들에게 주던 논밭)
화백회의 상대등의 권한을 줄이며
집사부(왕의 명령을 처리하는 부서)를 강화
아버지가 통일한 신라 땅의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며 각종 제도 정비
삼국통일 문무왕의 맏아들~
릉 옆의 소나무가 꽤나 인상적인 신문왕릉
크고 긴 돌을 쌓아서 만든 상석
조경농원을 지나가는데
소파 방정환 선생 동상이
인상적이어서 같이 담아 봅니다.
요즘은 보기 힘든 동상이라...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날을 만든
어린이들의 대부~
사천왕사지삼거리 향해 큰 도로변 따라 걷고 있는데...
날은 뜨겁고
도로에 차는 쌩쌩~ 많이도 달립니다.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소리
번개인가?
폭탄이 터졌나??
가스관이 터졌나???
정말 간발의 차이로
커다란 트럭이 지나가며
바퀴 파편을 길거리에 흩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우리와는 불과 몇 십미터 차이...
우리 옆에서 터졌다면
아마 우리들 파편 맞았을 듯
셋이 놀란 가슴 쓸어 내리며...
차 안오는 틈을 타서
도로 한 가운데 나뒹구는
파편 도로 밖으로 치워주고 갑니다.
밖으로 떨어져 나와 있던 것도 있고..
파편이 제법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바퀴 마모가 많이 되어서 터진 듯...
어휴~ 잘못 맞았으면
갱주에서 논산 처자가 처녀귀신 될 뻔 했습니다.
정말 사고라는 것은 순간~
신호 대기 기다리면서도
천만 다행이다~
그러며 감사해하고 있는 중...
일단 1박 2일 일정은 여기서 끝내며
통일전 주차장까지 걸어 들어가
차 수거합니다.
갱주 놀러간다고 했더니 아는 언니가
갱주가면 꼭 육회 먹으라고^^
전에 놀러 갔을 때 먹었는데
그 맛이 잊혀지질 않는다며
강추해줬었습니다.
그래서 이글스님께
육회~ 육회~
노래를 쬐매 불렀죠.
맛있는거 사주신다고 하셨었으니께~
일단 육회로 입가심
가볍게 하려고 했는데
육회 두 접시 시켜 먹으니
이미 배가 불러서...
방장님도 이글스님도 대식가들이 아니라서..
물론 저도...
이글스님 노련한 솜씨로 고기 맛나게 꿔서
앞접시에 올려주셔서
주시는거 쏙쏙 받아서 먹습니다.
소고기로 배 든든히 채우고~
끄억~
농담 보태서 50만원어치 사주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너무 조금 먹었다며...
다음에 또 와야한다고
못 먹은거 나머지 40만원어치 더 사준다고..
ㅎㅎ
갱주에 적어도 몇 번은 더 와야할 듯
이글스님 1박2일동안
진짜 아낌없이 베풀어 주셔서
너무 행복하게 지내다 갑니다.
잘 먹었습니데이~
동천동으로 차량 이동 주차 후, 잠시 들릅니다.
탈해왕릉(脫解王陵)
사적 제174호
탈해왕의 전설 한 번 읽어 보시구요.
4대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석탈해 그는
용성국에서 왔다고 전하며
경주 토함산에 올라 자기가 살 땅을 찾으니
초승달처럼 생긴 땅이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는 이미 호공이란 자가 살고 있었는데
꾀를 내어...
호공 집 주위에
숫돌과 숲을 몰래 묻어두고는
이곳은 내 조상이 살던 땅이니
내놓으라고 우깁니다.
호공은 관청에 신고하고
증거를 대라는 관리에게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장장이였으니
집 주변을 파보면
증거물이 나올거라고 태연하게 대답!
아니나 다를까 집 주변에서 숫돌과 숲이 나오니
관리는 호공에게 집을 양보하라고 합니다.
이곳이 바로 월성(신라 초기의 궁궐터)
남해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지혜에 탐복해
그 딸을 탈해에게 시집보냅니다.
2대 남해 차차웅 왕의 사위가 된 탈해
묘는 제법 작고...
다른 릉과는 다르게
무덤 주위로 울타리가 쳐저 있네요.
탈해 이사금하면 김알지가 따라와 줘야죠.
60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해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가 바로 김알지(金閼智)이다.
탈해 이사금이 양자처럼 키운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
다시 한번 상기해 보며 갑니다.
2대 남해왕이 죽고
다음 임금자리에
남해의 아들 유리와 사위인 탈해가
물망에~두둥~
신하들이 두 사람에게
떡을 베어 물게 합니다.
이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다고 생각했기에
유리의 이가 많아서
먼저 3대 왕이되고
(이의 금을 의미하는 '잇금' 이사금이라 칭호를 붙이게 됨)
유리왕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니
“내 아버지가 죽으면서 말씀하시기를
‘나 죽은 뒤에 아들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자로 내 뒤를 잇게 하라.’ 하셨소.
이런 연유로 나이 많은 내가 먼저 임금을 했으니,
이제는 마땅히 왕의 자리를 탈해에게 물려줄 때요.
탈해는 내 동서로 나라를 위하여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소.
또한 두 아들의 자질이 탈해에 비해 너무도 떨어지니,
내가 죽거든 탈해를 왕으로 섬기시오.”
이렇게 이글스님 사무실 앞에 모셔다 드리고...
더운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방장님과 대구로 가기 전에
차로 이동 '흥덕왕릉'
한 곳 더 들렀다 갑니다.
경주 여행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외곽지역에 위치한 흥덕왕릉
사적 제30호
위 설명 읽어보시구요.
여기도 들어가는 입구는 소나무군락~
꽤, 상당히 좋으네요.
무덤 들어가는 입구...
문인석과 무인석(서역인 모습)
우와~
여긴 제대로 왕의 무덤 같습니다.
다른 곳은 무덤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 많은데...
봉분을 두른 면석
상석도 제법 크고 높네요~
십이지신상 그림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릉 한 바퀴를 돌아보니
사방으로 돌사자도 있고...
제 코끼리 다리좀 감추려고
돌사자 뒤로 숨어서 고개만 내밀어 봅니다.
흥덕왕(興德王)
재위기간 826~836
흥덕왕 시대 지리산 이야기
Jiri-깽이가 지리산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죠.
흥덕왕 828년 음력 12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
귀국할 때 차의 종자를 가지고 돌아왔고
흥덕왕은 이를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여
이때부터
차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으로 도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대사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이 말에 감동한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고
군사 1만을 줍니다.
흥덕왕과 장보고 이야기며~
흥덕왕의 왕비 장화부인 김씨.
장화부인은 826년
흥덕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죽는데
삼국사기에는 장화부인이 죽어
왕이 슬픔에 빠지자
신하들이 새로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요청했으나
흥덕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시녀들조차 곁에 들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우리 흥덕왕
죽어서까지 이어진 그 순애보적인 사랑에
가슴 따뜻해지며 므흣
저 안에 두 분이 같이 잠들어 계시는구나 생각하니
고운 눈길 오래도록 머뭅니다.
1박2일 동안 경주 왕릉 여행
흥덕왕의 따뜻한 마음 마지막으로 엿보며
신라에도 이런 사랑 이야기 하나쯤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네요.
어디에나 고운 사랑은 있네요.
사랑 이야기 없는 곳은 삭막하고 재미없죠.
우리 모두 재미있게 살아요.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대신 한 사람하고만요.
꼭요~
J3-club에 와서 알게된
경주의 이글스님
그냥 한 번 휴가로 가봤던 지역 문화 여행~
의도치 않게도...
^^
벌써 다음 지역 초대장이
은밀히 제게 날아 들었습니다.
J3-club의 착한 인연들~
그렇게 연의 고리가 엮어지고 있네요.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늘 사람 이야기가 주가 됩니다.
^^
다음은 어느 지역, 어느 분과의 만남이
어떤 모습으로
어느 시대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 그림되어 그려질지...
저도 또한 기대해 봅니다.
좋은 사람 하나 알게 되는 일
복터지는 일
대박이죠!
사실 제가 또 인복이 많습니다.
그 인연을 소중히 하며
감사함 담아 봅니다.
^^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자료 찾아서 후기 작성을 해서
혹시 사실과 다를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
그점은 너그럽게 양해하며 읽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