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가계수지 동향에서 전국 가구 소득 5분위 비율이 7.64로 최대치를 기록했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다. 이는 도시근로자 소득은 향상됐지만 특히 영세 자영업자와 농어민의 근로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한 탓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국정브리핑은 지역 영세 상권을 빠르게 잠식해 가고 있는 대형 유통업체와 지역 상인과의 상생의 길을 모색해 보고, 나아가 현명한 소비자 운동을 통한 양극화 개선 방안을 찾아간다. <편집자>
과연 합리적인 소비자일까. 집에서 차로 10분만 나서면 싸고 다양한 물건이 가득한 대형마트가 있는 동네에 살면서 스스로 출자금을 내고 생산비와 인건비를 기준으로 가격을 책정한 물품을 구매하는 생활협동조합 참여자에 대한 의문이었다. 조합원이 운영하는 만큼 품을 팔아야 할 때도 종종 있다.
성산1동에 사는 이정란(45)씨는 하루 이틀에 한 번씩 집 근처에 있는 마포두레생협에 들려 야채, 계란, 빵 같은 먹을거리를 산다.
생협에서 물건을 살 때 이 씨는 고민하지 않는다. 조합원들이 유기농산물과 친환경제품을 구매하기로 정한 매장이기 때문에 방부제나 표백제를 쓰지 않았는지, 원산지가 어디인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사는 것이 아니라 교류한다"
생협 물건은 비싼지 싼지 가격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 때로는 바가지를 쓸 수도, 반대로 원가에 못 미치는 가격에 물건을 살 수도 있지만 생협에서는 철저하게 생산비를 고려해 가격을 책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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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과 달리 생활협동조합에서는 생산비와 유통비용을 기준으로 가격이 책정된다. |
이 씨는 “생협은 유기농산물을 사먹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와 교류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생산지 방문 프로그램에 참여해 병충해와 싸우면서도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농민을 보고나면 결코 비싸지 않다는 설명이다. 유통경로를 단순화해 실제 가격도 다른 유기농 전문점이나 대형마트의 유기농산물에 비해 비싸지 않다. 같은 품질이라면 오히려 저렴한 상품이 많다.
생협을 이용하면서 생활도 달라졌다.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이 씨는 생협을 이용하기 전만 해도 동네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수퍼와 미장원 주인이 전부였다. 하지만 생협이 주관하는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면서 ‘동네 사람과 같이 노는 재미’를 찾았다.
이 씨처럼 생협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역에 일자리도 생겼다. 현재 마포두레생협에는 매장과 사무실을 포함해서 12명의 직원이 일한다. 생협이 생기기 전, 이들은 대부분 전업주부였다.
그는 10년전 아토피로 고생하던 아이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줘야겠다는 생각에 생협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격와 편리를 기준으로 하는 합리적 소비를 넘어 가족과 지역사회를 고민하는 '현명한 소비'를 찾아가고 있다.
이 씨처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하고 있는 이들은 전국에 33만여 명, 조합으로는 176개에 달한다. 이 씨가 이용하는 마포두레생협처럼 지역생협뿐만 아니라 의료생협, 교육생협처럼 분야도 다양하다.
생협의 친환경 농산물 취급액은 약 1100억원, 친환경 농산물 총 유통량의 13.8%에 해당한다. 생협이 취급하는 가공식품도 친환경 유기농산물이 주원료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 친환경 농산물의 약 20%가 생협에서 유통되는 셈이다.
가격대신 조합원 구매량으로 공급과 소비 조절
생협은 생산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목적에 따라 대부분의 품목이 70% 생산비와 30%의 유통비용으로 가격이 책정된다. 물품이 적거나 과잉 생산될 경우에도 가격 대신 구매량을 조절한다. 계약재배한 고구마가 많이 생산됐다면 조합원들에게 소비를 장려하는 식이다.
박상신 소비자생활협동조합전국연합회 사무총장은 “조합원의 노력으로 20% 정도는 같은 가격에서 유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대신에 사람의 의지와 신뢰로 생산자와 소비자 상생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자본을 바탕으로 한 대형마트에 맞서 유통의 변화를 고민하는 소비자들의 노력은 재래시장을 살리는 노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한주부클럽연합회(주부클럽)는 지난해 서울시내 재래시장 177곳에 대한 소비환경실태를 조사하고 우수시장 8곳을 선정해 우수재래시장 인증패를 전달했다. 재래시장을 찾는 소비자 입장에서 상거래질서 및 고객서비스 실태, 고객만족도 등을 평가해 소비자가 믿고 찾는 시장으로 육성하는 취지였다.
주부클럽은 해당 지역 회원들을 대상으로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한 소비 홍보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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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와 상인의 노력, 정부의 지원이 더해져 재래시장 불씨가 살아나고 있다. <사진 : 중소기업처 재래시장 활성화 지원금으로 시설을 현대화한 의정부제일시장. 달라진 시장 돈버는 상인> |
주부클럽 김순복 총무는 “재래시장이 가격도 더 저렴하고 시설도 현대화 되는 등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며, “소비자를 대상으로 예전의 재래시장이미지를 바꾸는 데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역의 활기를 불어넣는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도 나서고 있다.
청주시청은 ‘삼수데이’를 정해 매월 셋째주 수요일에 시청 공무원들이 재래시장을 찾아고, 강원도 동해시청은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을 시장가는 날로 정해 시청 버스를 타고 물건을 사러간다.
서로 잘사는 상생의 모델을 마련할 때
장흥군은 군청에 장흥시장을 지원하는 ‘마케팅지원과’를 설치하고, 시장 부근을 관광지로 만들어 인근 광주시 주민들을 장흥군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재래시장 살리기에는 지역 소재 기업들도 팔을 걷어 붙였다. 포항의 포스코건설, 동국제강, INI STEEEL은 죽도시장과 자매결연을 맺고 장보기 운동을 펼치고, 울산 현대중공업 노조는 지역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상품권 3억6000여 만원 어치를 구입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청 김종국 시장지원팀장은 “상인 스스로의 노력에 지역사회의 힘이 모여 재래시장이 살아나고 있다”며, “앞으로 대형마트를 속속 열고 있는 대기업에서도 재래시장 살리기에 동참해 서로 잘사는 상생의 모델을 마련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우리나라와 외국의 생협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노동운동과 교회, 직장을 기반으로 생협 활동이 활발해졌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식품첨가물과 합성세제에 의한 건강과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이 집중됐고, 안전한 식품을 사고 싶다는 소비자의 욕구가 높아지면서 시민운동이 확산됐다. 생협전국연합회에는 63개 생협단체가 가입해 있으며 전국에 14만2000세대가 가입해 있다.
세계 각국에서도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활발하다.
싱가포르에서는 노동단체가 1983년 ‘페어-프라이스’ 생협을 설립해 전체 소매업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교통이 편리한 주택단지에 슈퍼마켓 형식으로 운영되며 빵, 우유, 쥬스, 설탕, 식용유 같은 물품을 자체브랜드로 생산하고 있다. 2000년 이후에는 24시간 편의점 '치어스(Cheers)'와 고급 슈퍼마켓 ‘리버티 마켓(Liberty Market)’을 열어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식품과 생활용품에서 생협이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이 18.5% 수준이다. 거대화 되는 소매점과의 경쟁에서 대항하기 위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생협은 국경을 초월하여 협력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본력으로 무장한 해외 대형 마트가 들어서자 생활협동조합 브랜드 강화, 하이퍼마켓과 슈퍼마켓의 운영 등으로 대항하고 있다. 조합원 400만명, 사업고 10조원 규모로 이태리 최대의 소매업이다.
역사가 80년이 넘은 스위스 생협은 조합원 180만명, 점포 582개, 직원 8만명으로 거대기업 수준이다. 매년 700억원을 문화사업에 지출하는 스위스 최대 문화집단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는 생활협동조합이 웰컴(Welcome)이라는 편의점형 점포와 마켓타운(Market Town)이라는 이름으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인터넷 판매도 실시하고 있다. 점포 이외에도 은행, 보험, 여행, 장례서비스 등을 사업영역을 확대 중이다.