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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계 리더12 스크랩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이철 편-
아빠 추천 2 조회 205 16.11.29 12: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2

 

귀족미용문화를 꿈꾸는 이철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이란 타이틀로 매달 우리 미용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용인 한 분씩을 집중 인터뷰합니다. 기존의 미용인께는 성공에 대한 성취감을, 미용을 배우고자 하는 꿈나무들에게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호에는 귀족미용문화를 꿈꾸는 이철 대장을 싣는다.<편집자주>

 

이철 대장(이철 본사 임직원을 비롯, 이철헤어커커에 근무하는 디자이너 포함 모든 직원들은 그를 대장이라 부른다. 대장이라 부른 연유는 차차 말하기로 하고 기자도 이 글에서 그를 대장이라 부르기로 한다.)을 만난 것은 추석 연휴가 막 끝난 19일 점심때였다. 그날 오후 4시에 만나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면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는데 이철 대장이 선약이 있었다는 것을 잊었다며 인터뷰 시간을 앞당긴 것이다. 오랜만에 음주 인터뷰를 기대했던 기자는 약간은 실망했지만 어쩌랴 가을 초입의 햇살을 받으며 만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철 대장과 개인적으로 만나 일상사를 듣는 것은 백만 년도 넘었을 것이란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미용계는 어찌 보면 좁고도 넓다.

 

이철 대장은 원주에서 군의관 생활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탄생 후 3개월 만에 서울로 이사 왔으니 고향이 서울인 셈이다. 서울에서의 초, 중학교 시절 그는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의 치맛바람 덕이라고는 하지만 어디 그게 치맛바람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던가.

 

1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안은 기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유고 후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는데 의붓어머니가 미용사였다. 그 당시 그는 패션, 신발, 의류 등에 관심이 많았다. 모델을 꿈꾸기도 했으나 의붓어머니의 영향으로 명동에 있는 미용실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3개월 정도 근무하다 <이옥규미용실>로 옮겼다. 이옥규미용실에 첫 출근했는데 손님을 받았다. 다행히 그 손님이 맘에 들어 하며 미용에 대한 자신이 붙었다. 그러나 이때가 진정한 디자이너는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

 

<유지승미용실>의 스텝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당시 80만원이나 하던 포니를 몰고 다녔다. 웬만한 원장들도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었다. 명동에서 잘 나가던 8명의 원장들의 모임에 얼굴을 내민 것도 이때였다. 물론 유지승 원장의 기사(?)로서 말이다. 하종순 원장의 <마샬미용실>에 입사를 부탁하고 연락이 차일피일 미루어지자 그는 3~4년 동안 미용계를 떠나 사진과 모델일을 병행하며 충전하다 <나경옥미용타운>에 첫 미용사로 출근한다. 명동이 한창 뜨던 시기였다. 이후 이훈숙 원장의 <새리미용실>에 들어가며 정식으로 미용을 공부했다. 이때도 신규 고객은 없었고 손님들의 자녀 머리를 해주며 고객을 늘려나갔다. <주니미용실>로 옮겨 알렉산더 김과도 같이 일했는데 원장은 오픈마인드를 가진 미용인으로 1년 후 그가 <하이클래스>라는 미용실을 오픈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이클래스의 성업으로 마침내 1988년 그는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겨 <이철헤어커커>를 만든다. 이철헤어커커는 성업에 성업을 거듭했다. 연예인 고객은 물론 대통령의 머리까지도 할 정도였다. 그는 하루에 고객 50~60명씩을 상대했다. 그 일은 10여 년간이나 지속됐다. 이철 대장의 전성기였다.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 해외로 눈을 돌려 비달사순을 공부했고 그 인연으로 매년 직원들을 연수시키고 있다. 영국의 얼터네티브 쇼를 보고 감명 받아 많은 미용인에게 소개했다. 2006년에는 AHA(아시아미용협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2013년에는 ICD KOREA 회장으로 임명도 되었다. 2014년에는 유러피안 프리미엄 퍼니처 라이프 스타일 컬렉션 브랜드 <BOE>를 런칭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이철헤어커커는 1988년 런칭 이후 꾸준하게 성장을 이루어내며 현재 전국에 210여 개의 매장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완근 처음 프랜차이즈를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이철 무슨 철학이나 목표가 있어서 시작한 게 아니었다. 당시 프랜차이즈 바람이 불어서 나도 시작하게 되었다.(그의 인터뷰는 건조체다. 으레 인터뷰를 하면 거창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는지 미사여구가 동원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런 걸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인터뷰어 입장에서는 난감할 따름이다.)

 

이완근 지금 전국에 210여 개에 달하는 이철헤어커커가 있고 대부분 성업 중인데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요?

 

이철 1988년도에 1호점이 오픈되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했다. 성공적인 숍을 운영하기 위한 노하우를 축척해가면서 완성도를 높여갔다. 처음엔 시행착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이철헤어커커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끈끈한 가족애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기본에 충실하고자 했던 이철헤어커커만의 가치관이 미용인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이철헤어커커는 브랜드 런칭 이후 체계적인 미용인 인재 양성을 위해 1997년 영국의 비달사순 아카데미와 스쿨십 계약을 체결하면서 기존의 개인기에 의존하던 우리 미용계에 전문화된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창의성과 전문성을 갖춘 미용인 양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04년부터는 미용 장학생을 선발하여 해외 유학을 지원하고 있으며 2014년부터는 미용고등학교에 미용 실습실을 기증하여 후학들의 미용 기술 학습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완근 말이 나운 김에 이철헤어커커만의 장점을 실제 예를 들어 말해 달라.

 

이철 우리는 전국 매장의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위해서 ‘Magic8’이라는 문화를 가꿔오고 있다. Magic8은 지역 매장별로 운영방식, 직원 개성 등 여러 요인에 따라 컨셉과 서비스의 차이가 발생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리만의 차별화된 문화 콘텐츠다. , 전국 매장 전화번호의 끝자리 동일화, 매주 전국 매장을 같은 꽃으로 장식하는 등 전국 매장의 통일성을 위한 8가지 우리만의 문화를 말한다. Magic8을 통해 지역적 한계로 인한 매장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화 차이를 최소화하여 여타 다른 프랜차이즈와 차별화된 서비스를 확장해가는 것이다.

 

(참고로 격주로 전국 매장에 보내는 꽃은 이철 대장이 직접 화원을 돌며 선택한다. 물론 꽃 구입 비용은 본사에서 전부 부담한다.)

 

이완근 대장이라는 호칭이 맘에 든다.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나?

 

이철 2005년 미사리에 미용연수원 <미사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개원식 때 대장 명칭 수여식을 했다. 1988<이철헤에커커>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 대표나 사장은 식상해서 마땅한 명칭을 찾던 중 대장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마음에 든다. 그 이후로 쭉 대장이라는 명칭을 써왔다.

 

(미사리에 미용연수원을 만들고 개원식을 하던 당시가 기자는 생각났다. 해가 뉘엇뉘엇 지던 시간에 출발했는데 들판 길을 한참을 달려 오픈식에 도착하자 캄캄한 밤이었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교육장을 오픈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철헤어커커 직원들의 이철 대장에 대한 존경심과 친밀함의 표시는 지금도 생생하다. 기자가 그때 당시의 잡기장을 들춰보니 이철, 대단하다. 그에게서 예술인의 향기를 읽을 수 있다. 미용인들 중에서 이렇게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라는 소감이 적혀 있었다.)

 

이완근 <미사 스튜디오> 오픈은 참 대단한 이벤트였다. 오래 지속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이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미용인은 예술가라는데 예술가적 기질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발상도 좋고 취지도 나무랄 데 없었는데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너무 먼 곳에 자리 잡은 것이 패착이었다.

 

이완근 근래 프랜차이즈를 한 곳만 하는 게 아니고 몇 개 브랜드를 따로 하는 미용인이 많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철 미용계에서 프랜차이즈는 갑과 을이 있을 수 없다. 본점의 노하우를 공개해서 프랜차이즈 지점과 같이 성장하는 것이 프랜차이즈 본점의 최고 지향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형 프랜차이즈가 많아지는 게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본사와 지점이 윈-윈 전략으로 미용의 고급화에 앞장서야 한다. 이철헤어커커는 뉴욕 스타일을 추구한다. 여러 프랜차이즈를 공유하는 것은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완근 요즘 고민되는 것이 있나?

 

이철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삶이 재미없다. 이왕 미용을 시작했으니 예술적으로 성취감을 느끼든지 사업적으로 성공하든지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두 가지 모두 쉽지 않다. 미용을 예술이라고 하는데 예술은 형태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미용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화가는 그림을 남기고 소설가는 소설, 시인은 시를 남긴다. 뿐이랴, 영화감독은 영화를 남기고 탤런트는 드라마는 남긴다. 그런데 미용인의 작품은 형태를 보존할 수가 없다. 일회성에 그친다. 여기에서 그의 고민은 시작된다.)

 

사업적으로도 법에서는 11미용실만 인정하는 현실에서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법망을 피해 타인 명의로 미용실을 운영하는 게 현실이지만 이는 그만큼 많은 제약이 따른다. 미용인에게 만이라도 규제를 풀어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한다. 그러나 미용인들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그러니 사는 게 재미가 있겠나?

 

(이런 고민이 많다 보니 그는 좋아하던 쇼핑이며 패션, 사진 등에 대해서도 심드렁해졌다. 올 여름에도 티셔츠 3벌로 지냈다고 한다.)

 

이완근 보에(BOE)라는 편집 살롱을 운영하는데 어떤가?

 

이철 미용이 재미가 없으니 사업을 다각화하고 싶었다. 해외 유명 브랜드 가구와 라이프 스타일 소품을 취급하는 컨셉 스토어 보에는 올해 두 번째 매장을 오픈한 데 이어 신세계백화점과 여러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매출도 많이 늘고 있어서 기대가 크다.

 

이완근 앞으로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이철 우리의 오래된 목표는 귀족미용문화를 실천하는 것이다. 귀족미용문화란 생계수단으로 미용을 하던 시절을 벗어나 고객의 삶에 가치를 더해주는 것이 헤어디자이너란 소명의식으로 일하는 것을 말한다. 선배 미용인이 후배 미용인에게 심어줘야 할 소명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룹으로서 이철헤어커커는 아시아 최고의 뷰티 리딩 그룹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좀 더 다양한 미용 브랜드를 가지고 글로벌 브랜드에 뒤지지 않을 미용 산업으로 육성하고 미용계에 고급스런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

 

(AHAICD KOREA를 지속적으로 앞장서서 이끌어가고 후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지금은 본사 직원들을 위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본사를 성장시킴으로써 직원들에게 성취감을 주고 미용을 후대에 대접받는 직종으로 성장시키고 싶다. 세계 박람회나 전시회를 자주 찾는 것도 새로운 아이템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철 대장과는 이렇게 인터뷰를 마쳤다. 그의 예술가적 기질을 끄집어내기에는 뭔가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그의 미용에 대한 큰 그림과 열정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귀족미용문화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업적으로도 미용인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토대가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기자도 가져보게 된다.

 

 

<이철 미용 연보>

 

1978년 미용계 입문

1988<이철헤어커커> 브랜드 런칭

1993TV광고 출연(선실크샴푸 ? 황신혜, 김남주)

1997비달사순 아카데미와 스쿨십읠 체결

1998세계 최초 바다 속 수중에서 커트

미용인 최초의 스타일 변신 TV프로그램 3년간 출연

1999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본선 심사위원 참여

2000년 이철헤어커커 런칭 12년만에 외부감사법인 커커 설립

2003사진작품전시 Now Here and There with 포토그래퍼 김중만

2004미용장학생 해외 유학 지원

2005설치미술과 사진작업을 연계한 헤어트렌드 전시, 미용연수원 미사 스튜디오 오픈

200616개국 아시아 미용협회의 총회장으로 선출

2007커커차이나 법인 설립

2009해외에서 트렌드를 촬영, Paris, London, Hongkong, Tokyo 10여 개국 20여개 도시

1999세종대 겸임교수

2010중국에서 명예교수로 임명

2011사회환원사업단체인 커커엔젤을 창단

2012커커만의 제품을 생산,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덜어내 단순함을 추구. 오직 기술과 제품력으로 승부

2012미용후배들을 위한 실습실을 기증,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인천생활과학고등학교

2013ICD KOREA의 회장으로 선출, IGM과 함께하는 박갑수의 커커 MBA” 코스를 개설

2014뉴 비즈니스 유러피안 프리미엄 퍼니처 라이프 스타일 컬렉션 브랜드 보에(BOE)를 런칭

2015해외 베트남에 중학교를 기부, 아시아 16개국이 참여하는 AHF(Asia Hair Designer Festival) Korea를 개최

 

<뷰티라이프>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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