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6.25 동란의 순교자들(2)
이 원 창 (미카엘) 신부 (1872 - 1950?)
이원창 신부는 성미카엘신학원(성공회대학교 전신) 제4회 졸업생으로, 서울 마포에서 아버지 이구현씨와 어머니 김씨의 2남 1녀중 차남으로 1872년 3월 23일(음)에 태어났으며 어릴때 부터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원창 신부는 일찍이 14세에 부친을 잃었으며 가장을 잃고난 후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집이 가난하여 밤에 공부를 할때에 등잔불이 없어 대신으로 반딧불을 모아 그 불빛으로 면학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청년 시절에는 초기 YMCA 총무를 역임한 신흥우씨 등이 다니던 경성외국어 학교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성공회 초대 신도였던 이원창 신부는 성공회 초대 고요한(Charles John Corfe ; 1889-1904 재임) 주교를 비롯하여, 제2대 단아덕(Arthur Beresford Turner ; 1905-1910) 주교, 제3대 조마가(Mark Napier Trollope ; 1911-1930) 주교의 비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가난한 자신의 생활과 가중되는 일본의 잠식과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그의 믿음으로 이겨 나갔다.
1923년 9월 23일에 서울대성당에서 사제 성직서품을 받은 후 서울대성당에서 시무하면서 휘문학교의 영어교사직을 맡았다.
그는 후에 이북에 있는 성천교회에서 근무한 바도 있었으나, 1932년 부터 충주 성 베네딕드교회에서 시무하였고, 그후 여주교회에서 관할사제로 시무 하였으며, 1940년대 세계 제2차대전이 극도에 달했을때 평양교회 관할사제로 부임하면서 그 지역일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데 선도적 역할을 다 하였으며, 그 지역 총사제직을 맡아 교세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평양교회, 성천교회, 선천교회, 진남포교회, 백천교회, 순천 자산교회, 순천 장래동교회, 해주교회, 평남 신성천교회, 평남 성천 석전리 성 알반교회,성천 지상1리 성 안드레교회, 성천 오은골 성 요한세자교회, 평남 순천 용화리 성신교회, 순천 동림리 성 스테반교회, 순천 임강리 성 도마교회, 황해도 평산 온정 성 모니카교회, 평남 백천 유천리 성 바우로교회, 평남 김천 용연 성 미카엘교회, 평남 순천 도흥리교회, 평남 신창교회 등 20여개의 교회를 설립하고 축성하는데 총사제로서 모든 재능과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들 교회를 바탕으로 성공회 평양교구 설립을 준비할 만큼 교세가 번창하였다.
그는 전후의 혼란기 속에서도 평양에서 계속 복음을 전파 하였는데,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자, 마음을 가다듬고 최후의 신자가 있을 때까지 자신은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결심하고, 모든 가족을 월남시키고, 또한 당시 평양지역에서 총사제를 도와 사목활동을 하였던 주장훈(바우로)신부, 최태희(디모데)신부 이정호(누가)신부 등을 남하 시키면서도 자신은 끝까지 성전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원창 신부는 당시의 공산 지배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곧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올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교회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믿고 실천하여 나아갔다.
그 후 9.28수복으로 평양이 수복되었을 당시 군에 복무하였던 고(故) 이두성(전,성공회 서울교구 관리국장)씨가 만나 남하할 것을 권고 하였으나, 당신은 현지의 교회에 남아서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 이북지역이 감옥으로 화한 상태에서 이원창 신부가 순교당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출처 및 참고: 선교 백년의 증언, 대한성공회 출판부
주)
이원창 신부의 가족으로는
친자인 2009년에 작고한 이면상(요셉) 전. 성공회 대학로교회 신자회장,
손녀인 이영우(마리아) 현. 성공회 대전주교좌교회 교회위원 (전. 성공회 전국어머니연합회장, 성공회 대전교구 어머니연합회장)이 있으며,
고(故)김태순(엘리야) 성공회 신부는 사위이고, 김태순 신부의 친자인 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김근상(바우로)주교는 외손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